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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무대와 만나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휩쓸려 간
북방에서 쓴 대본


이육사는 생전에 단 한 편의 희곡을 썼다. 제목은 《지하실》. 이육사는 흔히 저항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항일 활동은 저항이라는 단어로는 다 못 담을 스케일을 지녔다. 학창 시절 그의 시 《광야》나 《절정》을 읽으며 시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 놀라면서도 이 시로 어떻게 일제의 폭압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시인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으로 가득한 시를 통해 누군가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독립을 꿈꾸었다니, 옛날 사람들의 문해력은 우리 때와 현저히 다른가보다 싶었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독립운동을 했으며 그것도 절대 가볍지 않다. 남은 것이 글뿐이고 그중에 시를 가장 높이 쳐서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의 행적을 보면 본업이 독립운동가였고 시는 긴장감 팽팽했던 그의 인생에 유일하게 ‘일상’을 부여하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의 시는 잘 알려졌지만, 산문인 수필은 시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모호한 단어들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시각적·촉각적 상상력으로 채워진 시와 달리 그의 수필은 직설적으로 사회주의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라면 연좌제로 직업조차 갖지 못했던 길고 긴 서슬 퍼렇던 시절 동안 그가 지닌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없던 것처럼 지워지고 오로지 그의 시만을 기리며 ‘저항시인’이라고 이름하였기에 수험생의 머릿속에 이육사는 뜨고 남은 실처럼 어지럽게 엉켰다. 온전하지 못한 교육은 물음표만 더할 뿐이다.


〈중국 난징시의 톈닝사.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3기생이 훈련받은 장소로 알려졌다.〉 (출처: 독립기념관)


그런 이육사가 살아생전 남긴 단 한 편의 희곡이 《지하실》이다. 이육사는 1932년 10월 22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들어가 6개월동안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33년 4월 20일에 졸업했다. 《지하실》은 그 졸업식에서 공연된 세 편의 연극 중 하나였고 이육사 본인이 직접 배우로 나서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공연된 온전한 형태의 공연이라기보다는 짧은 시간 공연되는 콩트 형태의 단막극으로 추정된다.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여흥으로 올려졌지만 《지하실》의 내용은 여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좌: 한복을 입은 이육사 선생, 우: 윤세주 선생〉 (출처: 좌: 이육사문학관, 우: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한민족 독립운동 자료』 가운데 의열단을 다룬 28권~31권 중 31권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경성의 모 공장 지하실의 어두운 방에서 노동자 일동이 일하고 있는데 라디오 방송으로 ‘모월 모일 우리 조선 혁명이 성공하다.’라는 보도가 있고,
계속하여 ‘지금 용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지금 평양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지금 부산의 모 공장을 점령하였다’든가 하는 방송을 해오고
마침내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는 국유로 되어서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식당, 일터, 주거 등이 노동자 등에게 각각 지정되어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으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하며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고창하고 폐막하였다.

김공신(金公信) 신문조서 제2회,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자료 31권 1997, 149-150쪽.

조선혁명이 완수되는 마지막 단계를 그린 작품의 제목이 《지하실》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고 경성[서울]이 혁명 완수의 마지막 거점이 된다는 사실 또한 그러하다. 민중혁명이 무력성을 띤 것 또한 그가 사회주의 혁명을 깊이 마음속에 새긴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당시 지식인이라면 사회주의자가 아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심지어 낭만이기조차 했다.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퇴계 이황은 성리학자였고 성리학은 임금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를 굳건하게 하는 학문이지만 이육사는 사회주의자였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힌 조선을 해방 시키며 동시에 임금을 떠받드는 낡은 질서도 한 방에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을 해방 시킬 방법은 오로지 사회주의 혁명뿐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에는 가장 모범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대상인 러시아가 눈앞에 있었다.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이육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주의는 자신이 태어난 계급이 주는 이익에 복종하는 자가 아니라면 식민지 조선을 봉건제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 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처럼 보였을 것이다.


〈안동에 위치한 이육사 문학관〉 (출처: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는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 남으라는 윤세주의 제안을 거절하고 조선에 돌아가 노동자를 교육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결심으로 귀국하지만, 이듬해 처남 안병철의 밀고 때문에 1·2기 졸업생 중 국내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잡혀가면서 좌절되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이육사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에 따르면 안병철은 배우처럼 잘생기고 훤칠하며 남자다웠다고 한다. 안병철은 부끄러운 행동을 했지만 부끄러움을 알았다. 당시 일제가 행했던 가장 흔한 고문 가운데 하나가 대나무를 거칠게 흩어 다리 사이에 끼우고 앉힌 뒤 대나무를 빼내는 고문이었다고 한다. 안병철도 고문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었다. 그는 고문 앞에 약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을 보여주지만, 그 사실을 뻔뻔하게 덮고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끈질기게 따라붙은 순사들의 심문을 견딜 재간이 없어 자신이 아는 모든 인물의 명단을 실토하면서 이육사와는 연이 끊겼다.

하지만 그가 부끄러움을 알았다고 해서 이육사가 그를 용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이 잡혀간 사실만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명단을 넘겼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라는 데서 오는 회한이 컸을 테니. 이후 이육사는 자신의 주변 누구도 독립운동에 끌어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했던 형이나 동생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일언반구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되풀이되는 옥고 끝에 이육사의 건강은 계속 나빠졌다. 이육사는 석방된 후 글쟁이를 업으로 삼는다. 마치 혁명은 때려치우고 시인으로 살기로 했다고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듯이 그는 1935년에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로 등단했다. 제목만으로 벌써 아름다운 이 시를 내놓은 후 그는 《해조사》·《노정기》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1939년에는 《절정》·《청포도》 등이 나왔다.

하지만 일제는 그를 시인으로 보지 않았다. 1934년 7월 20일, 일경이 보고한 『이원록 소행 조서』에 따르면 이육사는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나와 있으며 이 소견은 철회된 적이 없다. 이육사는 1943년 일본이 패망으로 향할 때 북경으로 향했다. 이때 망명했다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위험한 것이었다. 어머니와 형님의 소상을 치르기 위해 국내에 들어온 그는 바로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됐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평생 17번의 옥고를 치렀다고 알려진 그도 마지막 17번째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재)세계유교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뮤지컬 이육사》(2019)의 한 장면〉 (출처: 국민일보)


그가 남긴 《지하실》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야기로만 남았을 뿐이지만 남겨진 이야기 속 줄거리에서도 극으로서의 재미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유려한 언어로 이루어진 대사와 전개가 궁금하다. 가장 멋진 공연은 늘 상상 속의 공연이기에.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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