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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이어온 보제원의 의료 전통

서울한방진흥센터는 2017년 서울 동대문구의 한방산업특구인 서울약령시에 건립되어, 우리 전통 의학의 맥을 잇고 있다. 약 2,800m²의 대지에 약 9,700m²의 총면적을 자랑하는 이 시설은 전시·교육·체험을 통해 전통 한의학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널리 알리는 한방복합문화시설이다. 지하 1~3층의 공영주차장은 전통시장의 고질적 문제였던 접근성을 크게 개선했으며, 지상 3개 층에는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한방카페, 다목적강당, 약선음식체험관, 보제원(한방이동진료, 기계식한방마사지체험) 등이 들어서 있다.


〈서울한방진흥센터 전경〉 (출처: 서울관광재단 다누림)


현대식 시설을 갖춘 서울한방진흥센터가 자리 잡은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우리나라 전통 의학의 중심지이다. 이곳에서 천년 넘게 이어져 온 의료 문화의 정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인 보제원(普濟院)의 역사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매년 10월 서울약령시에서는 '서울약령시 보제원 한방문화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의 이름이 말해주듯 서울약령시는 보제원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보제원은 흔히 조선시대의 구휼기관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그 뿌리는 고려시대 각지에 설립된 읍내 비보사(裨補寺)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우리 의학의 맥락에서 보제원의 역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원시시대에는 주술과 의료가 하나였으며, 무(巫)가 치료를 담당했다. 종교의 발생과 확산으로 새로운 사제집단이 등장하면서 치료 방식도 변화했다. 특히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온 불교 의학은 선진 치료법으로 인정받으며, 토착 의학 전통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 의학과 의승(醫僧)들이 전근대 의학의 중심축을 담당했다.




삼국시대~고려 : 비보 사찰로서의 의료인프라


이때 (눌지왕의) 공주가이 몹시 위독했는데, 묵호자를 불러들여 향을 사르며 기도하게 하였더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時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삼국유사』 권3, 흥법조-


이러한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삼국시대부터 불교 승려들이 의승(醫僧)으로서 치료 활동을 펼쳤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역할이 더욱 확대되었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법력이나 주술을 활용한 치료의 의학적 효과는 재고의 여지가 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신뢰할 만한 의료행위이자 심리적 치유법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개별 의승의 의료행위를 넘어, 사찰이 보유한 인프라를 활용하여 당시 사회의 의료 공백을 채우는 공공의료 기관의 역할도 수행했다.


〈『고려사』 권106, 열전( 列傳), 권제(卷第)19, 홍융조에 ‘복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의승’이 확인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고려시대의 자복사(資福寺)


각 고을 읍(邑) 안의 자복(資福)에는 (중략) 읍(邑)밖의 각사(各寺)에는
(하략)
(各官邑內資福, ... 邑外各寺, ...)

-『태종실록』 권11, 태종6년(1406) 3월 27일조-


『태종실록』의 이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는 행정구역을 읍내(邑內)와 읍외(邑外)로 구분하고, 읍내에 위치한 사원을 특별히 ‘자복’이라 지칭했음을 알 수 있다. '자복'이란 읍인(邑人)의 복을 도모한다는 뜻으로, 고려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용어였다. 자복사는 국가 불교 의례를 수행하는 기본적인 사찰 기능 외에도, 의료시설, 지방 시장인 허시(虛市) 운영, 승려·상인·관리들을 위한 읍내 숙박시설 등 복합적 사회복지시설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복사는 조선 건국 이후 혁파 대상이 되면서 그 명칭과 성격에 변화를 겪게 된다.




보제원(普濟院)의 변천과 발전



〈18세기 중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도(漢陽圖)》에 보이는 ‘보제원’〉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그 나머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각 고을의 자복사는 모두 혁파한다.
(其餘有名無實各官資福寺, 竝皆革除.)

