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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임하(臨河)에서 독립을 외치다,
하락정(河洛亭)

프롤로그



“어차피 일본에 넘어갈 조선입니다.
애기씨 하나 더 보탠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쿠도 히나 대사 중에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9회)-


가배(커피)와 양장이 아닌 독일제 총구에서 낭만을 찾는, 조선 최고 명문가 애기씨, 고애신은 의병이다. 고애신이 친일파 이완익의 표적이 된 것을 알게 된 구동매는 고애신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댕기머리를 잘랐다. 이완익의 딸 쿠도 히나는 유진 초이의 손수건으로 고애신의 머리를 묶어주며, “처음부터 총이 아니라 이 손수건처럼 고운 것만 드셨으면 좋았을 것을요, 어차피 일본에 넘어갈 조선입니다”라며 담담히 말한다.

기어코 이완익은 고애신의 조부, 고사홍 댁 담장을 부쉈다. 이제 곧 고사홍 댁 마당 앞을 기차가 지나갈 것이다. 고사홍은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눠 주며 보릿고개가 아무리 흉흉하고 총칼이 위협해도 왜놈들에게 절대 땅을 팔지 말라고 당부한다.

2020년 12월 16일, 안동발 청량리행 마지막 열차가 출발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놓치고 마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임청각(臨淸閣)과 법흥사 7층 전탑이 스치듯 지나갔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끝없이 이어지는 창밖 풍경에 살포시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아파트 숲이 보인다. 곧 청량리역이다.


〈임청각 마당을 관통한 중앙선〉 (출처: 국토교통부)


2021년 1월 5일, 중앙선 KTX-이음 청량리발 안동행 열차가 출발한 지 1시간 55분이 지났다. 창밖으로 임청각과 법흥사 7층 전탑이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과 1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키워낸 항일 독립운동의 산실, 99칸의 고택 임청각은 지금 복원 중이다. 1942년 임청각 마당에 중앙선 철길이 깔린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임청각은 마침내 진정한 독립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곧 안동역이다.




1. 해창(海窓) - 유교개혁론자


나라를 굳게 닫고 지낼 때는 바다를 담장으로 삼고, 나라를 개방하였을 때는 바다를 창[海窓]으로 삼는다. 바다를 담장으로 삼을 때에는 독서를 하는 선비들이 우리 유가가 본 것만을 숭상하고 …… 다른 학설들이 침입할까 두려워 배척하고 도외시하는 것을 대의로 삼고, 바다를 창으로 삼을 때에는 독서를 하는 선비가 고금(古今)의 일을 짐작하고 동서(東西)의 일을 종합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르며 남의 좋은 점을 취하기를 좋아해서 오히려 우리 유가의 학설이 한쪽으로 치우칠까 두려워하여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을 주된 의리로 삼는다. …… 창은 빛을 받는 곳이다. 이 때문에 나의 독서실을 ‘해창’이라 이름하노라.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2, 「해창설(海窓說)」 중에서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 1878~1949)의 시대는 유교 경전 대신 총과 칼을 들어야 했던, 달·별·꽃·바람·웃음·농담 그런 것들은 그저 ‘아름답고 무용한 것’(《미스터 션샤인》의 김희성의 대사)이 되던 때였다. 송기식은 높은 담장에 가려져 어두웠던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공자』와 『사회계약론』을 읽으며 아름답지만 무용한 것들에 대한 시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해외에서 공화설(共和說)이 들어오고 나서 공자의 대동설(大同說)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기뻐하였고, 또한 민주설(民主說)이 들어왔을 때는 맹자의 민귀설(民貴說)과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그의 독서실을 ‘해창’이라 이름했다.

‘바다를 창으로 삼는 것’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진짜 ‘우리 것’을 지켜내고자 한 송기식의 소명이다. 송기식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구학(舊學)으로 내몰린 유학(儒學)을 부흥시켜, 이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유교를 근본으로 삼고 서구의 사상으로 유교의 단점을 보완하려 했다. 송기식은 동도서기(東道西器)에 입각한 유교개혁론자였다.

