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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지역 의병항쟁과 의병장들의 문학

의병항쟁기 의병항쟁의 중심지 경북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개입하면서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 정책을 실시하였다. 개항 이래 대외적 독립과 대내적 근대화라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던 한국에서는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심화되었다. 특히 의병은 전기의병 봉기 후 1905년 중기의병, 1907년 후기의병 단계까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범민족적인 저항운동을 펼쳤다.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의병의 개념에 대해 박은식은 “의병은 민군이며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서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하는 자”라고 정의하였다. 요컨대, 의병은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무장항쟁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전기의병은 갑오개혁·을미사변 등에 대한 반발로 유학자 중심으로 반개화·반침략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농민·포수·동학교도 등 여러 계층이 합세하며 그 성격이 다양하게 변화해갔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이 일본의 실질상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서 의병은 국권 회복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경북지역의 경우 1896년 1월 17일 거의한 안동의진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창의하였다. 2월에는 김도현의 영양의진, 김우창의 영천의진이 합류하였고, 3월에는 금석주의 봉화의진, 서상렬의 호좌의진 등이 합류하며 군세를 키웠다. 전기의병기 경북지역의 의진들은 양반 유생들의 학문과 혈연에 기반한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강했다. 하지만 학문·혈연 외에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의진 상호 간에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안동의진과 청송의진의 연합 항전 등 각 지역의 의진들은 상호 협력과 지원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는 한편 회유책을 병행하며 각지에 선유사를 파견, 의병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각지의 유림의병들은 원래 의거의 목적이 대체로 ‘근왕정신’에 있었기에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직후 친일내각(제3차 내각)이 붕괴하고 단발령이 철회되자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청송의진 등 일부 경북지역 의진은 고종의 해산칙유에 따라 5월 25일 본진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까지 군사적 활동 외에도 외방장 아래 이속과 서기 등 행정 담당 요원과 면임과 집강 등 향촌 사회 유지들의 협조하에서 혼란기 행정 치안의 공백을 메꾸는 역할을 하였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한일의정서》〉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후 1904년 2월 개시된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체결, 그리고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이 이어지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봉기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본군은 서울로 들어와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였다. 결국, 일제의 강요 아래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의정서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발판이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세목(細目)’ 등을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더욱 가속하였다. 대한시설강령에서도 “‘외정(外政)’, ‘재정(財政)’을 감독하고 교통과 통신을 장악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토지를 일본군의 군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 기관을 군용으로 강제 수용하였고, 5월에는 한국과 러시아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하고, 철도 부설권과 통신망 가설권 등 경제적 이권은 일제가 차지하였다.


〈《신한민보》 287호 1913년 8월 29일자에 실린 《한일협약도》
그림의 왼쪽 아래에 ‘일본이 한황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이라고 기재하였다.〉 (출처: 독립기념관)


이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은 이에 반대하며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봉기한 대표적인 경북지역의 의병은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병이다. 산남의진은 의병의 규모와 성과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동 진군을 위한 통로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통해 전국의병의 연합작전을 유도하고 선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전기의병에 참여한 인물이 다수 포진되어 전기·중기·후기의병을 이어주는 연계성을 잘 보여주며 계몽운동 세력과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병항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진이다. 이외에도 1905년 의성 춘산에서 창의한 박연백의 의성·청송 지역 활동, 같은 해 영양에서 창의하여 청송·울진·진보 일대에서 활동한 이현규와 김대원, 1906년 이후 영양·청송 등지에서 김도현과 신돌석의 활동, 장수령·오누지전투, 산남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청송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활약한 박연백 등 경북지역의 의병은 의병항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시사를 탄식하며 「탄시사(歎時事)」를 지은 안동의진의 주역 김도현



〈의병장 김도현의 창의검과 자물쇠〉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의진을 대표하는 의병장 김도현은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대응하여 의병항쟁과 상소 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시사를 탄식한 「탄시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동구 풍랑은 이미 해를 넘기고
밤은 깊고 깊어 달마저 기울어
세상에 길이 많아 살 땅을 찾기 어렵구나
생령은 하소연할 길이 없어 아득히 하늘만 부르네
꽃 같은 강호에서 어찌 원하는 군대를 얻으리오
초야에서 부질없이 밝은 인연을 생각하며
구름 같은 오랑캐 속에 앉아 긴 한숨 쉬어보지만
조정에 가득한 소인들을 어찌할꼬


김도현은 이러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안동의진에 합류해 활동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도 의병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지만, 화적 토벌에 참여한 경험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일제에 체포된 후 근대학교인 영흥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나 향촌 사회로부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몸을 굽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찮아지자, 동해에 몸을 던졌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장손에게 다음과 글을 남겼다.