-『세종실록』 권23, 세종6년(1424) 3월 13일조-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태종대에 통폐합된 자복사는 세종대에 이르러 대부분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일부 기관은 이름을 달리하면서도 본래의 성격을 유지했는데, 동대문 밖의 보제원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서울은 고려시대 양주(揚州)와 남경(南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보제원은 이곳의 자복사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보제원 주변의 모습은 한 시인의 눈에 이렇게 비쳤다.

보제원 누대에 올라 감회를 읊다
동대문 앞 영도교(永倒橋)가 있는데
다리 밑 흐르는 물 아득히 멀어지네
번화했던 지난 일은 구름처럼 흩어졌고,
오늘 아침 시든 풀에 나그네 맘 녹아드네.
멀리 뵈는 숲에는 지친 새들 돌아가고
아득한 들판 위로 노루 제멋대로 뛰어다니네
잠시 보제대 앞 돌에 앉아서 쉬노라니
그 당시 옥 피리 소리 들리는 듯 하네.
바람 불자 가는 눈발 숲 모퉁이 뿌리대고
골짜기 찬 구름은 얼어붙어 꼼짝 않네
나그네 몸을 떨며 새벽달에 다니는데
별빛 아래 나무꾼이 오는 걸 마주쳤네

(登普濟院樓感吟
東大門前永倒橋 橋頭流水去迢迢
繁華往事浮雲散 衰草今朝客意銷
渺渺平林歸鳥倦 茫茫荒野走獐驕
暫休普濟臺前石 怳聽當時碧玉簫
風吹微雪灑林隈 峽裏寒雲凍不開
有客凌兢踏曉月 喜逢樵子戴星來)

-배응경(裵應褧), 『안촌선생문집(安村先生文集)』 권1- (국역: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이 시에서 '보제대(普濟臺)'라는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보제원이 단순한 의료구휼 기관을 넘어서는 복합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보제원의 기능 변화는 '성저십리(城底十里)' 개념의 변천과 맥을 같이한다.

조선 전기에는 왕화(王化)가 미치는 범위 안의 의료구휼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의원을 두어 병세가 없거나 심하지 않은 기민(飢民)을 치료하는 등 공공의료 기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그 기능이 더욱 확대되었다. 기로연(耆老宴)과 같은 문화행사가 열리는 장소가 되었고, 왕의 행차 시에는 주정소(駐停所)로 활용되었다. 특히 백성들의 상언(上言)을 접수하는 행정기관의 역할도 맡아, 백성과 왕실을 잇는 소통 창구 역할도 했다. 이는 보제원이 단순히 환자를 치료하는 곳을 넘어, 도성 동부의 중심 시설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보신각 앞에 정차한 전차〉 (출처: 공유마당)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도 보제원의 중요성은 계속되었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電車)가 부설될 때 주요 정류장 중 하나로 보제원이 선정된 것은 이곳이 여전히 도성 동부의 핵심 공간이었음을 방증한다. 비록 이를 끝으로 보제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지만, 그 전통은 오늘날 서울약령시와 서울한방진흥센터로 이어지고 있다.




보제원의 현대적 의미


이 세상에서 일하기를 하는데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니, 애쓰는 이가 가고 나면 그 뒤를 이은 이도 애쓰고 또 애쓸 따름이다.
(此世間為為事為為不𦘚為為 為人去後来者復為為者也)

-영조(英祖), 『어제인창방명건비추모만배(御製仁昌坊命建碑追慕萬倍)』(1771)-


보제원의 천년 역사는 영조의 말처럼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고려시대 비보사찰에서 시작해 조선시대 구휼기관으로, 다시 현대의 서울한방진흥센터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늘 시대적 한계와 마주쳤다. 하지만 보제원의 역사는 그 한계 속에서도 '활인(活人)'이라는 근본 가치를 잃지 않았다. 의료구휼의 형식과 방법은 달라졌을지언정, 그 본질적 가치만큼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서울약령시와 서울한방진흥센터가 매년 개최하는 ‘서울약령시 보제원 한방문화축제’에서진행하는 보제원 제향 의례〉
(출처: 동대문구)


