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야담』〉 (출처: 디지털 장서각)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조선 중기 요직을 역임한 문신이자 외교관이었으며 당대의 대표적인 고문(古文) 작가이면서도 야담집의 효시인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저술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붕당이 동·서·남·북으로 분기되던 혼란한 정국 한가운데 있다가 결국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복위를 도모한 무리에 가담했다는 무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죽기 2년 전인 1621년, 유몽인은 무척 이상한 기록을 남긴다. 바로 자신의 집에 붙은 첩 귀신 이야기다. 유몽인은 장장 32면을 통해 자신의 집에 붙은 첩 귀신, ‘애귀(愛鬼)가 일으킨 작화(作禍)를 여러 한문 문체를 활용하여 기록하였다.
이 글은 그 내용이 귀신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어 이른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은 유가적 글쓰기에 맞지 않고, 또 자세히 보면 당대 조정에 대한 비판 정신이 담겨 있어 유몽인의 공식 문집인 『어우집』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몽인이 직접 저술한 『묵호고(默好稿)』에는 남아 있어 현재 그 전문(全文)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아래에서 귀신이 어떻게 나타나 무슨 일을 했으며 이에 대응한 유몽인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신윤복의 《무녀신무(巫女神舞)》〉 (출처: 간송미술문화재단)
이 기록의 처음은 애귀라는 귀신이 집에 붙은 내력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 죽은 아내인 신씨(申氏)는 신사년(辛巳年, 1581) 나이 스물하나일 적
폐종양을 앓아 약을 먹고 여섯 달 만에 나았었다.
그런데 지난 무오년(戊午年, 1618) 11월에 옆구리와 등에 통증이 생겼고,
그다음 해에는 병이 더욱 깊어져 예전의 폐 질환이 재발했다고 생각했다.
용하다는 약을 썼으나 모두 소용이 없으니,
집안의 하인들이 “국무(國巫) 복동(福同)을 세상에서는 제일 용하다 하니
복동을 불러 물어보시지요.”라 하였으나
나는 그가 남자면서도 여자같이 입고 다니는 점이 꺼림칙하고
무당과 같은 자는 믿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지 않았다.
집안사람이 몰래 복동에게 물으니,
복동은 ‘요사스런 귀신이 부인 침실 밖 장독 밑에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 아래를 파보니 과연 사람의 해골과 나뭇가지에 글자를 새겨
부인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 이 물건들을 복동에게 보내니
복동이 ‘애개’라는 나의 첩의 이름을 종이에 적어 건네주었다.
집안의 사람을 심문하여 결국 애개가 나의 부인을 저주한 것을 밝혀내
형벌을 가했더니 애개는 천안(天安)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집안의 노복들을 시켜 그를 찾아내 독을 먹여 죽이도록 했는데,
그가 죽은 장소는 온양(溫陽)이었고 때는 6월 27일이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몽인의 첩 오애개(吳愛介)는 본부인 신씨를 저주한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첫 대목부터 집안의 병환과 저주가 언급되고 무당 복동이 등장하는가 하면, 애개를 잡아 독살하는 장면이 나오는 등, 이 글은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작한다.
〈《시왕도[十王圖]》〉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6월 27일에 죽은 애개는 이튿날 귀신이 되어 등장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다음날 28일 애개 귀신이 무덤에서 나왔는데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7월에 귀신은 명례방(明禮坊) 1) 내 옛집에 돌아왔다.
귀신은 집이 비어 있어 방황하다가 여종들이 피접소(避接所)로 간다는 말을 엿듣고
내 가족이 머물던 용산(龍山)의 피접소로 들어갔다.
귀신은 곧 내 아들의 첩에 씌어 온갖 나쁜 짓을 하며,
부인을 계속 병들게 하고 집안의 종들을 죽였다.
말과 개 등의 가축들도 죽어 나갔다.
귀신을 쫓아내려는 나의 노력에 애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사라지지 않았다.
“내 생전에 절에 보시하여 스님들 가사(袈裟)를 지어주었으니,
이 때문에 저승에서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지킬 군사를 많이 내려주었다!”
유몽인은 이에 저승의 시왕[十王], 즉 불교에서 죽은 자를 심판한다는 열 명의 왕에게 상소문을 써 애귀를 잡아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상소문을 세 편 쓴 뒤 그 글을 태워 저승으로 보내자, 애귀는 사라지게 된다.
1) 명례방(明禮坊) : 지금의 서울 중구 명동과 그 인근 지역. ‘명동’(明洞)은 명례방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무당성주기도도》〉 (출처: 서울대학교 박물관)
유몽인은 저승 시왕에게 상소문을 쓰면서 그간 자신이 여러 방법을 써서 집안을 어지럽히는 애귀를 쫓아내려고 한 내력을 낱낱이 고한다. 애귀가 집안을 괴롭히는 모습이나 그를 쫓아내려는 유몽인의 노력은 글 곳곳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으니, 그 대표적인 장면을 뽑아 아래에 소개한다.
