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시작된 날, 나는 눈을 뜨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돌연 나를 흘겨보며 덮칠 듯했고, 눈을 감으면 나를 향한 사람들의 모진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 끊임없이 나를 각성시켰다. 꼬박 이틀,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다섯 걸음도 안 되는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고 침대에서 토하고, 눕길 반복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추석 연휴 끝자락, 응급실 간호사가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주사를 맞고 혈액 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로 엑스레이(X-ray) 촬영과 CT 영상 검사를 하는 동안 꿈속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던 나는 약 기운 탓인지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다. 119 소방대원의 목소리, 기저귀에 소변을 보라는 간호사의 말에 한사코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악을 쓰며 우는 남자아이 소리, 응급실을 채우는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나는 코끼리 코 100바퀴를 돈 것처럼 세상과 함께 빙빙 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떴다. 응급실 천장의 커튼 사이로 ‘경증 환자 구역’이라는 팻말이 희미하게 보였다.
‘정부, 경증 환자는 응급의료센터 이용 자제 부탁’이라는 뉴스가 생각났다. 나는 이틀을 참고 탈수(저혈량성 쇼크의 원인 중 하나인 탈수) 직전에 응급실에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나 때문에 정말 위급한 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질 때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왔다. 그는 내 머리를 침대 밖으로 쭉 빼고 내 머리를 잡고 왼쪽으로 돌려 1분, 오른쪽으로 돌려 1분을 유지하며 내 상태를 살폈다. 의사 가운에 밴 담배 냄새와 좌·우 머리 회전에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뱅뱅 정신없이 돌아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얘졌다 했다. 곧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이비인후과 입원 명령을 내렸다.
〈안동성소병원 응급실 모습〉 (출처: 안동성소병원)
나는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병실로 옮겨졌다. 엘리베이터 천장 조명등에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환자인 내가 낯설어 눈을 감았다. 나도 환자가 되어 응급실에 갈 수 있고,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그래도 입원해 치료 잘 받으면 이전처럼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당연한 명제에 ‘중증’이라는 조건이 붙은 요즘, 지방 사람들은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 1차 개인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2차 종합병원과 3차 상급종합병원 대부분이 서울과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다(물론, 서울·경기에 인구 밀도가 높긴 하다). 안동은 2개의 종합병원과 안동의료원이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의 지방 소도시에는 갈만한 병원이 별로 없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할머니들께서는 청송과 영양,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 오셨는데, 한 분은 뉴스에서 본 것처럼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겨우 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이송되셨다고 했다.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 수준과 혜택의 차이가 이렇게 큰데, 600년 전, 한양이 아닌 지방에 살았던 선조들은 아프면 어디로 갔을까? 치료받을 곳이 있긴 했을까?
조선시대에도 의료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신분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달랐다. 내의원(內醫院)은 왕실의 의료기관, 혜민서(惠民署)는 백성들 담당 의료기관, 활인서(活人署)는 주로 가난한 백성들의 전염병 치료를 전담하던 의료기관이었다.
근년 이래로 돌림병이 대단히 성하여서, 1년 동안 사망한 것과 구제된 수효를 상고해 보면, 서울 활인원(活人院)에서는 살아난 사람이 열에 여덟아홉은 되는데, 외방에서는 한 도(道)에서만도 사망한 자가 거의 사천 명이나 되니, 어찌하여 서울과 외방이 이같이 서로 다른가.
그 까닭을 캐어 보면 활인원(活人院)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약이나 음식을 알맞게 하여 주기 때문에 살아나는 자가 많고, 외방에서는 구휼(救恤)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어린애들까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이같이 많은 것이니, 말하기에도 가슴 아픈 일이다.
『세종실록』 116권, 「돌림병 구휼을 지시하다」
1447년(세종 29)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한양과 지방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극명하게 차이남을 보여준다. 8~90%의 생존율을 보인 활인원은 고려 때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가난한 병자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동서대비원은 태종 때 불교 명칭인 대비(大悲) 대신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린다’라는 활인(活人)을 넣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라 했다.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두어 행려병자(行旅病者)들을 위한 공간으로 썼다. 그러다 세조 때 동서활인원을 활인서로 바꾸었다.
