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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조상을 생각하며 덕을 닦다,
염수당(念修堂)

포도가 익어가는 8월의 어느 밤, 우리는 툇마루에 앉아 감자와 옥수수를 먹으며 할머니와 오목을 두었다. 또 어떤 밤에는 할머니 등 뒤에 숨어 《전설의 고향》을 봤다. 검 보랏빛 포도알들이 단내를 풍기면, 우리 집엔 마실 온 동네 할머니들로 북적였다. 심심한 우리는 할머니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 달라 졸랐고, 그러면 할머니들은 포도 물 묻은 손을 치마에 쓱 닦고 ‘심야괴담회’를 열어 주셨다. 귀뚜라미 우는 밤, 마당의 대추나무가 저 혼자 흔들렸다.

생생한 ‘누구네 집’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보다 더 무서웠다. 상갓집에 다녀온 어떤 사람이 그날로 시름시름 앓아누운 것은 그의 몸에 ‘객귀(客鬼)’가 붙었기 때문이고, 변소 문을 고치던 어떤 사람이 그날 밤 졸도한 것은 측간 귀신이 노해서 ‘동티’가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누구네 집'에서는 몇 달 사이에 가족들이 이유 없이 아프고 다치는 일이 계속되어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 묘에 물이 차 할머니가 떨고 있으니, 하루빨리 명당을 찾아 할머니 묘를 이장(移葬)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장을 위해 묘를 파보니 돌아가신 할머니가 썩지도 않고 물에 불어 있었는데,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이 생전처럼 자라있더라고 했다.


〈영화 《파묘》의 파묘〉 (출처: 영화 《파묘》, 2024)


그리고 어떤 ‘누구네 집’에서는 할아버지 제사 다음 날, 여섯 살 된 손자가 마루에서 놀다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조잘조잘 말을 잘하던 아이가 그날로 어버버 말을 더듬게 되었다 한다. 답답한 마음에 찾은 무당, 그는 ‘내가 제삿밥을 먹으러 갔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상 위에 올라와 있어 못 먹고 그냥 왔다’라고 생전 할아버지 목소리로 가족들을 호통치며 ‘제사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고 했단다.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명당에 조상의 묫자리를 마련하고 조상 제사에 정성을 다하라.
그렇지 않으면 ….’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제사는 조상에 대한 효(孝)의 실천을 의미했지만, 백성들에게 제사는 잘 지내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祈福)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있었다. 효의 실천이든 기복 사상의 발현이든, 조상을 잘 섬기지 않았을 때 일어난다는 기묘한 이야기는 후손들, 특히 맏아들과 맏며느리에게 큰 심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제사를 잘 지내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가 공포다. 언젠가부터 제사는 ‘명절날 조상 잘 만난 사람은 해외여행, 그 반대의 경우엔 제사상 앞에서 부부싸움 한다’ 혹은 ‘제사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제사가 괴담이 아닌,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화담(和談)의 시간으로 인식되었으면 한다. 제사를 잘 지내야 한다는 강박과 홍동백서(紅東白西)에 갇힌 형식에서 벗어나 돌아가신 나의 선조를 생각하며 내 삶을 돌아보고 덕을 쌓아 다음 세대의 귀감이 되는 것, 내 후손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아 그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것이 제사의 본 의미가 아닐까?

대은(大隱) 변안렬(邊安烈, 1334~1390), 백산(栢山) 변경회(邊慶會, 1549~1639), 봉은(鳳隱) 변극태(邊克泰, 1654~1717)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의 구양서원(龜陽書院)에 ‘염수당(念修堂)’ 편액이 걸려있다. ‘염수’는 『시경』 「문왕」의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이에 그 덕을 닦을지어다[無念爾祖 聿修厥德]’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변안렬과 변경회의 충심, 변극태의 효성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후손들의 의지를 담고 있다.


