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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폐가에서 생긴 일


김 생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관아 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사또, 사또!”

젊은 무관 출신 사또 한익범도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시오?”

“우, 우리 아이가, 우리 아이가… 사라졌소이다!”

김 생원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 생원네 아이는 늘그막에 낳은 외동으로 이제 열한 살이 되었다.

“여기, 물 좀 가져오너라.”

사또는 급한 김에 김생원에게 손수 부채질을 해 주면서 통인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사또, 사또!”

또 사또를 찾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관아로 들어섰다. 육방관속이 모두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아무리 물러가라 해도 다들 손발을 허우적대며 사또만 찾았다.

사또는 급히 등채를 들어 대청마루를 내리쳤다. 딱! 하는 큰소리가 울려 퍼지자 소란을 피우던 사람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 무슨 일들입니까?”

사또가 대청마루에 있는 호피교의에 위엄있게 앉았다.

“아이가, 우리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오 선달이 부르짖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다들 자기 집 아이가 없어졌다고 비통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조사를 해보니 세 명의 아이가 없어졌다. 친척과 이웃들까지 모두 관아로 몰려와 사람들이 그리 많았던 것이다.

생원 김희문의 아들 재준, 선달 오명해의 아들 달호, 훈장 양진흥의 아들 석진으로 재준이 열한 살로 나이가 제일 많았고 달호와 석진은 열 살 동갑내기였다.

“아이들이 어딜 가서 돌아오지 않는지 알고 있는가?”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수 김상문이었다.

“우리 손자에게 듣기로 망허산 중턱에 있는 폐가에 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길? 왜? 하지만 신임 사또는 거기가 어딘지 몰랐다.

“폐가라니? 야반도주한 집안이라도 있다는 건가?”

삼정이 문란한지 오래라, 군포를 징수하는 것을 못 견뎌 도망치는 집들이 간혹 있었다. 이렇게 도망치면 또 인징(隣徵)이니, 족징(族徵)이니 하여 이웃과 일가친척이 피해를 받지만 당장 숨이 넘어갈 같은 상황에서 야반도주 말고 선택할 길이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런 건 아니고….”

이방이 말을 흐렸다. 사또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폐가가 생긴 사연이 시급한 일이 아니었다. 어서 아이들을 찾아야 했다.

“병방은 사령들을 모두 데리고 망허산을 수색한다. 폐가로 가는 길 주위를 집중적으로 살피도록 하라. 형방과 공방은 나를 따라 폐가로 간다. 꼭 필요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나를 따라오도록.”

형방과 공방의 낯 색이 금방 어두워졌다. 형방이 앓는 소리를 냈다.

“사또 나리, 저는 발병이 있어서 멀리 걷지를 못합니다. 산을 올라가는 건 무리입니다.”

“열흘 전에 계곡에 올라갈 때 앞장서서 간 건 형방 아니었소?”

“그, 그날 이후에 병을 얻었, 얻었습니다.”

“에잇, 그만두시오. 공방도 어디 다쳤소?”

선수를 빼앗긴 공방은 형방을 노려보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소인은 멀쩡합니다.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래도 대낮인데 설마 귀신이 나오진 않을 거야라고 공방은 중얼거렸다.

“뭐? 귀신?”

공방이 화들짝 놀랐다. 사또가 귀도 밝지.

“예예, 사실 그 폐가는 귀신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소상히 고하라.”

병방이 포졸과 사령을 끌고 수색에 나섰다. 사또는 호피교의에 앉아 공방으로부터 폐가가 생긴 사연을 들었다.

그 집은 본래 윤 초시가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들 셋이 있었는데 늘그막에 딸을 하나 얻어서 기뻐했죠. 그런데 딸이 대여섯 살 되었을 때부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집 소와 말이 하나씩 죽어 자빠진 겁니다. 아무도 이유를 몰랐죠. 소와 말이 다 죽자 이젠 종들도 하나씩 죽어 나갔습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그 집을 떠났죠. 막내아들도 가출해 버렸으니 말 다했죠. 우리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는데 집은 썰렁하기가 그지 없었습니다.

결국 채 1년도 못 가 두 아들과 노부부도 모두 죽고 그 집에는 막내딸만 남았습니다. 이후에 인근 집에서도 간혹 소와 말이 죽어 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해에 집을 나간 막내아들이 돌아왔죠. 막내아들은 누이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모양인데 그러고는 그 집에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집에서는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 하나만 나왔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게 새카맣게 타버렸습니다. 그게 막내아들인지, 누이동생인지는 모르지만 이후에는 둘 다 우리 마을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새 이야기는 아닙니다. 50년도 더 됐어요. 저희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불이 났다면 집이 성하지 않을 텐데?”

