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개입하면서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 정책을 실시하였다. 개항 이래 대외적 독립과 대내적 근대화라는 당면과제를 안고 있었던 한국에서는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반제국주의 운동이 심화되었다. 특히 의병은 전기의병 봉기 후 1905년 중기의병, 1907년 후기의병 단계까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과정에서 범민족적인 저항운동을 펼쳤다.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의병의 개념에 대해 박은식은 “의병은 민군이며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義)로서 분기하여 조정의 징발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개하는 자”라고 정의하였다. 요컨대, 의병은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는 무장항쟁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전기의병은 갑오개혁·을미사변 등에 대한 반발로 유학자 중심으로 반개화·반침략 항쟁을 전개하였으나, 농민·포수·동학교도 등 여러 계층이 합세하며 그 성격이 다양하게 변화해갔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이 일본의 실질상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에서 의병은 국권 회복을 외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경북지역의 경우 1896년 1월 17일 거의한 안동의진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창의하였다. 2월에는 김도현의 영양의진, 김우창의 영천의진이 합류하였고, 3월에는 금석주의 봉화의진, 서상렬의 호좌의진 등이 합류하며 군세를 키웠다. 전기의병기 경북지역의 의진들은 양반 유생들의 학문과 혈연에 기반한 인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구성원 간의 유대감이 강했다. 하지만 학문·혈연 외에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의진 상호 간에 갈등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안동의진과 청송의진의 연합 항전 등 각 지역의 의진들은 상호 협력과 지원을 통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의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는 한편 회유책을 병행하며 각지에 선유사를 파견, 의병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에 각지의 유림의병들은 원래 의거의 목적이 대체로 ‘근왕정신’에 있었기에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 직후 친일내각(제3차 내각)이 붕괴하고 단발령이 철회되자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청송의진 등 일부 경북지역 의진은 고종의 해산칙유에 따라 5월 25일 본진이 해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까지 군사적 활동 외에도 외방장 아래 이속과 서기 등 행정 담당 요원과 면임과 집강 등 향촌 사회 유지들의 협조하에서 혼란기 행정 치안의 공백을 메꾸는 역할을 하였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한일의정서》〉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후 1904년 2월 개시된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체결, 그리고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이 이어지자 이에 저항하기 위해 봉기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일본군은 서울로 들어와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였다. 결국, 일제의 강요 아래 2월 23일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과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의정서는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발판이었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대한방침(對韓方針)’,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 ‘세목(細目)’ 등을 시행하도록 강요하였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이라며 한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더욱 가속하였다. 대한시설강령에서도 “‘외정(外政)’, ‘재정(財政)’을 감독하고 교통과 통신을 장악한다.”라고 명시하여 한국의 토지를 일본군의 군용지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3월 말에는 한국의 통신 기관을 군용으로 강제 수용하였고, 5월에는 한국과 러시아 간에 맺은 모든 조약을 폐기하고, 철도 부설권과 통신망 가설권 등 경제적 이권은 일제가 차지하였다.
〈《신한민보》 287호 1913년 8월 29일자에 실린 《한일협약도》
그림의 왼쪽 아래에 ‘일본이 한황을 위협ᄒᆞ야 됴약을 륵뎡’이라고 기재하였다.〉 (출처: 독립기념관)
이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은 이에 반대하며 전국적으로 봉기하였다.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봉기한 대표적인 경북지역의 의병은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병이다. 산남의진은 의병의 규모와 성과가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동 진군을 위한 통로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통해 전국의병의 연합작전을 유도하고 선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전기의병에 참여한 인물이 다수 포진되어 전기·중기·후기의병을 이어주는 연계성을 잘 보여주며 계몽운동 세력과 대립적이지 않고 상호보완적인 상황에 있었다는 점에서 의병항쟁사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의진이다. 이외에도 1905년 의성 춘산에서 창의한 박연백의 의성·청송 지역 활동, 같은 해 영양에서 창의하여 청송·울진·진보 일대에서 활동한 이현규와 김대원, 1906년 이후 영양·청송 등지에서 김도현과 신돌석의 활동, 장수령·오누지전투, 산남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청송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활약한 박연백 등 경북지역의 의병은 의병항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의병장 김도현의 창의검과 자물쇠〉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안동의진을 대표하는 의병장 김도현은 일제의 한국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대응하여 의병항쟁과 상소 운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며 시사를 탄식한 「탄시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동구 풍랑은 이미 해를 넘기고
밤은 깊고 깊어 달마저 기울어
세상에 길이 많아 살 땅을 찾기 어렵구나
생령은 하소연할 길이 없어 아득히 하늘만 부르네
꽃 같은 강호에서 어찌 원하는 군대를 얻으리오
초야에서 부질없이 밝은 인연을 생각하며
구름 같은 오랑캐 속에 앉아 긴 한숨 쉬어보지만
조정에 가득한 소인들을 어찌할꼬
김도현은 이러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안동의진에 합류해 활동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에도 의병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지만, 화적 토벌에 참여한 경험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일제에 체포된 후 근대학교인 영흥학교 교장에 취임했으나 향촌 사회로부터 일신의 안위를 위해 몸을 굽혔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려 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찮아지자, 동해에 몸을 던졌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장손에게 다음과 글을 남겼다.