〈봉화 구양서원〉


〈구양서원 편액〉


〈구양서원 염수당 편액〉


기억하고 싶고, 기억되고 싶은 가문의 이야기는 기록되어 전해진다. 조상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서원 건립의 큰 동력이 되었다. 우리가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결국 현재의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그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천 년이 지나도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원주변씨(原州邊氏) 가문의 이야기를 전한다.




충신 변안렬(邊安烈, 1334~1390)


고려 말, 이방원(李芳遠)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진심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해 「하여가(何如歌)」를 읊었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丹心歌)」를 불러 화답했다.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다 선죽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조선은 정몽주를 조선의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이를 정몽주 묘의 비석에 새겼다. 이 비석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돌연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다음 날 아침, 정몽주의 비석이 산산조각 나 있는 것을 본 그의 후손들은 고려에 대한 정몽주의 충의(忠義)를 깨닫고 그가 고려에서 받은 관직을 새겨 ‘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의 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 다시 비석을 세웠다. 이후 비석은 천둥 번개에 끄떡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정몽주를 떠올린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차마 버리지 못한 이가 정몽주뿐이었을까? 이방원의 「하여가」에 「불굴가」로 맞선 변안렬이 있다. 후에 정몽주는 자신보다 2년 앞서 화(禍)를 당한 변안렬을 위해 1392년 봄, 「대은선생전(大隱先生傳)」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변안렬의 선조는 대대로 농서(隴西)에서 살다가 송나라 말에 고려 황주로 귀화했다. 변안렬은 1334년 4월 원나라 심양에서 변양(邊諒)과 곽성(郭渻)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세인 1351년에 그는 원나라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351년 12월 그는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 노국공주와 혼인한 후 고려로 환국할 때 수장으로 왕을 배행(陪行)했다. 지조가 맑고 문장에 능하며 무예도 뛰어난 변안렬을 좋게 생각한 공민왕은 그를 왕의 친척인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의(元顗)의 딸과 혼인시키고 원주를 그의 관향(貫鄕)으로 하사했다. 이때부터 변안렬은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용맹한 무장이었던 변안렬은 1362년 안우(安祐)와 함께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또 1374년 최영과 함께 탐라(耽羅)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亂)을 진압했다. 1376년 변안렬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 등과 부영(扶寧)에서 왜적을 토벌했는데, 전쟁터에서 돌아오니 국가의 최고 정무기구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나희(儺戲)를 열어 그를 맞이했다. 더불어 변안렬에게 백금 한 덩어리와 말 안장, 의복을 하사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시켰다. 전공을 세운 변안렬은 공민왕 말기부터 무장 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1388년에 요동(遼東) 공략을 위하여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거의(擧義) 회군하였다.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과 회의하여 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하니 변안렬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이때부터 호를 대은(大隱)이라 하였다.

『구양서원지(龜陽書院誌)』, 「대은선생전」


변안렬은 요동 정벌에 나서 위화도 회군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우왕이 폐위된 이후 이성계가 새 왕조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때부터 이성계와 노선을 달리했다. 그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조민수(曺敏修)와 더불어 창왕(昌王)을 옹립하고 이후 여주에서 우왕을 알현, 이색과 함께 우왕의 복위를 의논했다. 이에 변안렬은 왕실의 신임을 얻어 1389년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승진했다.

이성계는 왕과 조정의 신망을 얻은 변안렬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이방원을 시켜 변안렬과 정몽주를 초대했다. 연회가 무르익어 갈 때쯤 이방원은 짐짓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무심한 듯 「하여가」를 불렀다. 이에 정몽주는 단호한 목소리로 「단심가」를, 변안렬은 이방원을 쏘아보며 「불굴가」를 불렀다.

