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사본〉 (출처: 위키피디아)
사람들은 의사라면 응당 슬기롭기를 바란다. 시니컬하거나 순수하거나 아재 유머라도 괜찮으니 어쨌든 약간의 웃음을 갖추고, 무엇보다도 환자에 대한 연민을 갖추기를 바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인류에 봉사하고 환자의 비밀을 유지하며 인종·종교·국적·정치·재산 여부나 지위 고하를 초월하기는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는다. 병원에 들어가면 무사히 살아 나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뮤지컬 《Little Shop Of Horrors》의 한 장면〉
(출처: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뮤지컬 《Little Shop Of Horrors》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치과의사 오린이 그러하다. 병원에서는 하얀 가운에 하얀 마스크, 하얀 장갑에 하얀 모자를 쓰는 오린이지만, 병원만 벗어나면 검은 가죽 자켓을 입고 무거운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위험하게 모는 그는 사디스트 사이코패스다.
어릴 때부터 이웃의 반려동물의 씨를 말리던 오린을 보고 이 사이코패스의 어머니는 생각한다. “아들아, 고통에 특화된 너는 치과의사가 딱이다!” 어머니 덕에 일찌감치 소년원에 들어갔어야 했을 오린은 멀쩡하게 치대를 들어가 정말로 치과의사 면허를 따냈다. 그리고 환자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발산하며 가까운 사람들의 눈두덩이에 퍼런 보랏빛 멍을 그려주는 나날을 보내며 다시없을 쾌활한 인생을 살아간다.
이런 오린에게는 가스라이팅을 통해 자신감을 팍팍 죽여 놓은 여자친구 오드리가 있다. 그리고 오드리를 일편단심 바라보며 짝사랑하는 남자주인공 시모어가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린은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웃음가스를 본인이 흡입하고 넋이 나가 있다가 자신을 찾아온 시모어를 바라보며, 이미 지나치게 들이마신 웃음가스 때문에 박장대소 하면서 죽어간다.
오린은 시모어에게 가스를 끄라 명령하지만, 소심한 시모어는 그를 죽이러 온 터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오린이 오들오들 떨면서 구석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본다. 그리고는 죽은 오린을 잘 싸서 자신이 일하는 꽃집의 지하실로 끌고 가 토막 낸 뒤 식인식물 오드리2의 먹이로 던져준다.
극중 가장 웃긴 노래를 부르는 오린이 그렇게 죽은 후, 바로 식인식물 오드리2의 습격이 이어지면서 뮤지컬은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끔찍한 엎치락뒤치락 호러가 이어지는데 그 와중에 시모어와 오드리는 서로의 숨겨왔던 사랑도 고백하고 식인식물로부터 지구도 구하고 행복한 해피엔딩에 이른다.
〈동명의 영화 《Little Shop Of Horrors》(1960)의 한 장면〉 (출처: Imdb)
이 작품은 훗날 디즈니의 상징이 되는 작곡가 알란 맨켄(Alan Menken)의 1982년 오프-브로드웨이 초연작으로 반전의 유머감각이 뛰어났던 작사가이자 대본작가 하워드 애쉬먼(Howard Ashman)과의 합작이다. 원작이 되는 흑백영화(1960)에는 치과를 찾아오는 마조히스트 환자로 잭 니콜슨(Jack Nicholson)이 등장한다. 소위 말하는 ‘정상’의 인물은 한 명도 없지만 그들 안의 어느 한 면모는 보는 사람과 반드시 닿아 있다. 그 부분은 부끄럽게도 사람들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허영심이나 나약함이다. 이 작품은 이런 부분을 죄책감 하나 없이 웃으며 드러낸다.
