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김광계, 매원일기

직접 약을 조제하며 건강을 챙기다


김광계가 직접 약을 조제한 기록은 김광계가 55세이던 1635년부터 시작된다. 원래 체질이 건강하지는 않았던 김광계는 평소 과음을 하거나 외출 후에는 반드시 몸을 조리하고는 했다. 무더위나 혹한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수록 더 몸을 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김광계는 직접 약을 조제하기 시작하였다. 안동 읍내에 약국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약재를 사오기도 하고 근처에 약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조제법을 묻기도 하였다.

1635년 11월에 아우들과 함께 약을 조제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1637년 2월 7일에는 기를 보충하는 보기탕(補氣湯)을 지었다. 닷새 후에는 약에 대해 잘 아는 이 군위(李軍威)가 재종숙 김령(金坽)의 집에 있다는 것을 듣고 약에 대해 물어보러 가 보았으나, 이 군위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에는 아들 염과 조카들을 모아 함께 약을 지었다. 자신도 복통을 앓고 있었지만 조카며느리도 앓고 있는 터라 더욱 약을 짓는 일이 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1638년 3월에도 약을 지었는데, 일부러 멀리서 와서 약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환약을 만들어보았다. 아마도 처음 해 보아서 그런지 약재를 찧고 빻아서 가루를 내는 일이 힘들게 느껴졌다. 4월에도 약을 조제하였는데, 이번에는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환약을 만들었다. 이제 연례행사처럼 약을 만들게 되었고, 다음 해인 1539년에도 봄이 되자 환약을 만들었다.

김광계는 약의 중요성을 또한 잡기(雜記)에 따로 모아 적어두기도 하였는데, 건강한 삶을 위한 지침서 같이 목록화 해 놓았다. 평소 밥 먹듯 약을 먹는 건강한 어르신 이야기부터, 평소 김광계가 앓던 배탈 등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환약에 대해서도 정리하였다. 스스로의 건강에 늘 경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출전 : 매원일기(梅園日記)
저자 : 김광계(金光繼)
주제 : 의료
시기 : 1635-11-25 ~ 1639-03-28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광계, 김령, 김광실, 김광보, 김광악, 김렴, 김초

관련자료링크  더보기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마마를 피해 안동 집으로 보낸 아내가 마마에 걸리다”

마마배송굿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5.04.~1761.06.25

근래 하양현감 김경철의 근심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가뭄으로 보리와 밀이 모두 말라버린 것, 그리고 얼마 전부터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부와 하양현 일대에 마마가 퍼져 여러 사람이 마마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등이다.

고민 끝에 김경철은 일단 자신을 따라 하양현에 와 있는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아내는 아픈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경철은 거듭 설득했고, 침 치료를 받기 위해 사람을 부르자 아내는 김경철이 침을 다 맞고 나면 떠나겠다고 했다.

4월 26일부터 시작한 김경철의 침 치료가 5월 3일에 끝났는데,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증세가 나아진 듯하였다. 김경철은 바로 다음 날인 5월 4일에 아내의 행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인 갑동이가 모시고 가고, 손자인 쾌득(快得)도 따라갔다. 행차가 떠나가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김경철을 돌아봤다. 김경철은 자신의 오랜 병환으로 아내의 고생이 더욱 많았던 것을 알기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4일에 아내의 행차를 따라갔던 사람과 말은 10일에 돌아왔는데, 여기서 출발한 지 나흘 만에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했다. 조카들이 모두 내려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김경철은 다시 약을 먹으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양의 높은 산마다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이틀에 한 번씩 하양현의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다 보니 김경철의 병증이 다시 악화하였다. 너무 아픈 날은 직접 산에 오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한 달 정도 지난 6월 14일에 며칠 전 안동 집에 보냈던 태몽(太蒙)이 돌아와서 집안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몸이 아파 종일 신음하고 있고, 며느리의 병도 차도가 없다고 했다. 마마에 걸릴까 봐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냈는데, 신음이 나올 정도로 몸이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김경철은 여름 고과에서 최하의 평가를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어차피 병이 낫질 않아 여러 번 사직을 청했던 상황이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게다가 아내와 며느리의 병증이 심상치 않아 마음이 온통 집으로 가 있었으니 빨리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집에 소식을 알리고 곧 출발하겠다고 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 갑동이 20일에 하양현에 도착했다. 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17일에 출발하였으나 물에 막혀 이제야 도착했다고 했다. 김경철은 먼저 식구들의 소식을 물었는데, 아내는 계속 아픈 상황인데 두창(頭瘡)과 상풍(傷風)의 병증이라고 했다. 근심과 염려가 끝이 없었다.