穴吾之胸洞如斗   내 가슴에 한 말 만한 구멍 뚫고
貫以藁索長又長   새끼 줄로 길게 길게 꿰어
前牽後引磨且戞   앞뒤로 끌고 당겨 갈리고 찢길지라도
任汝之爲吾不辭   너희 하는 대로 사양치 않겠으나
有欲奪吾主         내 님 빼앗고자 한다면
此事吾不屈         이 일만은 나 굽히지 않으리

『구양서원지』, 「불굴가」


가슴에 한 말이나 되는 큰 구멍을 뚫는다는 시적 발상은 직설적이어서 더욱 슬프다. 이는 고려에 대한 변안렬의 충정과 단심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그의 반대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구양서원 불굴가 시비〉


1389년 11월 밤, 가슴에 칼 한 자루를 품은 대호군 김저(金佇)는 이성계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미 그가 자신을 살해할 것을 알고 다른 곳으로 피신한 뒤였다. 이성계 제거를 모의한 배후에는 폐위되어 황주로 유배 중인 우왕이 있었다. 우왕은 곽충보(郭忠輔)가 이성계의 세작(細作)인 줄도 모르고 이성계 살해를 지시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변안렬을 연루시키기 위해 김저의 발바닥을 칼로 찢고 쇠를 달궈 발바닥을 지졌다. 심문에 지친 김저는 결국 이성계가 원하는 답을 내놓았고, 변안렬은 삭탈관직 당하고 한양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적법한 국문(鞫問)도 받지 못한 채 1390년 1월 16일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의병 변경회(邊慶會, 1549~1639)


자발적인 군대, 의병(義兵)! 그들은 외적의 침입이 발생했을 때, 국가의 명령 없이 군사를 조직하여 전쟁에 나섰다. 임진왜란의 대표적 의병장으로는 진주성 전투와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가 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에게 위엄을 보인 곽재우는 위장 전술, 유격전을 펼쳐 적을 섬멸했다. 의병장 곽재우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구전설화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임진왜란에는 이름을 알리지 못한 수많은 의병과 그 가족이 있다. 고려 충신 변안렬의 후손, 변경회도 수많은 의병 중 한 사람이었다.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무명의 의병들〉
(출처: YTN 뉴스, 「드라마로 부활한 사진 속 의병들, 역사 의식 일깨워」)


변경회는 1549년 안동 거수리에서 만취당(晩翠堂) 변영순(邊永淳)과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정(司正) 이귀윤(李貴胤)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독서를 좋아했다.

변경회의 나이 44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동생 변경응(邊慶應)에게 가족을 부탁하고 임흘(任屹, 1557~1620)·금윤선(琴胤先)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 사람이 그를 소모장(召募將) 겸 운량감(運糧監)으로 추대하였다. 군량미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만큼 그의 임무는 막중했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막사(幕舍) 곳간은 텅 비었다. 지친 의병들은 막대기 하나 들 힘도 없다. ‘저들의 배를 채울 방도’를 고심하던 그는 붓을 들었다.

이 세상에 선비로 태어나서 나라가 위란(危亂)의 때를 당하여 힘을 다하고 충성을 다함이 회복을 도모할 계획이라, 우리 집에 재물이 비록 많지 않으나 반드시 하나하나 다 내어 팔아서 군량을 돕는 것이 의무며 옳은 일일 것이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곧 수전노(守錢奴)일 뿐 어찌 신하로서 애국의 정해진 분수를 지킨다고 하리.

『구양서원지』, 「동생 경응에게 보낸 편지」


변경회의 편지를 받은 변경응은 가산을 모두 팔아 백미 300석과 콩 50석의 군량미를 보냈다. 『심청전』에 나오는 ‘공양미 300석’은 2020년 기준 약 1억 7천만 원으로 75칸짜리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전 재산을 군량미로 내놓은 그와 그의 가족은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이다.

금 번의 의거는 우리가 신하로서 진력할 중요한 때라 나는 황송하게도 군량을 모으는 책임의 자리에 있어 우선 내 집의 곡식 350석을 마련하여 군용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군자들께서는 다 각기 스스로 의를 다하여 함께 국가 대사를 도모함이 어찌 바른길이 아니리요.

