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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예술과 문학으로 꽃피우다

예술과 문학은 일제 식민 지배의 억압속에서 민족의 영혼을 지키고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씨앗이 되었고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예술과 문학의 꽃을 피웠습니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과 독립에 대한 갈망을 시(詩)로 담은 《님의 침묵》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극예술연구회의 연극 활동, 일제의 억압과 민족의 문화를 그림에 담은 나혜석과 이중섭, 수많은 무명의 독립군들이 짓고 부른 독립 군가들과 정율성의 항일 음악 등 이루 헤아리기 힘든 정도입니다.

유별나게 길고 무더웠던 올해의 여름은 광복 79년을 품고서 가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남(嶺南)과 안동은 특히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의열단과 신간회 활동, 3.1운동과 학생 독립운동 등 다양한 운동이 활발하고 꾸준하게 진행되어온 곳입니다. 《청포도》와 《광야》를 통해 독립에 대한 열망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순국한 이육사 시인의 생애와 작품은 예술과 문학으로 꽃피운 독립운동의 소중한 사례입니다. 그 소중함을 되새기며 저희 웹진 《담談》은 ‘예술과 문학을 통한 독립운동’을 주제로서 이번 호를 기획했습니다.

김항기 선생님의 「경북지역 의병항쟁과 의병장들의 문학」은 의병항쟁기 저항의 중심지로서의 경북지역이 지니는 의미를 톺아봅니다. 그 저항운동과 함께 하며 시사를 탄식하며 「탄시사(歎時事)」를 지은 안동의진의 주역 김도현, 최후의 순간 유시를 남긴 경북지역 의병항쟁의 상징 이강년, 「신의관창의가」를 통해 의병항쟁을 기록한 의병장 신태식의 생애와 작품을 펼쳐줍니다.

김성장 작가님의 「이육사의 시를 쇠귀 민체로 쓴다는 것」은 저항시인 또는 민족시인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지는 이육사 시인의 시를 붓글씨로 형상화하는 것은 곧 그의 정신 세계 가치를 글씨의 형태와 구성으로 담아내는 작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의 느낌이 글씨로 전환될 때, 그 시가 담고 있는 느낌을 담을 수 있는 서체가 가능해지기를 꿈꾸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은경 작가님은 「팔원(八阮)」에서 백석 시인의 시(詩)를 웹툰 작품으로 그려 주셨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몇 해를 내지인의 집에서 밥짓고 걸레를 치다 묘향산 어디메 삼촌 집에 가려고 승합자동차에 오른,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터진 어린 계집아이와 거기에 있는 백석 시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웹툰은 내년으로 다가온 광복 8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특집 만화입니다.

이수진 작가님은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휩쓸려 간 북방에서 쓴 대본」에서 이육사 시인이 쓴 희곡 《지하실》에 관한 소개를 통해 조선혁명을 꿈꾸던 시인이 17번의 옥고를 치르던 고난에 찬 독립운동과 생애, 그리고 창작 활동을 둘러싼 맥락을 펼쳐 보여줍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은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망허산 동굴을 한밤중에 찾은 백이와 목금이의 모험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달이 밝아서 가는 길은 편하고 가을이면서 아직 추울 정도는 아니어서 도깨비나 요정들도 나타나지 않은 숲 속을 동행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소녀가 망허산 동굴에서 도대체 누굴 만나게 될까요.

이번 호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임하(臨河)에서 독립을 외치다, 하락정(河落亭)」에서는 유교 개혁론자로서 활동을 하며 협동학교를 세워 운영한 류인식, 근대식 학교인 봉양서숙(鳳陽書塾)과 인곡서당을 설립한 송기식을 소개합니다. 1945년 8월 봄, 68세의 송기식은 책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인곡서당이 있던 안동시 남선면 자리에 독립의 씨앗이 되는 하락정을 건립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작가들은 식민지 시대의 상황과 지역적, 사회적 관계로 구성된 공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생애와 활동, 고통과 세계관이 예술과 문학으로 꽃피운 것입니다. 그 꽃이 맺은 열매와 씨앗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어 지금의 우리의 가슴과 가슴에 전해지는 것은 그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고 하늘이 눈부시게 푸른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풍요로운 결실을 거두는 가을을 저희 웹진 《담談》 편집위원들은 독자분들과 함께 기다려 봅니다.




편집자 소개

공병훈
서강대학교에서 미디어경제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자와 대중을 연결하는 독립언론 《반디뉴스》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유혹하는가?』, 『4차 산업혁명 상식사전』 등이 있다. 기술혁신 환경에서의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진화를 주제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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