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가 한창 심해진 날인데 어쩌다 저런 모양새일까 싶을 정도로 불쌍한 차림의 사내가 찬바람에 옷자락을 여미며 비틀비틀 걸어가고 있었다. 두루마기도 없는 홑저고리 차림인데 그나마도 여기저기 찢어져 맨살이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찌그러진 갓이나마 쓰고 있는 걸 보면 양반인 것은 분명한데 어찌 짚신 하나 변변한 걸 신지 못해 발가락이 튀어나와 있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사내 뒤로는 동네 개구쟁이 여남은 명이 쫓아가며 거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인데 집에 가던 길에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를 만난 모양이었다. 아이들 놀림에도 사내는 옷자락만 여미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재미가 떨어진 개구쟁이 중 하나가 짱돌 하나를 들어서 냅다 던졌다. 다행히 사내에게 맞지 않고 발치에만 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듯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것들! 무슨 짓이야!”
마침 백이네 집에 놀러가고 있던 목금이 대뜸 큰소리를 내질렀다.
“야, 도망 쳐! 책방 귀신 누나다!”
“뭐, 어디?”
“저기, 저기!”
개구쟁이들은 파랗게 질려서는 후다닥 달아났다. 목금은 어이가 없어서 달아나는 개구쟁이들의 등짝만 바라보았다. 책방 귀신 누나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람?
“에취!”
사내가 재채기를 했다. 소리가 얼마나 큰 지 목금이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거, 참. 내가 재채기 소리가 좀 크지? 그나저나 아이들 말려줘서 고맙구만.”
사내와는 꽤나 거리가 있었는데도 소리가 얼음장처럼 귓속으로 꽂혀들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당연한 일인 걸요.”
목금이 꾸벅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고개를 들자 사내가 어느 틈에 목금이 앞에 와 서 있었다. 바람처럼 몸이 날랜 사람이었다.
“참으로 마음씨 고운 처자일세. 저, 그래서 그런데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네? 부탁이요?”
“어려운 일은 아니고 그저 전갈을 하나 해줬으면 해서 그러네.”
“전갈이요?”
“망허산 아래 작은 밭뙈기를 부쳐 먹는 임가네가 있는데, 혹시 어느 집인지 아는가?”
“네, 알아요.”
잘 알고 있었다. 그 집은 본래 양반가였다고 하는데 20년 전에 아버지가 관서 지방에 벼슬하는 친척을 찾아간다고 나간 후에 연락이 두절되었다. 남자 아이 둘을 데리고 졸지에 과부 아닌 과부가 된 산양댁은 삯바느질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고, 아이들이 머리가 좀 굵어진 뒤에 동네 최고 부자인 정 진사네 소작을 하게 되었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중 논갈이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목금이 친구인 백이 아버지가 정 진사다. 그런 이유로 정 진사네 일이 있을 때마다 두 형제가 불려와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니 허구한 날 얼굴을 볼 수밖에 없었다. 두 형제 모두 언제나 겸손하고 싹싹하고 씩씩했다. 남의 집 일을 한다고 비굴하게 굴지도 않았고,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마다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도 극진히 봉양해서 효자 형제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럼 그 집에 가서 정 진사네 딸이 다 죽게 되었으니 빨리 달려가면 구할 수 있다고 말 좀 전해다오.”
“네에? 정 진사 나리네 딸이요?”
목금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정 진사네 딸은 친구 백이뿐인데, 백이는 어제도 멀쩡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 죽게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래, 그 집 딸이 갑자기 쓰러져서 다 죽게 되었는데 임가네 아들만 구할 수 있으니 어서 가라고 전해다오.”
“아, 알았어요!”
의녀를 불러 진찰하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나쁜 농담일수도 있겠지만 정말이라면 큰일이었다. 목금은 터무니없이 들리는 말이었지만 우선은 믿어보기로 했다. 백이가 안 아프면 그걸로 다행이고, 백이가 아픈데 임씨 형제가 낫게 해주면 그것도 다행인 셈이었다.
하지만 서너 발자국 떼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어서 다시 사내에게 달려갔다.
“여보세요. 그런데 아저씨들이 얼토당토한 말이라고 제 말을 믿지 않으면 어쩌지요?”
사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긴 내가 들었어도 그게 뭔 소린가 했겠다.”
“그러게요. 어쩌죠? 직접 가시면 안 돼요?”
“나는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직접 갈 수는 없고… 그럼 어쩐다?”