『구양서원지』, 「회유문(回諭文)」


변경회는 향촌 사회에 기부를 독려하는 「회유문」을 보냈다. 변경회가 쏘아 올린 통 큰 기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들의 염원을 깨웠다. 그와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군량미를 보내왔다. 그가 내온 따뜻한 밥,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기 충만한 의병들은 왜군을 크게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

변경회의 삼종숙부(三從叔父) 충장공(忠莊公) 변응정(邊應井, 1557~1592)과 숙부 참봉공(參奉公) 변영수(邊永綏)도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호남 의병 역시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은 자가 속출했는데, 이때 변경회가 비축하고 있던 군량미를 털어 호남 의병 창고를 채워주었다. 하지만 얼마 후 변응정과 변영수는 순국했고 변경회는 전쟁터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변경회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장악원 직장(掌樂院直長)을 제수받았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講和)를 맺었다는 소식에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여 생을 마쳤으니 향년 91세였다.




효자 변극태(邊克泰, 1654~1717)


보은 설화(報恩說話)의 주인공들은 거의 동물들이다. 조건 없이 베푼 인간의 마음에 화답한 까치와 호랑이, 잉어와 개의 진심 어린 보답은 우리에게 권선징악 이상의 감동을 준다. 집에서 키운 개가 주인이 잠든 사이 불이 나자 자신의 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고 탈진해 죽었다는 ‘의로운 개’는 의구총(義狗冢)이라는 구체화 된 증거물로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하며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원주변씨 가문에는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며 효를 행한 강아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미 의구총〉 (출처: 구미시 공식 블로그)


밖에 나가 놀다 들어온 강아지는 언제나 먹을 것을 물고 왔다. 주인은 더러운 것을 물고 온다고 때렸지만, 강아지는 물어온 먹이를 어미를 위해 뱉었다. 하루는 백정이 세수 그릇에 먹이를 주며 어미를 유인했다. 어미는 그것도 모르고 덥석 먹이를 물었고, 그렇게 어미는 백정의 손에 죽었다. 강아지는 미친 듯이 짖어대며 날뛰었지만 끝내 어미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강아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슬피 울기만 하다 어미가 누웠던 자리에서 12일 만에 죽었다.

사람들은 앞산 기슭에 강아지를 묻었다. 그들은 강아지의 어미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새로 무덤을 만들어 주기로 하고 무덤을 파보았다. 그런데 강아지를 묻은 지 3개월이 지나 6월 무더운 날씨였는데도 털 하나 상하지 않고 벌레와 개미도 물지 않아 살았을 때와 같았다. 관(官)에 이 사실을 알리니 돌을 다듬어 표석 하도록 명하고 효구총(孝狗塚)이라 했다.

하루는 한 무리의 등짐 상인이 노송 앞에서 쉬어가다 효구총이라 새겨진 비석을 보게 되었다. 등짐 상인 중 한 사람이 ‘사람도 효자가 없는 세상에 효구가 말이 되나?’라며 지게 작대기로 비석을 때려 두 동강이 냈다. 잠시 후 이 등짐 상인은 주막 앞 개울을 건너가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었다.

효구총 이야기 속 강아지는 효자로 이름난 봉은(鳳隱) 변극태(邊克泰, 1654~1717)의 후손이 키우던 개였다. 변극태의 지극한 효성은 그 집안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감응한 것일까? 변경회의 현손인 변극태는 1654년 변수(邊洙)와 선성김씨(宣城金氏) 김윤(金鋆)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671년 4월, 18세의 변극태는 천연두로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 해는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와 병충해로 곡물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한 데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아사자와 병사자가 넘쳐나던 때였다. 대기근에 사람들은 점점 황폐해져 갔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기꺼이 도둑이 되었다.

