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는 서예가라는 말이 그렇게 편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캘리그라퍼라는 최근의 용어에도 썩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말해야겠다. 붓글씨를 써서 특별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려는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서실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운 것은 30년 넘는 기간이 흘렀지만 나는 다만 생활의 필요한 곳에 글씨 쓰는 재주를 활용하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다.
젊은 날 교직에 있으면서 틈틈이 글을 쓰거나 붓을 들곤 했고 퇴직 후 10여 년 붓을 잡은 시간이 좀 많아진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전시를 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지향보다는 시민단체의 요구와 나의 요구가 맞물리는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인연들로 인해 몇몇 책의 제호나 묘비명 등에 글씨를 쓰기도 했고 공공기관과 공원에도 몇 개의 서예 작품을 걸게 되었다. 시인 한 사람의 시만을 가지고 전시를 했던 것은 2023년 송찬호의 시를 써서 연 붓글씨 전인데 이것 역시 생활인의 글씨 전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육사의 시를 붓글씨로 써서 전시하자는 제안은 내 능력으로 좀 벅찬 제안이었다. 이육사의 시를 써서 글씨 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이육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컸다.
2015년 동북 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기행의 여정은 대체로 이육사에게 의열단 가입을 권유했던 윤세주의 활동 무대와 순절지였다. 태항산 자락의 십자령과 장자령 그리고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대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다. 마지막 일정은 이육사가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북경 형무소였다. 그 기행을 통해 이육사를 둘러싼 인물들의 네트워크와 활동의 개략을 알 수 있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친구였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의 동지로 살다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사람이다. 그의 권유로 이육사가 입교한 조선정치군사간부학교는 남경에 있었고 거기서 6개월의 훈련을 받는다. 당시 교장이 김원봉이었고 윤세주는 교관이었다. 이육사는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위 전사로 길러진 것이다. 간부학교의 학생들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한 지식인이었고 졸업 후 대중 조직, 선무활동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활약했다.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서로의 본명도 몰랐던 그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문서를 남기지 않았고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 전모가 지금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이육사 역시 시를 쓰고 언론 활동을 한 작가였지만 그가 의열단이었다는 사실은 주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육사가 의열단이었다는 것, 조선정치군사간부학교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기행을 갔던 2015년은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이 개봉되어 한 달 만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던 때이기도 하다.
저항시인 또는 민족시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육사 시인의 시를 붓글씨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곧 그의 정신세계 가치를 글씨의 형태와 구성으로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부족한 대로 그에 관해 공부한 지식이 있었다. 이육사 관련 동북 기행을 다녀온 다음 해 이육사 문학관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쓰기 위해 좀 더 공부의 시간을 가졌다.
중등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이육사의 시 《청포도》·《광야》·《절정》 등 몇몇 시를 가르치는 것 외에 특별히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전국의 문학관을 답사하고 기행 에세이(졸저 『시로 만든 집 14채』)를 쓰면서 이육사 관련 논문과 책을 몇 권 읽고 정리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나에게 ‘시와 다이나마이트를 동시에 가슴에 품은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도구였으리라.
수인번호 ‘264’를 이름으로 삼은 것도 그러하다. 시로 권력이나 명예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며 자기 한 몸뚱어리 하나 편안하게 하려고 시를 쓴 것도 아니다. 최소한 자신의 가문에서 이어진 선비적 가치 또는 공맹(孔孟)의 맥락에 닿아있는 유가의 지사적 정신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랐을까. 민족 단위의 총체적 압살 상태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그 무엇이 있었을까.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이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생각 저변에 깔려있었을지 모르겠다. 이육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경도가 강력하다. 이육사는 죽을 때까지 공적 삶에 자신을 밀어 넣었고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들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을 위험 속에 두고자 했다. 그러한 세계관과 정서를 가진 사람의 시를 글씨로 쓴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접근이 가능할까?
