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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그거 들었어?”

백이가 호들갑을 떨며 목금에게 말했다. 세상 소문은 세책방 딸인 목금이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늘 정 진사네 무남독녀인 백이가 더 많이 아니 참 희한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

“글쎄 말이야. 망허산에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고.”

“이상한 소리가 뭐야? 귀신 우는 소리라도 들린대?”

“그런 건 아닌데, 시조 읊는 소리도 아니고 한시 소리도 아닌데, 뭘 뺏겼다고 하는 것 같은 소리가 시를 읊는 듯이 들리고 막 그런대.”

“사람들을 해치거나 하는 건 아니고?”

백이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그런 말은 못 들었지만 무서워서 달아나다 다치기도 한다던데?”

“그럼 우리도 한번 가볼까?”

백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백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가보고 싶긴 하지만 혼자 가긴 무서워서 그러는 거다.

“그럼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오늘 밤에 살짝 가보자. 마침 보름날이고 해서 그리 무섭진 않겠다.”

목금이 그냥 쐐기를 박았다.

“불돌이 데리고 가면 괜찮겠지?”

백이는 집 구들장 밑에 사는 불길을 뿜는 신비한 새인 양수지조를 데려갈 생각을 했다.

“당연하지. 불돌이도 오랜만에 외출이라 좋아하겠다.”

두 소녀는 밤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자정 무렵이 되어서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대문으로 나오는 건 당연히 안 되니까 잡인들이 이용하는 뒷문을 통해 나왔다. 망허산은 뒷문에서 더 가깝기 때문에 흔히 이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망허산 어디로 가야 해?”

목금이 물었다.

“피난골이라고 하더라.”

망허산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 계곡이 있다. 동굴은 입구가 좁아서 들어가기가 어려운데 일단 들어가면 안은 넓다는 말이 있었다. 백이도 목금도 그 동굴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다. 전해오기로는 나라에 난리가 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그 동굴로 숨어들어 목숨을 부지한 적이 있다고 했다. 입구가 좁은 탓에 뚱뚱했던 지주는 못 들어가서 적군에 잡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동굴이 있어서 계곡 이름이 피난골이었다.


(출처: 연합뉴스)


달이 밝아서 가는 길이 편했다. 가을이지만 아직 추울 정도는 아니었고 도깨비나 요정들도 불돌이 덕분인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뭇잎은 노란 물, 붉은 물이 살짝 들기 시작했고, 성질 급한 녀석들은 벌써 떨어졌다. 일찌감치 떨어진 도토리는 다람쥐의 먹이가 되어 나무 옹이마다 가득 들어차 있었다.

“너무 예쁜 밤인데?”

백이가 깡충깡충 뛰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쉿! 다 왔나 봐.”

목금이 주의를 주면서 불돌이를 바구니 안에 깊이 넣었다. 불돌이의 기운은 귀신과 사악한 것들을 몰아내기 때문에 잘 감춰야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 들려?”

백이가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동굴 쪽으로 다가가 보자.”

목금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두 소녀는 조용히 발을 옮겨 동굴 쪽으로 다가갔다.

“아, 정말 무슨 소리가 들려.”

백이가 목금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 소리는 동굴 안에서 들려왔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백이는 동굴 안에서 자기들을 부르는 거라 생각해서 얼른 대답했다.

“네, 네!”

목금은 깜짝 놀랐다.

“뭐 하는 거야! 귀신이 부를 때 함부로 대답하면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밖에 누구요? 이리 와 보시오. 내가 함부로 나갈 수 없으니.”

백이는 그제야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어, 어? 목금아, 어쩌지?”

목금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니. 내가 먼저 들어가 볼게. 내 뒤를 따라와.”

“그, 그래. 하지만 분명히 혼자 오지 않았다고 답답하니 말해달라고 했단 말이야.”


〈경상북도 울진에 있는 성류굴. 성류굴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신했는데 이를 알게 된 왜병이 동굴 입구를 막아 모두 굶어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면 엎드려서 기어가야 했다. 꾸물꾸물 동굴 통로를 지나가자 넓은 안쪽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두루마기를 입은 것을 보니 평민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리를 짧게 깎아서 또 양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삭발을 한 것도 아니니 승려도 아니었다.