송기식은 처음부터 유교개혁론자는 아니었다. 초기에 그는 전통적 유학의 가치와 체제를 수호하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였다. 퇴계와 정재 학파를 잇는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는 모두 척사 유림으로 그의 스승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송기식은 조부 송구현(宋九鉉, 1839~1919)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했다. 이때 김흥락은 안동관찰부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초기 의병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송기식은 1896년 안동 의병장으로서 안동관찰부를 습격한 김도화의 휘하로 들어가 대장영서기(大將營書記)로 종군했다. 1905년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 처벌과 을사늑약 파기 요구 상소를 올린 이만도는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한 때 단식 순국하였다. 이처럼 송기식에게 학문적 영향을 끼쳤던 그의 스승들은 그에게 항일 정신을 심어주었다.

전통적 유학자의 길을 걷던 송기식은 목을 조여오는 일본의 무력에 투쟁의 한계를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전통적 유학에 침잠하여 8세에 ‘해가 지자 절로 밤이 되더니, 달이 뜨자 다시 낮이 되었네[日落自成夜 月出還作午]’라는 시를 썼던 그였지만 더 이상 전통 유학의 고수만으로는 당면한 현실을 타개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안동 혁신 유림을 주도했던 이상룡의 영향을 받은 송기식은 유학에 대한 개혁과 함께 교육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2. 교육 구국 운동 - 교육자


류인식의 협동학교


송기식은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과 함께 1909년 이상룡이 설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송기식이 안동 송천에 봉양서숙(鳳陽書塾)을 세운 것은 이상룡의 가르침과 더불어 류인식의 협동학교 영향이 컸다.

류인식의 아버지 류필영은 면우 곽종석과 더불어 경상남도에서는 곽종석, 경상북도에 류필영이라 불리며 ‘남곽북류’로 칭송받던 인물로 1919년 ‘파리장서’에 참여하여 한국 독립을 호소했던 강경한 척사 유림이었다. 류인식 역시 아버지 류필영과 김도화에게 배우며 전통적이고 강직한 유교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1903년 성균관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만나 그가 권유한 개화 서적을 읽고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목격하며 류인식은 사상적 전환을 맞았다. 그는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각축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구습을 타파하고 신학문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6년 류인식은 스스로 삭발하고 한복 대신 양복을 입는 것으로 개혁 의지를 드러냈다.

1906년 고종이 ‘흥학조칙(興學詔勅)’을 발표한 이후 류인식은 여러 신교육 추진 세력과 함께 학교설립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완고한 척사 유림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1907년 안동 천전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를 세웠다. 협동학교의 이름은 ‘협동(協同)’이 아니라 ‘협동(協東)’이었다. 『황성신문』 1908년 9월 27일자에 실린 협동학교 설립 취지문에서 ‘나라는 동국(東國)이고, 군은 안동(安東)이고, 학교가 자리한 면은 임동(臨東)이므로 학교는 협동이라 부른다’라고 학교 명칭에 대해 설명했다.

협동학교 교사(校舍)는 안동 내앞마을의 가산서당을 활용했다. 1909년 계몽운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맞은 김대락이 자신의 사랑채 ‘백하구려(白下舊廬)’를 학교 교사로 내놓았다. 현재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뒤편에 가산서당과 협동학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내앞마을 안쪽 ‘백하구려’에 무궁화가 활짝 피었다. 그 공간에 들어서기만 해도 숙연해졌다.


〈협동학교 교사, 가산서당과 편액〉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야외에 있는 추모벽을 따라 올라가면 가산서당이 있다.


〈협동학교 교사, 백하구려〉


1910년 계몽운동에 반대한 안동과 예천의 의병들이 협동학교에 난입해 교감 김기수와 교사 안상덕, 서기 이종화를 살해했다. 의병들은 단발과 신식교육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이상룡은 ‘긴긴밤 저 귀머거리들을 어이할고’라고 한탄하며, 척사적 사고에 갇혀 있는 유림들을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성리학적 세계관이 강했던 안동에서 신식학교를 설립·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협동학교 설립 직후 예안의 보문의숙, 풍산 하회의 동화학교, 와룡 가구의 동양학교, 송천의 봉양서숙 등이 설립되었다.