그날 밤 변극태는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다 잠이 들었다. 잠결에 창검 소리를 들은 그는 황급히 아버지 변수의 방으로 뛰어갔다. 도적이 변수를 향해 긴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변극태는 아버지 앞을 막아서며 “도적아! 나를 죽이고 내 아버님을 상하게 하지 마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도적은 이들 부자를 향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변극태는 오직 아버지를 지켜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도적의 칼날은 변극태의 몸 수십 곳에 상처를 냈다. 그의 왼쪽 어깨뼈는 끊어져 피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며 ‘제발 아버지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변극태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의 형과 막내아우, 노비 연화가 밤낮으로 그를 간호했지만 왼쪽 어깨의 상처는 나을 기미가 안 보였다. 의원은 변극태의 팔을 자르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고 했다. 변극태는 “부모가 물려준 몸을 절단할 수 없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루는 내가 문지방을 베고 곤히 잠이 들었다. 꿈에 홍의를 입은 관인(官人)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주상께서 그대에게 효자가 있는데 지금 중상(重傷)이란 말을 들으시고 나에게 이 약을 하사하셨다. 상처에 바르고 또 마시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것은 옥황상제가 있는 곳에서 주는 용뇌(龍腦)라는 약으로 비록 속효는 없으나 일 년 후에는 곧 완쾌하여 병이 나을 것이다.”고 했다.

『구양서원지』, 「신해기사(辛亥記事)」


「신해기사」는 변극태의 아버지, 변수의 시선으로 쓴 그날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자기 대신 죽는 것을 바랄까? 변극태의 지극한 효성은 오히려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픈 자식을 위해 해 줄 것이 없어 막막했던 변수에게 꿈에서 ‘용뇌’를 알려주니 그가 얼마나 기뻤을까? 용뇌는 효험이 있었다. 죽어가던 변극태는 14개월 만에 일어났으며, 끊어졌던 왼쪽 팔이 붙었다. 이후 변극태는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의 후손들이 키우던 개가 효구였으니 우연일까?




담談하게


배가 아픈 날이면 보드랍고 따뜻했던 할머니의 손이 생각난다. 정말 할머니 손은 약손이었다. 할머니는 아픈 배에 손을 얹고 지그시 누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쉬’ 소리 같기도 하고 ‘휘’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일어나 앉히고 등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셨는데 아프지 않고 시원했다. 마지막으로 정수리에서부터 왼쪽 중지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린 후 머리에 쓱쓱 문지른 바늘로 손을 땄다. 할머니는 시커먼 피를 닦아내고 콧김으로 한 번 더 ‘휙’, 그러면 신기하게 피가 멈췄다. 할머니의 손맛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 알음알음 소문 듣고 서울에서도 찾아오고 그랬다.

할머니의 제삿날, 나는 약사여래(藥師如來) 같던 할머니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데 삼촌·고모와 아버지는 생전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영덕 대게를 상에 올리며 정치 이야기를 하신다. 보살 같던 할머니는 늦은 밤, 음복(飮福)하며 여전히 우애 있게 살고 있는 아버지 형제들을 보며 흐뭇해하실 것도 같다.

원주변씨 가문의 변안렬, 변경회, 변극태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겐 부끄러운 조상도 분명히 있다. 닮고 싶지 않고, 닮아서는 안 되는 분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조상 탓하며 흙수저라서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포자기할 것인가? 구양서원의 염수당 편액을 보며 나는 ‘나의 조상을 생각하며 덕을 닦고’ 더불어 ‘복(福)을 짓자’는 생각을 했다.

고(故) 이근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16대 종손께서는 살아생전 ‘다른 사람을 칭찬하여 복을 짓는다’는 예인조복(譽人造福)의 가치를 전하셨다. 복은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사랑하여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악의적 괴담이 넘쳐나는 세상에 화담(和談)이 설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밥을 짓듯 복을 지어보기로 했다.


