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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신이 된 일곱째 딸, 바리


〈《심야괴담회》〉 (출처: MBC)


물속 같은 여름 장마가 끈적하게 계속되는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이야기 장르는 아마도 호러다. 최근에는 한밤중에 무서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심야괴담회》가 있다면, 과거에는 분장은 좀 어설퍼도 공포의 직구를 던지곤 했던 《전설의 고향》이 단연 인기였다. 이 무서운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으로 황천강을 건너 삶과 단절되어야 하는 영혼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망각의 강을 건너기를 거부하고 산 사람들의 세상을 떠돌며 자꾸 모습을 드러내어 무섭다. 죽음 너머를 알지 못하기에 죽음은 막연한 공포다. 산 사람들은 생각한다. 혼이 이승을 떠나지 못한 것은 미련 때문이라고. 그리고 가장 사무치게 잡아두는 미련은 원한이다. 복수심이든 슬픔이든, 한이 사무친 영혼은 산 자에게 두려움을 안긴다. 특히나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가 책임을 몰래 면했을 때는 더욱더 그러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이어주고, 그 사이의 얽힌 매듭을 푸는 자를 우리는 ‘무당’이라고 부른다. 산 사람이 죽은 자에게 살길을 묻는다. 사람들은 무당이 그 너머의 존재인 ‘신’과 인간을 연결하여 길을 알려주고, 미래의 동티를 막아주며 현실의 액운을 떨쳐준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무당의 조상, 무당의 무당, 무당의 선조에는 ‘바리공주’가 있다. 지역에 따라 바리가 아니라 미륵을 조상으로 섬기는 곳도 있지만 바리공주는 워낙 유명하고 이승과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는 여정 또한 기가 막힌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바리공주도》〉 (출처: 조선민화박물관)


왕국의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났지만, 고대하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는 막내 이야기는 ‘말자’·‘막례’·‘끝남이’·‘필녀’ 같은 이름을 받은 윗세대 어른들에게는 여전한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다. 버림받은 공주는 오이디푸스가 그렇듯이 늙은 부부에게 거두어져 그야말로 잘 자란다. 자신이 부모와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지만 키워준 은혜를 생각하며 바리는 바르고 곧게 자라난다. 하지만 막내딸을 버린 죄로 죽을병에 걸린 오구대왕이 목숨을 구해줄 혈연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부모는 천륜을 끊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바리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다.

아버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친 원수처럼 아버지를 때려죽이며 자신도 모르게 업을 쌓았던 오이디푸스와는 다르게, 바리는 자신을 버린 얼굴도 모르는 부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서천을 향해 떠난다. 그때, 바리 나이 고작 열다섯이다. 요즘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인생을 빨리 시작하고 어서 어른이 되었던 시절이라고는 해도 다 자라지도 않은 열다섯 소녀가 얼굴도 몰랐던 부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길을 나선다는 사실이 이미 바리의 비상함을 보여주는 장치다. 바리는 인간계에서 태어나 목숨을 구할 약을 찾아 선계와 망계를 드나들면서도 목숨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당연한 얘기겠지만 고행이 거듭될수록 파워 또한 업그레이드된다. 이런 슈퍼파워를 지닌 주인공이 가장 서러운 버려진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진한 연민과 카타르시스 때문일까,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황석영 장편소설 『바리데기』〉 (출처: 창비)


바리는 단순한 효의 상징만은 아니다. 심청과 마찬가지로 바리 역시 부모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 하지만 심청이가 왕비가 된 이후에도 아버지가 살던 청학동으로 직접 가지 않고 생색내기 딱 좋은 전국 맹인 잔치를 여는 것과 다르게 바리는 직구가 아니면 던지지 않는 인물이다. 하다못해 남편을 얻는 과정조차 그러하다.

바리의 남편과 관련한 이야기는 최소 16년을 함께 살기를 요구한 무장생 버전과 아들 셋을 낳아주기를 요구했던 동수자가 추남과 미남으로 그려진 버전이 각각 존재하는데 어떤 버전이든 남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같이 오구대왕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의 탄생이다. 그리고, 바리는 아들만 쑥쑥 낳으며 그 시대의 슈퍼파워를 다시 한번 드러낸다. 그래도 무장생은 바리를 보내기가 아쉬워 꾸물거리다 바리가 이혼을 통보하자 마지못해 살살이 꽃과 숨을 불어넣는 약수를 알려준다.

