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에 있었던 나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밀려오면 ‘파도 소리 ASMR’을 검색한다. 고요한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한 없이 요동치던 내 마음이 고요해진다. 해변을 향해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시끄러운 일상의 소리를 잠재운다.
초여름의 어느 날, ‘파도 소리 ASMR’만으로는 번잡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영덕에 갔다. 차창 밖의 해송(海松)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주차하기 무섭게 나는 어린아이처럼 뛰었다. 하지만 살랑이던 바닷바람은 사정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바닷바람은 뺨을 때리는 것도 모자라 곱게 빗질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만들었다. 부드럽게 내 얼굴을 어루만져 줄 줄 알았던 바닷바람의 짓궂은 장난에 나도 악을 쓰며 대거리를 했다. 가슴 속에 차오른 울분이 파도 소리에 묻혀 거품과 함께 흩날렸다.
인정사정없는 바닷바람 탓인지 눈부신 바다의 윤슬 탓인지 눈물이 났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고 바다를 향해 섰다. 발가락 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왔다 빠지기를 반복했다. 바람과 파도에 몸이 휘청거렸다. 인력(引力)이 가장 큰 보름날, 달이 바다를 끌어당기듯 바다가 나를 잡아당겼다. 이대로 계속 서 있으면 바다가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아 황급히 눈을 뜨고 해변으로 올라왔다. 복잡다단한 감정의 한 귀퉁이를 바닷속에 던져두고 ‘바다뷰’ 카페를 찾아 울진으로 차를 몰았다.
〈울진 망양정 앞 바다〉
창가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소금빵을 먹으며 두고 온 바다를 바라봤다. 통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그지없이 평화롭다. 좀 전까지 바닷바람에 어질했던 것을 잊고 이런 풍광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카페 사장님을 부러워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588년 10월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이 울진군 기성면에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다. 33세의 나이에 바다뷰 정자라니, 옛사람 황여일이 부럽다.
〈울진 해월헌〉
태양과 지구 사이에 위치하여 지구에서 달을 전혀 볼 수 없는 시점을 ‘삭’이라 한다.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도 삭을 만나면 소용돌이치며 꿈틀거린다.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지닌 ‘삭’과 같다.
1556년(명종 11) 10월 21일 황여일은 평해(平海) 사동리(沙洞里)에서 장예원 판결사에 추증된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평해,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이다.
8세부터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1524~1605)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황응청은 평생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인물로,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산해는 "어찌하여 산수가 아름답고 기름지며 넓은 곳을 택해 살지 않고, 지세가 낮고 비좁으며 토양이 척박한 곳에 사는가?"라고 황응청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나서 이곳에서 자라고 이곳에서 늙었소. 시내가 비록 맑지는 못하나 내가 아이 적에 때로 낚시하던 곳이고 산이 비록 기이하지는 않으나 내가 아이 적에 때로 노닐었던 곳이며, 거처가 비록 누추하나 무릎을 용납할 만하고 밭이 비록 척박하나 경작하여 먹고 지낼 만하오. 채소 뿌리와 나물국이 내 입에는 달고 낡은 옷과 짧은 갈옷이 내 몸에는 편하여, 남에게 구함이 없이 내 스스로 만족하니, 그저 이렇게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좋소. 달리 어디로 가겠소.”
이산해, 『아계유고(鵝溪遺稿)』 제3권 「정명촌기(正明村記)」
자신의 고향과 일상을 사랑하며 단순하고 검소한 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던 황응청에게 황여일은 자랑스러운 조카였다. 황여일은 13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독파했으며 14세인 1569년(선조 2) 간성(杆城)의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을 했다. 황여일은 죽서루를 지나며 벽에 「제진주죽서루(題眞珠竹西樓)」 시를 써 놓았는데, 당시 강릉의 지방관이었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이를 보고 매우 놀라 수소문해 저자인 황여일을 찾고 매우 기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75년(선조 8) 20세, 황여일은 의성김씨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의 따님과 혼인하면서 학봉가(鶴峯家)와 인연을 맺었다. 그해 가을에 열린 안동 향시에서 그는 조는 듯이 앉아 있다가 끝나기 직전에 일필휘지로 「치술령부(鵄述嶺賦)」를 지어 올리고 시험장을 나왔다. 시관들은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에 놀라 장원으로 발탁했다. 「치술령부」는 신라 박제상(朴堤上)의 아내가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소재로 지은 글이다.
