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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손님맞이와 상차림은?

조선의 미덕, 손님맞이(접빈객)


조선 시대의 ‘접빈객(接賓客)’, 즉 손님맞이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미덕으로 강조되었다.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 시대 여행객들에게 숙식 해결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전래동화나 전통 소설에서 여행객 접대 이야기가 나오고, 이를 시작점으로 여러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손님을 얼마나 ‘정성껏’ 대접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당시 사회에서는 ‘접빈객’을 독려하기 위해서, ‘인심이 후한 집의 자손들에게 복이 오고, 박한 집은 망한다.’라는 논리로 이를 강조하였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유포되었고, ‘인심이 후하다.’라는 평가는 향촌사회에서 지역 유지로 인정받고 군림할 수 있는 덕목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업무를 수행하는 주체인 여성에게 ‘접빈객’은 부덕(婦德:부녀자의 덕행)의 실천이자, 사회적 미덕으로 독려하였다.

‘접빈객’은 유교 윤리의 중 하나인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실천이기도 했다. 남편 혹은 자식의 친구가 왕래할 때 정성껏 접대하는 것은 친구 간의 우애를 표현하고 신의를 돈독히 하는 것이었고, 후일 자신의 남편도 동일한 대우를 받을 것을 약속받는 행위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 시대 ‘접빈객’은 세상과 소통하고 정보를 입수하는 창구였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대에 사랑방 손님은 외부 세계의 뉴스를 전달하고,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자이기도 했다. 아울러 손님과 친분을 두터이 함으로써 주인은 사회‧정치적 네트워크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소중한 기능이 있었기에 양반가의 안주인은 남편의 친구들과 지인 접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함양 일두 고택 사랑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그러면 충남 홍성군 갈산면 수한리에 둥지를 틀고 있던 안동김씨 선원파의 종부(宗婦: 종가의 맏며느리) 유씨 부인의 일기를 통해 실제적으로 양반가에 누가 방문하고, 어떻게 손님을 맞이했는지 확인해 보자. 이 일기는 1849년 말부터 1851년까지 약 16개월의 기록만 전해지고 있지만, 생활일기라는 특성이 있어 ‘접빈객’의 상황을 재현해 볼 수 있다.

유씨 부인의 집에는 많은 손님들이 오고 갔다. 일기가 작성된 기간 동안 부인이 식사나 숙식을 제공한 횟수는 약 188회에 달하였다. 남편 김호근의 친구들은 38회, 친족은 115회, 하민(下民: 평민과 천민)들은 35회 방문하였다. 대체로 남편의 부재일 수와 손님의 수는 비례하였다. 전체 방문객 중에서 친족의 비중이 제일 높게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은 인근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시댁 쪽의 10촌 이내 친족들이며, 이 중 여성의 비율은 약 1/4 정도이다.

남편의 지인이나 친구들의 거주 지역은 결성, 면천, 공주, 보령, 황주, 부여 임천, 청양, 화산 등으로 동일 충남 지역이다. 이들은 방문 시 1박 2일의 숙박과 식사 및 술을 제공받았으며. 노복을 대동하거나 다른 손님과 동반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손님의 수는 현직에 있을수록, 그리고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증가한다. 따라서 이들의 수는 주인의 사회적 권세와 추종자의 수를 상징하였다. 심할 경우 주인의 사랑방에서 십여 명의 빈객들이 수일에서 여러 달까지 체류하는 경우도 빈번했다고 한다.

한편 유씨 부인을 방문한 하민들은 총 35회, 즉 전체 방문객의 약 1/5을 차지한다. 이들 중 여성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것은 살림을 관장하는 사람이 부인이기에 여성의 방문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회적 관계 증진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하민의 수가 의외로 많지 않은 것은, 양반과 하민 간의 사회적 연결망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시대적 현상, 즉 신분제 사회라는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밥상 위의 신분과 생태


누가 방문하는가에 따라, 그리고 방문객의 사회·정치적 위상에 따라 부인이 내오는 음식의 종류와 질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 집에서 가장 환대를 받았던 그룹은 현직 지방 관료군이다. 일기에는 결성과 화산, 임천, 청양 현감이 총 5번 등장하는데, 이들 중 청양 현감(당시 청양 현감은 김상현(金尙鉉:1811~1890)이다. 그는 대원군 집권기에 공조 판서, 경기 감사, 평안 감사를 역임하였다.)은 방문할 때마다 2박 3일씩 체류했다. 일기를 바탕으로 부인의 손님 상차림을 재구성해 보자.