둥근 안경을 쓴 아저씨가 두 소녀를 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어린아이들이었구나. 식민지 조선에 태어나서 너희도 고생이 많다.”

백이가 목금에게 소곤거렸다.

“저 아저씨 얼굴에 있는 게 안경이라는 거지? 나 처음 봐.”

“나도.”

목금이 안경 아저씨를 보며 말했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게 뭐예요? 여긴 망허촌에 있는 동굴인데, 어디서들 오셨어요?”

목금은 이 아저씨들이 산적이거나(산적이라기 보기는 좀 호리호리했지만) 유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전을 일구시러 온 건가요? 우리 산은 화전하기는 좀 힘들 텐데요.”

그러자 다른 아저씨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마가 훤칠하여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화전이라, 화전을 할 재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네. 우리는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긴 몸이니.”

백이가 대충 알겠다는 눈치로 말했다.

“어디 악독한 지주한테 걸려서 패가망신하신 모양이네요. 저희 집안이 보잘것없긴 해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날도 추워지는데 이런 동굴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지 마시고 같이 가시죠.”

귀티 아저씨가 픽 웃었다.

“어디를 간들 왜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느냐. 광복의 때는 아직도 멀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목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미 이 두 아저씨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놈이라는 말을 하는 걸 보니 임진년 왜란 때 죽은 귀신인 모양이었다.


〈독립운동가 이상화 선생〉 (출처: 네이버)


“상화 형. 너무 늦더라도 광복은 꼭 올 거니까.”

안경 아저씨가 말했다.

“육사, 우리가 죽을 때까지도 광복이 오지 않았잖은가. 너무나 원통하네.”

그 말에 백이가 히익 하고는 놀라 목금의 손을 꽉 잡았다.

“지, 진짜 귀신이었잖아!”

목금은 백이의 손을 부드럽게 쥐어주었다.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서 알지 못하는 시를 읊는 소리가 나서 걱정들 하던데요. 무엇을 읊으신 건가요?”

안경 아저씨가 그 말에 기가 차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니, 아무리 촌구석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찌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모른단 말인가? 너희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게냐?”

그러더니 안경 아저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시였지만 듣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우면서 슬픈 시였다. 백이가 훌쩍거리다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쳐들어온 왜놈들은 이순신 장군님이 노량 앞바다에서 다 수장시켜 버렸으니까요.”

“뭐라고?”

깜짝 놀란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백이를 보고는 물었다.

“지금 나라를 누가 다스리느냐?”

“정종(정조의 원 묘호) 대왕의 아드님으로 금상이 보좌에 오르신지 30년 쯤 되었습니다만…”

귀티 아저씨가 혀를 찼다.

“우리가 백 년 전 세상으로 왔구나.”

목금이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신가요?”

안경 아저씨가 말했다.


〈독립운동가 이상정, 권기옥 선생〉 (출처: 뉴시스)


“이 형은 대구 사람으로 시인이지. 1919년에 3.1 운동을 모의한 걸 시작으로 동경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목격했고 귀국한 뒤에 금방 읊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에 발표했단다. 1927년에는 의열단원을 돕다가 체포되기도 했지. 상화 형의 큰형 이상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중국군에 들어가 장성이 되었고, 큰형수님인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며 일본군과 싸우고 있지.”

“네?”

백이와 목금은 안경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육사, 그런 이야기를 옛날 사람에게 한들 뭘 알아듣겠나?”

귀티 아저씨가 백이와 목금을 보며 말했다.

“우리는 미래에서 온 귀신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이 지나면 조선은 망하고 만단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자기네 식민지로 만들어버렸어. 그러니까 우리나라가 왜놈들에게 점령당하고 만 거란다.”

“네에? 아니, 임금님은 뭘 하셨대요?”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우리는 결코 가만있지 않았어. 나라가 기울어질 때부터 의병 항쟁으로 대항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거국적인 만세 운동을 일으켰지. 그 덕분에 중국 땅에 망명정부가 생겨났고.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되찾을 광복의 그날이 오리라 믿으며 굳세게 살아갔지. 나처럼 글 쓰는 재주가 있는 이는 민족 정기를 잃지 않도록 글을 쓰고, 총을 들 수 있는 사람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었지.”


