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폭풍우가 내리치니
대낮인데도 날이 어둡습니다

폭풍우가 내리치니 대낮인데도 날이 어둡습니다.

더욱이 날씨까지 무더우니 이럴 때는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시원한 수박 먹으며 공포 영화나 보는 것이 제맛 아닐까요.

이번 여름 동안 특선을 준비한 웹진 《담談》.

지난 7월호의 “바다”라는 주제에 이어 이번 8월호에는 “귀신”을 주제로 본격적인“납량특선”을 독자들께 선사하려 합니다. 납량(納涼)”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들일 에 서늘할 으로 서늘함을 들이다라고 풀이됩니다. “스토리테마파크”에는 귀신에 대한 생생한 기억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들은 온갖 미사여구로 꾸며 만든 가공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조들이 직접 경험한 일이며, 사실적이고 담담한 어조로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더욱 오싹하게 만드는 글들입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괴이하여 이성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기록하는 것은 유가에 어긋나니 몰래 숨기듯 적어놓은 귀신에 관한 글들. 그래서 더욱 기이한 오싹함을 주는 이 기록들과 함께 이번 무더위를 잠시 잊으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글을 읽으시면서 잠깐잠깐 뒤를 돌아보시길 추천합니다. 혹시나 무엇인가가 내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유몽인의 첩 귀신, ‘애귀’(愛鬼)이야기”는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본인의 집에 붙은 귀신에 관해 쓴 매우 사적인 기록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유몽인은 우리가 학창 시절에 그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만큼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작가인데요. 바로 『어우야담』을 쓴 작가님이시죠. 또한, 당시 그는 조선 최고의 문신이자 외교관이었습니다. 이런 분이 본인이 직접 경험했다며 귀신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대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며 유몽인이 보증인을 자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귀신 이야기의 백미는 바로 실화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제가 사극 드라마를 제작할 때 “스토리테마파크”를 많이 참고한 이유는 바로 유몽인의 글과 같이 실제로 겪은 사람이 직접 기록한 것만큼 사실적인 이야기는 없기 때문입니다. 꾸며진 창작물은 실제로 겪은 이야기보다 절대 더 사실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창작자가 실제 경험담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몽인의 글은 대략 이러합니다. 자신의 첩인 ‘애개’가 자신의 부인을 저주하여 죽게 하였는데, 부인을 저주한 것이 들통나서 도망간 애개를 쫓아가 독을 먹여 죽였더니, 결국 애개가 귀신이 되어 다시 자신의 집을 찾아와 온갖 괴이한 재앙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내용만 놓고 보면 ‘전설의 고향’ 같은 드라마에서 흔히 보던 이야기와 흡사해 오히려 시시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절대로 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글의 묘사가 너무나도 세세하고 사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사스런 귀신이 부인 침실 밖 장독 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래를 파보니 과연 사람의 해골과 나뭇가지에 글자를 새겨
부인을 저주하고 있었다.

애개는 천안(天安)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집안의 노복들을 시켜 그를 찾아내 독을 먹여 죽이도록 했는데,
장소는 온양(溫陽)이었고 때는 6월 27일이었다.

다음날 28일 귀신이 무덤에서 나왔는데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7월이 되자 귀신은 명례방(明禮坊) 내 옛집에 돌아왔다.

귀신은 집이 비어 있어 방황하다가
여종들이 피접소(避接所)로 간다는 말을 엿듣고
용산(龍山)의 피접소로 들어갔다.

귀신은 곧 내 아들의 첩에 씌어 온갖 나쁜 짓을 하며,
부인을 계속 병들게 하고 집안의 종들을 죽였다.
말과 개 등의 가축들도 죽어 나갔다.

7월에 애귀는 유몽인의 아들 유약(柳籥)의 첩 박씨에게 씌었다.
박씨는 귀신이 들어가자 스스로 머리를 때리고
가슴의 통증을 호소하고 땅에 엎어지기도 했다.


담담하게 묘사된 글이지만 여기에 우리의 상상력을 조금만 더해보면 이보다 더 무서운 장면은 없습니다. 애개 귀신은 혼령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한 듯 보입니다. 마치 좀비처럼 무덤에서 나와 당시 명례방이라 불리던 지금의 명동과 용산을 휘젓고 다니는 귀신. 지금 제 상상 속에는 동트기 직전 어둡고 짙은 파란 하늘 밑에 인적 없는 골목골목을 헤매는 귀신 여인의 형상이 그려집니다. 그러다 길모퉁이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좌우를 살피는 그로테스크한 모습 말입니다.

자, 이쯤 되면 유몽인의 글이 어느 작가가 쓴 공포 영화의 장면보다 더 무서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이 일어난 장소와 날짜까지 정확히 적혀있어 그 사실적 공포가 더해지는 이야기. 과연 유몽인의 귀신에 대한 기록은 어떻게 끝을 맺을까요. 애개 귀신의 괴이한 재앙의 끝은 과연 무엇일까요. 공포 영화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은 바로 스포일러입니다. “유몽인의 첩 귀신, ‘애귀’(愛鬼)이야기”를 통해 독자들께서 직접 그 결말을 알아보시죠.

벌써 너무 무서워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웹진 《담談》의 납량특선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한국 전설 속 수사의 여신, 순군부군”에서는 긴 머리를 풀어 해치며 소복을 입고 등장하는 처녀 귀신의 역사 속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그리고 이 처녀 귀신처럼 한을 품고 죽는 일이 없길 염원하는 우리 선조들이 ‘순군부군’이라는 귀신에게 빌어야 했던 사연의 비밀을 이야기합니다. “독(獨)선생전 8화, 은혜 갚은 양촌”에서는 ‘호귀 마마’로 죽은 양촌의 귀신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어딘가 애처로운 양촌의 사연. 이에 더해 양촌의 벗인 고양이의 활약도 기대해주십시오. “신이 된 일곱째 딸, 바리”에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무당’의 선조인 ‘바리 공주’를 소개합니다.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해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바리 공주’. 과연 그녀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무당의 역을 자처하였을까요. “폐가에서 생긴 일”에서는 호환을 입은 귀신의 모습이 단연 압권으로 무섭게 묘사되니 각오하고 글을 보시길 권장합니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이라는 사귀를 쫓는 주문으로 귀신을 물리치는 생생한 이야기를 기대해주십시오. “조상을 생각하며 덕을 닦다, 염수당(念修堂)”에서는 변씨 집안 세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충심과 효심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후손들의 의지를 담은 염수당을 소개합니다.

유난히도 덥고 습한 요즘입니다. 《담談》을 통해 잠시나마 시원함을 느끼시길 빕니다. 다가오는 9월에는 ‘토속신앙’을 주제로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를 더 시원하고 더 오싹하게 풀어내 보겠습니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사귀를 쫓는 주문을 외쳐 독자님들의 평안함을 기원하며 글을 마칩니다.





편집자 소개

김한솔
2004년 KBS에 입사한 공채 30기 PD.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등 드라마를 만들었다. 현재는 KBS에서 독립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시대 특수부대 관련 드라마를 만드는 중이다. 2017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7년 뉴욕 TV & 필름 페스티벌 작품상 금상, 201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16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그리메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