1850년 어느 따스한 봄날, 남편의 친구인 청양 현감이 점심 식사 전에 도착하였다. 부인은 점심으로 가볍게 깨죽, 꼴뚜기회와 실과를 대접한 후 손님 접대를 위한 본격적인 음식 준비에 착수하였다. 노비인 막돌이를 시장에 보내 식재료를 구입하고, 여종들을 시켜 떡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음식이 채 준비되지 않은 저녁에는 5첩 반상을 내었다. 다음날부터는 본격적인 접대에 들어갔다. 아침상에는 국수와 대하를 가볍게 내었고, 점심에는 총 12가지의 음식을 차렸다. 송편·화전·두텁단자 등 세 종류의 떡, 수육·생선찜·느리미(오색꼬치전)·수란·어채·묵채·화면(화면은 궁중의 잔치 음식 중 하나다. 녹두가루를 반죽하여 익힌 것을 가늘게 썰어 오미자 국에 띄우고, 꿀을 섞고 잣을 곁들인 것이다. 혹은 진달래꽃을 녹두가루에 반죽하여 만들기도 한다.)·잡탕의 국수, 그리고 디저트로 여러 종류의 과일들이 상에 올랐다.

저녁상도 이와 비슷하게 차려졌다. 그러나 셋째 날 청양현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 현감이 예정보다 빨리 가게 되자, 간단히 국수를 대접했다고 한다. 지방이라는 환경을 감안해 볼 때 상당히 화려한 손님상이다.


종가의 접빈상 예 (출처: 2018년 종가포럼)


청양 현감은 1850년 늦가을에 다시 수한리를 방문했다. 도착한 날 저녁에는 국수가 상에 올랐다. 23일부터 접대 음식을 내었는데, 조반으로는 육개국(개고기)과 만두, 점심에는 신설로 2틀을 차려 국수와 함께 대접하였다. 오후 간식으로 유자, 석류를 넣은 화채와 사색 정과(4가지 정과)를 함께 내었고, 저녁으로는 굴을 넣은 비빔밥을 만들었다. 한편, 임천 현감이 방문했을 때는 깨죽, 수란, 조홍시(감), 침채(물김치), 생니(햇배)를 내었다.

여기서 호서지역 양반 가문의 상차림을 엿볼 수 있다. 가문의 품격을 반영하는 다양한 찜, 채, 탕, 전, 편육, 떡, 화채, 정과 등이 등장하고 있다. 즉, 식생활에 있어서 향촌 양반과 경화사족(서울 양반) 간의 큰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이 중 국수는 상당히 고급 음식으로 취급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반이나 점심 등 가볍게 대접할 때 상에 올랐다. 아울러 손님상에서 신선로, 수란, 화면, 어채, 두텁떡 등 궁중음식이 등장한다. 아마도 이 집안이 서울의 경화사족 및 궁궐과 인맥이 닿았기 때문일 것이며, 이러한 통로를 통해 서울의 궁중요리가 전국적으로 소개·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탁에는 서해안 해안가라는 지역적·생태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대하, 생선찜, 꼴뚜기, 어채, 굴 등 갈산면 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해산물을 요리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부인이 서울의 친족이나 궁궐에 보내는 선물에도 김, 조기, 굴, 전복 등의 해산물들이 주요 품목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같이 부인이 구매했던 식재료에는 소고기, 전복, 굴 등 부자들의 식탁 위에 올라가는 고가품이 많았다. 즉, 부인의 밥상은 그 집안의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었다.

한편 친족들에게 접대한 음식도 자못 흥미롭다. 친족의 중요도와 친밀도에 따라, 또한 방문 거리와 식재료의 여부에 따라 접대 음식의 차이가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인근 지역의 오곡댁 서방님이 내방할 때는 콩죽, 생복회, 갈비탕, 홍시 등을 대접하였고, 오곡댁 아가씨가 왔을 때에는 소고기로 불고기를 해주고, 떡이나 국수를 대접하기도 하였다. 다른 친족보다 오곡댁 친족에게는 정성스레 대접하는데, 아마도 오곡댁과 혈연적으로 가깝거나 개인적으로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서가 아닌가 싶다. 인근의 수한댁 진사님이 왔을 때는 흑임자 깨죽, 윤댁이 왔을 때는 인절미, 개장국, 닭탕을 하였다. 남편의 생일에는 인근 친지들을 초대하여 대접하였는데, 아침 생일상에는 국수와 느리미, 전골, 점심상에는 인절미·송편·갑피떡(개피떡) 등 3종류의 떡과 갈비탕, 묵을 내었다. 일부 음식들은 참석하지 못한 주변 친족들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다.