송기식의 봉양서숙과 인곡서당


묵은 것을 씻어 내고 새로운 것에 나아가는 것이 지·덕·체의 교육이요, 가까운 것을 생각하고 먼 것을 헤아리는 것이 수신·제가·치국의 경륜이라네. …… 그 옛날에도 사다리를 놓아 험한 산을 오르고 배를 타고 먼바다를 건넜는데, 더구나 이 경쟁의 세계에 책무가 필부에게 있음에랴. 옛 학문을 헤아리고 오늘 학문을 살펴야 하니, 이에 철학자의 저술을 한 책상에 모으네.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2, 「봉양서숙 상량문(鳳陽書塾上樑文)」 중에서


1909년 송기식은 집안 사재를 털어 안동 송천, 지금의 하락정이 있는 곳에 근대식 학교인 봉양서숙(鳳陽書塾)을 설립했다. 송기식의 동도서기적 교육사상이 봉양서숙 상량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배움이 없으면 굶주린다. 땅은 스스로 아름다워지지 않으니 사람을 통하여 이름이 나네’라고 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봉양서숙은 사립학교가 번창하는 것을 원치 않는 일제의 감시 감독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송기식은 학교 운영을 위해 단연회(斷煙會) 기금을 썼는데 일제의 혹독한 감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채를 빌려 단연회 기금을 갚았다. 송기식은 봉양서숙 운영이 어려워지자 천도교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제가 봉양서숙을 설립하는 일은 옛날부터 명하신 것이라 지금까지 유지하며 자못 지방을 발전시킨 효과가 있지만, 지혜가 궁하고 힘이 다하여 크게 진작시킬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또 생각건대 과학 교육은 대중적인 종교 교육만 못하니, 지난해부터 천도교인과 서로 왕래를 하는데 그 손공·박공·오공·권공·최공 등이 모두 한 시대의 인걸들로 반드시 어려운 시기의 의지처로 기대해 볼 만하나 거센 이론이 들끓는 요즘 이렇게 대중에 맞서는 일은 과연 철석간장(鐵石肝腸)과 같이 굳센 의지를 지닌 사람이 아니고서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1, 「석주 이 어른께 답하다[答石洲李丈]」 중에서


1912년 이상룡에게 보내는 편지에 송기식은 봉양서숙 운영의 어려움과 종교 교육을 위해 천도교인과 교류했으나 거센 반대에 부딪힌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송기식은 만주로 오라는 이상룡의 권유에 자신 또한 만주로 가고 싶지만 집안 어른의 건강이 아침저녁으로 위급한 상황이라 집을 비우고 갈 수 없음을 전한다. 더불어 자신은 ‘밖에서 움직이면 안에서 내응하는 일을 하려 하니, 혹 이렇게 하면 국민 한 사람의 책임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며 비록 만주에 가지는 못하지만 안동에서 조국을 위해 애쓸 것을 다짐한다. 편지 말미에 그는 ‘임청각은 예전 그대로 위엄 있게 서 있어 지날 때마다 발걸음을 모으며 공경하는 마음이 여전하니, 어느 날에나 강산이 다시 주인을 찾아서 제 모습을 되찾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며 이상룡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덧붙였다.

송기식은 루소의 사회계약론, 제임스 와트의 증기,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 마르크스의 과학설과 톨스토이의 노동설 등의 학문과 선교·불교·천도교·대종교·예수교 등의 종교까지 두루 섭렵하며 봉양서숙 학생들을 가르쳤다. 송기식의 영향을 받은 그의 형제들과 제자들은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제군을 곤강의 옥이라 여겼는데                                     諸君看做玉崑崗
하룻밤 사이 뭇 향기로 피어나 지란이 되었네                 一夜芝蘭集群芳
봉양서숙에서 다년간 함께 등불 비쳤고                          鳳塾多年燈共照
인곡서당 만년계획 인재들 무성하네                              麟山晩計樹成行
도서 만 권으로 정신은 늙었고                                       圖書萬卷精神老
한밤중 솔에 걸린 달 이부자리 싸늘하네                         松月三更枕席涼
다시금 가는 사람 옷자락 붙잡아 머물게 하고 싶은데      更把征袗留意在
어찌 하면 그대들 앞날에 여덕을 이어줄 수 있으려나      何能前路續餘光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1, 「7월 15일 제군과 함께 짓다[七月十五日與諸君共賦]」 중에서


