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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함께 해볼까요?

제10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이 곧 시작됩니다. 매년 다양하고 흥미로운 역사 소재가 대학(원)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로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데요.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은 다른 공모전과는 달리 교육형 공모전으로 참가 팀들은 전문 멘토링 과정을 거쳐 제출한 기획안을 발전시키고, 최종 프로모션에서는 자신들의 기획안을 퍼포먼스 피칭으로 멋지게 소개합니다.

전통기록유산에 대한 관심이 있는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영화·드라마·OTT드라마·웹드라마 등 스토리 분야와 웹툰·예능·축제·연극·E북 등 아이디어 분야로 지원이 가능합니다.




공모전 접수부터 최종 선발까지


공모전을 위해서는 대학(원)생 3~4명으로 팀을 구성해야 합니다(휴학생 및 8월 졸업예정자 포함/박사과정 제외). 아이디어 도출, 기획안 발전, 최종 기획안 작성, 피칭 등 전체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공모전에 제출할 기획안에 사용될 역사소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서비스하는 전통문화 연계사이트를 바탕으로 찾으면 됩니다. 찾은 역사소재를 다양한 장르의 역사콘텐츠 기획안으로 작성하여 제출하면 되는데요.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전통문화 연계사이트〉


작성한 기획안과 지원서 접수는 4월 22일~30일까지, 스토리테마파크 속 공모전 접수 코너에서 진행합니다.

기획안 심사는 1차 기획안 서류 심사와 2차 면접 심사를 거쳐 최종 8팀을 선발합니다. 1차 서류 심사와 2차 면접 심사는 모두 5월 중에 진행되며, 모든 심사를 통과한 8팀이 발표됩니다.




공모전 일정을 알려드립니다.


선발된 8팀을 대상으로 약 5개월간 전문가 멘토링을 통해 완성도 높은 최종 작품 기획안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요. 이 교육 과정에는 2차례의 집합교육 〈오리엔테이션, 교육캠프〉와 전담교육 〈담임 멘토링 8회, 피칭 멘토링 2회〉이 진행됩니다.

매년 참가자들의 역사콘텐츠 기획안의 장르에 맞춰 분야별 전문가로 멘토단이 구성됩니다. 최종 기획안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피칭 전문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올해도 최종 선정된 8팀의 기획안 장르에 따라 멘토를 선발하여 전체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 오리엔테이션(6월 말 예정)


오리엔테이션은 최종 8팀 발표 뒤, 6월 말에 2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합격팀의 기획안과 매칭되는 최적의 멘토 선정을 위해 1개월 뒤에 진행되는데요.

기관과 멘토단은 오리엔테이션 개최 전 한 달 동안 교육 가이드 라인을 협의하고, 참가자들에게 더욱 공평하고 질 높은 멘토링을 제공하기 위해 팀별 멘토링 프로그램을 구체화합니다.

참가팀은 오리엔테이션에서 담임 멘토와의 만남 후, 본격적인 기획안 발전을 위해 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준비한 공모전 소개에 이어 멘토 소개, 참가팀 소개 후 각 팀별 멘토와 처음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데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한 아이스브레이킹, 기획서 발전을 위한 다양한 특강과 팀별 멘토링, 역사 멘토링 등 기획안 발전을 위한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됩니다.

또한 안동에서 진행되는 오리엔테이션은 안동 곳곳의 현장답사를 통해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아이스브레이킹

멘토와의 첫 만남

팀별 멘토링 및 역사 자문

안동의 역사와 문화 탐방




▶ 교육캠프(8월 초 예정)


8월에 진행되는 교육캠프에서는 역사소재를 이용한 콘텐츠 창작에 대한 이해와 밀착형 멘토링 교육을 통해 심도 있게 기획안을 발전시킵니다. 밀착형 멘토링 교육과 소재 고증을 위한 역사 멘토링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전년도 수상팀이 방문하여 자신들의 노하우를 빠짐없이 전달해주는 시간도 있습니다.

교육캠프는 완성도 있는 기획안 작성을 위한 집중 멘토링 시간과 더불어 다양한 교육과 특강이 진행됩니다.