사또가 물었다.

“워낙 큰 집이어서요. 안채는 탔지만 사랑채와 별당은 모두 멀쩡합니다. 행랑채, 부엌간, 외양간, 마구간도 그냥 있죠.”

“아이들은 거길 왜 간 거지?”

그 말에는 이방이 대답했다. 이방은 형방과 함께 사람들을 조사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가끔 사내아이들이 담력 시험을 한다고 거길 가더군요. 그렇다고 특별한 일이 생긴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뭔가?”

“여태는 다들 낮에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충분히 무서운 곳이거든요. 사람이 오래 살지 않아서 잡초가 무성하고 가끔 여우나 삵도 나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한밤중에 갔다고 하네요.”

“무모한 짓을 했군. 다행히 요샌 망허산에 호랑이가 없으니 망정이지.”

“일전에 소금 장수가 산을 넘다가 호환을 당한 이외에는 그런 일이 없습죠.”

이방이 대답하자 공방이 끼어들었다.

“그 소금 장수 시신을 못 찾지 않았나요?그러니 호환이 아닐지도….”

“그 현장에서 호랑이 발자국과 핏자국도 나왔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게.”

사또가 혀를 찼다.

“호랑이가 없어도 무서운 곳이긴 마찬가지지. 늑대도 있을 수 있고, 여우도 다 자란 놈이면 아이들은 못 당하는 법인데.”

사또는 공방을 데리고 폐가를 가보았다. 과연 상당히 큰 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타 버린 안채는 허물어지다 만 벽들만 남아있었다. 어디 지하실이라도 있을까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보이질 않았다. 해 질 무렵이 되자 공방은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나?”

“그것이… 해가 지면 여기서 귀곡성이 들린다고 해서….”

“귀곡성? 귀신이 곡을 한다고?”

“네. 간을 내놓아라 하면서 흐느낀다고 합니다.”

산중이라 해가 빨리 저물었다. 이미 병방도 다녀간 뒤였다. 아이들 흔적은 아무 곳에도 안 보인다고 했다.

“저희도 그러니 그만 내려가죠?”

공방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사또도 그럴까 생각하는 참에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이리로 와주세요.”

처음엔 알아들을 수 없는 가느다란 소리였는데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자 목소리였다. 놀란 공방이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히이익! 빠, 빨리 내, 내려가시죠.”

“안 돼. 아이들을 찾을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또는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 소리 나는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대문 쪽에서 불빛이 비쳤다.

“으아아악!”

공방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사또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었다.

“거기 누구냐?”

공방은 사또 뒤로 숨어서 두 무릎을 부딪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목금입니다.”

“백이도 왔습니다.”

세책방 소저와 정 진사네 무남독녀였다. 백이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불빛은 그 바구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두 소저가 야밤에 이 산중에 어찌 온 것이냐?”

사또가 인사를 하는데 공방이 뒤에서 속삭였다.

“여우 귀신이 둔갑한 겁니다. 분명해요.”

“시끄럽다!”

공방을 야단친 소리였는데 백이가 놀라서 얼굴이 하얘졌다. 사또는 손사래를 쳤다.

“소저들에게 한 말이 아니야. 대체 여긴 어찌 온 것이냐?”

목금이 대답했다.

“동네 아이들이 폐가로 왔다가 사라졌다고 해서 살피러 왔습니다.”

“야밤에 올 일이 아니잖은가?”

“야밤에 와야 아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요괴는 낮에 나오질 않으니까요.”

“여기 요괴가 있다는 말이냐?”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본래 여우 귀신이 사람을 해친 곳입니다. 윤 초시는 산속에 대궐 같은 집을 짓다가 여우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 안에는 여우 새끼 다섯 마리가 있었죠. 윤 초시는 그 여우 새끼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그날 밤에 어미 여우가 사냥을 하고 돌아왔을 때 새끼들이 모두 죽은 것을 보았죠. 어미 여우도 그날 밤에 죽었습니다. 그리고는 윤 초시 집 막내딸로 환생했습니다.”

공방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럼 막내아들이 누이동생을 죽이는 데 실패한 건가?”

“아닙니다. 막내아들은 도사를 만나 여우 누이를 죽일 방법을 알아 왔죠. 부적으로 억누른 뒤에 불을 질러 죽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뒤에는 이 마을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였다. 다시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간을 내놓아라. 어서 내놓아라.”