1925년 안동 남선면 신석리 인곡에 인곡서당(麟谷書堂)을 건립했다. 인곡서당 설립 이후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위 시에서 송기식은 제자들이 곤륜산에서 불에 탄 옥처럼 화를 당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지란(芝蘭)이었음을 말하며 제자에 대한 사랑과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봉양서숙에서 등불을 밝혔듯이 인곡서당에서 인재 양성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제자들이 학문에 전념하느라 한밤중인데도 이부자리가 싸늘하다고 하며 유학의 현자들이 남긴 은덕을 제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전했다.

동서양의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송기식은 1921년 『유교유신론』을 저술했다. 그는 유교의 종교화와 이를 통한 교육이야말로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송기식은 『유교유신론』에서 자신만의 교육 철학을 피력했다. 첫째, 교육자를 양성하여 교육의 체계화를 주장했다. 둘째, 유교의 대중화를 위해 신분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특정 계층만 향유할 수 있었던 한문 경전을 국문으로 번역했다. 셋째,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교육받아야 한다는 평등 교육을 주장했으며 넷째, 유학 교육과 더불어 서양 학문을 가르치고 배울 것을 강조했다.

서숙의 학생들 가운데 백정의 자제가 있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씀을 하시니 어른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경전에서 “벌은 자식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 우리 무리가 구습을 타파하고 신진을 장려하여 민족을 위해 근심하고 있는데 이 사사로운 마음 때문에 떠들썩한 여론 속에서 주저해 버린다면 저 젊은이들이 이를 공리로 알 것이니, 이는 미래의 후손들에게 나쁜 과보를 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1, 「아무개에게 답하다[答某人]」 중에서


인곡서당을 건립했던 1925년에 송기식은 단양에 설립된 명륜학원의 교수로 부임하여 활동하였고, 1932년에는 경성유교회의 초청을 받고 녹동서원(鹿洞書院)의 명교학원 교수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글은 1933년 송기식이 녹동서원 명교학원에 재직할 당시 안동 군수 최병철(崔秉轍)에게 보낸 편지로 그는 학교에 백정의 자녀를 받을 수 없다는 군수에게 ‘구습을 타파하고 신진을 장려해야 하는 우리가’ 여론 때문에 주저하는 것은 미래 후손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라며 일침을 가했다.

봉양서숙과 인곡서당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녹동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육 구국 활동을 펼쳤던 송기식, 그의 또 다른 독립운동을 들여다본다.




3. 독립 만세 운동 - 독립운동가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봉양서숙 제자들과 송기식은 안동의 협동학교, 동화학교, 보문학교와 함께 3월 17일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거사를 약속한 당일 일본 경찰에 잡혀 만세를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안동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천만의 만세 소리 우레 치듯 울려 퍼져                 二千萬口發雷聲
형체 없는 철옹성을 만들어 내었네                          團得無形鐵瓮城
맨손으로 큰 바다 물결을 돌릴 수 있으니                 赤手能回鯨海勢
창생들이 마관조약을 다시 볼 것이라오                   蒼生重見馬關盟
외로운 충심은 몽당붓으로 『춘추』에 남을 것이고      孤忠禿筆春秋在
큰 의리는 하늘 한가운데서 해와 달처럼 빛나리       大義中天日月明
남아의 본분이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하니           男兒本分須如此
천심에 순응할 뿐 명예는 좋아하지 않는다네           祗順天心不好名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1,
「체포되어 안동 옥사에 갇혔을 때 동지들에게 보이다[逮囚安東獄中 示同志]」 중에서


이 시는 송기식이 안동 감옥에 갇혔을 때 쓴 것으로 전국에서 퍼진 이천만의 만세 소리가 우리나라를 든든히 지켜줄 ‘형체 없는 철옹성’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마관조약’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을 말한다. 이 조약 제1항에 ‘청은 조선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으니, 송기식은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시모노세키조약을 제대로 다시 보라고. 송기식은 조국 독립을 외치다 감옥에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을 역사서에 기록할 것이며, 자신과 그들은 천심에 따른 것이지 명예를 바란 것이 아니라 하며 만세 운동의 의미를 되새겼다.

