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잔치가 있나 봐?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나네?”
목금이 코를 벌름거리며 백이에게 말했다.
“먹을 복이 있으셔. 오늘 삼촌 오신다고 지지미에 너비아니에 난리 났다, 뭐.”
백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 진사네 둘째인 정삼환은 무관으로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에 있었다.
“한양 삼촌이 여기까지 온다고? 웬일이래?”
〈성종 때, 박종원(朴宗元)을 삼봉도 경차관으로 임명하고 저포 철릭과 마피화 등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이번에 직속 상관인 훈련원 판관 나리가 삼봉도 경차관(三峯島敬差官)이 되셨다지. 그래서 따라갔다가 고향도 가까우니 들렀다 오라고 말미를 받아서 오신다는 거야.”
“삼봉도 경차관이라면 저기 울릉도 살펴보는 일을 맡았다는 거지? 거기 정말 멀다고 하던데.”
“그건 잘 몰라. 울릉도 살펴보는데 왜 삼봉도라고 해?”
“울릉도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세 개 있대. 그래서 옛날에 삼봉도라고 불렀대. 아마 옛날 명칭이 좀 더 근사하게 들려서 그렇게 부르는 거겠지.”
목금의 설명에 백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허세들은 대단해.”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오시는데 어떻게 알고 잔치 준비를 하는 거야?”
“그야 미리 병사가 와서 알려줬지. 어제 소식이 왔어.”
그때 대문간이 소란스러워졌다.
“삼촌 왔나 보다.”
〈아산시에서 진행한 2021년 한복문화주간아산 한복풍류 무관복식〉
백이가 얼른 몸을 일으켰다. 목금도 백이 뒤를 따라 나갔다. 과연 정삼환이 막 대문을 통과한 참이었다. 참상관 무관답게 붉은 전복에 환도를 차고 동개에 꽂힌 화살의 깃털마저 화려했다. 신은 무관들이 신는 수피화로 윗부분에 짙은 녹색 천을 덧댄 가죽신이었는데, 반짝반짝 윤이 났다.
“아이고, 우리 백이 조카, 잘 있었어?”
삼환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카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목금이 인사를 올렸다.
“아, 네가 그 세책방 집 딸이지? 많이 컸구나.”
“삼촌, 난 안 컸고?”
백이가 부러 샐쭉한 척 말하자 삼환이 당황한 척 말했다.
“백이도 많이 컸네. 이제 시집가도 되겠구나.”
“뭐야! 그게! 시집 같은 거 안 가!”
백이 얼굴이 빨개졌다.
“그래, 그래. 시집가지 말고 삼촌네 와서 살자.”
“어? 그래도 돼?”
“그럼! 한양에서 살고 싶지 않냐?”
“살고야 싶지.”
될 리는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한양 가서 살지 않겠냐는 말은 솔깃한 말이었다. 백이는 헛된 꿈을 털어내는 양 도리질을 쳤다.
“쓰잘데 없는 말은 그만하고 울릉도까지 갔다 왔는데 무슨 선물 없어?”
“귀여운 조카한테 줄 선물이라… 그런 게 있을 리가… 있지!”
삼환은 소맷자락을 흔들었는데 뭔가 들어있는 듯 묵직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먼저 형님께 문안은 올려야지. 좀 기다리면 네 방으로 가마.”
금방 올 것처럼 말한 삼환은 좀처럼 오질 않았다. 저녁 식사까지 먹은 목금이 그만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날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백이야, 삼촌 왔다.”
백이가 목금의 소매를 잡아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뭐야, 이렇게 늦게 오기 있어?”
문이 드르륵 열렸다.
“하하, 미안, 미안. 형님이 놓아주질 않아서 늦었다.”
삼환은 한잔 거나하게 들이킨 모양으로 얼굴이 불콰했다.
“아유, 술 냄새!”
“하하, 그것도 미안. 그럼 먼저 선물부터 볼까?”
삼환이 소맷자락에서 비단 주머니를 쑥 꺼냈다.
“열어보려무나.”
비단 주머니 안에는 예쁜 조개껍데기, 소라고둥이 수북이 들어있었다. 바다 냄새가 확 느껴졌다. 백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와, 너무 예쁘다.”
조개의 무늬도 아름다웠지만 백이의 눈길을 끈 건 커다란 소라고둥이었다.
“이건 뭐야?”
“소라고둥이지. 그거 귀에 대면 바닷소리가 들린다?”
“에이, 거짓말.”
하지만 백이는 그러면서 소라고둥을 얼른 귀에 갖다 댔다.
“정말! 정말! 신기한 소리가 들리네. 너도 들어봐.”
백이는 목금에게 소라고둥을 건네주었다. 소라고둥에서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목금의 얼굴이 갑자기 파랗게 질렸다.
“울릉도 다녀오시면서 별일 없으셨어요?”