7월에 애귀는 유몽인의 아들 유약(柳籥)의 첩 박씨에게 씌었다.
박씨는 귀신이 들어가자 스스로 머리를 때리기도 하고,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며 땅에 엎어지기도 했다.
애귀는 ‘전계원’(全繼元)이라는 남자 귀신을 데리고 와
박씨와 중매를 서 주겠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하기도 한다.
박씨를 귀신에게서 구하고자 하던 집안사람들은
박씨가 쓰고 있는 머리쓰개가 생전 애귀의 것임을 알아보고 이를 벗겨낸다.
그러자 애귀는 박씨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유약이 일본도(日本刀)로 애귀를 내리치자
애귀는 얼굴에서부터 배까지 베어져 귀졸(鬼卒)들에게 부축을 받아 저승으로 도망한다.
애귀는 그 후 또다시 박씨에게 씌어 병증을 유발하고, 유약의 본처 조씨도 곧 같은 병을 앓게 된다. 집안의 여종들은 애귀가 생전에 쓰던 옷을 입거나 물건을 얻더니 모두가 같은 병, 즉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나가게 되는 증상을 앓는다. 이에 무녀(巫女)를 불러와 굿을 하게 하나, 곧 그 무녀도 같은 병을 앓는다. 애귀에게 씌었던 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애귀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모두가 증언하기를 애귀는 항상 활잡이, 칼잡이, 창잡이, 포수 등에게 둘러싸여 호위받고 있다고 하였다.
한번 귀신에게 씐 사람이 집안에 많아지자, 이들은 애귀뿐 아니라 수많은 귀신의 말소리를 듣거나 이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유몽인은 이런 귀신들과 상대하던 중, 그 이름을 적시하여 명부(冥府)에 올리는 글을 적고 이를 불사르면 귀신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귀신들의 이름을 알아내 없애기 시작한다. 또, 유몽인은 ‘운인’(雲印)이라는 금강산의 스님이 귀신의 화를 그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애귀 쫓기를 맡긴다. 집안사람들이 운인의 지시에 따라 밤에 산 위로 가 음식을 차려 제를 올리나, 애귀는 그 그릇에 용변을 보고 떠나며 이들을 조롱한다.
유몽인의 아들 유약은 『용호경(龍虎經)』(용호경: 도교의 단학(丹學) 경전), 『황정경(黃庭經)』(황정경: 초기 도교의 경전), 『도덕경(道德經)』(도덕경: 노자(老子)가 지은 도교의 으뜸 경서)을 읽어서 귀신들의 반응을 살핀다. 귀신들은 귀를 막아 경 읽는 소리를 차단하였는데, 유약이 다시 『손자병법(孫子兵法)』을 읽자 멀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귀신의 작화(作禍)와 그를 물리치기 위한 여러 방편이 자세하게 기록된 조선 시대의 기록은 매우 드물다. 위에서 본 장면에서 보듯이, 당대에 귀신을 쫓는다고 알려진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스님이 주관하여 제를 올리기도 했고, 무당이 굿을 하기도 했으며 도교의 경전을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부에 바치는 글을 써 소각하기도 하였다.
〈바다 위 사후 세계를 그린 《게발도(揭鉢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이야기는 여러모로 매우 특이하다. 작가가 미처 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에 글이 다소 난삽한 감이 있으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등장인물이 여러 귀신인 점도 특이하거니와 귀신의 작화와 이를 쫓아내려는 지난한 과정이 길고 상세하게 작성되어 있다. 특히나 한국 귀신 이야기 가운데 첩 귀신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은 매우 드문데, 여기서는 ‘애귀’라는 이름을 가진 첩 귀신이 서사의 중심에 두면서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몽인은 이 이야기를 어떤 의도로 기록했을까?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시기, 즉 1621년경 유몽인은 몹시 어려운 처지에 처했었다. 이 무렵 유몽인은 파직당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어려운 처지에 처했으며, 실제로 2년 후 그는 누명을 쓰고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들 유악과 함께 처형당한다. 그러므로 당시 유몽인의 집안에 ‘첩의 귀신이 붙어 집안을 망친다.’는 인식이나, 이러한 인식에 따른 소문이 있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유몽인 자신도 일정하게는 그런 인식에 동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유몽인은 부도덕하고 뻔뻔한 ‘애귀’에 대해 기록하면서 한편으로 이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사대부로서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나 ‘애귀’는 여러 면에서 광해군의 애첩이었던 김개시(金介屎)를 연상시킨다. 동시에, 저승에 올리는 상소문을 통해 결국은 애귀를 소멸시켰다고 주장하는 유몽인은, ‘글로써 천지신명과 귀신조차 감화시킬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자의식을 이 글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조선 시대 괴이한 귀신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 유몽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기도 하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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