송기식은 자신이 구금된 이후 3월 22일에 2차 만세 시위가 일어나 40여 명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물과 같은 인심을 막아낼 수 없으니 눈앞의 서슬 퍼런 칼날을 만백성이 상대하네[如水人心禦莫能 白刃當前萬口應]’라고 하며 일제가 서슬 퍼런 칼날로 아무리 협박해도 만인의 강렬한 열망은 거센 물과 같아 반드시 독립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고 했다.

대구 감옥으로 이송된 송기식은 그곳에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과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9)을 만났다. 그는 ‘태산북두가 감옥에 들어오니 광채가 하늘과 땅에 뻗쳤도다[捲來山斗入 光彩射乾坤]’라고 하며 곽종석과 장석영을 태산북두에 비유했다. 세 평 좁은 감옥에 두 사람이 들어오니 온 세상이 밝다고 하며 대의를 위한 그들의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송기식은 대구 감옥에서 경성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20년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형이 감축되어 풀려났다. 조국 독립을 향한 열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는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는 『한문훈몽(漢文訓蒙)』과 『국문사서(國文四書)』를 지어 아이들과 한문을 못 읽는 이들의 교재로 삼았으며 『사서차의(四書箚疑)』와 『격치도(格致圖)』를 지어 유학의 이치를 밝혔다.




4. 하락정 – 독립의 씨앗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나온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에 인문이 이미 드러났고, 봉양서숙과 인곡서당이 함께 만들어진 이곳에 민심이 다 같음을 이에 보았네. …… 하락정은 석주 선생이 이름 지은 것으로 …… 봉양서숙에서 쓰던 목재를 받아서 쓰니, 새로이 도끼질과 톱질을 할 것이 없었네. 인곡서당이 있던 길지를 잡았으니 어찌 감히 열심히 공부하지 않겠는가.

송기식, 국역 『해창문집』 2, 「하락정 상량문[河洛亭上樑文]」 중에서


1945년 봄, 68세의 송기식은 지금의 안동시 남선면 신석리에 하락정을 건립했다. 하락정은 인곡서당이 있던 자리에 봉양서숙에서 쓰던 목재를 사용하여 지었다. 봉양서숙과 인곡서당의 정신이 깃든 하락정은 그곳에서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허물어졌다. 하락정은 1979년 안동시 송천동 송천초등학교 옆, 예전의 봉양서숙 자리에 복원되었다.


〈하락정〉


이상룡이 이름 지었다는 하락정은 그 의미가 깊다. 하락정은 하도낙서(河圖洛書)에서 따온 말이다.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으로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진 무늬에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깨닫고 이것으로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낙서(洛書)는 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리며 치수 사업을 하던 중 거북이 등에 나타난 여러 개의 점에서 천지 변화의 기틀을 깨닫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 『홍범구주』는 정치와 도덕의 기본적 9개 조항의 큰 법을 뜻한다.


〈하락정 편액〉


이상룡은 하락정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을까? 대자연의 원리가 담긴 하도의 팔괘 중 하늘과 땅, 물과 불이라 하는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가 태극기에 담겨 있다. 또 낙서의 『홍범구주』는 송기식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게 다시 쓴 『홍범시의(洪範時義)』에 녹아있다. 이상룡은 이 땅에 적의 그물 쳐진 것을 보며 ‘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강산’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강한 의지를 하락정에 투영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덧붙여 도서관(圖書館)은 하도낙서에서 유래한 것인데, 도서관 같은 하락정에서 책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후손들이 교육을 통해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처럼 하락정은 조국 독립의 다른 이름이다.