이제 서울약령시와 서울한방진흥센터는 선인들의 뜻을 이어받아 전통 의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한의학의 과학화와 현대화라는 새로운 도전 역시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앞선 이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또한 이 길을 성실히 걸어가고 있다. 천 년을 이어온 보제원의 전통이 말해주듯이 우리가 오늘 심은 씨앗은 후대에 반드시 큰 열매를 맺을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어제인창방명건비추모만배』
  김수연, 「고려~조선 전기 불교계의 전염병 대응과 대민 구료」, 『불교학연구』
  제71호(2022).
  한기문, 「고려시대 자복사의 성립과 존재 양상」, 『민족문화논총』 제49집
  (2011).



집필자 소개

김호산(서울한방진흥센터)
김호산
동국대학교에서 미술사학전공으로 문학석사,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문화예술학 전공으로 문화예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숭아트센터와 종근당고촌재단을 거쳐 현재 서울한방진흥센터 센터장 겸 서울약령시한의약박물관 관장으로 재직중이다. 한 장소, 한 사람, 한 물건의 삶과 스토리를 해석하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마마를 피해 안동 집으로 보낸 아내가 마마에 걸리다”

마마배송굿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5.04.~1761.06.25

근래 하양현감 김경철의 근심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가뭄으로 보리와 밀이 모두 말라버린 것, 그리고 얼마 전부터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부와 하양현 일대에 마마가 퍼져 여러 사람이 마마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등이다.

고민 끝에 김경철은 일단 자신을 따라 하양현에 와 있는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아내는 아픈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경철은 거듭 설득했고, 침 치료를 받기 위해 사람을 부르자 아내는 김경철이 침을 다 맞고 나면 떠나겠다고 했다.

4월 26일부터 시작한 김경철의 침 치료가 5월 3일에 끝났는데,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증세가 나아진 듯하였다. 김경철은 바로 다음 날인 5월 4일에 아내의 행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인 갑동이가 모시고 가고, 손자인 쾌득(快得)도 따라갔다. 행차가 떠나가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김경철을 돌아봤다. 김경철은 자신의 오랜 병환으로 아내의 고생이 더욱 많았던 것을 알기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4일에 아내의 행차를 따라갔던 사람과 말은 10일에 돌아왔는데, 여기서 출발한 지 나흘 만에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했다. 조카들이 모두 내려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김경철은 다시 약을 먹으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양의 높은 산마다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이틀에 한 번씩 하양현의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다 보니 김경철의 병증이 다시 악화하였다. 너무 아픈 날은 직접 산에 오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한 달 정도 지난 6월 14일에 며칠 전 안동 집에 보냈던 태몽(太蒙)이 돌아와서 집안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몸이 아파 종일 신음하고 있고, 며느리의 병도 차도가 없다고 했다. 마마에 걸릴까 봐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냈는데, 신음이 나올 정도로 몸이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김경철은 여름 고과에서 최하의 평가를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어차피 병이 낫질 않아 여러 번 사직을 청했던 상황이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게다가 아내와 며느리의 병증이 심상치 않아 마음이 온통 집으로 가 있었으니 빨리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집에 소식을 알리고 곧 출발하겠다고 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 갑동이 20일에 하양현에 도착했다. 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17일에 출발하였으나 물에 막혀 이제야 도착했다고 했다. 김경철은 먼저 식구들의 소식을 물었는데, 아내는 계속 아픈 상황인데 두창(頭瘡)과 상풍(傷風)의 병증이라고 했다. 근심과 염려가 끝이 없었다.

김경철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기 위해 며칠 동안 서둘러서 하양에서의 신변을 정리하고 25일에 아들과 함께 하양을 출발했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의 병세를 살펴보고 병이 나을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병도 깊고, 온 가족이 이리 아프니 답답하기만 했다.

“소실의 만성 복통”

이우석, 하은일록,
1884-10-03~1884-12-09

한겨울이다. 오늘도 저물녘에 눈이 내렸다. 이우석(李愚錫)이 며칠 집을 비웠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저께부터 소실이 복통이 나서 고통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계양탕(桂養湯)을 달여 복용시켰으나 증세에 차도가 없다.