난처한 얼굴로 서 있던 사내가 뭔가 결심한 듯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라. 내가 사실은 수재, 익재의 아버지란다.”
임씨 형제의 이름이 수재와 익재였다.
“네에? 선비 나리가 아버지라고요?”
“그래.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내가 고향에 오질 못했다. 이제 나타나니 집에 갈 면목이 없구나. 하지만 사람이 죽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천상 네가 가서 말을 전해야 하는데… 그 말을 믿지 않을 것 같다는 것도 맞는 말이니…”
“그럼 아버지라는 어떤 신표가 있으신지요?”
목금은 갈수록 점점 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내를 믿기가 어려웠다. 임씨 형제 아버지가 실종된 걸 알고 어떤 사기를 치려고 온 건 아닐까?
“그렇지!”
사내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생각난 게 있다. 집의 북쪽 기둥 위에 보면 구멍이 하나 있다. 그 구멍 안에 내가 시를 적어놓은 종이가 들어 있다. 그걸 꺼내보면 내 말이라는 걸 알게 되겠다.”
“혹시 그 시도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지. 『시경(時經)』의 「육아(蓼莪)」를 적어놓은 것이다. 혹시 그 시를 아느냐?”
목금이 얼른 시를 외웠다.
“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나를 돌아보시고 나를 다시 살피셨네. 드나들 때마다 나를 안아주셨는데, 그 은혜 갚으려 해도 하늘이 무심하구나.”
『시전대전(詩傳大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사내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맞아. 그 시는 둘째 익재가 어렸을 때 적은 것이다. 익재가 그때 많이 아파서 밤새 간호를 했는데, 그러면서 내 부모님도 내가 아플 때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나를 보아 주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단다. 그때서야 『시경』의 이 시가 가진 깊은 뜻을 알게 되었지. 효도를 하려 해도 이미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이 시를 부모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써서 기둥 위의 구멍에 넣어 두었단다. 지금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사내가 나쁜 사기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목금은 재빨리 임씨네로 달려갔다. 다행히 겨울날이라 바쁜 일이 없었던 모양으로 두 형제가 모두 집에 있었다. 하지만 최 진사 댁에 가보라는 말에는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진사 나리네 아가씨는 엊그제에도 뵈었는데, 아주 멀쩡하셨다. 누가 질 나쁜 장난을 칠 모양인데, 공연히 휘말리면 우리만 경을 칠 거다.”
“그런 게 아니에요.”
목금은 애가 타서 발을 구르며 임씨 형제 아버지가 전한 말을 재빨리 읊었다. 수재가 깜짝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버지가 우리 마을에 계시다고? 어디냐? 어디?”
흥분한 수재를 동생 익재가 말렸다.
“형, 잠깐만. 기둥부터 확인해보자. 이게 다 거짓말일 수도 있어.”
“그, 그래. 확인해보자. 익재야, 엎드려라.”
“뭐? 왜?”
“네가 엎드려야 내가 밟고 올라가서 종이를 꺼내볼 거 아니냐.”
수재는 조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엎드렸고, 익재는 기둥 구멍에서 정말 누렇게 변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 이거 정말… 정말… 아버지 글씨체다! 아버지 말이 맞았어!”
수재와 익재는 얼싸 안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애가 타는 건 목금이었다.
“아, 글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어서 진사 나리네로 가자고요!”
*
목금이 임씨 형제와 함께 백이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깜깜해진 뒤였다. 대문을 두들기려고 달려가는 목금이를 익재가 얼른 붙잡았다.
“대문으로 가지 말고…”
“네?”
“이리 가자.”
임씨 형제는 부엌 옆으로 난 쪽문으로 목금이를 데려갔다.
“밤이 됐는데 우리가 뭐라고 대문을 두들기겠냐? 이 문은 하인들 쓰는 문이라 우리가 들어가도 괜찮다. 아직 잠겨 있지도 않을 거고.”
송정(松亭)의 쪽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문으로 들어서니 마침 밥상을 들고 나르던 삼월이가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뒤 종종걸음으로 내실로 들어갔다. 목금이 바로 뒤를 따라갔다.
“삼월아, 삼월아!”
“네, 목금 아씨.”
삼월이는 초조한 얼굴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백이, 백이가 아프냐?”
삼월이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그거 어찌 아셨어요?”
“정말이구나. 지금 살 길이 있어서 수재, 익재 아저씨를 모시고 왔…”
그렇게 말을 하다가 목금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당에 허름한 옷을 입은 그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아이들은 왔느냐?”