‘봉제사(제사 모시기) 접빈객’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술이다. 부인은 남자 노비를 시켜 술을 빚게 하였는데, 백미 2말과 누룩 세 덩이로 청주를 빚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 밖에 탁주·소주·약주 등을 제사 모시기 전이나 명절 전, 혹은 농번기에 담갔다. 김호근 가의 종부에 의하면 1960년대까지 제주로 청주나 약주를 빚었고, 일꾼들을 위한 술로는 탁주(막걸리)를 내었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 초에는 소주가 고급술에 속했으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대중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였다. 탁주는 누룩과 술밥을 섞어 만든 술인데, 위의 맑은 술을 약주 혹은 청주라 하고, 가라앉은 술을 탁주 혹은 막걸리라고 부른다. 탁주는 일반인들이 주로 마셨고, 청주·약주·소주는 양반들이 애용했던 술이다.


조선 시대 술 빚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김호근 가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에는 권력·신분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하민들을 위한 밥상은 양반들의 음식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준비되었다. 일단 반찬의 개수, 쌀의 품질에서도 차이가 났다. 일반적으로 뽕잎을 따거나 밭농사 등 농번기에 남자 일꾼과 남자 노비에게 제공되는 식사량은 한 끼당 7홉, 여종에게는 5홉으로 정해진 듯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이들에게는 낮은 품질의 쌀이 제공되었다.

일기를 보면 늦은 봄, 산에서 비료와 땔감을 채취하기 위한 벌목이 시작되는데, 이때 작업에 동원된 일꾼들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노비에게 ‘들충벼’ 한 섬을 찧게 했다. 들충벼란 쭉정이가 많고 덜 익은 벼를 뜻한다. 또한 ‘구즌쌀’은 지난해 생산된 묵은쌀로, 뽕잎 채취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점심으로 제공되었다. 이와 함께 고공들이나 노비들의 반찬은 대개 2가지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치 외에 인근 지역에서 값싸게 구하기 쉬운 새우젓, 관목, 청어 등을 1인당 생선 2마리를 올렸다. 일기를 보면 겨울용 땔감을 준비하기 위해 인부 31명을 고용하였는데, 쌀 3말과 청어 60마리를 주었다 한다.


새참 (출처: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목화밭을 갈거나 김장 무 등을 심는 등 본격적인 농사철에는 1인당 9.7홉의 쌀과 청어 2마리를 배당했고, 점심 외에 새참으로 술과 안주가 제공되었다. 유씨 부인이 하민(下民)에게 차려준 밥상은 양반들의 상차림과 비교해 볼 때, 쌀의 품질이나 반찬의 가짓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바로 신분과 권력, 부가 밥상에 고스란히 투영된 결과였다. 신분 사회였던 조선의 상차림이었던 것이다.

손님맞이와 접대는 시대와 지역, 전통문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유씨 부인도 그 중요성을 잘 인지하고 방문하는 손님들을 ‘정성껏’ 접대했다. 그 상차림은 현재 우리 것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고, 풍족하고 다양하며, 화려했다. 식재료는 부인이 살고 있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비싼 것들이었고, 이를 서울 궁궐과 지역에서 습득한 최신 레시피로 요리하였다. 이러한 부인의 상차림은 손님의 신분과 정치적 위상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청양 현감의 12첩 반상과 하민의 2첩 반상은 조선 시대 신분만큼 간극이 컸다. 이렇게 유씨 부인의 상차림은 조선의 일상문화와 사회적 신분 및 권력·부·생태까지 반영하고 있었다.




집필자 소개

김현숙
김현숙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근대 한국의 서양인 고문관들』, 『조선의 여성, 가계부를 쓰다』, 『사진으로 읽는 한국근현대사』, 『일본의 한국보호국화와 강제 병합』,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등이 있다.
“연이은 술자리로 술병이 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1635년 1월 5일, 손님을 접대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김광계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인 계화(季華)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계화는 발이 넓었는지 그가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의 친척들과 근처 사는 지인들까지 모두 김광계의 집으로 모였다. 김광계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모두 대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술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635년 1월 30일에도 피병하러 오신 제천의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자개(子開)와 만났는데, 자개는 이날따라 술을 계속 권해 피하지도 못하고 과음을 하고 말았다. 2월의 첫날에 하려고 세워놓은 계획도 무산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2월 8일에는 사무를 보러 도산서원에 갔는데, 김시추(金是樞)가 크게 취한 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2월 9일에 김시추와 김광계는 도산서원 앞 누대인 천연대에 올라가 또 술을 마셨다. 김시추가 아직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랬는지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술은 조금만 마셨다. 하지만 다음날에 김광계는 숙취에 시달리게 된다.

