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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의 첩 귀신,
‘애귀(愛鬼)’ 이야기

공식 문집 『어우집(於于集)』에 누락된 기록



〈『어우야담』〉 (출처: 디지털 장서각)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조선 중기 요직을 역임한 문신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고문(古文) 작가이면서도 야담집의 효시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저술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붕당이 동·서·남·북으로 분기되던 혼란한 정국 한가운데 있다가 결국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복위를 도모한 무리에 가담했다는 무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죽기 2년 전인 1621년, 유몽인은 무척 이상한 기록을 남긴다. 바로 자신의 집에 붙은 첩 귀신 이야기다. 유몽인은 장장 32면을 통해 자신의 집에 붙은 첩 귀신, ‘애귀(愛鬼)가 일으킨 작화(作禍)를 여러 한문 문체를 활용하여 기록하였다.

이 글은 그 내용이 귀신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어 이른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은 유가적 글쓰기에 맞지 않고, 또 자세히 보면 당대 조정에 대한 비판 정신이 담겨 있어 유몽인의 공식 문집인 『어우집』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몽인이 직접 저술한 『묵호고(默好稿)』에는 남아 있어 현재 그 전문(全文)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아래에서 귀신이 어떻게 나타나 무슨 일을 했으며 이에 대응한 유몽인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애개(愛介)의 죽음



〈신윤복의 《무녀신무(巫女神舞)》〉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이 기록의 처음은 애귀라는 귀신이 집에 붙은 내력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 죽은 아내인 신씨(申氏)는 신사년(辛巳年, 1581) 나이 스물하나일 적
폐종양을 앓아 약을 먹고 여섯 달 만에 나았었다.
그런데 지난 무오년(戊午年, 1618) 11월에 옆구리와 등에 통증이 생겼고,
그다음 해에는 병이 더욱 깊어져 예전의 폐 질환이 재발했다고 생각했다.
용하다는 약을 썼으나 모두 소용이 없으니,
집안의 하인들이 “국무(國巫) 복동(福同)을 세상에서는 제일 용하다 하니
복동을 불러 물어보시지요.”라 하였으나
나는 그가 남자면서도 여자같이 입고 다니는 점이 꺼림칙하고
무당과 같은 자는 믿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몰래 복동에게 물으니,
복동은 ‘요사스런 귀신이 부인 침실 밖 장독 밑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 아래를 파보니 과연 사람의 해골과 나뭇가지에 글자를 새겨
부인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 이 물건들을 복동에게 보내니
복동이 ‘애개’라는 나의 첩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건네주었다.
집안의 사람을 심문하여 결국 애개가 나의 부인을 저주한 것을 밝혀내
형벌을 가했더니 애개는 천안(天安)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집안의 노복들을 시켜 그를 찾아내 독을 먹여 죽이도록 했는데,
그가 죽은 장소는 온양(溫陽)이었고 때는 6월 27일이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몽인의 첩 오애개(吳愛介)는 본부인 신씨를 저주한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첫 대목부터 집안의 병환과 저주가 언급되고 무당 복동이 등장하는가 하면, 애개를 잡아 독살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이 글은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작한다.




애귀의 등장



〈《시왕도[十王圖]》〉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6월 27일에 죽은 애개는 이튿날 귀신이 되어 등장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다음날 28일 애개 귀신이 무덤에서 나왔는데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7월에 귀신은 명례방(明禮坊) 1) 내 옛집에 돌아왔다.
귀신은 집이 비어 있어 방황하다가 여종들이 피접소(避接所)로 간다는 말을 엿듣고
내 가족이 머물던 용산(龍山)의 피접소로 들어갔다.
귀신은 곧 내 아들의 첩에 씌어 온갖 나쁜 짓을 하며,
부인을 계속 병들게 하고 집안의 종들을 죽였다.
말과 개 등의 가축들도 죽어 나갔다.
귀신을 쫓아내려는 나의 노력에 애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라지지 않았다.
“내 생전에 절에 보시하여 스님들 가사(袈裟)를 지어주었으니,
이 때문에 저승에서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지킬 군사를 많이 내려주었다!”


유몽인은 이에 저승의 시왕[十王], 즉 불교에서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열 명의 왕에게 상소문을 써 애귀를 잡아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상소문을 세 편 쓴 뒤 그 글을 태워 저승으로 보내자, 애귀는 사라지게 된다.

1) 명례방(明禮坊) :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과 그 인근 지역. ‘명동’(明洞)은 명례방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애귀의 작화와 귀신 쫓아내기



〈《무당성주기도도》〉 (출처: 서울대학교 박물관)


유몽인은 저승 시왕에게 상소문을 쓰면서 그간 자신이 여러 방법을 써서 집안을 어지럽히는 애귀를 쫓아내려고 한 내력을 낱낱이 고한다. 애귀가 집안을 괴롭히는 모습이나 그를 쫓아내려는 유몽인의 노력은 글 곳곳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으니, 그 대표적인 장면을 뽑아 아래에 소개한다.