밀착형 멘토링 교육

역사콘텐츠 관련 특강

전년도 수상팀 노하우 전수




▶ 팀별 담임 멘토링(7~11월)


각 팀마다 담임 멘토링은 8회 진행됩니다. 담임 멘토링을 통해 각 분야 창작자들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습니다. 팀별 멘토링에서는 선정한 분야에 대한 이해와 스토리 창작을 위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 진행됩니다. 각 팀은 담임 멘토를 통해 기획서 작성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며, 멘토 교육을 바탕으로 최종 기획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 피칭 교육(9~10월)


멘토링을 통해 완성된 작품 기획서를 제출한 다음에는 팀별로 집중 피칭 교육이 이어집니다. 피칭 교육은 팀별 기획서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집중 교육입니다. 최종심사 전까지 팀별 2회(9월 20~22일/10월 25~27일)의 피칭교육이 제공됩니다. 1일 2~3팀씩 교육이 진행되는데요. 피칭 교육을 통해 최종심사에서 최대한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예정입니다.




▶ 최종 평가(11월 초 예정)


최종 평가는 창작 전문가와 문화산업 관계자, 역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9명의 전문심사위원의 최종 평가를 거쳐 8팀 전원에게는 상장과 상금이 수여됩니다.


제9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최종 심사


○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1팀) : 상금 1,000만원
○ 최우수상 한국국학진흥원장상 (1팀) : 상금 500만원
○ 우수상 (2팀) : 상금 각 200만원
○ 장려상 (4팀) : 상금 각 100만원

최종 평가는 제출한 최종 기획서에 대한 기획서 심사가 55%, 최종 프로모션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 피칭에 대한 평가 35%, 그리고 공모전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와 참여도를 평가하는 기관 심사 10%를 합산하여 순위가 정해집니다.


〈최종 심사 평가 항목〉




다시 한번 접수 방법을 확인해 볼까요?


접수 방법은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에서 지원서와 기획서 양식을 다운로드 받아 작성한 다음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 - 대학생 공모전 – 온라인 접수〉란에 접수하면 됩니다. 여러분의 아이디어가 담길 기획서는 A4 기준, 요약문 1쪽을 포함하여 총 10쪽 이내로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중요한 심사 기준은 소재의 전문성, 기획의 독창성, 실현 가능성, 팀워크 이렇게 4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공정한 심사가 진행됩니다.

참고로 기획서 작성을 위해서는 전통소재 선택, 선택한 전통소재를 잘 담아줄 매체 선정 등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기획서 작성을 위해 달려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신청 기간은 4월 22일부터 4월 30일 오후 3시까지이니, 제출 전 시간을 꼭 확인해주세요!

대학(원)생일 때만 누릴 수 있는 대학(원)생 공모전,
창작 활동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도전 가능합니다.
스토리테마파크로 놀러오세요.




정      리
박나연(한국국학진흥원)
“연이은 술자리로 술병이 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5-01-05 ~ 1635-02-26

1635년 1월 5일, 손님을 접대하고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는 으레 술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김광계는 새해를 맞아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인 계화(季華)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계화는 발이 넓었는지 그가 김광계의 집에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의 친척들과 근처 사는 지인들까지 모두 김광계의 집으로 모였다. 김광계는 별 수 없이 그들을 모두 대접하며 술을 연거푸 마셔야 했다. 술병이 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635년 1월 30일에도 피병하러 오신 제천의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자개(子開)와 만났는데, 자개는 이날따라 술을 계속 권해 피하지도 못하고 과음을 하고 말았다. 2월의 첫날에 하려고 세워놓은 계획도 무산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

2월 8일에는 사무를 보러 도산서원에 갔는데, 김시추(金是樞)가 크게 취한 채 셋째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는 이미 인사불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인 2월 9일에 김시추와 김광계는 도산서원 앞 누대인 천연대에 올라가 또 술을 마셨다. 김시추가 아직 숙취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랬는지 멋진 경치에도 불구하고 술은 조금만 마셨다. 하지만 다음날에 김광계는 숙취에 시달리게 된다.