오린은 등장인물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물이다. 모두가 브루클린의 가난한 거리에서 간신히 살아가고 있을 때 오로지 그만 맨하튼의 멋들어진 건물에서 일한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불경한데 심지어 나쁜 사람이니 소중한 식인식물의 배를 채워줄 첫 인물이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그렇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소름 돋는 치과의사는 오드리2의 뱃속으로 깔끔하게 소화된다. 환자로 만나면 참으로 공교롭고 난처하고 무서울 치과의사 오린은 그렇게 사라지지만, 이 세상에 그런 의사가 정말 코믹 뮤지컬 속 오린 한 명뿐일까?
〈국립창극단의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2024)〉 (출처: 국립창극단)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의사는, 특히나 무대 위의 의사들은 죽은 자를 소생하는데 더 관심이 많다. 창극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주인공 옹녀는 장승을 땔감으로 쓴 남편 변강쇠가 동티가 들어 시름시름 앓자 일단 점집으로 향한다. 굿으로 어떻게든 이 액운을 풀어볼 참이나 장승의 기운이 워낙 세 도저히 풀지 못하자 결국 의원을 찾아간다. 그것도 아무나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함양의 명의를 찾아 가진 돈을 다 내놓고 사정사정 하여 데리고 온다. 이 의원은 드러누워 끙끙 앓는 변강쇠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야말로 오만가지 정성을 들인다. 원작에 따르면,
좌수맥(左手脈)을 짚어본다. 신방광맥(腎肪胱脈) 침지(沈遲)하니 장냉정박(臟冷精薄)할 것이요, 간담맥(肝膽脈)이 침실(沈失)하니 절늑통압(節肋痛壓)할 것이요, 심수맥(心水脈)이 부삭(浮數)하니 풍열두통(風熱頭痛)할 것이요, 명문삼초맥(命門三焦脈)이 이렇게 침미(沈微)하니 산통탁진(酸通濁津)할 것이요, 비위맥(脾胃脈)이 참심(참심)하니 기촉복통(氣促腹痛)할 것이요, 폐대장맥(肺大腸脈)이 부현(浮弦)하니 해수 냉결(冷結)할 것이요, 기구인영맥(氣口人迎脈)이 내관외격(內關外格)하여 일호륙지(一呼六至)하고 십괴(十怪)가 범하였으니 암만해도 죽을 터이나 약이나 써보게 건재(乾材)로 사오너라. 인삼(人蔘), 녹용(鹿茸), 우황(牛黃), 주사(朱砂), 관계(官桂), 부자(附子), 곽향(藿香), 축사(縮砂), 적복령(赤茯笭), 백복령(白茯伶), 적작약(赤芍藥), 백작약(白芍藥), 강활(羌活), 독활(獨活), 시호(柴胡), 전호(前胡), 천궁(川芎), 당귀(唐歸), 황기(黃기), 백지(白芷), 창출(倉朮), 백출(白朮), 삼릉(三稜), 봉출(蓬朮), 형개(荊芥), 防風(방풍), 소엽(蘇葉), 박하(薄荷), 진피(陳皮), 청피(靑皮), 반하(半夏), 후박(厚朴), 용뇌(龍腦), 사향(麝香), 별갑(鱉甲), 구판(龜板), 대황(大黃), 망초(芒硝), 산약(山藥), 택사(澤瀉), 건강(乾薑), 감초(甘草). 탕약(湯藥)으로 써서 보자.
형방패독산(荊防敗毒散), 곽향정기산(藿香正氣散),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湯), 자음강화탕(滋陰降火湯), 구룡군자탕(구龍君子湯), 상사평위산(常砂平胃散), 황기건중탕(黃기建中湯), 일청음(一淸飮), 이진탕(二陳湯), 삼백탕(三白湯), 사물탕(四物湯), 오령산(五靈散), 륙미탕(六味湯), 칠기탕(七氣湯), 팔물탕(八物湯), 구미강활탕(九味羌活湯), 십전대보탕(十全大補蕩). 암만써도 효험(效驗)없어 환약(丸藥)을 써서 보자.