〈데니 태극기〉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송기식은 유교개혁론자이며 교육자이고 독립운동가다. 그가 광복 직전 세운 하락정은 국립경국대학교(국립안동대학교)와 송천초등학교 인근에 서 있다. 교육만이 살 길이라 여겼던 그의 뜻이 이어진 것 같아 위안이 되었다. 다만, 하락정 마당 가득 잡초가 무성하여 이곳의 정신이 흐려질까 안타깝다.




에필로그



“나는 빈관 사장이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르나,
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소.”

-고애신 대사 중에서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9회)-


내가 고애신이었다면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애’로 살았을 것이다. 꽃과 나비로 가득한 수를 놓고 남이 빗겨준 머리에 예쁜 댕기를 달고 정혼자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저 남이 비춰준 빛을 따라 살았을 것이다. 어차피 넘어갈 조선, 나 하나 힘을 보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퇴근길, 가슴을 옭아매던 철길을 벗고 숨을 쉬기 시작한 임청각이 보인다. 비겁한 구경꾼으로 살았을 나이기에 늘 일제를 살아낸 분들께 빚진 마음이 크다. 여전히 일본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다. 독립운동가에게 부채감을 안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마음이 무겁다.

바나나맛 우유 ‘빙그레’가 국가보훈부와 함께 광복 79주년을 맞이하여, 옥중에서 순국한 87명의 독립운동가에게 AI 기술을 활용해 한복을 입혀드리는 ‘처음 입은 광복’ 캠페인을 진행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빛바랜 수의(囚衣) 대신 고운 한복을 입은 독립운동가가 환하게 걸어 나오고 있다. 뭉클하여 울컥 눈물이 났다. 바나나 우유만 잘 만드는 줄 알았더니 독립운동가에게 감사와 존경을 선물한 바나나 우유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처음 입는 광복〉 (출처: 빙그레)


바쁜 일상에 나는 또다시 잊고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룡·류인식·송기식과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이 눈물로 일궈낸 이 땅에서 욕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살다가 문득 하늘을 보며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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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송기식 지음, 이지안·이효림 옮김, 『해창문집 1』, 한국국학진흥원, 2019.
2. 송기식 지음, 곽민준·이지안·이효림 옮김, 『해창문집 2』, 한국국학진흥원, 2019.
3. 송기식 지음, 곽민준·전지혜 옮김, 『해창문집 3』, 한국국학진흥원, 2019.
4. 이정철 지음, 류종승 사진, 『협동학교』, 민속원, 2019.
5. 강윤정, 「대한제국기 안동지역 교육공동체의 변화-협동학교 설립을 중심으로」, 『국학연구』, 54호, 한국국학진흥원, 2024.
6. 박경환, 「해창 송기식의 시대인식과 유교 종교화의 구상」, 『안동학연구』, 18호, 한국국학진흥원, 2019.
7. 김순석, 「해창 송기식의 현실인식과 대응방략의 변화」, 『국학연구』, 42호, 한국국학진흥원, 2020.
8. 김영건, 「해창 송기식의 사상과 교육관-해창집과 유교유신론을 중심으로」, 『東洋古典硏究』, 86호, 동양고전학회, 2022.
9. 이규칠, 「해창 송기식의 문학관과 시시계」, 『남명학연구』, 68호,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20.
10. 이은영, 「해창 송기식의 교육활동과 독립운동」, 『국학연구』, 42호, 한국국학진흥원. 2020.
11. 이승용, 「해창 송기식의 가풍과 학문 성향」, 『국학연구』, 42호, 한국국학진흥원. 2020.
12.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13. 유튜브 빙그레
“의병장 유인석이 요동으로 망명하였다는 소식을 듣다”