세종은 활인원이 환자에게 약(藥)과 음식을 제공하고 환자 간호에 마음을 다했기에 그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돌림병을 구휼하는 법이 『원육전(元六典)』·『속육전(續六典)』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각도의 지방관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돌림병 사망자가 속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각 도의 감사(監司)와 개성부(開城府)의 유수(留守)에게 백성들의 돌림병 구휼(救恤)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덧붙여 세종은 ‘백성이 장수 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다.
외방(外方)에는 의약(醫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각 도에 의학교수(醫學敎授) 한 사람을 보내어 계수관(界首官)마다 하나의 의원(醫院)을 설치하고, 양반의 자제(子弟)들을 뽑아 모아 생도(生徒)로 삼고, 글을 알며 조심성 있고 온후한 사람을 뽑아 교도(敎導)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을 익히게 하고, 교수관(敎授官)은 두루 다니면서 설명을 권장하고, 약을 채취(採取)하는 정부(丁夫)를 정속(定屬)시켜 때때로 약재(藥材)를 채취하여 처방(處方)에 따라 제조하여,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구료(救療)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3권, 「각도에 의학교수와 의원을 두고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여
백성의 질병을 치료토록 청하다」
위 기록은 세종 이전부터 공립 지방 병원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 2년이었던 1393년(태조 2), 대사헌·형조 판서·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우마의방(牛馬醫方)』 등의 의학서적을 저술한 의학자, 김희선(金希善, ?~1408)은 전국 각 도에 의원을 설치하고 의학교수를 두어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것을 건의했다.
김희선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의학지식을 가르쳐 지방 백성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지금 했다면 ‘특권층 자녀의 입시 비리’ 혹은 ‘특권층 자녀, 의대 입학 특혜 논란’ 등으로 연일 언론을 장식했을 사안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양반 자제가 의술을 배운다는 것은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의사가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소득을 자랑하고 있어 많은 부모와 자녀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기술직으로 천시받던 직군 중 하나였기에 양반 자제 중에서 의업에 종사하려는 자들이 없었다.
천시받는 기술직이라고 해서 아무나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의관은 의과(醫科)를 통해 선발했는데, 정규 선발 시험인 식년시와 비정기 선발 시험인 증광시를 통해 의관을 뽑았다. 선발된 의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약재를 재배하고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수의사 역할도 했다. 그리고 의학 교육을 하고 의학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조선의 의사는 한의사·약사·수의사에 의학교수 업무까지 담당했으나 기술직으로 천시받았기에 공립 지방 병원 건립은 양반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614년 9월 1일, 과거 시험에 낙방한 김광계는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중략)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달 27일에 당홍역(唐紅疫)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
『매원일기(梅園日記)』,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안동 예안에 살았던 김광계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으로 시집간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영해 누이는 임진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오빠와 손위 누이들의 귀여움을 받다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 둘을 남겨 두고 당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광계는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영해로 갈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김광계가 사는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그의 아내가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서당으로 피접(避接)을 보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광계는 누이가 죽은 지 한 달 보름이 지나서야 영해에 갔지만 그땐 이미 조문객도 없고, 빈소에는 붉은 만장과 혼백 상자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누이의 빈소에서 김광계는 설움이 북받쳐 목 놓아 통곡하였다.
