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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전라감영을 찾은 푸른 눈의 손님

조선을 여행하며 기록한 미국인


조지 클래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1856~1893)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출신이다. 187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자마자 해군 아시아 지역 함대에 지원하여 약 7년간 중국과 한국 해역에서 복무하였다. 미국 정부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년 5월 22일) 이후에 포크를 주한미국공사관의 해군무관(海軍武官)으로 조선에서 복무하도록 명하였다. 포크는 미국공사관 소속 해군무관으로서 상관인 푸트(Lucius H. Foote, 1826~1913)의 업무도 보좌했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다. 포크는 더 많은 정보 수집을 위해 각 관아를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조지 클래이턴 포크 (출처: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1차 여행은 1884년 9월 22일부터 10월 7일까지 경기 북부권역을, 2차 여행은 1884년 11월 1일부터 12월 14일까지 삼남 지방을 다니며 기록하였다. 2차 여행은 포크를 중심으로 전양묵(통역), 정수일(수행), 가마꾼 12명, 말몰이 소년 2명, 하인 1명으로 총 18명이 말 2필, 가마 3대, 여행용 가방 5개, 손가방 3개, 사진기, 삼각대, 총기 상자, 돈 자루 등을 가지고 출발한다.

당시 외국인 혼자서 조선인 하인들을 이끌고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부(全州府)는 11월 10일에 도착하여 12일까지 2박 3일간 머물게 된다. 이때의 기록을 보면 전라감영 관찰사 김성근(金聲根, 1835~1919, 1883년 2월~1885년 1월 재임)이 외국인에게 차려준 접대 상차림과 연회 상차림 그리고 헤어질 때 건네준 선물에서 접대문화를 알 수 있다.

포크가 정보 수집으로 남긴 많은 자료는 미국 의회 도서관, 뉴욕 공립 도서관, UC버클리 대학교 밴크로프트 도서관, 위스콘신 대학교 밀워키캠퍼스 도서관 등에 나누어져 소장되어 있다.


포크가 촬영한 관찰사 김성근과 육방 관속 (출처: 위스콘신대학교 밀워키캠퍼스 도서관)




맛있는 음식으로 마음을 열다


포크는 1884년 11월 10일 오후 12시 10분에 전주 남문에 도착한다. 지금의 풍남문(豐南門)이다. 포크가 전주에서 관찰사로부터 대접받은 첫 음식은 고구마, 밤, 감, 얇게 썬 쇠고기, 국수 등(a spread of sweet potatoes, chestnuts, persimmons, sliced beef, vermicelli, &c.)의 음식이었다. 아쉬운 점은 마지막에 ‘&c.’로 표현되어 더 많은 음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찰사는 음식을 앞에 두고 “조선의 음식이 미국보다 풍부한가?”라고 물어서 포크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포크가 “앞에 준비되어 있는 음식과 비슷한 것도 있고, 다른 더 많은 것도 있다.”라고 말하자 주위에서는 놀라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관찰사는 포크 앞에 내준 음식을 두고 양이나 수적으로 대단한 음식으로 생각했으나, 포크가 미국 음식이 조선 음식보다 다른 더 많은 것도 있다고 말해 놀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포크는 조금이나마 조선어를 알았기 때문에 씨, 배, 죽 등(seed, pear, porridge &c.)은 영어 발음과 비슷하다고 말하며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었다.

음식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음을 열게 되자, 관찰사는 포크의 숙소를 좋은 곳으로 옮겨준다. 포크가 처음 도착하여 짐을 푼 곳은 허름하고도 비참한(miserable, shabby) 방이었으나, 서울 밖에서 본 집 중에서 가장 멋지고 편안한 최고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했다.

저녁에도 엄청난 밥을 대접하는데, 포크는 다른 관아의 수령들이 그러했듯이 전라감영 관찰사도 민영익에게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해 주기를 바란다는 걸 눈치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 토종꿀, 밤, 감을 보내고, 10시가 되자 아침상을 들여보냈다. 포크는 아침상을 보고 ‘가슴까지 올라오는 엄청난 밥’이라고 표현하였고, ‘관찰사가 특별히 나에게 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포크는 음식마다 번호를 붙이고 자세하게 설명해 두었다.


