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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셔우드 홀,
인류애의 실천을 위해 헌신하다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환자에게 자신의 피부를 이식하다



1890년 10월,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가 보구녀관(普救女館)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화상으로 손가락 세 마디와 손바닥이 붙어버린 윤 씨 성의 소녀가 찾아왔다.

다행히 손가락은 잘 떼냈지만, 군데군데 손가락 피부가 떨어져 나가 외형이 몹시 흉한 상태였다. 환자의 피부를 떼어내어 이식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소녀는 이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로제타 셔우드는 자신의 피부를 떼어내어 소녀의 손가락에 이식했다. 이식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사람들은 벽안의 여의사의 진심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변의 지인들은 혹시 모를 감염 때문에 이식 수술을 적극 만류했지만, 로제타 셔우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자 했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장애인 교육에 힘쓰다



로제타 셔우드는 1865년 미국 뉴욕 리버티에서 영국 청도교 출신 가문에서 로즈벨트 셔우드와 피비 셔우드의 삼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WMCP)을 졸업하고, 그다음 해인 1890년, 미북감리회 선교사로서 한국 선교를 위해 입국했다. 그가 의료활동을 시작한 곳은 보구녀관이었다. 1892년 6월, 로제타 셔우드는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하던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과 결혼했다. 1893년 11월, 아들 셔우드 홀이 출생한 그다음 해에는 청일전쟁 중에 부상병과 환자를 돌보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1894년 12월, 로제타 홀은 아들과 함께 고향인 리버티로 돌아갔다. 이때, 자신의 의료조수였던 박에스더(1877~1910)도 함께 데려갔고, 박에스더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여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1895년 1월, 유복자인 이디스 홀이 태어났다. 1898년 5월, 로제타 홀은 평양 선교를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았으나 가족들이 이질에 걸렸고, 이디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딛고 평양에 여성 전문 진료소를 열었다. 평양감사는 자신의 아내를 치료해 준 데 감사하는 의미로 광혜녀원(廣惠女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9년에는 광혜녀원(廣惠女院) 부근에 이디스 기념 어린이 병동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로제타 홀이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은 평양에서 오봉래라는 시각장애인을 만나면서였다. 오봉래는 남편의 선교 활동을 돕던 오석형의 딸이었다. 로제타 홀은 그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사회적 차별을 받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남편의 사망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뉴욕점자를 본격적으로 공부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글점자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1900년 1월, 평양여맹학교(1909년 평양맹아학교로 교명 변경)가 로제타 홀의 주도로 정식으로 설립되어 집단적인 특수교육이 시작되었다. 오봉래는 훗날 한국 최초의 특수교육 교사가 되었다.


〈로제타 홀과 맹아학교 졸업생〉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여성 의학교육을 위한 노력



척박한 한국 땅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을 돕기 위해 로제타 홀이 시급하게 생각한 일 중의 하나는 여의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더 많은 여의사가 배출된다면 더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말 일제하에서 여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정식 의학교육 기관을 졸업하거나 식민당국이 주관하는 의사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국내의 대표적인 의학교육 기관으로 제중원의학교(1886)와 관립의학교(1899)가 있었지만, 여성은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

1900년대 들어서서 선교 진영에서 연합 선교사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교파 연합에 의한 여성 의학교육의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이 있는 남대문 지역에 여성병원이 건립된다면 장로교와 감리교의 여성 의학교육에 대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감리교의 거절로 이러한 기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광혜녀원 시기 수술 중인 로제타 홀(1911)〉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1910년대 들어서서, 로제타 홀은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광혜녀원에 부속 여성의학반(Woman’s Medical Class)을 개설하고, 이곳에서 의사 시험을 통해 의사면허를 취득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를 위해 일본인 의사 2명을 초빙하여 의사 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의사 시험에 합격한 학생은 없었다.




