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이육사의 시를 쇠귀 민체로 쓴다는 것



우선 나는 서예가라는 말이 그렇게 편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렇다고 캘리그라퍼라는 최근의 용어에도 썩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먼저 말해야겠다. 붓글씨를 써서 특별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려는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서실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운 것은 30년 넘는 기간이 흘렀지만 나는 다만 생활의 필요한 곳에 글씨 쓰는 재주를 활용하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다.

젊은 날 교직에 있으면서 틈틈이 글을 쓰거나 붓을 들곤 했고 퇴직 후 10여 년 붓을 잡은 시간이 좀 많아진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전시를 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지향보다는 시민단체의 요구와 나의 요구가 맞물리는 현장을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인연들로 인해 몇몇 책의 제호나 묘비명 등에 글씨를 쓰기도 했고 공공기관과 공원에도 몇 개의 서예 작품을 걸게 되었다. 시인 한 사람의 시만을 가지고 전시를 했던 것은 2023년 송찬호의 시를 써서 연 붓글씨 전인데 이것 역시 생활인의 글씨 전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이육사의 시를 붓글씨로 써서 전시하자는 제안은 내 능력으로 좀 벅찬 제안이었다. 이육사의 시를 써서 글씨 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이육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컸다.



2015년 동북 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기행의 여정은 대체로 이육사에게 의열단 가입을 권유했던 윤세주의 활동 무대와 순절지였다. 태항산 자락의 십자령과 장자령 그리고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대의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다. 마지막 일정은 이육사가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북경 형무소였다. 그 기행을 통해 이육사를 둘러싼 인물들의 네트워크와 활동의 개략을 알 수 있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친구였으며, 평생을 독립운동의 동지로 살다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사람이다. 그의 권유로 이육사가 입교한 조선정치군사간부학교는 남경에 있었고 거기서 6개월의 훈련을 받는다. 당시 교장이 김원봉이었고 윤세주는 교관이었다. 이육사는 조선 민족의 해방을 위한 전위 전사로 길러진 것이다. 간부학교의 학생들은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한 지식인이었고 졸업 후 대중 조직, 선무활동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활약했다. 여러 개의 가명을 쓰며 서로의 본명도 몰랐던 그들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문서를 남기지 않았고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 전모가 지금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았다.

이육사 역시 시를 쓰고 언론 활동을 한 작가였지만 그가 의열단이었다는 사실은 주위의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육사가 의열단이었다는 것, 조선정치군사간부학교를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기행을 갔던 2015년은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이 개봉되어 한 달 만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던 때이기도 하다.



저항시인 또는 민족시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이육사 시인의 시를 붓글씨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곧 그의 정신세계 가치를 글씨의 형태와 구성으로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부족한 대로 그에 관해 공부한 지식이 있었다. 이육사 관련 동북 기행을 다녀온 다음 해 이육사 문학관을 방문하고 기행문을 쓰기 위해 좀 더 공부의 시간을 가졌다.

중등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이육사의 시 《청포도》·《광야》·《절정》 등 몇몇 시를 가르치는 것 외에 특별히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전국의 문학관을 답사하고 기행 에세이(졸저 『시로 만든 집 14채』)를 쓰면서 이육사 관련 논문과 책을 몇 권 읽고 정리하기도 했다. 이육사는 나에게 ‘시와 다이나마이트를 동시에 가슴에 품은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도구였으리라.

수인번호 ‘264’를 이름으로 삼은 것도 그러하다. 시로 권력이나 명예를 얻고자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며 자기 한 몸뚱어리 하나 편안하게 하려고 시를 쓴 것도 아니다. 최소한 자신의 가문에서 이어진 선비적 가치 또는 공맹(孔孟)의 맥락에 닿아있는 유가의 지사적 정신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랐을까. 민족 단위의 총체적 압살 상태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는 것?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그 무엇이 있었을까. 당시 유행했던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의 관점으로 이 세계의 질서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의 생각 저변에 깔려있었을지 모르겠다. 이육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경도가 강력하다. 이육사는 죽을 때까지 공적 삶에 자신을 밀어 넣었고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들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자신을 위험 속에 두고자 했다. 그러한 세계관과 정서를 가진 사람의 시를 글씨로 쓴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접근이 가능할까?