7월에 애귀는 유몽인의 아들 유약(柳籥)의 첩 박씨에게 씌었다.
박씨는 귀신이 들어가자 스스로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땅에 엎어지기도 했다.
애귀는 ‘전계원’(全繼元)이라는 남자 귀신을 데리고 와
박씨와 중매를 서 주겠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하기도 한다.
박씨를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하던 집안사람들은
박씨가 쓰고 있는 머리쓰개가 생전 애귀의 것임을 알아보고 이를 벗겨낸다.
그러자 애귀는 박씨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유약이 일본도(日本刀)로 애귀를 내리치자
애귀는 얼굴에서부터 배까지 베어져 귀졸(鬼卒)들에게 부축을 받아 저승으로 도망한다.


애귀는 그 후 또다시 박씨에게 씌어 병증을 유발하고, 유약의 본처 조씨도 곧 같은 병을 앓게 된다. 집안의 여종들은 애귀가 생전에 쓰던 옷을 입거나 물건을 얻더니 모두가 같은 병, 즉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나가게 되는 증상을 앓는다. 이에 무녀(巫女)를 불러와 굿을 하게 하나, 곧 그 무녀도 같은 병을 앓는다. 애귀에게 씌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애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모두가 증언하기를 애귀는 항상 활잡이, 칼잡이, 창잡이, 포수 등에게 둘러싸여 호위받고 있다고 하였다.

한번 귀신에게 씐 사람이 집안에 많아지자, 이들은 애귀뿐 아니라 수많은 귀신의 말소리를 듣거나 이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유몽인은 이런 귀신들과 상대하던 중, 그 이름을 적시하여 명부(冥府)에 올리는 글을 적고 이를 불사르면 귀신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귀신들의 이름을 알아내 없애기 시작한다. 또, 유몽인은 ‘운인’(雲印)이라는 금강산의 스님이 귀신의 화를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애귀 쫓기를 맡긴다. 집안사람들이 운인의 지시에 따라 밤에 산 위로 가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나, 애귀는 그 그릇에 용변을 보고 떠나며 이들을 조롱한다.

유몽인의 아들 유약은 『용호경(龍虎經)』(용호경: 도교의 단학(丹學) 경전), 『황정경(黃庭經)』(황정경: 초기 도교의 경전), 『도덕경(道德經)』(도덕경: 노자(老子)가 지은 도교의 으뜸 경서)을 읽어서 귀신들의 반응을 살핀다. 귀신들은 귀를 막아 경 읽는 소리를 차단하였는데, 유약이 다시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읽자 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귀신의 작화(作禍)와 그를 물리치기 위한 여러 방편이 자세하게 기록된 조선 시대의 기록은 매우 드물다. 위에서 본 장면에서 보듯이, 당대에 귀신을 쫓는다고 알려진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스님이 주관하여 제를 올리기도 했고, 무당이 굿을 하기도 했으며 도교의 경전을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부에 바치는 글을 써 소각하기도 하였다.




애귀 이야기의 의미



〈바다 위 사후 세계를 그린 《게발도(揭鉢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이야기는 여러모로 매우 특이하다. 작가가 미처 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에 글이 다소 난삽한 감이 있으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등장인물이 여러 귀신인 점도 특이하거니와 귀신의 작화와 이를 쫓아내려는 지난한 과정이 길고 상세하게 작성되어 있다. 특히나 한국 귀신 이야기 가운데 첩 귀신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매우 드문데, 여기서는 ‘애귀’라는 이름을 가진 첩 귀신이 서사의 중심에 두면서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몽인은 이 이야기를 어떤 의도로 기록했을까?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시기, 즉 1621년경 유몽인은 몹시 어려운 처지에 처했었다. 이 무렵 유몽인은 파직당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어려운 처지에 처했으며, 실제로 2년 후 그는 누명을 쓰고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들 유악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러므로 당시 유몽인의 집안에 ‘첩의 귀신이 붙어 집안을 망친다.’는 인식이나, 이러한 인식에 따른 소문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유몽인 자신도 일정하게는 그런 인식에 동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유몽인은 부도덕하고 뻔뻔한 ‘애귀’에 대해 기록하면서 한편으로 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사대부로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나 ‘애귀’는 여러 면에서 광해군의 애첩이었던 김개시(金介屎)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저승에 올리는 상소문을 통해 결국은 애귀를 소멸시켰다고 주장하는 유몽인은, ‘글로써 천지신명과 귀신조차 감화시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식을 이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조선 시대 괴이한 귀신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 유몽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집필자 소개

정솔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 문헌소재 귀신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동아시아 귀신담 비교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재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근대 한국과 동아시아의 귀신 서사를 연구하고 있다.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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