내가 붓글씨 공부를 하면서 집중했던 것은 신영복의 “쇠귀 민체”다. 배우는 기본적인 과정으로 안진경·구양순·왕희지 등의 서체·전서·예서·해서·행서 등의 서체들을 공부하다가 우연히 신영복의 글씨를 만나 거기에 마음을 두었다. 대학원에서 쇠귀 민체를 분석하며 논문을 쓰기 전부터, 그러니까 25년 이상 쇠귀 신영복 민체를 써왔다. 살아있는 사람의 글씨를 분석하는 일은 제한적 연구일 수밖에 없다. 글씨의 주체가 계속해서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기에 작가의 전체 작품을 놓고 분석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대체로 붓글씨 작가로서 신영복의 글씨라는 관점보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을 위해 그가 글씨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점에 바탕을 두고 그의 글씨를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씨보다 글씨와 시대의 상관관계 그리고 현실적 실용의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고 나도 내가 처한 위치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만들며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담긴 글씨를 쓰는 데 마음을 두었다. 문화 행사나 집회의 현장에서 깃발과 피켓 쓰기 등 글씨를 써먹는데 더 집중하고자 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용어지만 문학에는 참여문학이라는 말이 있다. 서예도 그렇게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일에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틈나는 대로 그런 일을 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곳,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곳, 산업재해를 다루는 곳, 그리고 전태일·노무현·김남주·고정희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서 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나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붓으로 썼다. 글씨 벗들을 가르치고 모아 여럿이 함께 하려고 했다. 나에게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쇠귀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감형되어 20년 형을 살고 출옥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통일혁명당의 조직원으로서 재판을 받고 투옥되어 그의 기획은 실패했지만 글과 붓글씨로 그는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편지글을 책으로 펴내 널리 알려졌고 감옥에 있는 동안 붓글씨를 연마하여 한글의 새로운 서체를 선보였던 것이다. 그가 만든 “쇠귀 민체”, 그것은 이전의 모든 글씨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서체였다. 그리고 7-80년대라는 시대의 가치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저항과 연대의 감성을 담아낸 글씨로서 글씨에 시대정신과 사상을 반영한 최초의 글씨라고 할 수도 있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신영복의 그 독특한 서체를 나는 “쇠귀 민체”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쇠귀 민체는 형태상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장에서 활용하기 좋았다. 쇠귀의 삶 자체가 첨단의 사상이었고, 시대의 억압과 안온에 균열을 가하는 망치였다. 쇠귀 민체의 획은 격렬함과 건강한 불안의 파장을 일으키며 떨고 있는 운필이다. 변화에 대한 갈망을 담아 돌진하는 서체이다. 신영복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꿈꾼 사람이었으며 그 대가로 20년의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 감성을 가진 서체, 쇠귀 민체’가 탄생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민중적 감성에 가까이 다가간 서체다.
이육사의 시.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자 온몸으로 저항하던 독립운동가의 시를 첨단의 시대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던 혁명가의 글씨체로 쓴다는 것.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전시였다. 나 자신을 서예가로 자리매김하기보다 생활인의 마음으로 그저 소소한 쓸모가 있기를 바라며 글씨를 써온 사람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20여 년이 지날 즈음부터 조금씩 글씨의 미학적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 이육사 시를 그것도 전편을 붓으로 써야 한다는 과제 상황에 놓여 있게 된 것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것이나 또는 그 반대로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것, 우리 민족을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 그것은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의 역정에 서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 영역의 정서와 감성을 알 수 없다. 공포와 불안과 고독일까? 아니면 심리적 평정 상태일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일에 기꺼이 목숨을 걸 각오가 가능한 감성을 가지고 있던 걸까? 목숨을 건 동지들과의 결연한 연대감으로 정서적 충만 상태에 있는 걸까? 나는 어떤 것에도 목숨을 걸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정서에 다가가기 어렵다. 그러한 감성 없이 쇠귀 민체로 이육사의 시를 쓴다는 것,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손으로 쓴다. 쓰다 보면 그들이 감성이 나에게 올까?
글씨 자체에 대한 탐미적 관점보다 글씨가 내 삶의 어디에, 우리 사회 공동체의 어느 곳에 쓰일 수 있을까에 집중하며 30여 년 붓을 가지고 지내다 보니 어떤 촉이 생기는 것 같기는 하다. 물론 글씨의 풍부한 표현력을 갖추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쓰임에 급급해 왔다. 그런 중에서 계속하여 붓을 쥐고 하얀 평면 위에 머물다 보니 서체의 다양성에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획과 자형과 기울기의 작은 변화에도 풍부한 정서가 발현될 수 있다는 느낌 말이다. 지난번 송찬호의 시를 쓰면서 시도했던 다양한 감성 표현이 한걸음 진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번 이육사의 시를 쓰면서 좀 더 섬세하게 다양한 변주를 하고 싶었다. 시의 느낌이 글씨로 전환될 때 그 시가 담고 있는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서체가 가능해지기를 꿈꾸면서 말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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