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여성들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흰 모래사장 대신 흰 타일이, 푸른 바닷물 대신 붉은 피의 바다가, 즐거운 함성 대신 사나운 침묵이 존재한다. 백상 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던 연출가 김미란이 각색하고 연출한 정육점을 배경으로 한 《맥베스》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정육점을 배경으로 만든 프로덕션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등장인물 모두를 여성으로 구성한 것도 처음이 아니다.
〈《Rose Rage》의 요크 공작의 죽음 장면〉 (출처: Michael Brosilow, 시카고 셰익스피어 컴퍼니 )
2002년, 영국 연출가 에드워드 홀이 시카고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만든 《Rose Rage》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6세》 3부작을 각색해 1·2부 각 두 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만들었고 심지어 1부와 2부 사이에는 45분의 식사 시간이 준비될 정도였다. 《헨리 6세》 3부작은 헨리 5세의 이른 죽음 이후 이어지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지나 에드워드 4세가 등극하기까지의 길고 긴 죽음의 리스트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가장 유명한 악인 가운데 한 명인 리처드 3세가 3부에서 등장해 뚜렷한 존재감을 남긴다. 이야기 속에 어떤 정치적인 배경이 있든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갔든 이 이야기는 형제와 친척을 죽고 죽여 왕위에 오르는 저주받은 집안의 이야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에드워드 홀은 이 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무대 둘레에 정육점의 꼬챙이를 걸고 고기 대신 시체를 걸었고, 정면의 크고 흰 타일 재질의 바닥에는 끊임없이 피를 흘렸다. 에드워드 홀은 실제 돼지 내장을 무대 위에 펼쳤다. 이백 석 남짓한 오프-브로드웨이 규모의 Duke On 42nd St Theatre 에는 실제로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비릿함이 감도는 듯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을 정도로 작품은 본격적인 정육점이었다. 이 학살극 사이에 저녁 시간을 배려해 넣은 것이야말로 고약한 유머 감각 같지만, 관객들은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될 2부를 앞두고 생략된 죽음은 없는지 체크하기도 하며 그보다 더 즐거운 저녁 시간도 없을 듯이 식사를 마쳤다.
〈필리다 로이드가 연출한 《Julius Caesar》〉 (출처: All ARTS)
여성만으로 구성된 작품도 처음이 아니다. 영국의 돈마 웨어하우스에서는 2012년에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여성 감옥 배경으로 각색해 등장인물 전원을 여성으로 바꿔 공연해 찬사를 받았다. 이 파격적인 연출은 영화 《맘마 미아!》를 연출한 필리다 로이드다.
국립극장 기획공연 연극 ‘맥베스’ 〈출처: Youtube 국립극장〉
그런데 이번에 공연된 국립극장의 《맥베스》는 이 모든 면-정육점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다-을 다 갖추었고 거기에 파격적인 각색까지 합세했다. 여섯 명의 배우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니, 수많은 대사를 객석에 던진다. 그들은 모두 농인이고 그들의 대사인 수화를 모르는 청인 관객은 대사를 분위기로만 짐작해야 한다. 하지만 배우들의 에너지는 그들의 대사를 한 마디도 모른다 해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전혀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넘쳐 흘렀다. 게다가 청인 관객의 귀에는 네 명의 소리꾼이 부르는 노래가 귀에 와서 꽂힌다. 전면 3면을 감싼 스크린에는 가사가 리드미컬하게 흐른다. 가사의 일러스트가 때로는 비명을 지르고 때로는 죽일 듯이 공격적이다. 소리를 하는 김소진·김율희·이승희·추다혜는 익숙한 판소리 내용을 슬쩍 얹기도 하면서 때로는 완전히 날것같은 단어들을 능숙하게 장단에 얹어 나른다. 내용은 처음부터 싹 다 죽는다.
“페어플레이는 반칙이고, 반칙은 페어플레이다.”
를 가장 먼저 보여주며 시작되는 극은 싹 다 죽고 살아남은 정육점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가족의 장례식날 막, 리, B, M 모두 부모를 잃는다. 사촌이고 자매이고 간에 그들의 부모는 장례식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다 싹 다 죽었고, 살아남은 어른은 그들의 큰엄마인 King 뿐이다. 킹은 정육점을 이어받아 운영하며 조카들을 부린다. 이 정육점의 특이점은 살을 파는 정육점이 아니라 머리를 파는 정육점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들어와 머리가 남아나는 짐승은 없다. 사람을 포함해서.
돼지의 몸에서 머리를 분리해 잘 삶아 파는 게 이 정육점의 일이다. 막과 리는 능숙하게 칼을 다루고 그중에서도 가장 칼을 잘 다루는 이는 막이다. 이 《맥베스》는 오로지 욕망만이 무섭도록 넘실거린다. 원작의 설정 중에 남아있는 것은 막이 왕을 죽인다는 가장 큰 줄기다. 연극은 원작 속 16개의 독백 장면을 선별해 16개의 장면으로 구성했지만 이 작품도 마치 공연 속의 정육점처럼 몸통을 버리고 머리만 선명하게 남겼다.