“네, 왔습니다. 부엌에 있어요.”
그 말에 사내가 흐릿해지더니 사라져버렸다.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춘 것 같았다.
“뭐가 왔다고 하시는 거예요?”
삼월이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물었다.
“너, 저기 남자가 서 있던 거 못 봤어?”
“남자가 있었다고요? 누구요?”
목금이 삼월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면 임씨 형제의 아버지라면 지금은 오십이 넘어야 했다. 하지만 사내는 서른대엿 밖에 안 돼 보였다.
*
“진사 나리, 저희 형제가 아가씨를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임씨 형제가 마당에 꿇어앉아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백이 방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정 진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너희가 어찌 알고 여길 온 것이냐?”
수재가 말했다.
“아가씨의 병은 응보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응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제 손님이 한 분 찾아왔었을 것입니다. 차림새가 허름하다 하여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그 손님이 저주를 한 때문에 병이 난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어제 손님이 온 적이 없는데… 가만, 청직(廳直)은 어디 있느냐?”
최 진사 댁 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급히 불려왔다.
“어제 온 손님을 집에 들이지 않고 내친 일이 있느냐?”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었고, 그저 거렁뱅이가 왔는데 내쫓은 일은 있습니다.”
그 말에 임씨 형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갓을 쓰고 다니는 거렁뱅이가 있습니까? 말씀이 심하십니다.”
정 진사가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령 거렁뱅이라 해도 그렇게 문전에서 내쫓으면 아니 되는 법이다. 양반가의 법도가 어디 그러하더냐? 손님이 찾아오면 찬이 모자라도 밥을 한 술 들고 가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수재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진사 나리의 뜻이 아닌 것을 알았으니 되었습니다.”
익재가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고 외쳤다.
“아버지의 뜻은 소자들이 잘 알고 있지만, 정 진사 나리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십니다. 부디 해코지를 거둬주십시오.”
수재도 이어서 말했다.
“아버지가 묻히신 곳을 이제서야 알았으니 저희가 가서 시신을 수습하고 고향 땅에 편히 모시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십시오.”
그러자 마당에 갑자기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마구 화를 내며 발을 쿵쿵 내리 밟았다.
“이 바보 같은 것들아. 내가 너희에게 한 재산을 떼어주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렇게 일을 다 망쳐버리는구나! 한심한 것들! 내가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간다. 정 진사! 나를 아시겠소? 내 아이들을 머슴으로 부리다니, 너무 하시는 거 아니오!”
정 진사도 깜짝 놀랐다.
“아니, 자네는 임생 아닌가? 대체 어디에 있다 이제…”
정 진사는 말을 하다 안색이 파래지고 말았다. 임생은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임생이 차갑게 말했다.
“내가 관북에 갔다가 그만 홍경래가 일으킨 난리에 휘말려 비명횡사했네. 하지만 내 아이들이 떠올라 구천에 갈 수가 없었네. 이렇게 손님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일세. 내 아이들을 머슴을 만들어? 내가 용서할 것 같으냐?”
임생이 정 진사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임씨 형제가 아버지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사 나리는 저희 은인이십니다! 저희를 여태 보살펴주셨습니다. 소작도 다른 이보다 훨씬 헐하게 주셨단 말입니다!”
“놔라! 나와는 서당 동무인데 소작을 주고 일을 부려 먹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임생의 모습은 이제 더는 선비가 아니었다. 역귀의 모습이었다. 임씨 형제도 그만 놀라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마당이 환해졌다. 목금이 불돌이를 안고 나타난 것이다. 목금이 임생을 향해 외쳤다.
“생과 사는 서로 다른 길인데, 어찌하여 혼백이 구천에 머물지 않고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입니까? 그리던 아들도 만났으니 이제 족함을 알고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세요!”
거렁뱅이 사내는 불길을 뿜어내는 양수지조, 불돌이의 기운에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조선 시대 구나(驅儺)의식 중 대불놓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임씨 형제가 사라져가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완전히 사라지자 백이가 이부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한밤중에 다들 뭐하는 거야?”
목금이 날 듯이 뛰어가 백이를 얼싸 안았다.
“이제 괜찮아? 안 아파? 고생했어.”
“아프긴 누가 아프다고 그래? 난 그냥 한숨 자고 일어난 건데.”
“그래, 그래, 잘 잤어. 별일 아니야. 손님 하나 문전박대해서 소동이 있었어.”
“손님을 문전박대하다니? 그럼 안 되지.”
목금이 백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귀신은 문전박대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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