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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설 속 수사의 여신,
순군부군


〈영화 《E.T》〉, (출처: 유니버설 픽처스)


귀신 이야기는 문화의 산물이다. 《E.T》와 같이 핼러윈 데이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를 보다 보면 미국 어린이들이 유령으로 변장하기 위해 하얀 식탁보 같은 천에 까만 눈구멍 두 개를 뚫어 놓은 것을 뒤집어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은 그런 것이 전형적인 귀신의 모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 누가 귀신을 보았다고 하면 일단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흰옷을 입은 여성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것이 한국 문화 속에서 전형적인 귀신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에서 누가 미국의 유령 모습을 본다면 그것을 귀신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여기 식탁보를 왜 걸어 놓았나?”라고 먼저 생각할 것이다.

〈「고모숙인송씨전(姑母淑人宋氏傳)」〉 (출처: 한국고전종합DB)


귀신의 형상은 한 문화권에서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귀신이 알 수 없는 불빛이나 불꽃의 형태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꽤 많은 편이다. 도깨비불 이야기라고 할 만한 이야기들이 흔한 귀신 이야기로 자주 돌았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학자인 송시열이 쓴 글 『고모숙인송씨전(姑母淑人宋氏傳)』에서도 귀신 이야기를 언급하며 알 수 없는 불꽃이 나타나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이야기를 같이 소개했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서 알 수 없는 불빛이 나타난 것 정도를 귀신 이야기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멀리서 날아다니는 불빛이 보이면 누가 드론을 가지고 노는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고, 혹시 괴이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UFO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정도지 귀신을 봤다고 생각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 등장한 귀신 모습〉 (출처: KBS)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흰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을 가장 전형적인 귀신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형태가 귀신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일까? 혹은 고려 시대 즈음에 생긴 유행일까? 그게 아니면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 문화가 자리 잡으며 생긴 풍습일까? 현대의 한국인들은 귀신 이야기라고 하면 원한이 맺힌 채로 세상을 떠난 사람의 혼백이 남아 귀신으로 나타난다는 구성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원한 이야기가 가장 흔한 한국 귀신의 형상과 결합하여 퍼진 시대는 언제일까?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머리를 길게 기르는 일이 많았으니까 사람이 큰 병이 들거나 목숨을 잃어서 머리카락을 정돈할 수 없게 되면 자연스럽게 긴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한국인은 흰옷을 즐겨 입었고 특히 장례식 등에서는 더욱 흰옷을 자주 입곤 했으니, 자연스레 흰옷을 입은 긴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이 쉽사리 죽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느낌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해져 내려오는 귀신 이야기들이 기록된 시점을 보면, 이 같은 형상이 귀신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여긴 것이 고대에도 흔했다고는 할 수 없다. 『삼국유사』를 보면, 탈해왕, 미추왕, 문무왕 등 임금이 세상을 떠난 뒤에 그 혼령이 나라를 지켜 주는 역할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은데, 여기에 한 맺힌 여성 이야기나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흰옷을 입은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는 않다. 심지어 『삼국유사』의 「도화여비형랑(桃花女鼻荊郞)」이야기는 세상을 떠난 진지왕의 혼령이 이승으로 돌아와 도화녀에게 찾아 왔기에 도화녀가 귀신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었다는 기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에도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한국 귀신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래서 나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귀신 이야기가 뿌리를 내린 시점은 그보다는 한참 후의 일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시점은 생각보다는 최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당인동 부군당의 무신도 좌: 《부군주》, 우: 《부군부인》〉 (출처: 서울시)


이런 시각에서 살펴볼 만한 이야기가 허균이 남긴 「순군부군청기(巡軍府君廳記)」라는 글이다. 허균은 정치인이면서도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1610년 무렵 자신이 겪었던 일을 기록한 글이 바로 「순군부군청기」다. 그리고 그 내용은 묘사가 풍부하고 사연이 잘 밝혀진 귀신 이야기다.