2월 12일에는 사숙과 함께 또 술을 예닐곱 잔 정도 마시게 되었다. 밤새도록 술기운에 괴로워 잠도 이루지 못하고 아침엔 일어나는 것도 힘겨웠다. 김광계는 술 마시는 일을 경계해야만 한다고 반성했다. 하지만 반성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2월 26일에 김광계는 제사를 지낸 뒤 뱃놀이를 하며 또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연일 손님대접에 거덜 나는 살림살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812-08-01 ~ 1812-08-27

노상추가 부임한 가덕진에는 연일 손님이 드나들었다. 외직에 부임하면 으레 손님을 치르게 되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전에 부임했던 갑산은 워낙 멀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손님이 자주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있는 가덕도는 바다의 아름다운 풍경과 왜선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노상추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먼 친척과 지인, 그리고 승려들까지 모두 일부러 배를 타고 가덕도까지 들어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노상추를 따라 섬에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고 있는 아들 익엽은 공무로 바쁜 아버지 대신 손님들을 명승지로 인도하였다. 고향에 있는 암자에서 온 승려들과 손님 두 사람을 데리고 큰 항구와 천수대를 구경시켰는데, 노상추는 한창 관사를 허물고 새로 짓는 공사를 감독하느라 따라가지 못했다. 손님 중 무과 급제자들은 역시 왜선이 궁금한지 일부러 천성까지 가서 정박해 있는 왜선 두 척을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승려들도 보고 싶은 것이 많은지 통영에 가고 싶다고 해서 노상추는 병교가 합험을 하러 타고 가는 배를 함께 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돈 손진악과 손해경도 일부러 바다를 구경하러 찾아왔다.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오는 길에 노상추의 고향집이 있는 화림에 들러서 집 소식을 알아보고 전해주었다. 집안은 모두 평안하다고 한다.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서 노상추는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마침 달빛도 아주 밝았다. 그래서 아이 6, 7명도 함께 데리고 두 친구와 함께 진남루에 올라 악공들이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그대로 배를 타고 호수도 돌았다.

친구들이 돌아가자 노상추는 방으로 조용히 감색을 불렀다. 그리고는 손님 접대에 사용한 비용을 정산해 보도록 했다. 감색은 이리저리 계산하더니 원래 진에 책정된 비용보다 400금이나 초과해서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많은 손님을 접대하느라 노상추는 매일같이 쓰는 일기도 건성으로 썼다. 봄철 이후로 찾아온 손님들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50명 정도 된다. 많은 손님이 찾아주어 기쁘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답답해진다.

“손님치레에 소란스러운 관아, 가벼워진 주머니”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4-02-14 ~ 1794-03-27

노상추가 삭주부사에 임명되자 고향인 선산 등 영남 각지에서, 그리고 노상추가 관직 생활을 하던 도성에서까지 변방인 이곳 삭주까지 찾아오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영천(榮川, 지금의 경북 영주)의 김영억(金永億)은 노상추에게 자신이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부의금을 얻으려 1천 6백 리를 산 넘고 물 건너왔다. 지나칠 정도로 대단한 행동력이니, 노상추는 혀를 차면서도 부의금을 마련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상추는 김영억에게 돈 150금을 주어서 상을 치르며 진 빚을 갚게 했다. 그런데 김영억과 함께 온 최생(崔生)이라는 자는 이미 삭주에 도착했을 때부터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병이 낫지 않아서 김영억과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삭주 관아에 남게 되었다. 최생의 체류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노상추의 몫으로 남았다. 손님이니 내칠 수도 없고, 그저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먹이고 재워 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반가운 손님도 있기는 했다. 노상추의 손님인 아들 노익엽은 이운경(李運慶)과 같이 첩을 데리고 삭주로 왔다. 노익엽이 삭주로 오면서 군식구도 더 늘었다. 노익엽의 이종사촌, 그러니까 노상추에게는 처조카가 되는 예안(禮安)의 김주옥(金調玉)도 천 리가 멀다 하지 않고 삭주로 왔다. 이 사람은 특히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라 노상추의 현재 사정이나 형편도 알아보지 않고 온 듯했다. 곤란하게 되었다. 곧이어 조카 노정엽과 내종숙 조석년(趙錫年), 동생 영중도 삭주로 왔다.

