“아가씨, 비야 아가씨!”
의녀 행덕이 헐레벌떡 숨을 들이키며 안채로 뛰어 들어왔다.
“원,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뛰어왔어? 우선 이거라도 마시고 숨 좀 돌려라.”
산비가 물 한 대접을 건넸다. 행덕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경사가 나서 얼른 알려드리러 왔죠.”
“경사라니?”
“효옥 애기씨 아시죠?”
“그래 연초에 종수 도령과 혼인하지 않았더냐? 그거 꼭 가보고 싶었는데 여자는 가는 거 아니라고 하시는 통에 못 가서 너무 억울했지.”
“효옥 애기씨가 임신을 하셨지 뭡니까?”
“아니, 벌써?”
하긴 벌써랄 것도 없었다. 혼인을 한 지 4개월이나 지났으니 임신할 때도 되긴 했다.
“김 대감댁에서 애지중지하던 손녀잖습니까. 아기를 가졌다고 하니 바로 친정으로 불러들인다고 하더라고요.”
“너는 그런 이야긴 다 어디서 들은 거냐?”
“어디서 듣긴요. 직접 들었습니다. 하 진사댁에서 허 의원을 청했는데, 저도 따라오라고 해서 같이 갔습죠. 진맥도 다 쇤네가 했답니다. 맥이 뛰는 걸 허 의원께 막 설명했더니, 달거리를 언제 했는지 물어보라고 했습죠. 그랬더니 달거리가 석 달째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아기를 가지면 달거리가 없어지냐?”
행덕이 혀를 끌끌 찼다.
“어찌 그것도 아직 모르십니까? 양반댁 아가씨들은 정말 이런 쪽으로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아가씨는 세상모르는 거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는데…”
행덕은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어쩌자고 감히 사또 따님을 면전에서 흉을 본단 말인가! 행덕은 자기 입을 주먹으로 콕 쥐어박았다.
“아유, 이놈의 입이 주책이네요. 아가씨,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산비가 손사래를 쳤다.
“죽을죄는 무슨 죽을죄. 모르는 게 죄도 아니고, 모르는 걸 알려주는 것도 죄가 아니다. 이렇게 모르는 걸 알게 되면 그 또한 즐겁다고 하는 거지.”
산비의 마지막 말은 『논어(論語)』를 살짝 인용한 것인데, 물론 행덕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산비는 두 달쯤 지나서 다시 효옥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이번에도 행덕이 달려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입덧이 심하다 해서 김 대감댁엘 가지 않았겠어요?”
“입덧이 심하다니, 얼마나 심하기에 의원을 다 불렀어?”
“아유, 말도 마세요. 아주 얼굴이 반쪽이 되었더라고요. 뭘 드시든 다 토한다고 그러지 뭐예요. 그것뿐이 아니에요.”
“뭐가 또 더 있어?”
“태중 애기씨가 계집이라지 뭡니까? 그래서 더 힘들어지신 것 같아요.”
“태중의 애기 성별을 어찌 알 수 있어? 허 의원이 하늘에서 내린 신의라도 되는 거야?”
행덕이 손사래를 쳤다.
“허 의원 나리가 용하긴 좀 용합니다만 그럴 정도는 아니죠. 당골네가 신통을 부려 알려준 거랍니다.”
“당골네? 당골네가 누구야?”
행덕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나, 당골네를 모르세요?”
“내가 읍내 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당골네는 처음 들어보는 걸?”
“아하, 그렇네요. 읍내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산 안에 집이 있어요.”
“성산? 산속에서 산다고?”
“네, 네. 무당은 읍내에서 살 수가 없거든요.”
“무당이 태아 성별을 알려줬다는 거야? 그거 다 혹세무민하는 거야. 정말 그렇게 용하면 내가 한번 가서 봐야겠다. 나도 꿰뚫어 보는지 궁금해지는데?”
광희문(光熙門). 광희문 밖은 지금의 신당동으로 조선 시대 무당촌이었다고 한다.(출처: 문화재청)
행덕이 손을 휘저었다.
“안 되죠. 아가씨는 사또 나리의 무남독녀시잖아요. 어찌 8천의 하나인 무당집엘 가신단 말씀이세요.”
“수령 7사(사또가 행해야 하는 일곱 가지 임무)에 간활식(奸猾息)이 있다. 간사하고 교활한 일을 그치게 하는 것이야. 무당이 혹세무민하는 거면 당연히 멈추게 해야 한다.”
“하지만 신통력이 광대하다는데 걱정도 안 되십니까?”
“걱정도 팔자다. 먼저 인화당부터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들어야겠다.”