포크가 일기에 그려둔 상차림 (1884년 11월 11일 오전 10시)

상차림에 나온 음식


포크가 그려둔 상차림을 살펴보면 밥 1종, 국 1종, 김치 2종, 나물 1종, 젓갈 3종(2기), 전 1종, 구이 3종, 찌개나 전골 형태 2종, 장 2종 등으로 구성되어 총 17종이다. 별도로 술병과 술잔이 놓인 상도 차렸다. 육류 요리가 소고기뭇국, 닭구이, 맥적구이, 쇠고기 편육, 육전, 오리탕, 꿩탕, 불고기까지 무려 여덟 가지다. 이 요리를 만드는 육류의 종류도 다섯 가지다. 무려 140년이 지난 2024년에도 대단한 상차림에는 틀림이 없다.


포크의 기록을 바탕으로 필자가 재현한 상차림


이날 오후에는 연회를 즐기는데, 포크는 연회 상차림을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다.

“문이 열리고 두 개의 상에 말 그대로 음식이 쌓여서 들어왔다. 상은 2피트 높이에 지름이 30인치이고, 둥글고 작은 접시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으며 가장 높은 것은 적어도 1피트 위에 있었다. 각각 열 명이 먹을 만큼의 음식이 쌓여 있었다. 큰 상 옆에는 작은 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냄비에 다진 고기와 채소가 놋쇠 용광로 안에서 끓고 있어 김이 나고 있었다. 음식은 전에 적어둔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달콤한 흰색, 갈색, 검은색, 노란색 사탕이 쌓여 있었다. 빨간색의 톱니 모양 케이크가 엄청났다. 국수가 주요리였고 국화 모양을 한 모찌(mochi) 튀김은 꿀에 담겼다. 술상도 제공되었다. 기생은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무릎을 꿇은 채 나에게 올렸다. 그녀는 긴 소리를 뽑았고 다른 세 명도 크게 합창하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커졌다가 서서히 작아졌다. 권주가였다.”

연회상 옆에는 곁상이 있어 식사 자리에서 끓일 수 있는 신선로가 있고, 아침상과 다른 점은 다양한 색의 사탕 더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식이나 잔치에 쓰는 음식을 높이 쌓아 올려서 차린 상차림으로 ‘고배상(高排床)’이라는 점이다.




흥겨운 춤사위


포크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11시에 촬영 장비를 챙겨 전양묵(통역)과 함께 전라감영 내삼문(內三門)을 통하여 선화당(宣化堂)으로 들어간다. 선화당은 전라감영 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보는 장소이며 7칸으로 78평의 규모다. 이곳에서 관찰사와 함께 연회를 즐긴다. 방에 연회 음식상이 펼쳐지고, 관기(官妓)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춤을 추었다.

포크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두 나무판을 서로 맞부딪혀 소리를 내자 아주 아름다운 옷을 입은 네 명의 소녀들이 마루로 들어온다. 10인치에서 18인치만큼 넓은 머리카락 덩어리를 머리에 쌓고 나와 너무 무거워 머리를 똑바로 세우지 못했다. 네 명이 북춤을 추는데, 붉은 띠가 나비 모양으로 묶여서 뒤를 향하고 있었고, 춤은 느리고 미끄러지듯 췄다. 바닥 가운데에는 커다란 북이 놓여 있었고, 무용수들은 때때로 줄을 서서, 다시 짝을 지어, 등을 맞대고, 사각형으로 움직였다. 붉은 술이 달린 네 쌍의 북채가 바닥에 줄지어 놓여 있었으며 삼십 분 또는 그 이상 계속되었다.”