목금이 소라고둥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별일이라. 별일이 있었지. 그 이야기도 해주려고 했다.”
삼환이 굳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
〈《용왕도》와 《용태부인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용왕도는 사해(四海)를 관장하는 용왕을,
용태부인도는 용의 부인이자 비와 구름을 관장하는 여신을 그린 그림이다.
울진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를 향해 떠나게 되었지. 어촌 사람들이 한밤중에 제사를 지내야 무사하다고 주장하는 거야. 보통 그렇게 해서 이것저것 관원들에게 뜯어내려는 수작인 거지만 바닷가 선원들에게는 워낙 미신이 많은 데다가 그걸 다 무시하면 뒤탈이 나도 늘 그 핑계를 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지.
사경(四更: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제사를 지내려니 졸려서 죽을 판이었어. 제사 지내야 할 신도 많았지. 대해신(大海神), 용왕신(龍王神), 소성신(小星神)의 세 신에게 제사를 지냈지. 소성신이 뭐냐고? 나도 몰라. 나중에 보니까 바다에서는 밤에 별을 보며 방향을 잡는다고 하더군. 그러니 별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야. 그런데 왜 작을 소(小)자를 쓰냐고? 대해신에 비해서 별신은 작은 존재라 그런 것 같아. 이 소성신에게는 바람을 주관하는 비렴(飛廉)이라는 신하가 있어서 순풍을 불게 해달라고 빌더군.
그걸로 끝이 아니었어.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에게도 제사를 지냈어. 행여 원혼이 해코지 할까 두려워 그런 모양이야. 그리고 배에 오른 뒤에는 또 배의 신인 선신(船神)에게 제사를 지내더군.
이렇게 철저히 신의 보호를 기원하면서 출항했지. 그런데 제사 지낸 것도 소용없었는지 엄청난 풍랑을 만났지 뭐야. 빗줄기가 무슨 장대 같아서 맞으면 얼굴이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다 파도는 또 어떻고. 파도가 마치 벽처럼 일어서서 배를 덮치더라고.
선원들이 모두 미친 것처럼 배를 안정시키려 노력했지. 신한테 기원하는 것 말고도 재주를 가지고 있더라고. 그런데 나야 뭐 배를 다룰 줄은 모르니 밀려드는 파도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지. 그때였어. 그 폭풍우 속에서 이상한 짐승을 본 거야. 새 같은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반점이 있는 몸뚱이에 날개가 붙어있더라고. 아, 그뿐이 아니었어. 몸을 돌릴 때 보니까 네 발에는 발굽이 달려있고 뱀 같은 꼬리가 달려있었지.
뭐? 그게 바로 비렴이라고? 바람을 부리는 신? 목금이 넌 별걸 다 알고 있구나. 아무튼 비렴이 날뛰는데 갑자기 바닷속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사람이 불쑥 솟아올랐어. 비렴을 냅다 후려치더구나. 비렴이 날쌔게 피해서 맞지는 않았는데 겁을 먹었는지 물러나더구나. 그러자 비바람도 그쳤어. 그 거인은 비바람이 물러나면서 다시 물속으로 자취를 감췄지. 세상에, 그 모든 걸 본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니 말이 되나.
울릉도에 도착한 뒤에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제수를 갖춰서 용왕신께 제사를 지냈지. 출항할 때는 해도 그런 제사는 다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 아니더라고. 뱃사람들도 용감했지. 그 사람들이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출항 전에 진심으로 제사를 지냈으니 신들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 풍랑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아, 그렇지. 소성신한테도 제사를 지냈는데, 소성신의 부하인 비렴이 왜 풍랑을 일으켰냐고? 글쎄 그게 말이지. 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거든.
〈《광여도(廣輿圖)》에 수록된 울릉도 지도〉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울릉도에 간 이유는, 그곳에서 몰래 무기를 만든다는 소문이 있어서였어. 역모를 꾀하는 역도 무리가 울릉도에서 병장기를 만든다는 첩보가 있었거든. 우리는 섬을 샅샅이 수색했지. 섬에 도망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 그중에 대머리 한 명이 있었어. 머리에만 털이 없는 게 아니라 눈썹도 수염도 없었지. 온몸에 털이라곤 없더라고.
‘너는 어찌 이런 몰골이 된 것이냐?’라고 묻자 넙죽 엎드리며 대답하더군. 먼 바다로 나갔다가 커다란 물고기를 만났는데 그놈이 배를 통째로 삼켜버렸다고. 괴물의 입에서 배는 부서졌고 물고기의 뱃속에 굴러떨어졌는데, 동료들과 함께 죽을힘을 다해 뱃속을 난도질하자 괴물이 토하는 바람에 살아났다고. 하지만 토해질 때 위액이 온몸을 녹여서 그런 몰골이 되어버렸다고 하더군. 이후 간신히 울릉도를 발견해서 살아남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다시는 바다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어. 『장자』에 보면 배를 삼키는 ‘탄주어(呑舟魚)’라는 물고기가 나오는데, 바로 그놈을 만난 것 같아.
