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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무대 위의 손님맞이

누군가의 방문


막내였던 내 어머니와 어정쩡한 중간 순번이었던 내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의 설날은 항상 ‘어른’들의 집을 전전하며 세배를 드리며 나가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내 부모님도 나이를 먹었고 우리집으로도 누군가가 세배를 하러 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분주한 설날을 보내다 부모님이 은퇴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설날만이 아니라 명절 전체가 찾아오는 이 없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명절에 불만은 없지만 이게 만약 무대 위라면 손님이란 대체로 불길한 이들이다.

특히나 고요한 집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손님이라는 이들은 불길함과 동의어다. 그러니 이들을 환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가 고민이다. 이를테면 제목에서부터 ‘방문’이 들어가는 방문객 이야기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의 연극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이 있다. 주인공인 노부인 클레어는 한 쪽 다리를 절며 십대 때 쫓겨났던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이고 임신시킨 후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부잣집 딸과 결혼했던 몰염치한 첫사랑 안톤을 죽이기 위해서다.

그 생각을 숨기지도 않는다. 부자 노부인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에 시장부터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이까지 나와 노부인을 환영하지만 노부인의 첫 만남부터 안톤을 죽이라는 요구조건을 제시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클레어의 제안을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긴 해도, 클레어를 환영하는 행사를 조직했을 때부터 이미 클레어의 무서운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고 있다.


연극 〈노부인의 방문〉의 한 장면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작품은 인간의 양심에 대해 묻지만 사실상 작품 속에서 양심으로부터, 도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 인간적이다. 클레어의 갑작스러운 방문부터 안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클레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이 마을의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끔 마을 사람들을 일깨운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클레어도 한때는 마을의 일원이었음을 일깨워 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클레어의 마음을 달래주려 하지만 안톤의 죽음 말고는 클레어를 달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마침내 목적을 이룬 클레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돈을 남기고 마을을 떠난다. 방문의 목적은 달성됐고 마을은 돈을 얻은 대신 만신창이가 됐다. 무대에서의 ‘방문’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조건 없는 환대


최근 불청객들을 아무 조건 없이 따듯하게 맞이했던 실제 사례를 가지고 만들어진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가 공연중이다. 이 일은 캐나다에서 일어났다. 하긴 이토록 선량한 일이 캐나다가 아니면 어디에서 일어나랴 싶기도 하다. 캐나다의 땅끝 마을 갠더(Gander)에는 하루에 비행기 한 두 개가 지나갈 정도로 한가한 공항이 있다. 갠더 공항은 한때 중간 기착지로서 앵커리지처럼 주유를 하는 거대한 공항으로 유명했지만 비행 기술이 발달하고 더이상 비행기들이 중간 주유 없이 단숨에 목적지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자 공항의 영광은 과거에 묻히고 공항을 없애는 논의가 제법 무르익을 정도로 한가한 곳이다.

하지만 그날, 2001년의 맑은 가을날, 9월 11일, 전세계로부터 찾아온 38대의 비행기들이 갠더의 하늘을 꽉 메우고 내릴 자리와 쉴 자리를 찾는다. 뉴욕의 무역센터가 폭발하고 무너졌던 2001년 9월 11일, 미국 상공의 모든 비행기 운항이 금지되고 떠 있던 비행기들은 어디로든 내려 앉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북미 지역을 비행 중이던 비행기들 가운데 38대가 원래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갠더 공항으로 인도 당했다. 비행기 안에 탄 승객들은 영문을 모른 채로 24시간이 넘도록 기내에 갇혀서 기내식이 떨어지고 공짜 술마저 바닥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9.11 당시 갠더 공항에 착륙한 항공기 (출처: CNN travel)