당홍역 또는 당독역(唐毒疫)은 오늘날의 성홍열(猩紅熱)을 이르는 말이다. 1613년(광해군 5)부터 1614년(광해군 6) 사이에 당홍역이 유행하여 왕명에 따라 허준(許浚, 1539~1615)이 당홍역에 대한 치료 약방문 『벽역신방(辟疫神方)』을 편찬했다. 성홍열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무서운 병이었으나 지금은 이 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허준의 『벽역신방』 태백산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성홍열과 함께 법정 2급 감염병에 속하는 홍역은 홍역 바이러스(measles viru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발진성 전염병이다. 2급 감염병은 전파 가능성을 고려하여 발생 또는 유행 시 24시간 이내 신고하고 격리가 필요한 감염병을 말하는데, 홍역은 주로 호흡기 분비물 등의 비말(飛沫)을 통해 전파되며 감염력이 매우 높아 지금도 생후 12~15개월이 되면 MMR 백신 접종을 필수로 하고 있다. 홍역에 걸리면 코플릭 반점(Koplik’s spot)이라고 하는 볼 안쪽 점막에 좁쌀알만 한 회백색 반점이 나타나고 고열이 난다. 한 번 홍역을 앓으면 영구적인 면역력을 얻게 되지만 예방접종이 없던 조선에서 홍역은 천연두와 함께 조선을 뒤흔든 무서운 역병이었다.
홍역은 평등하여 임금의 아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1720년(숙종 46) ‘왕세자가 홍진(紅疹)을 앓아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였다’(『숙종실록』 권65, 숙종 46년 2월 26일 계해 첫 번째 기사.), 1743년(영조 19) ‘왕세자가 홍진을 앓아 약원(藥院)에 명하여 괴원(槐院)으로 옮겨 숙직하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홍역은 왕세자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혜민서와 활인서가 없는 지방의 일반 백성들에게 당홍역이나 홍역이 찾아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반들은 피접이라도 가면 되는데, 초가집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살아야 했던 백성들은 전염병이 창궐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을 위한 병원은 없었을까?
경상북도 영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지방 병원, 제민루(濟民樓)가 있다고 하여 영주시 가흥동 구학공원을 찾았다. 서천(西川) 옆을 따라 올라가면 구릉 위에 제민루가 있다. 제민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1층은 개방된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대청과 방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지만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제민루〉
제민루는 언제 지어졌을까? 『영주읍지(榮州邑誌)』에 따르면, 1418년(태종 18) 영주 군수 이윤상(李允商)이 의원 3칸을 지어 내의원에 진상할 약재를 건조하고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1433년(세종 15) 영주 군수 반저(潘渚)가 1371년(공민왕 20) 영주에 향교를 세운 하륜(河崙, 1347~1416)의 뜻을 계승하여, 향교의 옛터에 동재(東齋)와 남루(南樓)를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상도 편에, ‘제민루는 군수 반저가 세웠으니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초기의 제민루는 학교와 의국의 기능을 두루 담당했다. 그래서 영주 인근의 여러 학자들은 제민루에 모여 경전을 공부하거나 틈틈이 의술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강학 장소로 사용되던 제민루의 역할은 이후 이산서원(伊山書院) 탄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약관의 나이에 제민루를 방문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지어 서원 건립 과정을 설명하며, 경북의 사족(士族)들이 의국 제민루를 임시로 빌려 공부하다 보니 늘 불편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영주 군수 안상(安瑺, 1511~1573)이 영주 유림의 도움을 받아 32칸 규모의 서원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산서원 건립 이후 제민루는 약재를 모아 내의원에 공물을 납부하고, 백성들을 치료하는 등 의국의 역할에 충실했다. 『영주읍지』의 「의원입의(醫院立議)」에 의국 제민루의 운영 전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제민루는 약물 제조를 위한 양인 4명을 차출하여 군역(軍役)을 면제하고 천역(賤役)을 시키지 않는다는 규칙을 두었다. 이는 약물 제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약물 제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양질의 약물을 얻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물과 약재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약값을 치르지 않은 채 강제로 약물을 취하려는 자와 후일에 내겠다며 핑계를 대는 자는 비록 관원이라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두었으며, 약재를 사고팔기 위한 목적 외의 약방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지방관이나 관청의 서리들, 그리고 향촌 사족들 모두 제민루의 규칙을 지키도록 요구했으며, 의국의 공정한 운영을 훼손하면 그에 따른 징벌을 내렸다.
