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가 보구녀관(普救女館)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화상으로 손가락 세 마디와 손바닥이 붙어버린 윤 씨 성의 소녀가 찾아왔다.
다행히 손가락은 잘 떼냈지만, 군데군데 손가락 피부가 떨어져 나가 외형이 몹시 흉한 상태였다. 환자의 피부를 떼어내어 이식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소녀는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로제타 셔우드는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어 소녀의 손가락에 이식했다.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벽안의 여의사의 진심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혹시 모를 감염 때문에 이식 수술을 적극 만류했지만, 로제타 셔우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자 했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로제타 셔우드는 1865년 미국 뉴욕 리버티에서 영국 청도교 출신 가문에서 로즈벨트 셔우드와 피비 셔우드의 삼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WMCP)을 졸업하고, 그다음 해인 1890년, 미북감리회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를 위해 입국했다. 그가 의료활동을 시작한 곳은 보구녀관이었다. 1892년 6월, 로제타 셔우드는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과 결혼했다. 1893년 11월, 아들 셔우드 홀이 출생한 그다음 해에는 청일전쟁 중에 부상병과 환자를 돌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1894년 12월, 로제타 홀은 아들과 함께 고향인 리버티로 돌아갔다. 이때, 자신의 의료조수였던 박에스더(1877~1910)도 함께 데려갔고,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여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1895년 1월, 유복자인 이디스 홀이 태어났다. 1898년 5월, 로제타 홀은 평양 선교를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으나 가족들이 이질에 걸렸고, 이디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딛고 평양에 여성 전문 진료소를 열었다. 평양감사는 자신의 아내를 치료해 준 데 감사하는 의미로 광혜녀원(廣惠女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9년에는 광혜녀원(廣惠女院) 부근에 이디스 기념 어린이 병동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로제타 홀이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은 평양에서 오봉래라는 시각장애인을 만나면서였다. 오봉래는 남편의 선교 활동을 돕던 오석형의 딸이었다. 로제타 홀은 그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남편의 사망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뉴욕점자를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글점자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1900년 1월, 평양여맹학교(1909년 평양맹아학교로 교명 변경)가 로제타 홀의 주도로 정식으로 설립되어 집단적인 특수교육이 시작되었다. 오봉래는 훗날 한국 최초의 특수교육 교사가 되었다.
〈로제타 홀과 맹아학교 졸업생〉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척박한 한국 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을 돕기 위해 로제타 홀이 시급하게 생각한 일 중의 하나는 여의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더 많은 여의사가 배출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일제하에서 여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식 의학교육 기관을 졸업하거나 식민당국이 주관하는 의사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의학교육 기관으로 제중원의학교(1886)와 관립의학교(1899)가 있었지만, 여성은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
1900년대 들어서서 선교 진영에서 연합 선교사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파 연합에 의한 여성 의학교육의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이 있는 남대문 지역에 여성병원이 건립된다면 장로교와 감리교의 여성 의학교육에 대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의 거절로 이러한 기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광혜녀원 시기 수술 중인 로제타 홀(1911)〉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1910년대 들어서서, 로제타 홀은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광혜녀원에 부속 여성의학반(Woman’s Medical Class)을 개설하고, 이곳에서 의사 시험을 통해 의사면허를 취득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인 의사 2명을 초빙하여 의사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의사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없었다.
로제타 홀은 의학생들이 여성의학반에서 의사 시험에 대비하는 한편, 기존 의학교에 편입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서 여학생 3명을 청강생으로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14년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등 세 명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했다. 원래는 로제타 홀이 광혜녀원 부속 여성의학반에서 공부하던 3명을 추천했으나 그중 한 명이 탈락하였고, 안수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 추천한 인물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로 개편되었고, 여자 청강생들은 1918년 경성의전 제2회 졸업생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경성의전은 조선총독부 지정 학교였으므로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내 최초의 여의사들은 청강생제도를 통해 면허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강생제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청강생들에게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부여하는 일로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청강생제도는 국내 최초의 여의사 배출이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여의사를 지속해서 배출할 수 없는 제도적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다. 1920년대 중요한 도전 중의 하나는 로제타 홀이 이화여자전문학교(이하 이화여전)에 의과 개설을 제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화여전은 1929년 가사과만 신설하였을 뿐 의과 개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강생제도로 배출된 한국 최초의 여의사들(1918): 아래 왼쪽부터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로제타 홀의 은퇴 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여의사 양성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청강생제도나 의사 시험에만 기댈 수 없었다. 1926년 10월, 로제타 홀의 환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각계 인사들에게 여자의학전문학교의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홀 여사가 답하여 말하기를) 여러 선배한테서 들은 말을 실험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조선 여성을 위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니,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을 바랍니다. 조선 가정에 있는 어린이의 건강을 보호하며 소경과 귀머거리를 예방하고 더욱 공장에 있는 여자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에 부인병원이 많이 생겨야 하겠고, 여의사도 많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여자의학전문학교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동아일보』 1926년 10월 24일 자-
그런데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해서는 교직원과 학생의 모집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 설립, 각종 설비와 기자재 확보 등을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요구되었다. 5년제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목표로 우선은 의사 시험을 준비하며 여자의학강습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9월, 경성부 창신동에 위치한 엘라 루이스 선교사의 사택에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열었다. 로제타 홀이 소장, 길정희가 부소장을 맡았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교육 기관으로 이전의 과도기적이고 단속적인 의학교육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1933년 7월, 로제타 홀이 은퇴를 준비하면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김탁원·길정희 부부에게 인계되었다. 일제 식민당국이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강습소 명칭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하게 되었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1933년 11월부터 매년 의사 시험 합격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정식 의학교육 기관으로 인준을 받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어야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는 학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졸업생들이 무시험으로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김탁원은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승격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34년 4월,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회를 조직하여 기부금을 모집했는데, 학교 설립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탁원은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 준비위원인 김성수를 찾아가 기부금 모금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성수는 순천의 유지이자 교육사업가인 김종익을 소개해 주었다.
김종익은 여자의학전문학교 기성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1937년 갑작스러운 이질 감염으로 위독한 상황에서도 여자의학전문학교 승격 자금으로 65만 원이라는 거금을 기부하였다. 이로써 로제타 홀과 한국인 의사들이 꿈꾸던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한국인 여의사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45년까지 157명의 한국인 여의사를 배출하였고,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을 돕고 싶다는 열망으로 낯선 이국땅을 밟은 지 40여 년, 로제타 홀은 다른 어떤 의료 선교사보다도 헌신과 돌봄의 삶을 살았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픔과 시련 속에서도 더 많은 사람을 돕겠다는 의지는 장애인 교육기관과 여성 의학교육 기관 설립이라는 더 원대한 목표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애인 교육과 여성 의학교육을 위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품은 원대한 꿈은 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과 여성 의학교육 기관의 설립을 통해 수많은 교사와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었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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