그래서 언제 그런 일을 겪었는지 물었더니 얼마 안 된 일이라고 하더라고. 우리도 곧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니 걱정이 되었지. 울릉도에 무기를 만드는 사람은 없었어. 부역을 피해서 도망친 사람들만 있었지. 그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태웠어. 배는 다시는 안 타겠다는 대머리도 억지로 배에 태우고 울릉도를 떠났어.
그런데 이번에는 또 희한한 괴물을 만났지 뭐야. 새벽녘에 속이 안 좋아서 뱃전으로 나왔다가 그걸 봤지. 바다 위에 말이 한 마리 우뚝 서 있는 거야. 웃지 마. 니가 못 봐서 그래. 갈기와 꼬리는 눈처럼 희고 몸은 바다색 같은 청색이었어. 말은 파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우리 배를 쳐다보는 듯이 가만히 서 있었어.
그때였지. 하늘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나더라고. 비렴이 나타난 거였어. 비렴은 미친듯이 날개짓하며 용마를 향해 곧바로 떨어져 내렸어. 용마도 눈치를 챘지. 용마는 파도 위를 평지처럼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하더군.
비렴은 수면에 내리꽂힐 듯이 내려왔다가 수면 가까이에서 날개를 크게 펼치면서 날갯짓을 했지. 그러자 파도가 엄청나게 밀려왔어. 그 파도는 지난번에 비할 바가 아니었어. 하늘까지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지.
이젠 죽었구나 싶었어. 아무 조짐도 없었기 때문에 뱃사람들도 다 잠이 들어있었거든. 그런 상황에서 이런 큰 파도가 배를 덮치면 이건 뭐 그냥 끝장이겠지.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어.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가 나타나서 짓쳐오던 파도를 먹어버린 거야. 꿀꺽!
그 물고기가 바로 대머리를 삼켰던 탄주어라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 용마는 그 사이에 갑자기 날아올랐어. 어디에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눈처럼 흰 날개를 펼쳐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거야. 그러자 비렴도 용마를 쫓아 하늘 위로 올라갔어. 나는 이제 탄주어가 우리 배를 삼켜 버릴까 걱정하며 벌벌 떨고 있었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어. 탄주어는 다시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지. 그러더니 다시 물이 솟구치면서 바다 거인이 나타났어. 바다 거인은 얼굴만 물 위로 내밀더니 나한테 말을 걸었어.
‘주부 나리,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다 거인이 예의바르게 말해서 더 놀랐지 뭐야.
‘그대는 누구요?’
내가 묻자 거인이 대답했어.
〈탈해왕릉〉 (출처: 경주시청)
‘소인은 용성국을 지키는 거인입니다.’
‘용성국이라면 저 옛날 신라국의 왕이 된 탈해 임금이 태어난 나라 아니오?’
‘맞습니다. 용성국은 28명의 용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무슨 일로 조선국 동해에 온 것이오?’
‘용왕님께서 아끼는 용마가 도망쳐서 잡으러 온 것입니다. 용마는 재빨라서 비렴이 아니면 잡을 수가 없어제가 비렴과 함께 왔는데, 본의 아니게 비렴이 풍랑을 일으키게 되어 폐를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울릉도 올 때 거인이 비렴을 후려치려 한 건 아니었어. 비렴을 말린 걸 내가 그렇게 본 거였지.
‘사람이 상하거나 죽지 않았으니 괜찮소.’
‘너그러운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용왕신께 제를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저희가 폐를 끼쳤으니 뭔가 보답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바다의 궁벽한 곳에 사는 몸이라 딱히 가진 것은 없으나 이걸 바치니 받아주십시오.’
〈해녀지(海女紙)〉 (출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해녀들이 용왕제를 지낼 때 용왕에게 바치는 제물로 한지에 쌀을 넣고 포장한 후 겉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적고 안전한 조업과 식구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바다 거인이 그러면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건네주었어. 조개 담아온 그 주머니냐고? 그래, 맞아 그 주머니야. 조개와 소라고둥도 그 안에 들어있던 거야.
나는 얼른 그 주머니를 소맷자락에 넣었지. 그리곤 긴장이 풀려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어. 선원들이 뱃전에 쓰러져 있는 날 발견했다고 하더라고. 내가 본 이야기를 해줬더니, 다들 바다에선 그런 신기루를 보기도 한다면서 아무도 내 말을 믿질 않더라.
*
삼환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백이가 삼촌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삼촌, 난 삼촌 말 다 믿어. 이 주머니 내가 잘 간직할게. 이 귀한 걸 내게 줘서 고마워.”
삼환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래야 내 착한 조카지.”
왠지 울컥해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조카가 다 알아들었으리라 믿어버리기로 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