의암유인석묘역 영정각 내
유인석선생 영정 (출처: 문화재청)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898년 4월, 오늘 박주대는 반가운 이름의 소식을 들었다. 바로 호서의병장 유인석의 소식이었다. 두 해 전, 중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의병을 거병하였다. 그는 그중에서도 의병대장으로 추대 받았던 인물이었다. 나중에 주상께서 직접 의병의 해산을 효유하자 하나 둘 의병들이 해산될 때도 그는 마지막까지 항전을 계속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유인석의 호는 의암인데, 사람됨이 정중하고 또 중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을미년에 거병할 당시 모친상을 당한 와중이었는데도, 나라의 일이 급하다며 의병장으로 나섰다. 비록 부모의 상에 의병을 이끌고 출전한 것은 칭찬할 일은 못되었지만, 서상열, 김백선 등과 더불어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는 충의로움만은 칭찬할 만하였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최근까지 충주에서 의병대를 이끌었는데, 패전하자 원수를 피하여 요동으로 망명하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의병장이기 이전에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학자였는데, 그곳 요동에서도 널리 강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요동의 토착인들에게까지 항일의식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본래 요동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거칠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감복하여 불원천리 달려온 사람이 구름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그의 교육이 차츰 요동을 변화시킨다는 소식이었다.

박주대는 직접 유인석을 만나볼 기회는 극히 적었지만, 함께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 신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타국 땅에서 나랏일을 위해 수고하는 그를 생각하며 그의 건강과 무운을 빌었다.

“옥수수 밭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을 뻔한 매켄지”

〈프레더릭 매켄지(F.A.McKenzie)가 쓴 『The tragedy of Korea』(1907)에 실린
의병〉
F.A매켄지, 『한국의 비극』, 미상

원주를 지나 지나게 된 마을들은 그곳의 주민들이 나한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매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의 곳이었다. 길은 바위투성이어서 울퉁불퉁했으며 절벽이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계곡을 주로 통과해야 했다. 매켄지와 일행들은 옛날 화산으로 만들어진 산골짜기를 지나가기도 했는데, 바위에서 금이 들어 있는 석영(石英)을 쪼아내려고 잠깐 멈추기도 했다. 이 지역은 금이 많이 나기로 조선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주위는 군대가 감쪽같이 숨어 있을 만한 지형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매켄지 일행은 잠을 잘 만한 조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은 침울하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했다. 그동안 매켄지가 다른 마을에서 만난 한국인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동안 만난 주민들은 매켄지가 그 마을에 도착하면 모두 나와서 반겼고 때로는 숙박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에 백인이 오셨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마을 사람들은 말에게 줄 여물도, 당신들에게 줄 쌀도 없으니 6km 정도 떨어져 있는 다른 마을로 가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할 수 없이 매켄지 일행은 다른 마을로 가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마을에서 벗어나 얼마쯤 가다가 매켄지는 우연히 옥수수밭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숲에 몸을 반쯤 숨기고 손에 뭔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더니, 매켄지가 돌아보니 급하게 숨겨 버렸다. 이를 본 매켄지는 너무나 어두워서 분명하게 식별할 수가 없었지만 그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조그마한 낫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빵’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매켄지의 귀를 스쳐가더니 철판을 때리는 총탄의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매켄지는 얼른 몸을 돌려 그쪽을 쳐다보았으나 총을 쏜 사람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매켄지가 생각하기에 100m이상 떨어진 곳을 향해 자신이 소지하고 있는 380구경 콜트(Colt) 권총으로 응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게다가 쫓아갈 시간의 여유도 없었으므로 그냥 가던 발길을 재촉하였다.

국치 기념일 행사가 신흥학교에서 열리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김대락, 『백하일기』, 1913.07.28

1913년 7월 28일, 벌써 햇수로 3년이 되었다. 3년 전 오늘은 500년 넘게 이어져오던 조선의 사직이 무너져 내린 날이었다. 김대락이 많은 식구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오게 된 것도 바로 3년 전의 오늘 일 때문이었다. 망국의 회환과 분노, 3년간 김대락 본인과 식구들이 겪었던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으나, 앞으로도 이런 고생이 얼마나 갈지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학교에 갔다. 신흥강습소에서 국치 기념일을 맞아 행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모여 다시금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자리가 될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저녁 무렵에 돌아와 오늘 행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듣자니, 평안도 정주에 사는 김준식(金俊植)이란 이의 부인 박씨가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조카 김창무(金昌懋)의 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아들을 입학시키고 자력으로 생활을 꾸려가는데, 남편은 고향에 남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학교 행사에서 연설을 했는데, 퍽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비분하고 통한한 뜻은 이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연설하셨으니, 안방에 있는 무식한 제가 더 할 말은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 모이신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각자 힘을 다하여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는 오늘 같은 날이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부질없는 말만 일삼는다면, 어찌 여러 사람들이 신빙(信憑) 하겠습니까?”