1577년(선조 10) 22세, 황여일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와 교류하였다. 1585(선조 18)년 30세, 그는 별시(別試) 을과(乙科)에 1등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1586년(선조 19) 31세, 그는 안동 예안[宣城]에 가서 퇴계 이황의 유고(遺稿)를 편집했다. 이후로도 그는 『퇴계집』의 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588년(선조 21) 33세, 황여일은 평해로 돌아와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 1563~1628) 등등 수많은 인사(人士)들이 해월헌에 대한 시와 글을 남겼다. 그중 해월헌 편액과 「해월헌기(海月軒記)」를 쓴 아계 이산해를 빼놓을 수 없다. 이산해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선조의 의주 파천을 주도했다가 탄핵 되어 평해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평해에서 3년간 지내며 황여일의 부친인 황응징과 중부인 황응청과 교류했다.
〈해월헌 편액〉
황여일과 이산해의 인연은 앞서 언급한 별시 문과 시험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시험관 좌주(座主)였던 이산해와 과거 응시생이었던 황여일은 만나기는 했으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594년(선조 27) 여름, 형조 정랑이 된 황여일이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왔다가 평해에 있는 이산해를 찾아갔다. 그 인연으로 이산해는 그해 가을, 「해월헌(海月軒)」 시를 짓고, 1603년(선조 36)에 황여일의 요청으로 「해월헌기」를 지었다.
오직 군자는 혼탁한 시속(時俗) 가운데 섞이어도 심지(心志)는 더욱 고결하고, 급박한 환난의 즈음에 처해서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여, 부귀에도 흔들리지 않고 빈천에도 옮겨지지 않으며 위무(威武)에도 굽히지 않는 것이 마치 바다가 그렇게 뒤집히는 거센 파도에도 차거나 준 적이 없고, 달이 저렇게 차고 이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缺損)이 없는 것과 같다. (중략)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高明)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이산해, 『아계유고』 제3권 「해월헌기」
이산해는 ‘해월헌’이라 하는 누정(樓亭) 이름에 주목하여 바다와 달에 내재한 이치를 심도 있게 탐구했다. 그는 바다와 달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했다. 기문의 서두에서 ‘천하 만물 중에 본래의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은 드물다고 하며 강철과 돌, 산봉우리와 하천 등 강하고 단단하며 높고 깊은 사물들도 모두 본체를 잃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다는 많은 물을 받아들이고 내어주면서도 그 양이 늘거나 줄지 않고, 달 또한 이지러지거나 차고, 가려지거나 먹히는 때가 있어도 그 빛은 오히려 새로운 느낌을 준다고 하며, 바다와 달은 본체를 잃지 않는 사물이라 했다. 그는 외부의 영향에 쉽게 흔들리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강철과 돌, 산봉우리와 하천에 비유하고, 꾸준한 수양을 통해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군자의 마음을 바다와 달에 비유했다.
〈해월헌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황여일은 잔잔한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평화로운 삶을 산 듯이 보인다. 그의 뛰어난 문학적 역량은 그에게 여러 번의 장원을 안겨주었다. 1776년에 간행된 『해월선생집(海月先生集)』의 교감(校勘)을 맡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은 「해월선생집서(海月先生集序)」에서 ‘황여일의 문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고 커서 경계를 알 수 없고, 시 또한 조탁을 일삼지 않았다. 입으로 읊조리면 문장을 이루어서 오산 차전로와 백호 임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했다’라고 그의 문학을 높이 평가했다. 황여일의 학문과 관직 생활이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로워 보이는 것은 그의 숨은 노력과 함께 스승 황응청의 가르침 덕분일 것이다. 황여일은 “지극한 가르침 내가 모방하기 어려운데, 산은 높고 바다는 맑구나[至訓吾難倣 山高與海澄]”라고 하며 스승의 가르침과 경지를 산과 바다에 비유하며 칭송했다.
보름달이 뜨면 바다는 다시 거친 항해를 시작하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 황여일은 임진왜란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거침없는 항해를 이어갔다. 전쟁 속에서 그는 나라와 가족이 내내 무사하기를 소망하며, 군자의 마음으로 국난 극복을 위해 애썼다.