내가 붓글씨 공부를 하면서 집중했던 것은 신영복의 “쇠귀 민체”다. 배우는 기본적인 과정으로 안진경·구양순·왕희지 등의 서체·전서·예서·해서·행서 등의 서체들을 공부하다가 우연히 신영복의 글씨를 만나 거기에 마음을 두었다. 대학원에서 쇠귀 민체를 분석하며 논문을 쓰기 전부터, 그러니까 25년 이상 쇠귀 신영복 민체를 써왔다. 살아있는 사람의 글씨를 분석하는 일은 제한적 연구일 수밖에 없다. 글씨의 주체가 계속해서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기에 작가의 전체 작품을 놓고 분석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나는 대체로 붓글씨 작가로서 신영복의 글씨라는 관점보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념을 위해 그가 글씨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점에 바탕을 두고 그의 글씨를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씨보다 글씨와 시대의 상관관계 그리고 현실적 실용의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고 나도 내가 처한 위치에서 다양한 방법을 찾고 만들며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의 요구가 담긴 글씨를 쓰는 데 마음을 두었다. 문화 행사나 집회의 현장에서 깃발과 피켓 쓰기 등 글씨를 써먹는데 더 집중하고자 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용어지만 문학에는 참여문학이라는 말이 있다. 서예도 그렇게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일에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틈나는 대로 그런 일을 했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곳,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곳, 산업재해를 다루는 곳, 그리고 전태일·노무현·김남주·고정희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편에서 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나 그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붓으로 썼다. 글씨 벗들을 가르치고 모아 여럿이 함께 하려고 했다. 나에게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쇠귀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일명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감형되어 20년 형을 살고 출옥한 사람이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던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통일혁명당의 조직원으로서 재판을 받고 투옥되어 그의 기획은 실패했지만 글과 붓글씨로 그는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 특히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편지글을 책으로 펴내 널리 알려졌고 감옥에 있는 동안 붓글씨를 연마하여 한글의 새로운 서체를 선보였던 것이다. 그가 만든 “쇠귀 민체”, 그것은 이전의 모든 글씨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서체였다. 그리고 7-80년대라는 시대의 가치와 그 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저항과 연대의 감성을 담아낸 글씨로서 글씨에 시대정신과 사상을 반영한 최초의 글씨라고 할 수도 있다.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신영복의 그 독특한 서체를 나는 “쇠귀 민체”라고 이름하고자 한다.

쇠귀 민체는 형태상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현장에서 활용하기 좋았다. 쇠귀의 삶 자체가 첨단의 사상이었고, 시대의 억압과 안온에 균열을 가하는 망치였다. 쇠귀 민체의 획은 격렬함과 건강한 불안의 파장을 일으키며 떨고 있는 운필이다. 변화에 대한 갈망을 담아 돌진하는 서체이다. 신영복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꿈꾼 사람이었으며 그 대가로 20년의 감옥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혁명적 감성을 가진 서체, 쇠귀 민체’가 탄생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이후 가장 민중적 감성에 가까이 다가간 서체다.

이육사의 시.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자 온몸으로 저항하던 독립운동가의 시를 첨단의 시대정신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가던 혁명가의 글씨체로 쓴다는 것. 나에게 새로운 전기가 될 전시였다. 나 자신을 서예가로 자리매김하기보다 생활인의 마음으로 그저 소소한 쓸모가 있기를 바라며 글씨를 써온 사람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20여 년이 지날 즈음부터 조금씩 글씨의 미학적 세계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 이육사 시를 그것도 전편을 붓으로 써야 한다는 과제 상황에 놓여 있게 된 것이었다.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것이나 또는 그 반대로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것, 우리 민족을 다른 민족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것, 그것은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삶의 역정에 서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 영역의 정서와 감성을 알 수 없다. 공포와 불안과 고독일까? 아니면 심리적 평정 상태일까?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일에 기꺼이 목숨을 걸 각오가 가능한 감성을 가지고 있던 걸까? 목숨을 건 동지들과의 결연한 연대감으로 정서적 충만 상태에 있는 걸까? 나는 어떤 것에도 목숨을 걸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정서에 다가가기 어렵다. 그러한 감성 없이 쇠귀 민체로 이육사의 시를 쓴다는 것,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손으로 쓴다. 쓰다 보면 그들이 감성이 나에게 올까?



글씨 자체에 대한 탐미적 관점보다 글씨가 내 삶의 어디에, 우리 사회 공동체의 어느 곳에 쓰일 수 있을까에 집중하며 30여 년 붓을 가지고 지내다 보니 어떤 촉이 생기는 것 같기는 하다. 물론 글씨의 풍부한 표현력을 갖추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쓰임에 급급해 왔다. 그런 중에서 계속하여 붓을 쥐고 하얀 평면 위에 머물다 보니 서체의 다양성에 조금씩 눈을 떠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획과 자형과 기울기의 작은 변화에도 풍부한 정서가 발현될 수 있다는 느낌 말이다. 지난번 송찬호의 시를 쓰면서 시도했던 다양한 감성 표현이 한걸음 진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번 이육사의 시를 쓰면서 좀 더 섬세하게 다양한 변주를 하고 싶었다. 시의 느낌이 글씨로 전환될 때 그 시가 담고 있는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서체가 가능해지기를 꿈꾸면서 말이다.




집필자 소개

김성장 (세종손글씨연구소 대표)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교사 재직 중 우리나라 최초의 중고등 학생 토론 수업 사례집 『모둠토의수업 방법 10가지』를 출간했다. 1988년 문학동인 『분단시대』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 『서로다른 두 자리』,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등을 냈다. 중고생을 위한 정지용 시 해설서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과 시인들의 문학관 기행서 『시로 만든 집 14채』를 썼다. 대학원에서 서예문화를 전공했고 석사 논문 『신영복 한글 서예의 사회성 연구』를 썼다. 김남주, 전태일, 노무현, 고정희, 세월호 등을 주제한 단체 서예전을 기획하였으며 송찬호의 시를 소재로 하여 《모란타투》 전 이육사 시인의 시를 붓으로 쓴 《노랑나븨도 오쟎는 무덤 우에 이끼만 푸르리라》 등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국가대표선수촌(진천)과 문재인 대통령 어록과 신경림 시인 묘지명 글씨를 썼다.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