〈독립운동가 이육사 선생〉 (출처: 네이버)


귀티 아저씨는 안경 아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육사는 안동 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손이지.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가 감옥살이를 했어. 그때 수인 번호가 ‘264’라 아예 그걸 자기 호로 만들었지. 원래는 역사를 도륙하겠다고 육사라고 했었지. 중국에서 의열단 김원봉 대장이 가르친 군사학교를 졸업한 진짜배기 독립군이지.”

“에이, 참. 내가 무슨 진짜배기 독립군이겠어. 뭘 제대로 하기도 전에 늘 체포되고 말았는걸.”

“그게 무슨 말이야. 자네만큼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귀티 아저씨가 갑자기 시를 한 수 읊기 시작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


“자네가 뿌린 가난한 노래의 씨가 우리 광복의 싹이 될 것일세.”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 (출처: 네이버)


“아, 심훈이 노래한 것처럼 그날이 오면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앞장서서 두들길 덴데.”

안경 아저씨의 말에 귀티 아저씨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심훈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지. 너무나 안타깝네.”

백이도 공연히 눈시울이 젖었다. 백이가 목금에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정말 어떻게 되는 거야? 넌 몰라?”

목금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그걸 어떻게 알겠니.”

목금이 아저씨들에게 말했다.

“아저씨들은 어쩌다 백 년을 거슬러 오신 거예요?”

안경 아저씨가 말했다.

“글쎄, 그걸 모르겠네. 나는 그저 고향에 가보고 싶었을 뿐인데, 갑자기 소용돌이 같은 게 일어나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에 와 있었지.”

“그랬나? 나도 그랬어.”

“그럼, 혹시 다른 분도 오실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두 아저씨가 껄껄 웃었다.

“그래, 우리보다 더 미래의 사람이 왔으면 좋겠네. 그럼 광복이 됐는지도 알 텐데.”

그때였다. 동굴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이쿠, 여긴 어디야?”

검은 두루마리를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러더니 두 아저씨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조지훈 시인〉 (출처: 네이버)


“아니, 이상화 시인과 이육사 시인이 아니십니까? 아, 내가 죽긴 죽었나 보군요.”

“뉘시오? 어찌 우리를 아시오?”

“저는 영양 출신의 조지훈이라고 합니다. 선배님들보다 한참 후배죠. 선배님들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광분에 붓을 꺾고 숨어 살았습니다.”

귀티 아저씨가 반가운 얼굴이 되었다.

“조지훈이라면 《승무》를 쓴 시인 아닌가? 참으로 아름다운 시였소.”

안경 아저씨가 말했다.

“혹 조선에 광복이 왔는지 아시오?”

조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왔습니다. 두 분 다 조금만 버티셨으면 광복을 보셨을 텐데요. 1945년에 일본이 미국에 항복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두 아저씨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아, 광복이, 광복이 되었구나! 우리가 해방되었어! 육사, 이제 떳떳이 고향을 찾을 수 있겠네.”

이육사는 조용히 자신의 고향을 그리는 시를 읊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 《청포도》-


시를 읊는 동안 이육사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귀티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를 만나 다행이구나. 덕분에 평생의 한이 풀렸어.”

조지훈의 혼령도 서서히 사라졌다.

“아, 나는 두 분에게 광복의 소식을 알려주라고 여길 온 것이었구나.”

백이와 목금은 텅 빈 동굴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어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백이가 말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 시들은 참 아름다웠어. 마음이 따뜻해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맞아. 우리말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한시와는 다른 멋이 있네. 왜놈 때문에 고생을 해도, 더 미래에는 참 멋진 일들이 있을 것 같아.”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친구가 있으니까.”

하지만 목금이 냉정히 팔을 잡아뺐다.

“빨랑 풀어. 우리 또 기어서 나가야 해.”

“얘는 하여간 낭만이 없어! 같이 가!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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