마을에서는 시장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전세계의 비행기에서 내릴 이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만 했다. 마침이란 말이 어쩌면 딱 맞겠지만 그 때 갠더시의 운수노조는 총파업 중이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하나둘씩 활주로에 승객들을 토해 놓기 시작하는데 마을로 그들을 옮겨올 교통수단의 발이 묶인 것이다. 결국 운수노조는 이 비상사태 동안만 파업을 멈추기로 결의하고 결연하게 승객들을 옮기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간다.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학교 체육관을 치우고 마을의 슈퍼마켓을 털어 임시 숙소인 체육관을 채운 후 자발적으로 집에서 옷가지를 비롯해 필요할 거라고 여겨지는 물품을 챙겨 나타난다. 갠더 사람들이 돌봐준 승객 가운데는 이슬람교인과 영어 한 마디도 모르는 아프리카 출신의 기독교인들도 있다. 거대한 참사 앞에서 단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이슬람교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욕하고 책임을 지우고 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갠더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호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유대인과 이슬람교인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지만 갠더라는 이 평화로운 공간 안에서 이슬람교인과 유대인, 기독교인은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종교의 자유를 누린다. 사실 알고보면 이들 세 종교의 신은 다 같은 신이기도 하다. 갠더 사람들은 집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곳에 멀리 떨어져 온 낯선 이들을 마치 입양이라도 한 듯 정성스레 돌본다. 세상 최고의 손님맞이다.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의 성공요인은?


갠더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9.11 10주기 되던 해에 캐나다에서 뮤지컬 초연이 올라왔다. 사실 이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제작진의 바람은 최종 목적지가 뉴욕 브로드웨이가 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사실이 되었을 때는 그들 자신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브로드웨이는 다소 냉소적인 유머 감각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 박애주의가 지나치게 넘쳐나는 착한 뮤지컬이 올라와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공연이 처음 시작했을 때의 반응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도 대부분 뮤지컬이 지나치게 착하다는 것과, 효율적으로 짜인 동선과 인간적인 다역 연기에 대한 호평이 대부분이었지만 장기 흥행에는 부정적이었다. 9.11이 일어났던 도시가 뉴욕인지라 외부의 친절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갠더시의 무조건적인 손님맞이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한 마음을 품긴 했어도 그 마음으로 티켓을 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보이는 친절함은 관객이 즐기기에는 도를 살짝 넘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살짝 도를 넘긴 박애주의가 이 작품의 성공 요인이 됐다. 그것은 잡지 표지에 날 정도의 엄청난 성공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폐막을 면할 정도의 잔잔한 성공이었다. 조기 폐막이라는 첫 번째 난관을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은 극단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올라온 작품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평균 제작비의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소규모 작품인데다 배우 12명이 최소한 1인 2역에서 5역 이상을 해내고 무대 전환과 설치에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인적 자원인 배우를 이용해 무대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통해 작품 유지비도 크게 줄였다.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 한국 공연 포스터 (출처: ㈜쇼노트)


덕분에 객석 65퍼센트 이상이 팔리지 않으면 폐막으로 직행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관행보다 살짝 아래까지 객석 점유율이 떨어져도 폐막에 이르지는 않을 수 있었다. 조기 폐막이라는 초반 암초를 넘자 작품의 수준에 대한 잔잔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관객 평균 연령이 꽤 높은 브로드웨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작품에 지친 노년 관객층을 끌어들이면서 보행 보조기와 보청기가 가장 많이 대여되는 작품이 됐고 입장줄이 가장 느리게 줄어드는 흥행작이 되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come from away) 따한 돌봄을 받는 과정이 때로는 긴박하게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촌스럽지만 따듯하게 그려지면서 그 자체로 인류애가 회복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작품의 라이센스 공연이 서울 BBC 홀에서 공연 중이다.