뛰어난 문장가인 황여일은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1592(선조 25)년 37세, 황여일은 함경도 고산 지역의 역로와 역마, 통행 등을 관리하는 고산도 찰방이 되었다. 왜적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까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수들은 갑옷을 벗었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도망쳤다. 황여일은 함경도 관찰사 유영립(柳永立, 1537~1599)에게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 적이 철령(鐵嶺)을 넘지 못하게 해야한다’고 권유했지만 유영립은 듣지 않았다. 그때의 일에 대해 『선조실록』은 ‘유영립은 방백(方伯)의 신분으로 적 왜(倭)가 영(嶺)을 넘자 겁먹고 도망쳐 도(道)를 궤멸시켰고, 적에게 잡혀 구금되었다가 도망쳐 국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그를 파직한다’고 기록했다. 이후 중호(重湖) 윤탁연(尹卓然, 1538~1594)이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때 황여일은 그의 종사관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전공을 세웠다.
1594(선조 27) 39세, 황여일은 명나라 장수 이영춘(李榮春)에게 화전[火戰, 화약으로 만든 총포를 이용한 전투]을 배워 기록하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에게 보고했다. 그해 황여일은 도원수 만취당(晩翠堂) 권율(權慄, 1537~1599)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권율은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萬)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文武)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황여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선조에게 주청했다.
1597년(선조 30) 6월 6일,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 황여일은 이제 막 초계에 도착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에게 사람을 보내 문안을 드렸다. 6월 10일 저녁, 황여일은 권율의 막하(幕下)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된 이순신을 찾았다. 그날의 만남에 대해 이순신은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이야기하자 감탄해 마지않았다. 또 그는 산성에 험준한 요새를 쌓지 않았다고 한탄하며, 당장 토벌과 방비의 대책이 허술한 데 대해서 말하면서 밤이 깊은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기록했다. 그 후 황여일은 이순신의 안부를 묻고 도원수 권율과의 일을 전달하는 등 여러 차례 이순신과 소통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황 종사관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라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두 달간 이어진 이들의 짧은 만남은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元均, 1540~1597)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해 8월,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끝이 났다. 이순신은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13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대파했으나,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해전(露粱海戰)에서 왜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황여일과 이순신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되었다.
1598년(선조 31) 조선은 7년 동안 지속되던 임진왜란이 마무리 되어가던 중 예기치 못한 ‘무고(誣告) 사건’에 휘말렸다.
‘왜노(倭奴)를 불러 군사를 일으켜서 함께 천조(天朝)를 침략함으로써 요하(遼河) 동쪽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옛 지역을 회복하려 하였다.’는 등의 말을 하기에, 신은 놀라움과 괴이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해동기략(海東紀略)』은 조선이 왜(倭)와 교제한 사실을 기록한 것인데 (중략) 해마다 왜선(倭船)을 통하여 무역(貿易)할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혹은 조선의 쌀과 콩을 받기도 하였으며 (중략) 조선의 임금과 신하가 중국을 가볍게 업신여긴 지가 이미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선조실록』 104권,
「찬획 주사(贊畫主事) 정응태(丁應泰)의 주본(奏本) 내용의 진위를 밝히도록 지시하다」
명나라 찬획 주사 정응태는 조선이 일본과 손을 잡고 고구려 옛 땅인 요동을 되찾으려 한다고 무고했다. 이 상소로 양호(楊鎬)와 마귀(麻貴), 형개(邢玠) 등이 탄핵당했다. 이보다 앞서 정응태는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 우첨도어사(經理朝鮮軍務都察院右僉都御史)인 명나라 장수 양호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렸는데, 조선의 분음(汾陰) 최천건(崔天健, 1538~1617)과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등이 양호를 변호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정응태가 조선을 명 황제에게 무고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 놓인 조선은 정응태의 무고를 벗기 위해 7월과 8월, 10월 세 차례에 걸쳐 명에 사신을 보냈다.
1598년(선조 31) 10월 21일에 명나라로 사행을 떠난 정사(正使) 이항복(李恒福, 1556~1618),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서장관 황여일은 1599년(선조 32) 4월 25일 사행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선 사신단은 명나라에서 정한 사행길을 따라 해로가 아닌 요동과 산해관을 거치는 육로를 통해 이동했다. 서장관 황여일은 변무 사행의 과정을 기록한 『은사록(銀槎錄)』을 남겼다.