“네? 효옥 아가씨를요?”
인화당은 효옥이 시집 간 뒤에 붙은 당호였다.
“넌 인화당이 시집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아가씨, 아가씨 하는 거냐?”
행덕이 또 자기 입을 장난스럽게 때렸다.
“아, 그렇죠. 하여간 요 놈의 입이 문제라니까요. 그럼 입덧 챙겨본다는 핑계로 쇤네도 같이 가겠습니다요.”
“그러자꾸나.”
행덕이 헤헤거리며 산비의 외출 치장을 거들어주었다.
김 대감댁에서 요양 중이던 효옥은 산비의 방문을 반겨주었다. 정말 반쪽인 얼굴이 너무 안 돼 보였다.
“다과를 전혀 못 드시는 것 같은데 저만 상을 받아서 민망합니다.”
산비는 미안한 마음에 다식 하나를 손에 잡기가 어려웠다.
“괜찮습니다. 허 의원이 꿀물을 마셔보라고 해서 많이 좋아진 상태입니다. 불편해하지 마시고 어서 드십시오.”
효옥이 웃으며 차와 다식을 다시 권했다. 산비는 한입 깨물어 먹고 차를 홀짝 마셨다. 산비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핵심을 찌르고 들어갔다.
“당골네가 딸이라고 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효옥의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
“아, 그거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한 건데…”
효옥이 섬돌에 앉아서 두리번대는 행덕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산비는 헛기침을 했다.
“행덕이한테 들은 건 아니고…”
“그럼 허 의원한테 들으셨단 말입니까?”
산비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런 말은 다 미신입니다. 믿지 마세요.”
“그게…”
효옥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사실 정해진 운수는 피할 수 없다면서 아기의 성별을 일자와 함께 종이에 적어 밀봉을 하더군요. 만일 틀린다면 그걸 열어보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산비가 코웃음을 쳤다.
“봉투 따위 얼마든지 바꿔치기 할 수 있잖습니까?”
“제가 직접 봉투 위에 수결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 수결. 수결은 당사자의 서명이다. 문서 말미에 수결이 보인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옛일상 속 인간관계, 고문서)
“그럼 이미 결정된 것이니 걱정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결정이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인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일을 다 한 뒤에 천명을 기다린다고 해서 정성을 다 하면 아들로 바뀔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사기극입니까?”
효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당사자가 아니면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죠. 괜찮습니다. 이미 딸로 점지된 이상 치성을 드리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치성이요?”
효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성 굿을 올리고 매일 정화수를 떠 놓고 빌면 된다고 하더군요.”
“굿이라고요?”
〈무당십이거리도(巫黨十二巨里圖)〉 굿 장면(출처: 서울대학교 박물관)
산비가 혀를 차듯 말하자, 효옥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까요? 춘부장께선 평안하시지요?”
산비도 더는 말하지 않고 다른 잡담을 나누다가 물러 나왔다.
“행덕아, 성산으로 가자.”
“네? 기어이 당골네를 가시려고요?”
“물론이다. 이 사기꾼의 정체를 내가 확 벗겨버리고 말겠다.”
산비는 그 장한 결심을 2각(30분)도 되기 전에 후회했다.
“해, 행덕아, 아직 멀었냐?”
산길을 오르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여기는 원래 산성이 있었다고 합니다요.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름이 성산이구나. 성이 있던 산이라고.”
“맞습니다. 하하.”
산비가 힘들어 하늘이 노랗게 보일 때쯤 되어서야 당골네의 처소에 도착했다. 주변에 나무도 풀도 별로 없어 황량하게만 보이는 곳에 빛바랜 천들이 처마에 줄줄이 매달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음산한 기운이 스물스물 뻗쳐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리 오너라.”
산비는 사립문 앞에 서서 큰소리로 당골네를 불렀다.
“뉘시오?”
삐꺽 소리를 내며 문짝이 열렸다. 쪼글쪼글한 노파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30대쯤 되어 보이는 아낙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당이 사용하던 부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네가 당골네냐?”
산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골네는 후다닥 버선발로 마당으로 내려와 큰절을 올렸다.
“어쩌다 이 누추한 곳에 왕림하셨습니까?”
산비는 황당한 기분에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게냐?”
“지금은 사또 나리의 고명 따님이시지만 장차 나라의 어머니가 되실 몸이옵니다.”
행덕의 입이 딱 벌어졌다.
“뭐, 뭐시라고요? 그럼 우리 아가씨가 주, 주, 주, 중전마마가 된단 말씀이예요?”
당골네는 고개를 홱 쳐들며 사나운 눈초리로 행덕일 노려봤다.