김경철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기 위해 며칠 동안 서둘러서 하양에서의 신변을 정리하고 25일에 아들과 함께 하양을 출발했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의 병세를 살펴보고 병이 나을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병도 깊고, 온 가족이 이리 아프니 답답하기만 했다.

“소실의 만성 복통”

이우석, 하은일록,
1884-10-03~1884-12-09

한겨울이다. 오늘도 저물녘에 눈이 내렸다. 이우석(李愚錫)이 며칠 집을 비웠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저께부터 소실이 복통이 나서 고통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계양탕(桂養湯)을 달여 복용시켰으나 증세에 차도가 없다.

소실이 아픈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두 달 전인 10월에도 밤중에 자다가 닭 울 때쯤 복통이 도져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때는 평진탕(平陳湯)을 달여 먹였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복통에 잘 듣는 약이 무엇일까. 그때도 한 사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을 했다. 정기산(正氣散)이니 소체환(消滯丸)이니 하는 약들을 연이어 먹여봐도 효험이 없었다. 애꿎은 아내는 그 후에도 며칠간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보다 못한 이우석은 임경운(林慶雲)이라는 사람을 시켜 의원 박생(朴生)에게 증세를 기록해 보냈다. 다음날 돌아온 임경운은 처방을 가지고 왔지만, 이미 아내의 병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처방 덕분인지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복통은 차도를 보였다. 대신 이우석 자신이 감기로 드러눕는 바람에 집안에 약 냄새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쯤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시 아내의 복통이 도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때 임경운을 통해 받아온 처방대로 초기부터 약쑥을 달여 아내에게 먹여보았다. 과연 의원이 처방이 효험이 있었는지 조금은 증상이 덜한 것 같았다. 연일 추운 날씨에 아내까지 몸이 좋지 않아 참으로 걱정스럽다. 부디 당분간은 복통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우석은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복용이 효험이 없어 침 치료를 시작하다”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4-26~1761-05-03

김경철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여러 처방으로 약을 먹은 지 벌써 5달이 넘었다. 그러나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약만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듯하여 침술에 능한 최윤정(崔允貞)을 불렀다. 4월 26일 최윤정이 와서 침을 놨고, 그 후로 매일매일 최윤정에게 침을 맞았는데 5월 3일까지 침 1도(度)를 다 맞았다.

이렇게 꾸준히 침을 맞은 이후에 김경철은 가슴이 막힌 것 같은 증상이 약간 줄어든 듯했다. 효과가 지속되면 앞으로 침 치료를 더 받아볼 생각이 들었다.

“눈병으로 세상이 온통 흐릿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5-17~07-18

1643년 5월 17일, 아침에 밖에 나가니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세상이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광계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날이 맑게 갰지만, 김광계의 눈앞은 말끔하지가 않았다. 김광계가 마지막으로 눈병을 앓았던 것은 1609년, 34년 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 중순이 되어서까지 눈병이 낫지를 않았다. 7월 16일에는 눈이 아파서 결국 책도 보지 않고 온종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가로운 것도 좋았지만 눈을 써서 섬세하게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몇 달간 눈병 때문에 처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광계는 눈병 치료를 위해서 의원을 만나보지도 않았고, 젊을 때처럼 초정의 약수에 눈을 씻으러 가지도 않았다.

“약 짓다가 약 짓는 연기에 중독되다”

군관청(軍官廳)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12-25~1787-12-28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노상추에게 갑산 부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별말 없이 단지 갑산부 관아에 와 달라는 말만 간략히 적혀 있었다. 부 관아에 가 보니, 갑산 부사가 얼마 전 함흥에서 만병환(萬病丸)을 만드는 약재를 사 왔으니 함께 약 짓는 것을 의논하고 약을 달여 보자는 것이었다. 정말 약 이름처럼 만병통치약인지 그 처방을 알 수는 없었으나 하룻밤 동안 꼬박 달여야 하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 약인 듯했다.

노상추는 결국 갑산 부사가 붙드는 바람에 밤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부 관아의 군관청에서 약 달이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약탕기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던 방과 다른 방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신음하는 노상추를 돌보던 하인이 말하기를, 해가 떠도 부르시지를 않기에 방에 들어가 보니 쓰러져 계시더라며, 연기를 마신 것 같다고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 약을 달이며 한방에서 잤던 책방의 황조언(黃調彦) 석사(碩士)도 노상추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 만에 증상은 나아졌지만, 약을 달이자고 했던 갑산 부사는 미안했는지 다음날 연회를 열어 주었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약탕기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