포크가 전라감영에서 본 춤은 바로 승전무(勝戰舞)다. 승전무는 북춤으로 4인이 춤을 추는 원무에 해당한다. 승전무는 1593년(선조 26) 경상남도 통영(統營)에 삼도수군(三道水軍)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된 이후 1896년까지 영문(營門)에 예속되어 있던 기생청(妓生廳)의 관기가 추었던 춤이다. 승전무라는 명칭은 춤추며 부르는 창사(唱詞)의 내용이 충무공의 충의와 덕망을 추앙하며 전승을 축하하고 군졸들의 사기를 북돋운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연회에서 승전무를 추던 관기 (출처: 위스콘신대학교 밀워키캠퍼스 도서관)




주고받은 선물들


포크는 전라감영에 도착하여 떠날 때까지 다양한 선물을 주고받는다. 포크가 전주에 도착한 첫날에는 비장(裨將)이 술 한 병과 감 한 바구니를 보낸다. 비장은 경기도(광주)로부터 가지고 온 편지를 전달해 준 보답으로 포크에게 선물을 준 것이다.

포크와 관찰사가 처음 만났을 때, 포크는 은박으로 감싼 궐련 세 개를 선물로 준다. 관찰사는 매우 기뻐했다. 포크가 떠날 때는 관찰사가 6가지 선물 목록이 적힌 종이를 건넨다. 인삼, 두 종류의 부채, 빗 여러 개, 병풍 등이다.

관찰사 김성근이 다양한 선물을 포크에게 준 것은 모두 출세욕에서 비롯하였으며, 5,000푼을 건네고 포크에게 서울에서 보기를 원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넨다. 김성근은 이듬해인 1885년 2월 12일에 이조참판(종2품)이 되어 한양으로 올라간다. 이는 포크에게 접대하고 엽관(獵官)을 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포크는 전라감영에서의 연회는 중국에서 본 어떤 것보다 더 웅장한 모습이라고 하였으며, 이날을 환상적인 날이라 하였다. 또한 이 세상 어떤 장소보다도 인상적이며 감영을 ‘작은 왕국’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에는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오늘은 내게 정말 멋진 하루였다.”라고 덧붙였다. 전라감영에서 포크를 위해 베푼 연회 음식의 호사로움, 기생들의 화려한 춤과 함께 연회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포크는 전라감영뿐 아니라, 다른 관아를 방문하는 여행 기간 내내 관리들이 차려준 진수성찬을 맛보았고, 극진한 접대를 받았다. 이는 민영익의 후원을 받아 조정의 고관이 여행하는 관행을 그대로 따라 시종들을 거느린 호기 있는 여행이었으므로 가능했다.

포크는 자신의 여행을 두고 가는 곳마다 ‘대인(大人)’으로 불리면서 극진하게 대접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심지어 잠깐 낮잠이라도 자려고 하면 관리들은 “대인이 주무신다! 조용히 하거라!”라고 큰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객관에 들 때, 화장실에 갈 때, 심지어 잘 때도 여러 벼슬아치가 수발을 들고 다른 잡인들의 접근을 막아 아주 불편했으며 자신에게 접근하다가 발길로 차이는 사람을 보면 미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필자 소개

송영애
‘향토음식의 스토리텔링이 브랜드 태도에 미치는 영향’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주대학교 K-food산업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전통문화전당 한식창의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新도문대작』, 『식기장 이야기』, 『음식이 정치다』, 『전주음식 먹거리 식담록』 등이 있다. 연구 관심사는 음식 스토리텔링, 식문화, 전주음식이다. 끊임없는 음식문화 연구와 더불어 맛있는 음식이야기와 식문화에 대한 강연도 부지런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음식과 관련된 맛깔스러운 글을 쓸 계획이다.
“연이은 술자리로 술병이 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1635년 1월 5일, 손님을 접대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김광계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인 계화(季華)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계화는 발이 넓었는지 그가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의 친척들과 근처 사는 지인들까지 모두 김광계의 집으로 모였다. 김광계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모두 대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술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635년 1월 30일에도 피병하러 오신 제천의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자개(子開)와 만났는데, 자개는 이날따라 술을 계속 권해 피하지도 못하고 과음을 하고 말았다. 2월의 첫날에 하려고 세워놓은 계획도 무산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2월 8일에는 사무를 보러 도산서원에 갔는데, 김시추(金是樞)가 크게 취한 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2월 9일에 김시추와 김광계는 도산서원 앞 누대인 천연대에 올라가 또 술을 마셨다. 김시추가 아직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랬는지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술은 조금만 마셨다. 하지만 다음날에 김광계는 숙취에 시달리게 된다.