“그 입 다물라! 천기를 누설하면 재앙이 따를 터!”
행덕은 또 한번 자기 입을 탁 치며 말했다.
“아, 진짜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야. 확 꿰매버릴까?”
산비가 말했다.
“객쩍은 소리 그만두고 안으로 들어가세. 할 말이 있으니.”
“네네, 어서 드십시오.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습니다.”
당골네는 굽실거리며 산비를 안으로 모셨다. 행덕이도 따라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최영 장군의 그림이 북쪽 벽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향로가 놓인 작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향로에서는 향이 지독한 냄새를 내며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자네가 인화당 태중 아기의 성별을 알려주었다고 해서 왔네.”
산비는 이번에도 바로 직격탄을 날렸다.
“그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아들딸 쇤네의 손에 달려있습죠.”
“터무니없는 소리. 자네가 봉서를 만들어놓았다고 들었네. 이리 내보게.”
“쇤네가 그걸 속일까봐 증빙을 하시려고 찾아오셨습니까? 이거 이렇게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는데, 이러면 동티가 나서 될 일도 안 될 텐데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봉서나 내놓게.”
“성별을 쓸 때는 저도 뭐라 쓰는지 모릅니다. 신이 붓에 내려와 움직이는 대로 제 손이 따라가 줄 뿐입니다. 그런 이유로 봉서 안에 뭐라 쓰였는지는 저도 모른답니다.”
당골네는 뒤로 돌아서서 머릿장에 가로 지른 쇳대를 풀었다. 그 안에 봉서들이 수북했다.
“인화당 마마의 봉서가 어디 있나~”
노래처럼 흥얼거리면서 봉서를 찾던 당골네가 드디어 찾아냈는지 봉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여기 있네요. 자, 보세요. 인화당 마마가 쓴 수결이 있습니다.”
산비는 당골네가 내민 봉서를 슥 훑어보았다. 언문으로 인화당이라고 쓰여있고 그 밑에 효옥의 수결이 있었다. 산비는 더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당골네에게 질문을 던졌다.
“머릿장 안에 봉서가 많구만. 왜 그리 많이 있는 겐가?”
“별 거 아닙니다. 오래 이 일을 하다보니 자연히 많이 쌓인 것뿐입니다.”
“그럼 올 초에 아들을 낳은 고양댁의 봉서도 있겠구만.”
“네? 고양댁의 봉서요?”
산비는 행덕에게 눈짓을 했다. 행덕이 잽싸게 앞으로 나와 당골네를 붙들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행덕이, 이거 못 놓느냐? 신벌이 무섭지도 않느냐!”
당골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행덕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신벌은 무서운데요. 우리 아가씨가 더 무서워요!”
산비는 머릿장 안의 봉서를 우르르 쏟아내고는 고양댁의 봉서를 찾았다.
“여기 있군. 아들을 낳았으니 안 찾아갔을 줄 알았다.”
행덕이 밑에 깔려있는 당골네가 악을 쓰며 말했다.
“아들은 낳았으니 안 찾아갔다는 게 대체 뭔 말씀입니까?”
산비가 빙긋이 웃었다.
“넌 임신을 한 사람들에게 딸을 낳을 것이라고 협박하여 굿을 하게 하고, 부적도 쓰고 해서 재산을 갈취했다. 그러다 아들을 낳으면 치성이 통한 줄 알고 너한테 감사를 올렸겠지. 아들을 낳았으니 굳이 봉서를 확인하려고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딸을 낳은 집에서는 억울하니까 너한테 따지러 왔을 것이다. 굿도 하고, 부적도 쓰고, 치성도 올렸는데 왜 딸이냐고.”
산비가 고양댁의 봉서를 북 찢었다.
“그럼 너는 신의 힘으로 썼다는 봉서를 꺼내서 확인을 시켜주는 거다. 진인사를 했으나 대천명은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면서 말이지.”
산비는 고양댁의 봉서 안에서 나온 종이를 당골네 앞에 들이밀었다. 그 종이에는 언문으로 딸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혹세무민의 책임을 물어 관아로 압송하겠다. 행덕아, 이 여자는 가짜다. 그러니 신벌 따위 걱정하지 말고 포승으로 꽁꽁 묶어라.”
당골네가 이를 갈며 행덕에게 말했다.
“너, 의녀인 줄 알았더니…”
행덕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다모로 나왔습니다요.”
다모는 본래 차를 끓이는 관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사건 수사에 동원되는 여자도 다모라고 했다. 산비가 행덕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모 행세가 아주 그럴 듯하구나. 이제 인화당도 안심이 될 것이다. 네 공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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