사또가 다시 칼을 잡고 전기세의 자세를 잡았다. 전기세는 얼굴 옆으로 칼을 바짝 치켜세우는 자세이다.

“그럼 저 소리를 내는 건 뭐란 말이냐?”

“그건 소녀도 모릅니다. 이제 확인해 보죠.”

“그럼 막내아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그건 책에서 봤습니다. 막내아들을 가르친 도사가 내막을 적은 책이 집에 있어서요.”

사또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잠깐 의심했다. 하지만 이미 같이 귀신을 두 번이나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소리 나는 곳으로 가보자.”

소리는 외양간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방은 사또의 도포 자락을 잡고 가다가 그만 다리가 풀려 더는 움직이질 못했다.

“공방은 여기서 기다리게.”

“아, 안 됩니다, 사또. 소인을 버리고 가지 마십시오.”

공방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사정했다. 목금이 말했다.

“백이야, 네가 공방 나리와 여기서 기다리렴. 불돌이가 지켜줄 테니까 괜찮을 거야.”

“불돌이가 없으면 너는 어쩌려고?”

“나한테는 네가 빌려준 이게 있잖아.”

목금이 품에서 조개와 소라고둥을 꺼내 보였다. 바다 거인의 선물이었다.

“몸조심해야 해.”

목금은 사또와 함께 외양간을 향해갔다. 외양간 앞에 도착하자 목금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육도(六道)가 다른데 귀신과 사람이 어찌 한곳에 있으랴. 귀신은 사람을 내놓고 떠날지어라.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목금이 외양간 문을 열려는 순간 문 안에서 시커먼 팔이 튀어나와 목금을 붙들었다. 사또가 급히 칼을 내리쳐 팔을 끊어버렸다.

“키에엑!”

떨어진 팔에서는 피 한 방울이 나오질 않았다. 사또와 목금이 외양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몰골의 중년 남자가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고개를 숙인 자세로 서 있었다.

“오라버니, 간을 내 줄 거야?”

소름 끼치게도 목소리는 어린 여자와 같았다. 고개를 들었는데 얼굴이 반쪽만 남아있었다. 뭔가에 물려서 먹힌 것 같은 형상이었다. 사또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사람이면 무릎을 꿇을 것이고, 귀신이면 사라져라!”

“싫은데? 간을 달라니까 왜 딴소리야?”

“아이들은 어디 있지?”

“아이들 간은 못 먹어. 너무 작아. 크면 먹을 거야.”

중년 남자가 달려들었다. 사또는 살짝 비켜서서 남자가 지나친 뒤에 등에 칼을 내리쳤다. 딱 소리가 나면서 칼이 들어가질 않았다. 알고 보니 남자는 지게를 등에 메고 있었다. 목금이 외쳤다.

“소금 장수! 호랑이한테 물려 죽었다는 소금 장수에요!”

왜 호랑이한테 죽은 소금 장수가 이런 괴물이 된 걸까? 목금이 외쳤다.

“여우 귀신이 소금 장수 몸에 붙은 거네요!”

남자가 목금을 노려봤다.

“언니야는 누구야? 언니야가 간을 줄 거야?”

남자가 목금에게 달려왔다. 목금이 침착하게 조개와 소라고둥을 양손에 나눠 쥐고는 말했다.

“넌 죽었어. 아무것도 못 먹어!”

“거짓부렁! 간 내놔! 간 먹을 거야. 난 숨도 쉬는데 왜 못 먹어?”

“숨을 쉰다고? 그럼 숨 못 쉬면 죽겠구나?”

목금이 양손을 펼쳤다. 조개와 소라고둥에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두 보배는 바다에서 온 신물이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물은 순식간에 남자의 온몸을 둘러쌌다. 물기둥에 갇혀 꿀꺽꿀꺽 물을 삼키던 남자가 풀썩 쓰러졌다. 그 순간 남자의 미간에서 밝은 빛 한줄기가 새어 나왔다. 빛줄기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만두지 않을 테야!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야! 쓸 만한 몸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

하지만 그 말을 끝으로 빛줄기는 금방 사라졌다. 사또는 그 짧은 새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그래도 쉴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목금이 금방 아이들을 찾아냈다. 셋 다 건초더미 밑에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여우 귀신이 신통력으로 아이들이 보이지 않게 했었는데 사라지고 나니 모습이 드러난 것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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