이야기는 허균이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비리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아 수사 대상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시험에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이니 요즘으로 따지자면 입시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다는 의미이고, 과거 시험은 곧 벼슬자리를 얻는 길이니 공무원 채용 비리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에게 입시 비리와 채용 비리는 크게 화제가 될 만한 중요한 범죄이므로 결국 허균은 수사 도중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허균은 감옥에서 같이 갇혀 있던 여러 다른 사람들이 어떤 여신을 향해 열심히 기도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여신의 이름이 “순군부군(巡軍府君)”이라는 말도 듣는다. ‘순군부’라는 말은 요즘으로 따지자면 순찰대, 담당 부서라는 뜻이니 경찰 내지는 수사팀이라는 뜻이다. 그 뒤에 붙은 ‘군(君)’이라는 말은 직역하자면 임금이라는 뜻이므로 그 부서의 대장, 왕이라는 뜻이다. 옛날 중국에서 지방을 다스리는 관부, 즉 정부 부처의 높은 사람을 부군(府君)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으니 ‘순군부군’이라는 말은 수사팀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일컫는 말이 된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14년 전인 조선시대의 감옥에서는 이 말이 단순히 수사팀 팀장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수사·감옥·재판을 관장하는 신을 높여 부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법치국가라고 하는 요즘 대한민국 시대에도 고발을 당해 조사를 받거나, 수사를 당하고 재판을 받다 보면 가끔은 억울한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든가, 삼심 제도·재심 제도 등이 있어서 어떻게든 공정한 수사와 재판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간혹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고생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니 조선시대의 수사와 재판이 오죽했겠는가? 높은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별 죄가 없어도 일단 감옥에 갇혀 험하게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는 일도 생기고, 그러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어 어지간한 사람은 용서해 주자는 의견이 조정에서 돌기 시작하면 별일 없이 문득 감옥에서 걸어 나올 수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단 수사하겠다고 사람을 감옥에 가둬 놓고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지면 아무런 수사의 진전도 없이 한도 끝도 없이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게 될 수도 있었고, 반대로 연줄이나 뇌물을 잘 쓰기만 하면 큰 죄를 짓고도 잠깐 관직을 떠나는 것 정도로 무마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것이 옛 시대 재판의 현실이었다.

〈조선시대 형정의 실상을 그린 《형정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렇다 보니 감옥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에게 ‘언제 내가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냐’, 혹은 ‘살 수 있을 것이냐, 목숨을 잃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저 운수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요즘이라면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 자료를 모으거나 더 좋은 변호를 하기 위해 애쓸 수도 있겠지만, 옛사람들은 그저 운을 좋게 하는 일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니 각종 주술이 널리 퍼졌을 것이고 감옥의 여신, 수사와 재판의 여신이라고 하는 순군부군에 대한 믿음도 같이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허균의 글에 따르면 당시 감옥에서는 순군부군이 여성이기 때문에 순군부군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남성의 기운을 어떻게든 신에게 보내야 한다는 등의 희한한 믿음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허균은 자신이 꿈에서 본 순군부군의 모습을 설명한다. 순군부군은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아름다웠지만 단장은 하지 않고 비녀를 꽂지 않은 헝클어진 머리에 얼굴을 찡그린 모습이었다고 되어있다. 이런 대목은 우리에게 친숙한 머리카락이 긴 여성 귀신의 모습과 통한다. 그런데 뒤이어지는 묘사에서는 위에는 보라색 실로 된 동옷을 입었고 아래에는 엷은 황색 비단 치마를 입었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흰옷을 입고 스산하게 나타나는 요즘 여성 귀신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니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영화에 나오는 귀신의 모습과 그와는 다른 모습이 뒤섞인 형태를 당시의 유명한 작가가 떠올린 것이다.

〈조선시대 형정의 실상을 그린 《형정도》 오른쪽 상단에 ‘악한죄지은여인을 치죄하다.’라고 쓰여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글에 나와 있는 다음 사연도 주목할 만하다. 순군부군이 재판의 여신이 된 이유는 자신이 억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의 여러 관청이 같이 수사했지만 자신을 살해한 진범을 잡지 못하고 엉뚱하게 죄 없는 사람만 범인으로 검거했기 때문에 그 원한이 더욱 심해져서 귀신이 되어 이승에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 나중에는 아예 재판의 여신으로 눌러앉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이야기는 한 맺힌 여성과 귀신 이야기가 흔히 이어지는 현대의 귀신 이야기와 잘 통한다.