흥부가 보여주는 손님맞이


9.11이라는 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뮤지컬이 바스라져 가는 인류애를 회복시켜 준다면 한국에는 의외의 손님맞이 뮤지컬이 있다. 바로 놀부전에 나오는 흥부다. 흥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각도로 평가가 변화해온 인물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내걸렸던 1970년대의 흥부는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책임도 못 질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 사회를 어지럽히는 무능력한 가장의 상징이었다. 가족들이 배가 고파 굶고 있는데 구걸을 하러 바가지 달랑 하나 들고 나서는 것만 봐도 흥부의 경제관념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 바가지를 들고 찾아가는 곳도 다른 집이 아니라 자신을 안락한 집에서 쫓아낸 이기적인 욕심쟁이 놀부의 집이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집이기도 했던 그곳에 누더기를 입고 찾아가 밥 한 술만 달라는 흥부는 심지어 자존심마저 없고 현실감각은 안드로메다까지 도망가고 없다. 놀부는 흥부를 곤장을 쳐서 내쫓고 놀부의 마누라는 뺨을 쳐서 내쫓는다. 이렇게까지 친형에게 당하고도 흥부는 나중에 부자가 되고 나서 형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맨발로 달려나가 형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마당놀이 〈놀부전〉 중 흥부가 놀부 찾아가서 매 맞는 대목 (출처: 유튜브 GugakTV)


산해진미로 놀부의 밥상을 차려 먹이고 놀부의 등에 화초장을 짊어 주고 그 안을 보석과 돈으로 가득 채워 들려 보내는 흥부다. 과거에는 능력도 없이 애만 줄줄이 낳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었지만 요즘 같으면 흥부는 단숨에 애국자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다. 출생률이 0.6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라 인구가 다 사라지는데 백년도 안 걸릴 거라는 요즘에 흥부처럼 줄줄이 애를 낳는 인물이 얼마나 귀한가.

거기 더해서 자신을 구박하고 힘들게 한 형을 칙사 대접 하는 삼강오륜으로 똘똘 뭉친, 정부가 원하는 인재상이라 할 만하다. 아니, 사실 흥부는 형인 놀부를 아주 지능적으로 매장한 영리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얻은 박에서 튀어나온 도깨비들에게 늘씬하게 얻어텨져 괴물이 되니 말이다. 마당놀이가 다시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들리는데 심청도 오고 이춘풍도 왔으니 이제끔 놀부도 다시 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6~2017년 공연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 (출처: 국립극장)


고전이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안에서 새로 길어 올릴 무언가가 있기에 훌륭하다. 세상 흠잡을 데 없이 손님 대접을 한 캐나다의 땅끝마을 갠더 사람들이 칭송을 받는 다른 한 편에 우리에게는 이렇게 보아도 재밌고 저렇게 고쳐도 즐거운 오래된 판소리가 있다. 어쨋거나 서양이든 한국이든 손님 접대는 진심을 담아야 탈이 없는 듯하다. 설날의 세배를 통해 우리는 일년어치의 안부 주고받기와 작은 부의 나눔이라는 기능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게 아닐까.

〈컴 프롬 어웨이〉 홍보 영상(한글자막)   더보기

〈컴 프롬 어웨이〉 한국 공연 프레스콜   더보기

마당놀이 〈놀부전〉 녹화본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연이은 술자리로 술병이 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1635년 1월 5일, 손님을 접대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김광계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인 계화(季華)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계화는 발이 넓었는지 그가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의 친척들과 근처 사는 지인들까지 모두 김광계의 집으로 모였다. 김광계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모두 대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술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635년 1월 30일에도 피병하러 오신 제천의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자개(子開)와 만났는데, 자개는 이날따라 술을 계속 권해 피하지도 못하고 과음을 하고 말았다. 2월의 첫날에 하려고 세워놓은 계획도 무산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2월 8일에는 사무를 보러 도산서원에 갔는데, 김시추(金是樞)가 크게 취한 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2월 9일에 김시추와 김광계는 도산서원 앞 누대인 천연대에 올라가 또 술을 마셨다. 김시추가 아직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랬는지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술은 조금만 마셨다. 하지만 다음날에 김광계는 숙취에 시달리게 된다.