이제야 죽는데 어느 땅에서 죽을고
옛 나라에 남은 강토가 없으니
노중련이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었지만
밝은 달과 같이 오히려 빛나는구나


1914년 12월 23일, 김도현은 망국으로 인해 이 땅에 묻힐 곳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며 영덕군 대진리 관어대에 몸을 던졌다. 죽음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는 기개를 보여준 것이다.



최후의 순간 유시를 남긴 경북지역 의병항쟁의 상징 이강년



〈『운강선생창의일록』〉 (출처: (사)운강이강년의병대장기념사업회)


중·후기의병 조령·죽령 등 경북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인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을 지낸 무인이다. 1896년 전기의병이 봉기할 때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스승으로 섬기며 활동하였다. 전기의병 활동 이후 10여 년간 유교적 관념에 따른 충군애국의 정신을 견지하며 학문을 수양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7년,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이 중심된 민긍호의진과 함께 활동하며 충북·강원·경북 등 중부지방 일대를 비롯해 조령과 문경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1908년 6월 영월 사자산에서 원주 수비대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일대에서 활동이 여의찮아지자 잔여 의병을 이끌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던 중 청풍 금수산 기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강년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분전하였으나 발목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이때 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애잔한 시를 남겼다.

탄환이여 참으로 무정하도다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만약 심장에 맞았다면
욕보지 않고 저세상에 갔을 것을


체포된 직후 일본군이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이 제공하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이후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거의한 이유는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임을 글로 답했다. 1908년 9월 23일 평리원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3일 51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수감 중 자신이 살아온 역정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남겼다.

성패를 어찌 모름지기 말하리오
조용히 말한 바를 실천했네
붉은 마음 배양하여 징험하니
성조의 은혜 감읍하노라


조정의 충실한 신하이자, 선비로서 평소 강조한 의리와 명분을 실천하는 삶을 산 것에 대한 자부심과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다는 정신을 시에 표현한 것이다.

「신의관창의가(申議官倡義歌)」를 통해 의병항쟁을 기록한 의병장 신태식



〈문경에 있는 의병장 신태식의 생가〉 (출처: 지역N문화)


신태식은 1906년 문경의병에 합류한 이후 3년간 이강년과 함께 활동한 의병장이다. 의병항쟁 중 체포되어 1913년까지 복역하다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갔고 1922년에는 대한군정서 군자금 모금, 1925년에는 임시정부를 위한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신태식은 자신이 참여한 의병활동에 대해 「신의관창의가」라는 가사를 통해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1907년 죽령일대에서 벌어진 이강년의진의 전투를 확인할 수 있다.

토벌대 오백은 예천으로 넘어오고
수비대 사백 명은 원주·제천으로 덮어오고
마병대 백여 명은 충주·청풍 들어온다.
매바위 유진하고 철통같이 단속할 제
기호를 높이 달고 훤화를 일금하라

…(중략)…

사오일 지내도록 승패를 불분터니
칠십여 전 싸운 끝에 적병이 퇴진하네
군사를 수습하니 총 맞은 자 칠팔이라
적병을 수렴하니 수백 명이 사망일세


다소의 과장은 있지만 죽령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시가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의관창의가」는 의병항쟁의 접전지, 의병 모집, 주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가사문학을 넘어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다.

이처럼 의병장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자기 생각이나 각오 등을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으로 남겨 놓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집필자 소개

김항기
동국대학교에서 한국근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의병항쟁기 의병판결과 그 성격』, 「1896~1910년간 충청지역 의병판결과 의병의 대응」, 「대한제국기(1898~1908) 《제국신문》의 법제개혁론」 등이 있다. 의병항쟁과 개항 이후 재판제도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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