청강생제도와 의과 개설의 좌절



로제타 홀은 의학생들이 여성의학반에서 의사 시험에 대비하는 한편, 기존 의학교에 편입하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서 여학생 3명을 청강생으로 받아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1914년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등 세 명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에 청강생 자격으로 입학했다. 원래는 로제타 홀이 광혜녀원 부속 여성의학반에서 공부하던 3명을 추천했으나 그중 한 명이 탈락하였고, 안수경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 추천한 인물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로 개편되었고, 여자 청강생들은 1918년 경성의전 제2회 졸업생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경성의전은 조선총독부 지정 학교였으므로 졸업과 동시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내 최초의 여의사들은 청강생제도를 통해 면허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청강생제도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청강생들에게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부여하는 일로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청강생제도는 국내 최초의 여의사 배출이라는 성과를 얻었지만, 여의사를 지속해서 배출할 수 없는 제도적 한계도 드러내고 있었다. 1920년대 중요한 도전 중의 하나는 로제타 홀이 이화여자전문학교(이하 이화여전)에 의과 개설을 제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화여전은 1929년 가사과만 신설하였을 뿐 의과 개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강생제도로 배출된 한국 최초의 여의사들(1918): 아래 왼쪽부터 김영흥, 김해지, 안수경〉
(출처: 고려대학교 여성의학사연구소)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개설



로제타 홀의 은퇴 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여의사 양성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청강생제도나 의사 시험에만 기댈 수 없었다. 1926년 10월, 로제타 홀의 환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각계 인사들에게 여자의학전문학교의 설립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홀 여사가 답하여 말하기를) 여러 선배한테서 들은 말을 실험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조선 여성을 위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니,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을 바랍니다. 조선 가정에 있는 어린이의 건강을 보호하며 소경과 귀머거리를 예방하고 더욱 공장에 있는 여자들의 건강을 보호하는 데에 부인병원이 많이 생겨야 하겠고, 여의사도 많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여자의학전문학교를 꼭 세워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동아일보』 1926년 10월 24일 자-


그런데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해서는 교직원과 학생의 모집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 설립, 각종 설비와 기자재 확보 등을 위해 적지 않은 비용이 요구되었다. 5년제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목표로 우선은 의사 시험을 준비하며 여자의학강습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9월, 경성부 창신동에 위치한 엘라 루이스 선교사의 사택에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열었다. 로제타 홀이 소장, 길정희가 부소장을 맡았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한국 최초의 여성 의학교육 기관으로 이전의 과도기적이고 단속적인 의학교육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여자의학전문학교 승격을 위한 노력



1933년 7월, 로제타 홀이 은퇴를 준비하면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김탁원·길정희 부부에게 인계되었다. 일제 식민당국이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강습소 명칭도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개칭하게 되었다.

경성여자의학강습소는 1933년 11월부터 매년 의사 시험 합격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정식 의학교육 기관으로 인준을 받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어야 조선총독부가 지정하는 학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고, 그래야만 졸업생들이 무시험으로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김탁원은 여자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승격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34년 4월,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준비회를 조직하여 기부금을 모집했는데, 학교 설립 기준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탁원은 여자의학전문학교 발기 준비위원인 김성수를 찾아가 기부금 모금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성수는 순천의 유지이자 교육사업가인 김종익을 소개해 주었다.

김종익은 여자의학전문학교 기성회 이사로 참여하였고, 1937년 갑작스러운 이질 감염으로 위독한 상황에서도 여자의학전문학교 승격 자금으로 65만 원이라는 거금을 기부하였다. 이로써 로제타 홀과 한국인 의사들이 꿈꾸던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준비를 마칠 수 있었고,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한국인 여의사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45년까지 157명의 한국인 여의사를 배출하였고,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을 돕고 싶다는 열망으로 낯선 이국땅을 밟은 지 40여 년, 로제타 홀은 다른 어떤 의료 선교사보다도 헌신과 돌봄의 삶을 살았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픔과 시련 속에서도 더 많은 사람을 돕겠다는 의지는 장애인 교육기관과 여성 의학교육 기관 설립이라는 더 원대한 목표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애인 교육과 여성 의학교육을 위한 그의 열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품은 원대한 꿈은 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과 여성 의학교육 기관의 설립을 통해 수많은 교사와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었고, 그의 제자들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열어 나갔다.