2월 12일에는 사숙과 함께 또 술을 예닐곱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기운에 괴로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김광계는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2월 26일에 김광계는 제사를 지낸 뒤 뱃놀이를 하며 또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연일 손님대접에 거덜 나는 살림살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2-08-01 ~ 1812-08-27

노상추가 부임한 가덕진에는 연일 손님이 드나들었다. 외직에 부임하면 으레 손님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전에 부임했던 갑산은 워낙 멀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손님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가덕도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왜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노상추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과 지인, 그리고 승려들까지 모두 일부러 배를 타고 가덕도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상추를 따라 섬에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고 있는 아들 익엽은 공무로 바쁜 아버지 대신 손님들을 명승지로 인도하였다. 고향에 있는 암자에서 온 승려들과 손님 두 사람을 데리고 큰 항구와 천수대를 구경시켰는데, 노상추는 한창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를 감독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손님 중 무과 급제자들은 역시 왜선이 궁금한지 일부러 천성까지 가서 정박해 있는 왜선 두 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승려들도 보고 싶은 것이 많은지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노상추는 병교가 합험을 하러 타고 가는 배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돈 손진악과 손해경도 일부러 바다를 구경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오는 길에 노상추의 고향집이 있는 화림에 들러서 집 소식을 알아보고 전해주었다. 집안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노상추는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침 달빛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아이 6, 7명도 함께 데리고 두 친구와 함께 진남루에 올라 악공들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대로 배를 타고 호수도 돌았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노상추는 방으로 조용히 감색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님 접대에 사용한 비용을 정산해 보도록 했다. 감색은 이리저리 계산하더니 원래 진에 책정된 비용보다 400금이나 초과해서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노상추는 매일같이 쓰는 일기도 건성으로 썼다. 봄철 이후로 찾아온 손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50명 정도 된다. 많은 손님이 찾아주어 기쁘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14 ~ 1794-03-27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흘간의 초례, 손님접대 하느라 술고래가 된 외삼촌 김령”

김령, 계암일록,
1621-02-16(윤) ~ 1621-02-20(윤)

1621년 윤 2월 16일, 영천으로 시집갔던 김령의 누이가 세월이 흘러 사위를 보는 날이었다. 신랑은 류원립(柳元立)군. 신랑을 따라온 손님들 중에는 영천 수령도 있었다. 김령은 누이 부부와 함께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잔치는 다음 날인 17일까지 이어졌고, 손님들은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날 오후 돌아갔다.

윤 2월 18일에는 김령의 자형 전경업(全景業)이 그의 여러 며느리들을 친지들에게 인사시켰다. 지인들이 다음날 향교 재사에 모여 글을 검토하자는 전갈을 보냈지만, 김령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형과 몇몇 벗들과 함께 어울려 계속해서 묽은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그들은 군내(郡內) 벗의 빈 집, 향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결국 김령은 벗 중 한 명이 만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윤 2월 20일, 초례를 치른 지 나흘 만에 신랑 류원립은 제 집인 임하로 돌아갔다. 김령은 신랑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형과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오에 문 밖을 나서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앓아누웠던 김령, 머리에 빗질을 하고 경상감사를 맞이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2-10-16 ~ 1622-10-22

1622년 10월, 승정원일기 수정작업을 위해 도성에서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던 김령은 건강이 악화되었다. 10월 중순의 그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조리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22일 경상도 감사 김지남(金止男)이 방문하였다. 김령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고는, 감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접대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술잔을 들었다. 조카와 문중의 자제들도 모두 와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감사는 인사를 나누고는 정오 즈음 안동으로 향하였다. 김령은 자신의 집을 방문해주었던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안동으로 아이를 보내 사례하였다.

감사가 떠난 후 김령은 수령을 보러 갔다. 감사의 행차로 인해 수령이 그 부근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을 만나고는, 손님들, 친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김령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셔서 꽤나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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