자신의 친척과 지인이 수령으로 있는 지역을 굽이굽이 지나치며 하나하나 방문하면서 대접을 받는 노상추의 친구 이동겸(李東謙) 같은 자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손님이 관아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총 10명이나 되었다. 10명에는 또 따라온 남자종 4명, 여자 종 1명, 겸인 1명이 있었으니 매일같이 관아가 소란스러웠다. 수령으로서 매일같이 해야 하는 업무들도 있었는데 많은 손님까지 신경 써야 하니, 근심스럽고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노상추는 손님들을 돌려보내기로 마음먹고, 그들이 바라는 바를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 이동겸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주고, 하인과 말을 딸려서 안주(安州)의 중영(中營)으로 보내버렸다. 이국연(李國延)에게도 노자 1천 동을 주어서 보냈는데, 불만스러워하면서 곱지 않은 말투로 툴툴거렸다. 아마도 이동겸에게 해 준 것처럼 하인과 말을 주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이국연은 이미 하인과 말을 갖추고 왔기 때문에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김주옥에게는 1천 7백 동의 노자를 주어서 돌려보냈고, 홍(洪) 군에게는 1천 동의 노자를, 지(池) 군에게는 5백 동의 노자를 주었다. 이들은 애초에 삭주까지 올 때 걸어서 왔고, 노자를 받아 떠나는 날에도 걸어서 돌아갔다. 손님들이 걸어서 돌아가는 행색이 초라해 보여서 노상추는 자신이 마치 박대한 것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도 노상추로서는 새로 부임해서 어렵고 궁핍한 처지에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대접한 것이었다. 이제 손님들이 다 돌아가니, 관아에는 노상추의 정말 가까운 일가붙이만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흘간의 초례, 손님접대 하느라 술고래가 된 외삼촌 김령”

김령, 계암일록,
1621-02-16(윤) ~ 1621-02-20(윤)

1621년 윤 2월 16일, 영천으로 시집갔던 김령의 누이가 세월이 흘러 사위를 보는 날이었다. 신랑은 류원립(柳元立)군. 신랑을 따라온 손님들 중에는 영천 수령도 있었다. 김령은 누이 부부와 함께 손님들을 접대하였다. 잔치는 다음 날인 17일까지 이어졌고, 손님들은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날 오후 돌아갔다.

윤 2월 18일에는 김령의 자형 전경업(全景業)이 그의 여러 며느리들을 친지들에게 인사시켰다. 지인들이 다음날 향교 재사에 모여 글을 검토하자는 전갈을 보냈지만, 김령은 사양하고 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자형과 몇몇 벗들과 함께 어울려 계속해서 묽은 막걸리를 마셨다. 취한 그들은 군내(郡內) 벗의 빈 집, 향교 등으로 자리를 옮기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결국 김령은 벗 중 한 명이 만취해서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밖으로 나왔다.

윤 2월 20일, 초례를 치른 지 나흘 만에 신랑 류원립은 제 집인 임하로 돌아갔다. 김령은 신랑을 보내고 안으로 들어가 자형과 누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정오에 문 밖을 나서서,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앓아누웠던 김령, 머리에 빗질을 하고 경상감사를 맞이하다”

김령, 계암일록,
1622-10-16 ~ 1622-10-22

1622년 10월, 승정원일기 수정작업을 위해 도성에서 두 달 가까이를 머물렀던 김령은 건강이 악화되었다. 10월 중순의 그는 몸이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조리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힘이 들 정도였다.

그런 그를 22일 경상도 감사 김지남(金止男)이 방문하였다. 김령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수하고 빗질을 하고는, 감사를 사랑방으로 맞아들여 접대하였다. 조용한 가운데 이야기를 나누며 간혹 술잔을 들었다. 조카와 문중의 자제들도 모두 와서 인사하도록 하였다. 감사는 인사를 나누고는 정오 즈음 안동으로 향하였다. 김령은 자신의 집을 방문해주었던 감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안동으로 아이를 보내 사례하였다.

감사가 떠난 후 김령은 수령을 보러 갔다. 감사의 행차로 인해 수령이 그 부근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수령을 만나고는, 손님들, 친지들과 어우러져 술을 마시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흩어졌다. 김령은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술을 마셔서 꽤나 취한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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