靑石盤盤白日陰 굽이굽이 청석령은 한낮에도 어둡고
層氷矗矗雪霜深 층층이 쌓인 얼음 눈과 서리가 두껍네
逢人盡道摧車地 사람 만나 수레 부순 땅을 실컷 말하니
笑我還催叱馭心 우스워라 다시 마부 꾸짖는 마음 일어나네
許國此身甘蹈火 나라 위한 이 몸 기꺼이 불 속에 뛰어들어
燒城讒舌痛銷金 성을 불태우는 참설 통렬하게 금을 녹이네
何須問識山靈未 어찌 알았으랴, 산령이 이문하지 않았음을
踏遍中華免陸沉 중화를 두루 다녀 육침을 면하였네
『은사록』에 실려 있는 「청석령(靑石嶺)」은 12월 11일, 사행단이 고개가 좁아 험하고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청석령을 지나며 쓴 작품이다. 황여일은 수레를 부술 만큼 험난한 청석령이지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가겠다는 충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정응태가 함부로 놀린 참설을 제거하겠다는 황여일의 굳은 마음이 ‘감도화(甘蹈火)’에 함축적으로 녹아있다.
황여일은 종사관과 서장관이 되어 임진왜란의 거센 파도를 넘었다. 전란 속에서 공을 세웠고, 정응태의 무고를 변무(辨誣)하여 명나라 황제의 오해를 풀었다. 꽉 찬 그의 삶은 만월(滿月)처럼 빛났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했던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나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던가? 여전히 빛을 내는 하현달처럼 사람과의 관계든 일이든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진 적이 있는 사람은 저물어 가는 모습도 아름답다. 황여일의 남은 삶은 평온했을까, 아니면 폭풍 속이었을까?
1601년(선조 34) 46세, 황여일은 예천 군수를 제수받았는데, 이때부터 주로 외직을 역임했다. 1606년(선조 39) 51세, 명 황제는 황손(皇孫)의 탄생을 기념하여 조선에 조칙을 내렸다. 정사(正使) 한림원 수찬(翰林院修撰)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예과 좌급사(禮科左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조칙을 갖고 왔다. 이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使臣) 일행을 접대했는데, 이때 황여일은 이들과 함께 한강을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1615년(광해 7) 60세에 황여일은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로 당시 동래는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그는 백성들의 주거 안정을 급선무로 여겨 전쟁에 불타 버린 곳을 깨끗이 씻어내고, 지붕을 이었다. 또한 학문하는 선비를 찾아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고 훈도(訓導)를 맡겼다. 백성들의 집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경비는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충당했다.
1618년(광해 10) 63세, 황여일은 동래 부사에서 체직되어 고향인 평해로 귀향했다. 그는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부르며 약 33년간의 관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9월, 통정대부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전경〉
1622년(광해 14) 4월 2일, 황여일은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라 하며, ‘집을 잘 돌보는 것이 내가 깊이 기원하는 바다’라는 유훈을 남기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운명하였으니, 향년 67세였다. 이후 황여일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에 증직(贈職) 되었다.
전쟁 후, 지방관으로 사는 삶은 녹록지 않다. 무너진 담장을 고치고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쓴 지방관 황여일의 삶을 단 몇 줄로 요약한 것이 죄스럽다. 그저 관직에서 물러난 그가 만귀헌이라 고쳐 부르고 머물렀던 ‘해월헌’에서 평온했기를, 그믐밤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황여일은 과거 급제 후 예문관 검열, 봉교, 사헌부 감찰, 형조와 병조의 정랑, 승문원 교리 등 중앙 관직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이후 예천 군수, 영천 군수, 창원 부사, 동래 부사 등 경상도 지역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등 내·외직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으며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문학지사로 참여하는 등 외교 사절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가 머물렀던 ‘해월헌’은 그가 떠난 후에도 조선의 ‘핫플레이스’였다. 독립운동가였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은 ‘듣자하니 당년에 고래가 어망에 들었으니, 긴 밤 봉황 우는 듯한 퉁소 소리를 견디기 어렵다오[聞說當年鯨入網 不堪遙夜鳳吹簫]’라고 하며 300년 전 국난의 시기를 보낸 황여일을 기억했다. 그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물러났음을 ‘고래가 그물에 들었다’로 표현하여 일제강점기에 놓인 지금 상황을 극복하고자 했다.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 대문〉
조선 성종 때 문신으로 제주에서 추쇄경차관으로 재직했던 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는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하다 어느 섬에 도착했다.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인 최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혹 우리는 낯선 섬에 놓여있는 최부가 아닐까? 우리는 인생의 키를 잡고 항해하지만 때때로 파도에 휩쓸려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가곤 한다.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에 쓰러져 절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군자의 마음으로 살진 못해도 가득 차거나 줄어든 적이 없는 바다와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는 달처럼 우리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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