〈김미란 연출 《맥베스》의 전체 출연진〉 (출처: 국립극장)
막 역의 박지영은 2022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 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으로 여자 연기상 후보에 올랐던 배우다. 장난꾸러기처럼 등장해서 사람의 목을 딴 이후 무섭게 변해가는 연기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박지영을 비롯한 농인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어디에도 신파는 커녕 상냥함조차 찾을 수 없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배역을 연기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배역들은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망령에 씌어 우선 찌르고 보는 그런 인물들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어떻게 각색해도 서양의 냄새를 제거하기 어렵지만 이번 《맥베스》는 다르다. 피바다 속에서 서양의 냄새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피비린내 속에서 나는 서쪽의 향기는 오로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남은 알파벳과 F로 시작되는 서양 욕뿐이다. 《심청가》를 비롯해 민요는 물론 굿거리장단까지 등장하여 기존의 창극과도 분명히 차별되는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는데, 특히나 돼지머리를 사러 오는 무당이 등장할 때의 굿 소리는 배역과 상황과 찰떡같이 들러붙는다.
국립극장은 한 해에 한 편씩 무장애 공연을 올려왔는데 이 정도까지 발전한 극을 올리면서 단 며칠만 공연하는 것은 공연의 낭비라는 생각마저 든다. 이번 공연은 그간의 공연과는 달리 무대 위에 두 가지 언어가 공존한다. 둘 다 한국어지만 하나는 입으로, 하나는 손으로 발화된다. 그리고 노래가 멈춘 무대 위에서 손을 움직이는 몸을 볼 때, 청인은 비로소 온전히 소통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한다. 아마도 농인은 일상에서 늘상 마주쳤을 그런 상황이다. 소리꾼의 중재가 없는 상태로 무대 위의 수화를 보는 이 짧은 순간은 막과 M이 마지막 대결을 하고 난 뒤에 다가온다.
〈《맥베스》의 한 장면. 좌로부터 B역의 오서진, 막을 맡은 박지영, 리를 연기한 김우경〉 (출처: 국립극장)
음주운전 끝에 술 취한 킹을 치고, 친 김에 킹을 죽이기로 한 막은 자매인 리의 도움을 받아 킹을 살해하고 그 장면을 목격한 B마저 내친김에 죽여버린다. 막은 이미 King의 지시로 사람의 목을 딴 이후 눈빛이 바뀐 이후지만, 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이번이 처음인데다 친자매처럼 같이 일했던 B마저 죽는 꼴을 보자 제정신을 놓는다. 정신을 놓은 리는 접싯물에 빠져 죽는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무겁고 끔찍할 것만 같은 극에 유머 감각을 입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M과 막이 대치하는데 조용하고 내성적인 M은 막과 싸우기를 거부한다. 결국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만 공연이 끝난다는 메시지가 뜨자 이 긴장된 상황에서도 웃음이 올라온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미친 눈알의 소유자 막이 M을 몰아붙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M이 총을 꺼내면서 상황을 순식간에 뒤집는다. 살기 위해 M은 막을 쏘지만 결국 살아남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자살하면서 모든 등장인물이 무당 한 명만 빼고 다 죽는 전멸극의 길을 걷는다. 모두의 피가 흐르는 이곳에 등장한 것은 King의 딸이다. 애당초 알콜중독자에 탐욕스러운 King이 수고한 조카들을 싹 다 무시하고 이곳의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딸에게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았다면 이 사단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King이 누군가. 장례식의 피바람에서 형제자매 모두 죽이고 살아남아 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인물이었다. 장례식의 피바람은 데자뷔처럼 다시 재연되고 그의 딸이 살아남아 다시 한번 피바람을 불러일으킬 정육점을 재건할 것이다.
〈《맥베스》의 한 장면〉 (출처: 국립극장)
배우가 소리꾼과 소통하는 방식은 바닥의 LED 바로 이루어졌다. 관객에게 셋트의 일부로 기능했던 LED가 배우와 소리꾼 사이의 소통기구로 영역을 확대했다. 수화가 등장할 때면 청인은 자막을 보고, 소리꾼이 노래를 부를 때면 농인이 자막을 본다. 사실상 모든 관객이 자막을 즐긴다. 이 프로덕션이 결코 쉽지는 않았겠지만 결과는 달콤하다. 각자 솔로 공연을 매진시키는 소리꾼 네 명이 무대 가장자리에 붙박혀 흥겨운 리듬에 가끔 흔들리며 노래만 부르는 모습도 처음 보는 모습이고,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인사를 소리꾼만 하고 배우들은 죽은 그대로 머무는 모습도 흔치 않다.
작품이 시작될 때 등장했던 문구 “페어플레이는 반칙이고, 반칙은 페어플레이다.”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짐승우리일지도 모른다. 잔인한 욕망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공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배우들을, 그리고 이 작품을 다시 만나고 싶다. 일 년에 단 한 번의 무장애 공연이 아니라 여러 번의 공연을 보고 싶다. 그래야 한다. 피바다를 건너 생명의 바다로 함께 나아가기를 바란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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