그런데 또 그 원한을 푸는 과정은 현대의 정형화된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좀 더 후대에 유행한 『장화홍련전』이나 밀양의 ‘아랑 전설’ 등에서는 원한 맺힌 여성 귀신이 나타나면 용감한 사또나 뛰어난 관청의 높은 사람이 귀신의 한을 풀어 주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사례가 많다. 그런데 허균의 순군부군 이야기에서는 귀신이 직접 수사와 재판을 담당하는 벼슬아치들의 꿈속에 등장하여 진범을 알려 주겠다고 보다 주체적으로 나선다. 그리고 순군부군은 대오접(大烏蝶), 그러니까 특이한 모습의 커다란 검은 나비로 변신해서 세상에 나타나 스스로 진범을 지목한다.

혼령이 나비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한국 전설에 종종 나타나는 장면이지만, 허균의 글 속에서 순군부군은 현대의 흔한 여성 귀신 이야기 속 귀신에 비해 훨씬 더 수사를 주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17세기 초, 당시의 여성 귀신 이야기는 현대 귀신 이야기와 통하는 점도 있지만 상반된 특징도 갖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좌: 《구미호: 여우누이뎐》, 우: 《구미호뎐 1938》〉 (출처: 좌-KBS/ 우-tvN)
2010년 방영한 KBS 드라마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구미호는 흔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2023년 tvN 드라마 《구미호뎐 1938》에서는 남성 구미호가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 귀신의 전통적인 형태를 한 가지 모습으로 단순화하거나 너무 좁은 몇 가지 특징으로 국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정형화된 한국 귀신의 모습은 현대에 영화·TV·만화·동화 등의 매체를 통해 급작스럽게 대거 유포되는 바람에 굳건히 자리 잡은 한국 전통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 또한 한국 귀신 이야기의 한 가지 중요한 모습이지만, 실제 옛 기록과 전통문화 속에 드러나 있는 다채로운 귀신의 모습들과 귀신 이야기의 여러 가지 양상은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나는 그런 여러 가지 옛이야기 속의 소재를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여러 방향으로 전통을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울 서빙고동 부군당 내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허균의 글에 묘사된 순군부군 이야기와 비슷한 계통의 전설은 조선후기에 더욱 생명력을 얻어 더 널리 퍼져 자리 잡기도 했다. 지금도 서울 지역 무속인들 사이에서 신령스럽고 영험한 귀신이 깃든 곳이라면서 부군당 또는 발음이 변해서 부근당이라고 불리는 건물들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면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된 서빙고동 부군당(西氷庫洞 府君堂)도 그중 하나다. 이런 곳들은 감옥에 깃든 순군부군처럼 다른 관청, 다른 관공서와 관련된 신령이 부군이라는 이름으로 깃들어 있는 장소일 거라는 믿음이 퍼지면서 탄생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옥의 여신, 수사의 여신과 뿌리가 같은 신을 믿는 풍습이 이렇게 많이 퍼져서 오랫동안 계승된 나라도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 만큼 이런 문화는 현대 한국에 되살려서 여러 가지로 활용해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순군부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굉장히 뛰어난 수사 실력을 뽐내는 명탐정을 내세운 추리 소설을 써 봐도 재미있을 것이고, 재판 정보를 정리한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하며 프로그램 이름을 순군부군이라고 붙여도 좋을 거라고 본다.

우리나라 대법원 건물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디케를 모방해서 만든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이 정의의 여신을 나타내는 모습으로 설치되어 있다. 미래에 새로운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이 건설 될 때에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하고 몸 주위를 커다란 검은 나비로 장식하고 있는 순군부군 모습의 동상이 설치된다면 어떨까? 억울함 없이 수사를 하고 재판을 하기를 바랐던 한국의 전통에 어울릴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집필자 소개

곽재식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MBC에서 영상화되면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단편집 『지상 최대의 내기』, 『모살기』, 장편소설 『신라공주해적전』을 비롯하여 한국의 괴물 전설을 정리한 『한국괴물백과』, 한국의 별과 우주에 대한 전설을 소개한 과학 교양서 『슈퍼 스페이스 실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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