이 연설을 하고는 가슴에서 작은 칼을 꺼내어 자기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끊는데, 한 번 찍고 두 번 찍고 세 네 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뼈마디가 끊어졌다고 한다. 두 조각 손가락이 연단 아래서 뛰고, 선혈이 낭자하게 저고리와 치마를 다 적셨다고 한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아연실색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는데, 부인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세찬 말투로 “이것이 제 뜻이니, 여러 선생들께서는 각자 죽을힘을 내어 다시 우리 4천 리 제국 땅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야기를 들은 김대락 역시 부인의 결기에 섬찟 놀랐다. 대장부들도 자기 손가락을 끊는 고통을 참기 어려울 터인데, 한낱 부인의 몸으로 어디서 그런 강단이 나온단 말인가. 더불어 아직 조선인들의 가슴에 그런 의분이 남아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두들 그 부인과 같다면, 아마 몇 년 안에 고국을 다시 밟아볼 수 있으리라.

“예안 고을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다”

만세운동을 하는 학교 생도들의 모습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미상

1919년 2월, 드디어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이 경상도 지역에서도 퍼지고 있었다. 지난 16일에는 예안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하고, 17일에는 안동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된다고 한다. 봉화와 영천에서도 또한 만세를 불렀으며, 대구와 동래에서는 서울보다 조금 뒤늦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만세 열기가 계속된다면, 어쩌면 정말 독립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세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안동군수 이선호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조금 잦아들자 일본인들의 무자비한 복수가 시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학교 생도들이 모두 감옥에 수감되었다고 하고, 안동, 금소, 역촌 등의 마을 3백여 호에서는 솥, 물동이 등 살림살이들이 남김없이 다 부서지고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는데, 일본인들의 만행이라고 한다. 이들 마을 사람들이 일본 병참에 가서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복수를 한 것이라 한다. 또 인근 은풍 마을에서도 여러 사람이 만세를 불렀는데, 또한 많이들 붙잡혀 갔다고 한다. 영해의 호지촌의 남씨들과 이씨들도 만세 운동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 일로 혹독한 난리를 당했으며, 수곡마을의 유씨들도 마찬가지라 하였다. 정녕, 독립의 길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덕수궁 대한문 박한광·박득녕·박주대 외, 『저상일월』, 1919.02.09~

1919년 2월 9일, 들으니 얼마 전 서울에서는 손병희를 비롯한 몇 만 명의 사람들이 덕수궁의 대한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일장기를 뽑아 버리고 태극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불렀다 한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만세를 부르기를 3일간을 계속했는데, 그 기세가 장대하여 총독도 능히 금지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또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에는 팔도에서 사람들이 모여 그 행렬을 따랐으며, 기생들까지도 몇 천 명이 소복을 입고 뒤따랐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서울 문안에 3일간 일장기가 보이지 않았고, 다만 보이는 것은 태극기뿐이었고, 들리는 소리는 만세 소리뿐이었다고 한다.

태극기를 가진 자는 대개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소문이다. 그리고 이번에 만세를 부르는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앞장선 사람들은 호남과 평안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영남 사람들은 이번 만세운동을 헛일로 생각하여 움츠리고 물러나기만 하므로, 사람들의 조롱과 꾸지람을 들었다 한다. 박면진은 이 소리를 듣자 확 얼굴이 불어졌다.

또 서울에서 금곡에 이르는 40리 길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곡성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던 외국인도 또한 흐느껴 울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물며 외국인들도 이러한데, 영남의 인사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박면진은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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