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허촌 사또 한익범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역병이 분명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시작은 마을에 들렀던 나그네로부터였다. 마을 입구의 주막에 묵었던 나그네는 그날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질 못했다. 얼굴에 붉은 꽃이 피더니 열이 펄펄 끓었다고 했다. 하필 주막에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 손님도 없었고, 왕래도 없었다. 주막이 민가가 모여있는 곳과는 좀 떨어진, 마을 입구의 길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달 나뭇짐을 배달하는 임씨 형제가 갔을 때는 나그네와 주모, 주막의 머슴과 찬모 모두 죽은 뒤였다.
그리고, 며칠 후 임씨 형제가 쓰러졌다. 그들 또한 얼굴에 붉은 꽃이 피어나더니 팔다리까지 번졌다. 열이 올라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고을 사람 스물이 넘게 쓰러졌고, 벌써 그 중 세 사람이 죽었다. 고을에 초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아에는 역병에 걸린 사람들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아이들은 역병에 더욱 취약했다.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의 한 장면〉 (출처: SBS)
“예방(禮房)은 속히 들라.”
예방이 얼른 달려왔다. 예방은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고을에 역병이 창궐하니 참으로 큰일이오. 우선 역병에 걸린 사람 집은 금줄을 걸어 사람의 왕래를 막도록 하시오.”
예방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건 벌써 시행하고 있습니다.”
〈허준(許浚, 1539~1615)이 1613년 간행한 『신찬벽온방』〉 (출처: 국가유산청)
“그리고 『신찬벽온방(新撰辟瘟方)』을 참고하여 약을 지어 돌리도록 하시오. 우리 고을에 의원은 몇이나 있소?”
“의원은 허인이라고 한 명이 있습니다.”
“의원이 달랑 한 명뿐이라는 거요?”
“옆 고을에도 의원이 있기는 한데, 이미 우리 고을에 역병이 돈다는 소문이 돌아서 데려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의약에 관해 아는 이는 누구 없소?”
“정 진사 나리가 의약에 대해서 좀 아는 걸로 들었습니다.”
“그럼 한 번 들러봐야겠소. 예방도 같이 갑시다.”
“저는 『신찬벽온방』을 찾아서 허 의원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건 이방(吏房)에게 맡기도록 하시오. 갑시다.”
예방은 울상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사또를 따라나섰다. 예방이 울상이 된 이유는 정 진사댁에 가서 알 수 있었다.
“사또 나리께서 누추한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정 진사가 얼른 반겼다가 예방을 보고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형님도 오셨습니까?”
예방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했다.
“흠흠, 사또 나리가 자꾸 같이 가자고 하시는 통에…”
사또는 어리둥절해졌다.
“형님이라니…?”
예방이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제가 서형(庶兄)입니다.”
서자라는 이야기였다. 사또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서 껄끄러워서 오기를 싫어했는데, 공연히 같이 오자고 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방에 들어 정 진사와 마주 앉았다.
“이미 아시겠지만, 고을에 역병이 돌고 있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사또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정 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듣고 있습니다. 제가 사또 나리께 도움 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정 진사께서 의약에 정통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정 진사의 눈길이 예방에 갔다가 되돌아왔다. 예방은 찔끔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의약에 정통하다니 과찬입니다. 그저 심심풀이로 『동의보감』을 들춰보는 정도입니다.”
“『동의보감』이오? 그 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동의보감』은 광해군 때, 어의(御醫) 허준이 만든 책으로 동양 의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신찬벽온방』도 허준이 만든 것으로 『동의보감』에 조금 앞서서 편찬한 책이었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 역병이 퍼졌으나 막지 못하여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자 이를 예방하겠다고 편찬하였다.
“『동의보감』에 이번 역병에 대해서 참고할 것이 있을까요?”
정 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병에 대한 것은 『신찬벽온방』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결국 정 진사가 집 안에 있는 약재를 모두 모아 이번 사태 진정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선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사또가 사랑을 나서는데 안채 쪽에서 나오는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남양주시 불암사(佛巖寺) 《감로도(甘露圖)》에서 환자를 살피는 의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아래로는 굿을 드리는 무당의 모습도 보인다.〉 (출처: 국가유산청)
“아무 걱정하지 말아! 이 집엔 마마신께서 한 걸음도 안 할 터이니! 그리고 이번 달 제사는 지내면 안 돼!”
무당 임씨였다. 무당은 안채의 백이 모친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뒤돌아섰는데, 사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 깜짝이야! 두창신이라도 납신 줄 알았습니다요.”
사또가 뒷짐을 지고 말했다.
“마마니, 두창신이니 그게 다 무슨 소리냐?”
임씨가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아이, 참. 사또 나리도. 뭘 다 아시는 걸 묻고 그러십니까?”
“알기는 뭘 안다는 거냐? 물볼기라도 쳐야 대답할 것이냐?”
“고을에 손님이 오지 않았습니까. 큰 굿을 해서 내보내 드려야 합니다.”
“손님? 무슨 손님이 오셨다는 게냐?”
임씨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아이구야,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지금 고을에 돌고 있는 얼굴에 빨간 꽃이 피는 역병이 뭔지? 그게 다 마마신이 내린 벌이에요.”
사또가 휘청했다.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의 초상 얼굴 부분. 오명항의 초상화에는
그가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출처: 국가유산청)
“두창… 그럼 고을에 도는 역병이 천연두란 말이냐?”
“맞습니다. 호환 다음으로 무서운 역병입죠.”
그랬다. 사또도 그제야 기억났다. 빨간 꽃이 피었다가 화농이 일고 고열에 시달리다 죽는 전염병! 천연두였다.
“막는 방법을 아는 게냐?”