〈구양서원 숭절사〉


〈구양서원 숭절사 편액〉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지내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3-03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최산휘의 아들이 귀신에 홀리다”

김령, 계암일록, 1636-04-08 ~

1636년 4월 8일, 한참 동안 무섭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오늘은 돌아가신 선친의 생신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요새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내곤 하는데, 서울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이 그러했다. 또 『향교예집』이란 명나라 유학자의 책을 살펴보아도 모두 돌아가신 분의 생일날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러나 본래 생일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 퇴계 선생 역시 불가하다고 한 일이었다. 김령은 제사 대신 마음속으로 선친을 추념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오늘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다. 청송의 수령으로 부임해 있는 이는 최산휘라는 자였는데, 어느 날 초저녁에 아들이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리하여 사람을 풀어 사방으로 찾았는데, 임하에 있는 황산사란 절에 가 있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이 도깨비에 홀린 것 같다고 하였다. 하룻밤에 60리 길을 맨발로 걸어갔는데, 비가 그토록 쏟아지는데도 옷이 하나도 젖지 않았으며, 맨발인데도 발도 하나 다친 데가 없더라는 것이다. 이 최산휘의 아들은 이도창의 딸과 정혼한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이토록 정신 줄을 놓았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녕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는 것인가?

“흉흉한 괴소문, 사람의 쓸개를 모으는 자들이 있다!”

김령, 계암일록,
1607-05-20 ~ 1607-07-23

1607년 5월 20일, 근래 서울과 지방에서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어리석은 백성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5월 28일,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이 파다하여 길을 갈 때는 반드시 무리를 이루어 가고, 한두 사람은 감히 길을 가지 못한다니 또한 괴이한 일이다.

6월 2일, 아침에 듣자 하니, 최근에 사람의 쓸개를 모은다는 헛된 소문 때문에 관가에 소장(訴狀)을 올린 것을 이름하여 ‘비밀고장(秘密告狀)’이라 했다 한다. 내용 중에는 임금을 욕되게 하는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또 내세운 증인을 성주(城主)가 잡아 끌어와 발뒤꿈치를 쳐서 착고를 채워 가두고, 다음날 볼기 20대를 사납게 쳤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본성을 잃고 흉악하고 괴팍한 짓을 했으니 한탄한들 어찌하겠는가.

7월 21일, 이시(李蒔) 중립(中立)의 종의 배가 갈라졌다고 한다. 지극히 놀라운 일이다.

외천(外川)의 촌 아낙네가 목이 말라 들에서 물을 마셨는데, 그 맛이 짜서 초정(椒井)이라 생각했다. 이를 이야기하는 자가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바람에 원근에서 목욕은 하러 오지만 실제로는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제천 표숙이 외천에서 돌아온 뒤 이시의 아내가 어린 종을 시켜 온계(溫溪)로 가서 그녀의 모친이 속히 목욕하러 오도록 알렸다. 그런데 종이 돌아오는 길에 간악한 자의 꾐에 빠져 이러한 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천사(聖泉寺) 중이 마침 온천 소문을 듣고, 그의 부모에게 달려가 속히 목욕하러 오라고 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다. 아이종이 수풀 속에 쓰러져 있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았었다. 아이종이 말하길, 머리털이 반은 세었고, 패랭이를 포개어 쓴 생강 장수의 꾐에 넘어가 그를 따라 작은 고개 마루에 이르자, 밥을 먹이고 수건과 허리띠로 목을 졸라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배를 가르고 쓸개를 잘라 갔다고 했다. 그 아이종은 이 말을 마치고는 물을 마신 뒤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창자와 위가 어지럽게 파열되어 먹은 밥알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놀랍고 해괴한 일이었다.

이때 생강 장수들이 많이 이웃 고을에 왔는데, 마침 우리 현을 지나는 자들이 있어서 모두 잡아 가두었다. 2명은 증거가 없어서 바로 놓아주고, 1명이 잡혀 있었다. 그가 말린 쓸개를 가지고 와서 말했다. “질병으로 항상 웅담을 씹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의심했다. 그런데 이지(以志)가 수령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박중식(朴仲植)의 종으로 몇 년간 부렸는데, 1·2일 전에 임 참봉에게 웅담을 팔았습니다. 그의 행적은 만에 하나도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이에 수령이 그를 놓아주었다.