소합환(蘇合丸), 청심환(淸心丸), 천을환(天乙丸), 포룡환(抱龍丸), 사청환(瀉淸丸), 비급환(脾及丸), 광제환(廣濟丸), 백발환(百發丸), 고암심신환(古庵心腎丸), 가미지황환(加味地黃丸), 경옥고(瓊玉膏), 신선고(神仙膏)가 아무것도 효험없다. 단방약(單方藥)을 하여 볼까.
지렁이집, 굼벵이집, 우렁탕, 섬사주(蟾蛇酒)며 무가산(無價散), 황금탕(黃金湯)과 오줌찌기, 월경수(月經水)며 땅강아지, 거머리, 황우리, 메뚜기, 가물치, 올빼미를 다 써 보았지만 효험없다. 침이나 주어보자.
순금장식(純金粧飾) 대모침통 절렁절렁 흔들어서 삼릉(三稜)을 빼여들고 차차 혈맥(穴脈) 집퍼 줄 때, 백회(百會) 짚어 통천(通天) 주고, 뇌공(腦空) 짚어 풍지(風池) 주고, 전중(전中) 짚어 신궐(神闕) 주고, 기해(氣海) 짚어 대맥(帶脈) 주고, 대저(大저) 짚어 명문(命門) 주고, 장강(長强) 짚어 간유(肝兪) 주고, 담유(膽兪) 짚어 소장유(小腸兪) 주고, 방광(膀胱) 짚어 곡지(曲池) 주고, 수삼이(手三里) 짚어 양곡(陽谷) 주고, 완골(腕骨) 짚어 내관(內關) 주고, 대릉(大陵) 짚어 소상(小商) 주고, 환도(環跳) 짚어 양능천(陽陵泉) 주고, 현종(懸鍾) 짚어 위중(委中) 주고, 승산(承山) 짚어 곤륜(崑崙) 주고, 신맥(申脈) 짚어 삼음교(三陰交) 주고, 공손(公孫) 짚어 축빈(築賓) 주고, 조해(照海) 짚어 용천(涌泉) 주어, 만신(萬身)을 다 쑤시니, 병에 곯고 약에 곯고 침에 곯아 죽을 밖에 수가 없다.
의원은 결국 못 고친다며 가버린다. 하지만 이 의원이 이리 저리 들쑤신 덕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끙끙대던 변강쇠가 용을 써서 입을 열고 옹녀에게 마지막 작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창극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이 장면에는 의녀들까지 등장해서 여기에 춤과 노래를 곁들이는데, 어쨌거나 이 의사는 원작인 판소리에서도, 새로 만들어진 창극에서도 자기 역할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려준다.
살리지는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진짜 의사다. 심지어 이 의사는 극중의 모든 남자들이, 눈이 안보이는 봉사까지 포함해서 옹녀만 보면 껄떡이느라 정신을 못 차리건만 유일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작별을 고하는 유일한 남성이기도 하다. 그는 아마도 변강쇠를 살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다음에 비슷한 환자를 만나면 어떻게 살릴까 고민하며 자신의 의원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옹녀의 진짜 삶은 변강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시작되겠지만 우리는 그 이후 옹녀의 삶은 아직 알 수 없다. 난봉꾼에 노름꾼인 변강쇠를 서방으로 맞아 삯바느질부터 남의 집 일까지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 하며 억세게 살림을 꾸려갔던 옹녀의 뒷이야기가 진정으로 슬기로운 옹녀의 싱글 라이프였기를 바란다. 그 당시에 자신의 죄도 아닌데 박대를 당하며 고향 땅을 떠날 때, “오냐 옹녀, 어서 가자! 흥!” 하고 떠났던 그 기개에 어디로도 떠나지 못했던 동시대의 수많은 여성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참으로 슬기로운 옹녀다.
1986년 개봉 영화 〈Little Shop of Horrors - Dentist Song〉
코미디언/배우인 스티브 마틴이 사디스트 치과의사 오린으로 분했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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