“물론입죠. 치성을 드려야 합니다. 굿판을 벌여야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쉿! 마마신은 질투가 심한 분이십니다.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무슨 놈의 병이 질투한다고 그러느냐!”
임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마마신께선 질투가 심해서 제사 때 오는 조상신도 싫어하거든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말씀드리는 건 사또 나리도 들으셨죠?”
“됐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썩 나가거라.”
임씨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문을 나가버렸다. 그때였다.
“사또 나리.”
귀가 밝지 않았으면 못 들을 뻔한 소리였다. 뒤돌아보니 이 댁 소저인 백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낭자, 무슨 일이오?”
“이 병이 정말 두창이 맞는 거죠?”
“그런 듯하오.”
“그럼 목금의 집을 한 번 들러보세요. 목금이가 드릴 말씀이 있을 거예요.”
사또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예방은 아직 정 진사네 창고에서 나오지 않아서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흠흠, 알았소. 내 들러보겠소.”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 시술에 쓰였던 도구. 우리나라 종두법 보급에 앞장섰던
지석영(池錫永, 1855~1935) 집안에서 소장했던 것이다.〉
(출처: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목금 낭자, 잘 지냈는가?”
목금이의 집은 세책방을 하고 있다.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사또는 안심하고 목금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악!”
안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 사또는 깜짝 놀라 세책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세책방에 목금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서적들이 놓인 뒤쪽으로 작은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장부를 작성하는 등의 일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
목금은 사또가 찾아온 것을 알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연둣빛 치맛자락에 핏자국이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어딜 다쳤느냐?”
그 순간 치마 위로 피가 또 한 방울 뚝 떨어졌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코피가 난 것이다.
“코피가 나는데 어찌 고개를 숙이고 있느냐? 고개를 젖혀야지.”
사또는 이제 방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목금이 얼른 손을 휘저으며 사또를 못 올라오게 막았다. 목금은 코를 손가락으로 꼭 잡아 누른 채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별일 아닙니다. 갑자기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제가 코를 찔렀을 뿐입니다.”
사또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코를 찔렀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휴, 멎었다.”
목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사또가 유심히 보니 목금의 얼굴에 뾰루지도 몇 개 보였다.
“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
목금의 말에 사또는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라 뒤돌아섰다.
“어? 사또 나리, 얼굴이 붉어지셨는데요? 혹시 역병에…”
“아, 아니다. 나는 멀쩡하다.”
사또가 당황해서 다시 되돌아섰다. 목금이 방에서 나왔다.
“흉한 꼴을 보여 민망합니다. 지금 온 고을에 두창이 창궐하니 예방법을 시행해 보았습니다.”
“예방법이라니? 그런 게 있단 말이냐?”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약용이 저술한 『마과회통(麻科會通)』〉 (출처: 디지털 장서각)
“사또 나리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다산 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분이 쓰신 책 중에 『마과회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책에 두창을 막는 방법이 적혀있습니다.”
“그런 게 있단 말이냐? 어찌하면 되는 것이냐?”
“두창에 걸린 사람의 얼굴에 생긴 딱지를 일고여덟 개 떼어냅니다. 도자기로 된 종지에 넣고 손톱으로 맑은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립니다. 단단한 공이로 으깨어 즙을 내는데 너무 묽어도 아니 되고, 너무 진해도 아니 됩니다. 진하면 두창의 기운이 일어나지 않고, 묽으면 두창의 기운이 너무 손상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대추씨 만 하게 만든 누에고치 솜에 묻혀서 남자는 왼쪽 콧구멍에, 여자는 오른쪽 콧구멍에 넣습니다.”
“그럼 그걸 어찌 꺼낸단 말이냐?”
“아참, 빼먹었습니다. 솜에 미리 실을 달아둡니다. 예리하십니다.”
“하하, 그거야, 뭐.”
사또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웃으니까,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여섯 시진을 넣어두고 이렇게 2~3일을 하면 약간 몸이 아프고 몸에 발진이 살짝 생깁니다. 걱정할 일은 아니고 금방 딱지가 생겨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되면 더 이상 두창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또가 저도 모르게 목금의 얼굴 쪽으로 손을 올렸다가 스스로 화들짝 놀라 손을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 낭자 얼굴의 그 뾰루지가…”
“네, 두창 딱지입니다.”
사또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책에 나온다고 그게 진짜 될지 어찌 믿고 이런 일을 했단 말이냐?”
목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두창은 본래 열이 높은 병입니다. 소녀는 지금 열이 없습니다.”
“그럼, 정말 두창이 예방되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서 이 방법을 사람들에게 널리 시행케 해야 합니다.”
“알겠다. 혹시 그 『마과회통』을 가지고 있느냐?”
목금이 얼른 방안의 서탁에 펼쳐져 있던 책을 가져왔다. 사또는 크게 기뻐 대체 목금이 어디서 두창의 딱지를 얻었는지는 물어보지도 않고는 동헌으로 달려갔다.
사또의 뒷모습을 보던 목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따라가려고 했냐?”
세책방 구석의 짙은 어둠 속에 흐릿한 형체가 있었다. 형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낮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었다.
“마마신이라고 해도 약해지면 그 꼴이구나. 이제 내가 소천 시켜 주마!”
목금이 팔을 걷어 올린 뒤에 두리번거리다가 묵직한 서진을 들어 올렸다.
“마, 마마신 살려!”
목금이 신나게 패준 뒤에 흐릿한 형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마신은 다 타고 난 재가 바람에 사라지듯이 없어져 버렸다.
목금이 씩 웃었다.
“이제 마마신은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럼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 사냥이나 나가볼까?”
서진을 탁탁 손바닥에 쳐보는 목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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