7월 23일, 오후에 자첨과 이지가 보러 왔다. 이야기한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이 문서를 가지고 이지가 있는 곳으로 왔다. 고을 수령의 전령(傳令)이었다.

그 내용은, 어제 풀어준 생강 장수가 아이종을 죽인 진짜 범인인데, 이지가 한 말을 믿고 경솔하게 놓아주었으니, 반드시 잡아 바치라는 것이었다.

유향소(留鄕所)에도 이와 같은 전령을 내렸다.

“장수 마을에서 계속 사망 소식이 전해지다”

장흥효, 경당일기, 1616-01-07

1616년 1월 7일, 장흥효가 살고 있는 안동의 어느 마을은 장수 마을로 유명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마을 어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유독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은 장수하기로 유명했다.

조선후기 평균 수명은 40세 전후로 오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40세는 말 그대로 평균만을 의미했을 뿐이다. 장흥효에게 있어서 평균은 크게 의미가 없었고 60세를 넘는 노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평균 수명과는 상관없이 마을 어른들이 많은 마을이 장수 마을이 될 수 있었다.

마을에는 60세 이상의 어른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그중에서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어른을 존로(尊老)라고 불렀다. 당시 장흥효가 살았던 마을의 존로는 부장(部將)을 지낸 이응복이었다. 그런데 존로의 부음(訃音) 소식을 전해 듣자 애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당시 마을 사람들의 사망 소식은 여럿 전해 듣고 있었지만 마을 존로의 부음은 그 자체로 마을의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수년간 다른 지역으로부터 존로가 가장 많아 장수하는 마을로 인식이 되었는데 근래 계속 존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니 더욱 슬프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웃 마을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다”

김령, 계암일록, 1630-03-15

1630년 3월 15일, 날씨가 맑았다. 밤이 되어 들으니 임후가 안동으로부터 예안에 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안동에서 저주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권상현이 지난 가을부터 병을 얻어서는 증세가 점차 심해지더니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을 수색해보니 사람 뼈와 함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여러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걸 보고 나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 저주는 반드시 권익봉이 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권익봉은 권씨 문중의 서얼이었다.

이 자가 이익으로 권상현의 종을 꾀어서 이와 같은 일을 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이 그 종을 가두어놓았다. 종은 갇힌 곳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는데, 이 역시 권익봉이 교사한 것이었다.

종이 죽자, 종의 부모를 포박하여 관아에 고하니, 종의 부모들이 ‘서얼 권익봉이 우리 자식을 꾀어 이런 요사스러운 저주를 하였다’고 모두 말하였다. 드디어 권익봉 부자를 포박하여 옥에 가두었는데, 권익봉은 자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권씨 일문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할 것 없이 모두 연명으로 소장을 관청에 올렸는데, 도촌의 좌수인 권오란 자가 우두머리였다. 권오는 나이가 이미 77세였는데, 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하여 수고로움을 사양치 않았으니 아름다운 일이라 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권익봉이 권상현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정말로 사소한 일이었다. 지난번 권상현이 삼계서원의 원장이 되었을 때, 권익봉이 오래도록 서원의 곡식을 갚지 않아 밀린 곡식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권상현이 이를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조금도 사적으로 봐주는 게 없었으니 이 일로 권익봉이 그를 크게 원망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흉악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신안 현감을 지낸 김중청이 또한 저주의 독을 맞고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집안에서 인골이 아주 많이 나왔는데, 그의 이복동생인 김득청의 소행이었다. 최근 김득청의 종 춘금이란 계집이 그 일을 김중청의 종에게 몰래 말하여 일이 발각되었다. 그러자 관아에서 이들을 포박하여 갔는데, 김득청의 아들은 곤장 한 대도 치기 전에 사실을 다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 아비인 김득청이 무덤을 파서 인골을 가져다 놓고 요사한 짓을 했다고 김득청의 셋째 아들과 두 종놈이 일일이 다 자복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해치는데 이런 해괴한 요술까지 동원하다니, 정말로 세상이 말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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