2월 12일에는 사숙과 함께 또 술을 예닐곱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기운에 괴로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김광계는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2월 26일에 김광계는 제사를 지낸 뒤 뱃놀이를 하며 또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연일 손님대접에 거덜 나는 살림살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2-08-01 ~ 1812-08-27

노상추가 부임한 가덕진에는 연일 손님이 드나들었다. 외직에 부임하면 으레 손님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전에 부임했던 갑산은 워낙 멀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손님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가덕도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왜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노상추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과 지인, 그리고 승려들까지 모두 일부러 배를 타고 가덕도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상추를 따라 섬에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고 있는 아들 익엽은 공무로 바쁜 아버지 대신 손님들을 명승지로 인도하였다. 고향에 있는 암자에서 온 승려들과 손님 두 사람을 데리고 큰 항구와 천수대를 구경시켰는데, 노상추는 한창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를 감독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손님 중 무과 급제자들은 역시 왜선이 궁금한지 일부러 천성까지 가서 정박해 있는 왜선 두 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승려들도 보고 싶은 것이 많은지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노상추는 병교가 합험을 하러 타고 가는 배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돈 손진악과 손해경도 일부러 바다를 구경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오는 길에 노상추의 고향집이 있는 화림에 들러서 집 소식을 알아보고 전해주었다. 집안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노상추는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침 달빛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아이 6, 7명도 함께 데리고 두 친구와 함께 진남루에 올라 악공들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대로 배를 타고 호수도 돌았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노상추는 방으로 조용히 감색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님 접대에 사용한 비용을 정산해 보도록 했다. 감색은 이리저리 계산하더니 원래 진에 책정된 비용보다 400금이나 초과해서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노상추는 매일같이 쓰는 일기도 건성으로 썼다. 봄철 이후로 찾아온 손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50명 정도 된다. 많은 손님이 찾아주어 기쁘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14 ~ 1794-03-27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흘간의 초례, 손님접대 하느라 술고래가 된 외삼촌 김령”

김령, 계암일록,
1621-02-16(윤) ~ 1621-02-20(윤)

1621년 윤 2월 16일, 영천으로 시집갔던 김령의 누이가 세월이 흘러 사위를 보는 날이었다. 신랑은 류원립(柳元立)군. 신랑을 따라온 손님들 중에는 영천 수령도 있었다. 김령은 누이 부부와 함께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잔치는 다음 날인 17일까지 이어졌고, 손님들은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날 오후 돌아갔다.

윤 2월 18일에는 김령의 자형 전경업(全景業)이 그의 여러 며느리들을 친지들에게 인사시켰다. 지인들이 다음날 향교 재사에 모여 글을 검토하자는 전갈을 보냈지만, 김령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형과 몇몇 벗들과 함께 어울려 계속해서 묽은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그들은 군내(郡內) 벗의 빈 집, 향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결국 김령은 벗 중 한 명이 만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윤 2월 20일, 초례를 치른 지 나흘 만에 신랑 류원립은 제 집인 임하로 돌아갔다. 김령은 신랑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형과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오에 문 밖을 나서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앓아누웠던 김령, 머리에 빗질을 하고 경상감사를 맞이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2-10-16 ~ 1622-10-22

1622년 10월, 승정원일기 수정작업을 위해 도성에서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던 김령은 건강이 악화되었다. 10월 중순의 그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조리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22일 경상도 감사 김지남(金止男)이 방문하였다. 김령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고는, 감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접대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술잔을 들었다. 조카와 문중의 자제들도 모두 와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감사는 인사를 나누고는 정오 즈음 안동으로 향하였다. 김령은 자신의 집을 방문해주었던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안동으로 아이를 보내 사례하였다.

감사가 떠난 후 김령은 수령을 보러 갔다. 감사의 행차로 인해 수령이 그 부근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을 만나고는, 손님들, 친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김령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셔서 꽤나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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