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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에 삭주성 전체에 등을 밝히다


비록 나라에서는 불교를 억제하고자 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왕실이든 사대부든 개인 차원에서는 신앙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복을 염원하는 일을 어떻게 억지로 막을 수 있었겠는가. 부처에게든 귀신에게든 빌어서라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의 마음이었기에 초파일이 되면 사람들은 고을마다 어김없이 등을 달아 장식하곤 했다.

노상추도 큰 등 하나를 만들어서 관농정(觀農亭) 주변에 열 자[杖] 길이의 나무 장대를 세워서 달았다. 이 등에 담은 노상추의 바람은 원자궁(元子宮)께서 장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자신의 개인적인 소망을 하나쯤 더 빌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노상추는 풍악을 앞세우고 읍양당(揖讓堂)에서 성 모퉁이를 돌아 남문에 도착하여 망일루(望日樓)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포 3발을 쏘고 천아성(天鵝聲)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성의 안팎에서 일제히 등을 달았다.

초파일 밤에 성 안팎에 등불의 빛이 휘황하니 노상추도 절로 뛸 듯 기뻤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무과에 급제한 서덕겸(徐德謙)·서유화(徐有華) 부자가 노래 부르는 창부(倡夫)를 앞세우고 성 주위를 돌아 동문루(東門樓)에 이르렀다. 밝은 등과 함께 성내에 음악 소리가 가득하니 축제 분위기였다. 이들은 함께 음악을 듣자고 노상추를 청해 불렀다. 밤이 깊도록 음악이 울려 퍼지고, 등은 부드럽게 어둠을 밝혔다.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94-04-08
장소 : 평안북도 삭주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서덕겸, 서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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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봄날의 제사는 꽃과 함께”

김광계, 매원일기, 1634-03-15

『가례』에서는 설․동지와 매달 초하루․보름마다 집안 사당(가묘, 家廟)에 지내는 제사를 참례(參禮)라고 부른다. 이 참례가 변하여 요즘에도 설과 추석에 올리는 차례가 되었다. 김광계 역시 집안 사당을 갖춘 양반으로서 매달 두 번씩 참례를 올렸으나, 참례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일기에 꼬박꼬박 쓰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34년 봄 3월 15일의 참례는 다소 평소와 달랐으므로, 김광계는 친구와 친지들을 만난 일 외에 참례를 올렸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해 놓았다. 그 날의 참례에는 ‘새 꽃을 따서 만든 전병’을 올렸던 것이다.

양력을 쓰는 현대인들에게 3월은 아직 추울 무렵이지만 김광계가 살던 조선시대의 음력 3월은 봄 날씨가 한창 따스하게 무르익을 때였다. 특히 음력 3월 3일인 삼월 삼짇날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축제와도 같은 날로, 여성들은 그 날 하루만은 집안일을 그만두고 들로 나와 봄꽃을 따서 화전을 부쳐 먹고 노래를 부르며 즐길 수 있었다.

화전은 봄날의 화창함을 만끽하기에 딱 알맞은 음식이었다. 삼짇날이 지난 뒤라도 봄꽃이 피어 있는 동안에는 드물지 않게 상에 올랐을 것이다. 3월의 참례 혹은 여타 제사에 새 봄꽃으로 만든 화전을 올린 것은 김광계만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살던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 『계암일록』에서도 몇 차례 확인된다. 1636년 김령은 이상 기후로 날씨가 너무 추워서 꽃이 피지 않아 화전을 올리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로 보아 평소에는 3월 제사에 화전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양반가라 해도 예법과 격식만 깐깐하게 따져 상을 차리기보다는 때에 맞는 음식,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 자신도 즐겁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차려 올리는 것이야말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조상에게 정성을 들이는 방식이었다.

“현감과 함께 관등회를 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4-04-05 ~ 1644-04-08

1643년 10월부터 예안 현감으로 부임한 황입신(黃立信)은 시시때때로 절기와 특별한 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4월 초파일이 가까워지자 그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즐길 준비를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흥겨운 기분을 전파하려고 하였다. 4월 5일에 그는 김광계를 방문했다. 마침 김확(金確)과 김요형(金耀亨), 김익중(金益重) 등이 함께 따라와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이 반쯤 취해 슬슬 흥이 올랐을 때에는 밖에 있는 판판한 돌 위에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해가 질 때쯤 하여 황입신이 비로소 가고, 모든 사람이 흩어졌다. 이날 술을 마신 것 때문에 김광계는 다음날 속도 좋지 않고 눈병도 더 심해져서 불편함을 느꼈다.

하루가 더 지나서야 김광계의 건강이 조금 나아졌는데, 현감 황입신은 김광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파일의 관등회를 함께하자며 사람을 보내 청하였다. 김광계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김확, 김요형과 함께 관아로 향하였다. 관아에 가니 관아에는 이미 등을 달아 놓고 관등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감의 형도 오고, 류시원(柳時元)과 임지경(任之敬)도 와서 제법 떠들썩했다. 동헌에 모두 벌려 앉으니 다시금 술잔이 어지러이 오가고, 그 사이에 날이 저물어 비로소 등을 밝혔다. 등이 밝아서인지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다가 늦게 파하게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김령, 계암일록, 1623-12-30 ~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들에게 감사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 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룻배가 완성된 날, 냇가에서 축제가 벌어지다”

김령, 계암일록,
1618-04-28 ~ 1618-04-09 (윤)

1618년 4월 28일, 흐리다가 간혹 비가 내렸다. 김령은 낮에 냇가에 나가 배 값을 의논하였다. 배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마무리는 다음달 5일이나 6일 사이에 끝날 예정이었다. 드디어 윤 4월 6일, 배 만드는 일이 다음날 끝날 예정이라, 마을의 아래 윗사람 할 것 없이 술을 가지고 모두 모였다. 한편으로는 흥을 풀었지만, 한편으로는 논의할 사항이 있었다. 배 만드는 일은 다음날 마감되어야했지만, 오후에 미흡한 것을 조치하고 최종 완성은 9일로 물리기로 결정하였다. 7일에는 우선 먼저 몇몇만 모여 새로 만든 배를 시승해보기로 하였다.

윤 4월 7일, 완성된 배를 냇물에 띄우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김령과 몇몇 친지들은 모두 술을 가지고 가 잔을 돌렸다. 맑은 시내에 떨어지는 노을이 취흥을 돋아 주었다. 시를 짓다가 달이 떠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윤 4월 9일, 모두가 냇가에 모였다. 동네 아랫것들은 남녀가 모두 모였는데 안주거리를 가지고 길에 즐비하게 줄줄이 이어져 보기에 매우 성대하였다. 장막을 치고 자리를 나누니 등급이 엄격하였으나, 상하가 같이 즐기고 호령함에 차이가 없었으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김령은 배에 올라 다시 술을 마시며 달이 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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