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였던 내 어머니와 어정쩡한 중간 순번이었던 내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의 설날은 항상 ‘어른’들의 집을 전전하며 세배를 드리며 나가곤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자 내 부모님도 나이를 먹었고 우리집으로도 누군가가 세배를 하러 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렇게 분주한 설날을 보내다 부모님이 은퇴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설날만이 아니라 명절 전체가 찾아오는 이 없이 고요해졌다. 고요해진 명절에 불만은 없지만 이게 만약 무대 위라면 손님이란 대체로 불길한 이들이다.
특히나 고요한 집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손님이라는 이들은 불길함과 동의어다. 그러니 이들을 환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가 고민이다. 이를테면 제목에서부터 ‘방문’이 들어가는 방문객 이야기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의 연극 〈노부인의 방문(Der Besuch der alten Dame)〉이 있다. 주인공인 노부인 클레어는 한 쪽 다리를 절며 십대 때 쫓겨났던 고향 마을로 돌아온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속이고 임신시킨 후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부잣집 딸과 결혼했던 몰염치한 첫사랑 안톤을 죽이기 위해서다.
그 생각을 숨기지도 않는다. 부자 노부인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에 시장부터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이까지 나와 노부인을 환영하지만 노부인의 첫 만남부터 안톤을 죽이라는 요구조건을 제시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클레어의 제안을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긴 해도, 클레어를 환영하는 행사를 조직했을 때부터 이미 클레어의 무서운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알고 있다.
연극 〈노부인의 방문〉의 한 장면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작품은 인간의 양심에 대해 묻지만 사실상 작품 속에서 양심으로부터, 도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 인간적이다. 클레어의 갑작스러운 방문부터 안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클레어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이 마을의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끔 마을 사람들을 일깨운다. 아무리 마을 사람들이 클레어도 한때는 마을의 일원이었음을 일깨워 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든 클레어의 마음을 달래주려 하지만 안톤의 죽음 말고는 클레어를 달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마침내 목적을 이룬 클레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돈을 남기고 마을을 떠난다. 방문의 목적은 달성됐고 마을은 돈을 얻은 대신 만신창이가 됐다. 무대에서의 ‘방문’이란 대략 이런 것이다.
최근 불청객들을 아무 조건 없이 따듯하게 맞이했던 실제 사례를 가지고 만들어진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가 공연중이다. 이 일은 캐나다에서 일어났다. 하긴 이토록 선량한 일이 캐나다가 아니면 어디에서 일어나랴 싶기도 하다. 캐나다의 땅끝 마을 갠더(Gander)에는 하루에 비행기 한 두 개가 지나갈 정도로 한가한 공항이 있다. 갠더 공항은 한때 중간 기착지로서 앵커리지처럼 주유를 하는 거대한 공항으로 유명했지만 비행 기술이 발달하고 더이상 비행기들이 중간 주유 없이 단숨에 목적지까지 날아갈 수 있게 되자 공항의 영광은 과거에 묻히고 공항을 없애는 논의가 제법 무르익을 정도로 한가한 곳이다.
하지만 그날, 2001년의 맑은 가을날, 9월 11일, 전세계로부터 찾아온 38대의 비행기들이 갠더의 하늘을 꽉 메우고 내릴 자리와 쉴 자리를 찾는다. 뉴욕의 무역센터가 폭발하고 무너졌던 2001년 9월 11일, 미국 상공의 모든 비행기 운항이 금지되고 떠 있던 비행기들은 어디로든 내려 앉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북미 지역을 비행 중이던 비행기들 가운데 38대가 원래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갠더 공항으로 인도 당했다. 비행기 안에 탄 승객들은 영문을 모른 채로 24시간이 넘도록 기내에 갇혀서 기내식이 떨어지고 공짜 술마저 바닥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9.11 당시 갠더 공항에 착륙한 항공기 (출처: CNN travel)
마을에서는 시장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전세계의 비행기에서 내릴 이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만 했다. 마침이란 말이 어쩌면 딱 맞겠지만 그 때 갠더시의 운수노조는 총파업 중이었다. 마침내 비행기가 하나둘씩 활주로에 승객들을 토해 놓기 시작하는데 마을로 그들을 옮겨올 교통수단의 발이 묶인 것이다. 결국 운수노조는 이 비상사태 동안만 파업을 멈추기로 결의하고 결연하게 승객들을 옮기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간다.
시장과 마을 사람들은 학교 체육관을 치우고 마을의 슈퍼마켓을 털어 임시 숙소인 체육관을 채운 후 자발적으로 집에서 옷가지를 비롯해 필요할 거라고 여겨지는 물품을 챙겨 나타난다. 갠더 사람들이 돌봐준 승객 가운데는 이슬람교인과 영어 한 마디도 모르는 아프리카 출신의 기독교인들도 있다. 거대한 참사 앞에서 단지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이슬람교인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욕하고 책임을 지우고 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갠더 사람들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종교의 자유를 보호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유대인과 이슬람교인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지만 갠더라는 이 평화로운 공간 안에서 이슬람교인과 유대인, 기독교인은 한 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며 종교의 자유를 누린다. 사실 알고보면 이들 세 종교의 신은 다 같은 신이기도 하다. 갠더 사람들은 집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곳에 멀리 떨어져 온 낯선 이들을 마치 입양이라도 한 듯 정성스레 돌본다. 세상 최고의 손님맞이다.