집필자 소개

신규환
신규환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의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의인문학교실 교수 및 여성의학사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페스트 제국의 탄생』(2020), 『북경의 붉은 의사들』(2020), 『세브란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2019), 『북경똥장수』(2014), 『질병의 사회사』(2006) 등이 있다. 질병사, 의학사상사, 의료제도, 의학교육 등 의학사 분야의 다양한 연구를 통해 동아시아의 의료문제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마마를 피해 안동 집으로 보낸 아내가 마마에 걸리다”

마마배송굿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5.04.~1761.06.25

근래 하양현감 김경철의 근심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가뭄으로 보리와 밀이 모두 말라버린 것, 그리고 얼마 전부터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부와 하양현 일대에 마마가 퍼져 여러 사람이 마마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등이다.

고민 끝에 김경철은 일단 자신을 따라 하양현에 와 있는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아내는 아픈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경철은 거듭 설득했고, 침 치료를 받기 위해 사람을 부르자 아내는 김경철이 침을 다 맞고 나면 떠나겠다고 했다.

4월 26일부터 시작한 김경철의 침 치료가 5월 3일에 끝났는데,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증세가 나아진 듯하였다. 김경철은 바로 다음 날인 5월 4일에 아내의 행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인 갑동이가 모시고 가고, 손자인 쾌득(快得)도 따라갔다. 행차가 떠나가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김경철을 돌아봤다. 김경철은 자신의 오랜 병환으로 아내의 고생이 더욱 많았던 것을 알기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4일에 아내의 행차를 따라갔던 사람과 말은 10일에 돌아왔는데, 여기서 출발한 지 나흘 만에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했다. 조카들이 모두 내려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김경철은 다시 약을 먹으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양의 높은 산마다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이틀에 한 번씩 하양현의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다 보니 김경철의 병증이 다시 악화하였다. 너무 아픈 날은 직접 산에 오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한 달 정도 지난 6월 14일에 며칠 전 안동 집에 보냈던 태몽(太蒙)이 돌아와서 집안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몸이 아파 종일 신음하고 있고, 며느리의 병도 차도가 없다고 했다. 마마에 걸릴까 봐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냈는데, 신음이 나올 정도로 몸이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김경철은 여름 고과에서 최하의 평가를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어차피 병이 낫질 않아 여러 번 사직을 청했던 상황이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게다가 아내와 며느리의 병증이 심상치 않아 마음이 온통 집으로 가 있었으니 빨리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집에 소식을 알리고 곧 출발하겠다고 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 갑동이 20일에 하양현에 도착했다. 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17일에 출발하였으나 물에 막혀 이제야 도착했다고 했다. 김경철은 먼저 식구들의 소식을 물었는데, 아내는 계속 아픈 상황인데 두창(頭瘡)과 상풍(傷風)의 병증이라고 했다. 근심과 염려가 끝이 없었다.

김경철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기 위해 며칠 동안 서둘러서 하양에서의 신변을 정리하고 25일에 아들과 함께 하양을 출발했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의 병세를 살펴보고 병이 나을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병도 깊고, 온 가족이 이리 아프니 답답하기만 했다.

“소실의 만성 복통”

이우석, 하은일록,
1884-10-03~1884-12-09

한겨울이다. 오늘도 저물녘에 눈이 내렸다. 이우석(李愚錫)이 며칠 집을 비웠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저께부터 소실이 복통이 나서 고통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계양탕(桂養湯)을 달여 복용시켰으나 증세에 차도가 없다.