무장생이 알려준 약수는 알고 보니 바리가 매일 매일 길어와 음식을 하고 빨래를 했던 바로 그 물이다. 바리가 궁전으로 돌아오니 거한 장례가 진행되고 있다. 바리가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구대왕의 숨이 꼴까닥 넘어가 버렸다. 하긴 무장생 버전이라면 최소 16년을 더 산 것이니 오구대왕도 삶에 큰 미련이 없을 만도 하건만, 가진 게 많은 자라 그런지 미련이 철철이고 마침 바리는 죽은 자를 살리는 약을 가져왔으니 아비의 목숨을 살린다.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온 오구대왕은 큰 선심을 베풀어 “왕국 절반을 바리에게 떼어주마.” 한다. 그러나 바리는 이를 거절하고 저승으로 영혼을 인도하는 수호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를 떠나 자신의 길을 걷는다.


〈오구굿의 한 장면〉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신이 되기로 결심하기 전 바리의 삶은 자신만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운명으로 이미 점지되어 있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서 바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영화를 거부하고 더욱 이타적이며 위대한 삶을 선택한다. 한 명의 인간이 신이 되겠다고 선언한다고 신이 될 수는 없다. 사이비 종교의 지도자라면 모를까. 하지만, 바리는 되었다. 자격과 내면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바리가 약수를 얻기 위해 지옥의 강을 건너고 약수를 얻은 뒤 돌아오는 과정에서 망자들을 천도한 모습이 내내 가장 강조되는 부분인데 바로 이 부분이 바리공주의 역할이며 이후 무당들이 행하는 오구굿의 근본적인 목표다. 이 제의는 망자를 저승에서 건져내 환생을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더보기 )


〈뮤지컬 《바리-잊혀진 자장가》 영상〉 (출처: YouTube Acacia)  더보기


바리공주의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진화 중이다. 소설로는 바리를 탈북소녀로 재해석한 황석영의 『바리데기』가 있다. 무대 위에서도 수많은 바리들이 각자의 사연으로 춤추고 노래해 왔다. 해외로 입양된 수잔 브링크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영화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뮤지컬 《바리-잊혀진 자장가》에서는 가수 이선희가 입양된 바리 바우만으로, 아이를 입양 보내야만 했던 어머니 역으로는 가수 윤복희가 출연했다. 현대의 바리에게 저승으로의 모험을 보내기 위해 꿈이라는 가장 단순한 장치를 사용하여 긴장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바리의 영웅담이 가진 힘이 극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버려진 딸이 부모를 살린다는 효와 버려진 딸이 자신의 길을 찾는다는 두 가지 길 위에서 양립하지 못하고 흐릿하고 갑작스러운 결말을 보여주며 아쉬움이 남았다.


〈뮤지컬 《홍련》〉 (출처: ㈜마틴엔터테인먼트)


바리공주 이야기는 수많은 겹이 있지만 대부분은 바리의 효성에 집중하면서 바리의 희생을 납작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최근 저승의 인도자이자 최초의 심판관으로서의 바리와 그 바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홍련이 만나는 내용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라올 예정이다. 『장화 홍련』의 바로 그 홍련이 주인공이다.

2022년 CJ문화재단의 ‘스테이지 업’과 2023년 ‘K-뮤지컬 국제마켓’ 리딩 쇼케이스에 선정되었고, 올해 7월에 상업 무대에서 첫 막을 올린다. 2022년의 리딩공연에서 소재의 신선함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무엇보다도 왜 우리 설화의 귀신들은 자신의 한을 직접 풀지 못하고 타인에게 호소하느냐는 질문이 심금을 울렸다. 하긴 그러고 보면 장화와 홍련의 혼백이 저승으로 보낸 수령이 몇 명인데 그들 손으로 직접 원한을 갚을 능력이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들이 원한 것은 단순히 원수를 갚은 일이 아니라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고 공공 앞에서 원수의 죄를 낱낱이 까발리는 것이다. 그러하니 한밤중에 그냥 심장 잡고 죽어서야 이들의 한이 풀릴 수가 없다. 그런데 뮤지컬 《홍련》에는 죄목이 추가된다.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원작에는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당의 원조인 바리를 만나 어떻게 해결될까? 리딩공연 이후 수정작업을 거친 뒤 올라오는 뮤지컬 《홍련》에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 바리가 판관으로 활약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듯하다.

여름이란 자고로 등골이 서늘한 무서운 이야기가 제격이라고 하나, 실제로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것은 더위를 못 참고 켠 에어컨의 전기세이고, 그보다는 속을 시원하게 해 줄 펄펄 나는 바리공주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물론 주인공은 살인마(?) 홍련이니 식은땀도 한 줄기 덤이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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