갠더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으로 9.11 10주기 되던 해에 캐나다에서 뮤지컬 초연이 올라왔다. 사실 이 작품이 만들어졌을 때 제작진의 바람은 최종 목적지가 뉴욕 브로드웨이가 되는 것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일이 사실이 되었을 때는 그들 자신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브로드웨이는 다소 냉소적인 유머 감각이 주를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 박애주의가 지나치게 넘쳐나는 착한 뮤지컬이 올라와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공연이 처음 시작했을 때의 반응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도 대부분 뮤지컬이 지나치게 착하다는 것과, 효율적으로 짜인 동선과 인간적인 다역 연기에 대한 호평이 대부분이었지만 장기 흥행에는 부정적이었다. 9.11이 일어났던 도시가 뉴욕인지라 외부의 친절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갠더시의 무조건적인 손님맞이에 대한 놀라움과 감사한 마음을 품긴 했어도 그 마음으로 티켓을 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보이는 친절함은 관객이 즐기기에는 도를 살짝 넘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살짝 도를 넘긴 박애주의가 이 작품의 성공 요인이 됐다. 그것은 잡지 표지에 날 정도의 엄청난 성공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폐막을 면할 정도의 잔잔한 성공이었다. 조기 폐막이라는 첫 번째 난관을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사실은 극단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올라온 작품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평균 제작비의 절반 정도밖에 안되는 소규모 작품인데다 배우 12명이 최소한 1인 2역에서 5역 이상을 해내고 무대 전환과 설치에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인적 자원인 배우를 이용해 무대적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통해 작품 유지비도 크게 줄였다.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 한국 공연 포스터 (출처: ㈜쇼노트)
덕분에 객석 65퍼센트 이상이 팔리지 않으면 폐막으로 직행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관행보다 살짝 아래까지 객석 점유율이 떨어져도 폐막에 이르지는 않을 수 있었다. 조기 폐막이라는 초반 암초를 넘자 작품의 수준에 대한 잔잔한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관객 평균 연령이 꽤 높은 브로드웨이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작품에 지친 노년 관객층을 끌어들이면서 보행 보조기와 보청기가 가장 많이 대여되는 작품이 됐고 입장줄이 가장 느리게 줄어드는 흥행작이 되었다.
멀리서 온 사람들이(come from away) 따한 돌봄을 받는 과정이 때로는 긴박하게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촌스럽지만 따듯하게 그려지면서 그 자체로 인류애가 회복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이 작품의 라이센스 공연이 서울 BBC 홀에서 공연 중이다.
9.11이라는 참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뮤지컬이 바스라져 가는 인류애를 회복시켜 준다면 한국에는 의외의 손님맞이 뮤지컬이 있다. 바로 놀부전에 나오는 흥부다. 흥부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각도로 평가가 변화해온 인물이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내걸렸던 1970년대의 흥부는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책임도 못 질 아이들을 줄줄이 낳아 사회를 어지럽히는 무능력한 가장의 상징이었다. 가족들이 배가 고파 굶고 있는데 구걸을 하러 바가지 달랑 하나 들고 나서는 것만 봐도 흥부의 경제관념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게다가 그 바가지를 들고 찾아가는 곳도 다른 집이 아니라 자신을 안락한 집에서 쫓아낸 이기적인 욕심쟁이 놀부의 집이다. 얼마 전까지는 자신의 집이기도 했던 그곳에 누더기를 입고 찾아가 밥 한 술만 달라는 흥부는 심지어 자존심마저 없고 현실감각은 안드로메다까지 도망가고 없다. 놀부는 흥부를 곤장을 쳐서 내쫓고 놀부의 마누라는 뺨을 쳐서 내쫓는다. 이렇게까지 친형에게 당하고도 흥부는 나중에 부자가 되고 나서 형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맨발로 달려나가 형을 맞이하는 인물이다.
마당놀이 〈놀부전〉 중 흥부가 놀부 찾아가서 매 맞는 대목 (출처: 유튜브 GugakTV)
산해진미로 놀부의 밥상을 차려 먹이고 놀부의 등에 화초장을 짊어 주고 그 안을 보석과 돈으로 가득 채워 들려 보내는 흥부다. 과거에는 능력도 없이 애만 줄줄이 낳는 반사회적인 인물이었지만 요즘 같으면 흥부는 단숨에 애국자의 반열에 오를 인물이다. 출생률이 0.6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라 인구가 다 사라지는데 백년도 안 걸릴 거라는 요즘에 흥부처럼 줄줄이 애를 낳는 인물이 얼마나 귀한가.
거기 더해서 자신을 구박하고 힘들게 한 형을 칙사 대접 하는 삼강오륜으로 똘똘 뭉친, 정부가 원하는 인재상이라 할 만하다. 아니, 사실 흥부는 형인 놀부를 아주 지능적으로 매장한 영리한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얻은 박에서 튀어나온 도깨비들에게 늘씬하게 얻어텨져 괴물이 되니 말이다. 마당놀이가 다시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들리는데 심청도 오고 이춘풍도 왔으니 이제끔 놀부도 다시 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6~2017년 공연 마당놀이 〈놀보가 온다〉 (출처: 국립극장)
고전이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안에서 새로 길어 올릴 무언가가 있기에 훌륭하다. 세상 흠잡을 데 없이 손님 대접을 한 캐나다의 땅끝마을 갠더 사람들이 칭송을 받는 다른 한 편에 우리에게는 이렇게 보아도 재밌고 저렇게 고쳐도 즐거운 오래된 판소리가 있다. 어쨋거나 서양이든 한국이든 손님 접대는 진심을 담아야 탈이 없는 듯하다. 설날의 세배를 통해 우리는 일년어치의 안부 주고받기와 작은 부의 나눔이라는 기능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게 아닐까.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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