소실이 아픈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두 달 전인 10월에도 밤중에 자다가 닭 울 때쯤 복통이 도져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때는 평진탕(平陳湯)을 달여 먹였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복통에 잘 듣는 약이 무엇일까. 그때도 한 사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을 했다. 정기산(正氣散)이니 소체환(消滯丸)이니 하는 약들을 연이어 먹여봐도 효험이 없었다. 애꿎은 아내는 그 후에도 며칠간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보다 못한 이우석은 임경운(林慶雲)이라는 사람을 시켜 의원 박생(朴生)에게 증세를 기록해 보냈다. 다음날 돌아온 임경운은 처방을 가지고 왔지만, 이미 아내의 병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처방 덕분인지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복통은 차도를 보였다. 대신 이우석 자신이 감기로 드러눕는 바람에 집안에 약 냄새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쯤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시 아내의 복통이 도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때 임경운을 통해 받아온 처방대로 초기부터 약쑥을 달여 아내에게 먹여보았다. 과연 의원이 처방이 효험이 있었는지 조금은 증상이 덜한 것 같았다. 연일 추운 날씨에 아내까지 몸이 좋지 않아 참으로 걱정스럽다. 부디 당분간은 복통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우석은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복용이 효험이 없어 침 치료를 시작하다”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4-26~1761-05-03

김경철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여러 처방으로 약을 먹은 지 벌써 5달이 넘었다. 그러나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약만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듯하여 침술에 능한 최윤정(崔允貞)을 불렀다. 4월 26일 최윤정이 와서 침을 놨고, 그 후로 매일매일 최윤정에게 침을 맞았는데 5월 3일까지 침 1도(度)를 다 맞았다.

이렇게 꾸준히 침을 맞은 이후에 김경철은 가슴이 막힌 것 같은 증상이 약간 줄어든 듯했다. 효과가 지속되면 앞으로 침 치료를 더 받아볼 생각이 들었다.

“눈병으로 세상이 온통 흐릿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5-17~07-18

1643년 5월 17일, 아침에 밖에 나가니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세상이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광계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날이 맑게 갰지만, 김광계의 눈앞은 말끔하지가 않았다. 김광계가 마지막으로 눈병을 앓았던 것은 1609년, 34년 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 중순이 되어서까지 눈병이 낫지를 않았다. 7월 16일에는 눈이 아파서 결국 책도 보지 않고 온종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가로운 것도 좋았지만 눈을 써서 섬세하게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몇 달간 눈병 때문에 처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광계는 눈병 치료를 위해서 의원을 만나보지도 않았고, 젊을 때처럼 초정의 약수에 눈을 씻으러 가지도 않았다.

“약 짓다가 약 짓는 연기에 중독되다”

군관청(軍官廳)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12-25~1787-12-28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노상추에게 갑산 부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별말 없이 단지 갑산부 관아에 와 달라는 말만 간략히 적혀 있었다. 부 관아에 가 보니, 갑산 부사가 얼마 전 함흥에서 만병환(萬病丸)을 만드는 약재를 사 왔으니 함께 약 짓는 것을 의논하고 약을 달여 보자는 것이었다. 정말 약 이름처럼 만병통치약인지 그 처방을 알 수는 없었으나 하룻밤 동안 꼬박 달여야 하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 약인 듯했다.

노상추는 결국 갑산 부사가 붙드는 바람에 밤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부 관아의 군관청에서 약 달이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약탕기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던 방과 다른 방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신음하는 노상추를 돌보던 하인이 말하기를, 해가 떠도 부르시지를 않기에 방에 들어가 보니 쓰러져 계시더라며, 연기를 마신 것 같다고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 약을 달이며 한방에서 잤던 책방의 황조언(黃調彦) 석사(碩士)도 노상추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 만에 증상은 나아졌지만, 약을 달이자고 했던 갑산 부사는 미안했는지 다음날 연회를 열어 주었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약탕기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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