이제야 죽는데 어느 땅에서 죽을고
옛 나라에 남은 강토가 없으니
노중련이 죽은 지 수천 년이 되었지만
밝은 달과 같이 오히려 빛나는구나
1914년 12월 23일, 김도현은 망국으로 인해 이 땅에 묻힐 곳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며 영덕군 대진리 관어대에 몸을 던졌다. 죽음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고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는 기개를 보여준 것이다.
〈『운강선생창의일록』〉 (출처: (사)운강이강년의병대장기념사업회)
중·후기의병 조령·죽령 등 경북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인 이강년은 1880년 무과에 합격하여 선전관을 지낸 무인이다. 1896년 전기의병이 봉기할 때 고향인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스승으로 섬기며 활동하였다. 전기의병 활동 이후 10여 년간 유교적 관념에 따른 충군애국의 정신을 견지하며 학문을 수양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7년,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이 중심된 민긍호의진과 함께 활동하며 충북·강원·경북 등 중부지방 일대를 비롯해 조령과 문경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1908년 6월 영월 사자산에서 원주 수비대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고 이 일대에서 활동이 여의찮아지자 잔여 의병을 이끌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이동하던 중 청풍 금수산 기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강년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분전하였으나 발목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이때 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애잔한 시를 남겼다.
탄환이여 참으로 무정하도다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만약 심장에 맞았다면
욕보지 않고 저세상에 갔을 것을
체포된 직후 일본군이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이 제공하는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이후 일본군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을 때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며 자신의 거의한 이유는 도탄에 빠진 생민을 구하고자 함임을 글로 답했다. 1908년 9월 23일 평리원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3일 51세를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수감 중 자신이 살아온 역정을 기억하며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남겼다.
성패를 어찌 모름지기 말하리오
조용히 말한 바를 실천했네
붉은 마음 배양하여 징험하니
성조의 은혜 감읍하노라
조정의 충실한 신하이자, 선비로서 평소 강조한 의리와 명분을 실천하는 삶을 산 것에 대한 자부심과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다는 정신을 시에 표현한 것이다.
〈문경에 있는 의병장 신태식의 생가〉 (출처: 지역N문화)
신태식은 1906년 문경의병에 합류한 이후 3년간 이강년과 함께 활동한 의병장이다. 의병항쟁 중 체포되어 1913년까지 복역하다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에도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갔고 1922년에는 대한군정서 군자금 모금, 1925년에는 임시정부를 위한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신태식은 자신이 참여한 의병활동에 대해 「신의관창의가」라는 가사를 통해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1907년 죽령일대에서 벌어진 이강년의진의 전투를 확인할 수 있다.
토벌대 오백은 예천으로 넘어오고
수비대 사백 명은 원주·제천으로 덮어오고
마병대 백여 명은 충주·청풍 들어온다.
매바위 유진하고 철통같이 단속할 제
기호를 높이 달고 훤화를 일금하라
…(중략)…
사오일 지내도록 승패를 불분터니
칠십여 전 싸운 끝에 적병이 퇴진하네
군사를 수습하니 총 맞은 자 칠팔이라
적병을 수렴하니 수백 명이 사망일세
다소의 과장은 있지만 죽령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시가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신의관창의가」는 의병항쟁의 접전지, 의병 모집, 주민들과의 관계 등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가사문학을 넘어 사료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기록물이다.
이처럼 의병장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자기 생각이나 각오 등을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으로 남겨 놓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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