소실이 아픈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두 달 전인 10월에도 밤중에 자다가 닭 울 때쯤 복통이 도져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때는 평진탕(平陳湯)을 달여 먹였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복통에 잘 듣는 약이 무엇일까. 그때도 한 사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을 했다. 정기산(正氣散)이니 소체환(消滯丸)이니 하는 약들을 연이어 먹여봐도 효험이 없었다. 애꿎은 아내는 그 후에도 며칠간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보다 못한 이우석은 임경운(林慶雲)이라는 사람을 시켜 의원 박생(朴生)에게 증세를 기록해 보냈다. 다음날 돌아온 임경운은 처방을 가지고 왔지만, 이미 아내의 병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처방 덕분인지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복통은 차도를 보였다. 대신 이우석 자신이 감기로 드러눕는 바람에 집안에 약 냄새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쯤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시 아내의 복통이 도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때 임경운을 통해 받아온 처방대로 초기부터 약쑥을 달여 아내에게 먹여보았다. 과연 의원이 처방이 효험이 있었는지 조금은 증상이 덜한 것 같았다. 연일 추운 날씨에 아내까지 몸이 좋지 않아 참으로 걱정스럽다. 부디 당분간은 복통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우석은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복용이 효험이 없어 침 치료를 시작하다”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4-26~1761-05-03

김경철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여러 처방으로 약을 먹은 지 벌써 5달이 넘었다. 그러나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약만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듯하여 침술에 능한 최윤정(崔允貞)을 불렀다. 4월 26일 최윤정이 와서 침을 놨고, 그 후로 매일매일 최윤정에게 침을 맞았는데 5월 3일까지 침 1도(度)를 다 맞았다.

이렇게 꾸준히 침을 맞은 이후에 김경철은 가슴이 막힌 것 같은 증상이 약간 줄어든 듯했다. 효과가 지속되면 앞으로 침 치료를 더 받아볼 생각이 들었다.

“눈병으로 세상이 온통 흐릿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5-17~07-18

1643년 5월 17일, 아침에 밖에 나가니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세상이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광계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날이 맑게 갰지만, 김광계의 눈앞은 말끔하지가 않았다. 김광계가 마지막으로 눈병을 앓았던 것은 1609년, 34년 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 중순이 되어서까지 눈병이 낫지를 않았다. 7월 16일에는 눈이 아파서 결국 책도 보지 않고 온종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가로운 것도 좋았지만 눈을 써서 섬세하게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몇 달간 눈병 때문에 처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광계는 눈병 치료를 위해서 의원을 만나보지도 않았고, 젊을 때처럼 초정의 약수에 눈을 씻으러 가지도 않았다.

“약 짓다가 약 짓는 연기에 중독되다”

군관청(軍官廳)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12-25~1787-12-28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노상추에게 갑산 부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별말 없이 단지 갑산부 관아에 와 달라는 말만 간략히 적혀 있었다. 부 관아에 가 보니, 갑산 부사가 얼마 전 함흥에서 만병환(萬病丸)을 만드는 약재를 사 왔으니 함께 약 짓는 것을 의논하고 약을 달여 보자는 것이었다. 정말 약 이름처럼 만병통치약인지 그 처방을 알 수는 없었으나 하룻밤 동안 꼬박 달여야 하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 약인 듯했다.

노상추는 결국 갑산 부사가 붙드는 바람에 밤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부 관아의 군관청에서 약 달이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약탕기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던 방과 다른 방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신음하는 노상추를 돌보던 하인이 말하기를, 해가 떠도 부르시지를 않기에 방에 들어가 보니 쓰러져 계시더라며, 연기를 마신 것 같다고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 약을 달이며 한방에서 잤던 책방의 황조언(黃調彦) 석사(碩士)도 노상추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 만에 증상은 나아졌지만, 약을 달이자고 했던 갑산 부사는 미안했는지 다음날 연회를 열어 주었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약탕기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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