2월 12일에는 사숙과 함께 또 술을 예닐곱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기운에 괴로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김광계는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2월 26일에 김광계는 제사를 지낸 뒤 뱃놀이를 하며 또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연일 손님대접에 거덜 나는 살림살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2-08-01 ~ 1812-08-27

노상추가 부임한 가덕진에는 연일 손님이 드나들었다. 외직에 부임하면 으레 손님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전에 부임했던 갑산은 워낙 멀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손님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가덕도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왜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노상추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과 지인, 그리고 승려들까지 모두 일부러 배를 타고 가덕도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상추를 따라 섬에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고 있는 아들 익엽은 공무로 바쁜 아버지 대신 손님들을 명승지로 인도하였다. 고향에 있는 암자에서 온 승려들과 손님 두 사람을 데리고 큰 항구와 천수대를 구경시켰는데, 노상추는 한창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를 감독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손님 중 무과 급제자들은 역시 왜선이 궁금한지 일부러 천성까지 가서 정박해 있는 왜선 두 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승려들도 보고 싶은 것이 많은지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노상추는 병교가 합험을 하러 타고 가는 배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돈 손진악과 손해경도 일부러 바다를 구경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오는 길에 노상추의 고향집이 있는 화림에 들러서 집 소식을 알아보고 전해주었다. 집안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노상추는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침 달빛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아이 6, 7명도 함께 데리고 두 친구와 함께 진남루에 올라 악공들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대로 배를 타고 호수도 돌았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노상추는 방으로 조용히 감색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님 접대에 사용한 비용을 정산해 보도록 했다. 감색은 이리저리 계산하더니 원래 진에 책정된 비용보다 400금이나 초과해서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노상추는 매일같이 쓰는 일기도 건성으로 썼다. 봄철 이후로 찾아온 손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50명 정도 된다. 많은 손님이 찾아주어 기쁘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14 ~ 1794-03-27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흘간의 초례, 손님접대 하느라 술고래가 된 외삼촌 김령”

김령, 계암일록,
1621-02-16(윤) ~ 1621-02-20(윤)

1621년 윤 2월 16일, 영천으로 시집갔던 김령의 누이가 세월이 흘러 사위를 보는 날이었다. 신랑은 류원립(柳元立)군. 신랑을 따라온 손님들 중에는 영천 수령도 있었다. 김령은 누이 부부와 함께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잔치는 다음 날인 17일까지 이어졌고, 손님들은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날 오후 돌아갔다.

윤 2월 18일에는 김령의 자형 전경업(全景業)이 그의 여러 며느리들을 친지들에게 인사시켰다. 지인들이 다음날 향교 재사에 모여 글을 검토하자는 전갈을 보냈지만, 김령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형과 몇몇 벗들과 함께 어울려 계속해서 묽은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그들은 군내(郡內) 벗의 빈 집, 향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결국 김령은 벗 중 한 명이 만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윤 2월 20일, 초례를 치른 지 나흘 만에 신랑 류원립은 제 집인 임하로 돌아갔다. 김령은 신랑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형과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오에 문 밖을 나서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앓아누웠던 김령, 머리에 빗질을 하고 경상감사를 맞이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2-10-16 ~ 1622-10-22

1622년 10월, 승정원일기 수정작업을 위해 도성에서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던 김령은 건강이 악화되었다. 10월 중순의 그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조리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22일 경상도 감사 김지남(金止男)이 방문하였다. 김령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고는, 감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접대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술잔을 들었다. 조카와 문중의 자제들도 모두 와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감사는 인사를 나누고는 정오 즈음 안동으로 향하였다. 김령은 자신의 집을 방문해주었던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안동으로 아이를 보내 사례하였다.

감사가 떠난 후 김령은 수령을 보러 갔다. 감사의 행차로 인해 수령이 그 부근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을 만나고는, 손님들, 친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김령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셔서 꽤나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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