1641년(인조 19) 제민루에는 『동의보감(東醫寶鑑)』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포함한 9종의 의서를, 1643년(인조 21)에는 중국 송·원대의 황실 의약을 집대성한 『어약원방(御藥院方)』 의서까지 갖추었다고 『잡물질불망기(雜物秩不忘記)』에 기록되어 있다. 제민루 소장 의서는 매해 증가했는데, 제민루에서 활동했던 명의는 없었을까?
사마시에 합격한 후 한성부 남부 참봉을 역임, 이후 곧바로 낙향하여 유의(儒醫)로 활동한 이석간(李碩幹, 1509~1574)이 있다. 이석간의 의술은 영남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왕진 요청을 받았을 만큼 유명했다. 오랜 임상 경험과 치료법이 담긴 이석간의 『경험방(經驗方)』은 후에 채득기(蔡得己)·박렴(朴濂)·허임(許任)과 같은 유명한 유의들의 처방과 함께 수집·편집되어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으로 출간, 조선 후기까지 널리 활용되었다고 한다.
어스름에 계당에 이르러 들어가서 선생님을 뵈오니, 선생님께서 가래와 열이 많아서 말씀하시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나를 보시고는, “청량산에서 오는가?”라고 하시기에 감회를 말씀드렸더니 단지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중략) 구성(龜城 영주)의 참봉 이석간(李碩幹), 기성(箕城 풍기)의 생원 민응기(閔應祺), 분천(汾川)의 판사 이연량(李衍樑) 등이 모두 모여 맥을 짚고 약을 조제하였으나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이때 집 안팎에서 함께 시중을 든 사람이 칠십여 명이었으나 많은 사람의 정성이 통하지 못하고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8일 신축일에 선생님께서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송암집(松巖集)』 제5권,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이석간이 당시 의술로 유명했다는 것은 1570년(선조 3) 이황이 돌아가시기 전, 그를 마지막으로 진맥하고 약을 처방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석간은 의학을 공부하여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턱없이 부족한 의원과 약재 수급의 어려움은 지방의 의료 낙후를 초래하며, 향촌 사회의 안녕을 위협했다. 이때 ‘백성을 구제한다’는 공립 지방 의국, 제민루의 건립과 운영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실천인 동시에 ‘자신의 본마음을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이상적 인간, 성인(聖人)이 되고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적 참여라 할 수 있다.
〈제민루 편액〉
제민루가 지금의 보건소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고 하지만 과거의 의료는 예방보다는 진단과 치료에 역점을 두었다. 지방 병원 건립과 운영이 쉽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의서를 편찬하여 보급하는 것으로 향촌 사회의 열악한 의료 상황에 대응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료는 예방접종, 건강 증진, 보건교육, 개인 청결 유지 등의 일차적 예방 활동을 중시하고 있다. 1차 예방은 건강한 개인을 대상으로 질병이나 특정 건강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질병을 예방하거나 만일 발생하더라도 질병 발생 정도를 약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황은 이미 ‘양생(養生)’ 즉, 예방에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그의 저서 『활인심방(活人心方)』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인(聖人)은 병들기 전에 다스리고
의사(醫師)는 병이 난 후에 고친다.
퇴계 이황, 『활인심(活人心)』 서문
이황은 중국 명나라 주건(朱權, 1378~1448)이 쓴 『구선활인심법(臞僊活人心法)』을 원본으로 삼아 『활인심』을 필사하고, 이후에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덧붙여 건강과 장수의 비법을 덧붙여 ‘사람을 살리는 마음의 방책’이라고 하는 『활인심방』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의 성리학자 이황이 도교의 양생 사상을 바탕으로 쓴 건강 비책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활인심방』 전시〉
오로지 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일체의 병을 치료한다.
이것을 복용하면 원기(元氣)가 충실하고 질병을 일으키는 기운이 침입하지 못하니
만 가지 병이 생기지 않고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으며
긴 세월을 근심 없이 지낼 수 있다.
퇴계 이황, 『활인심방』, 「중화탕(中和湯)」
이황은 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일체의 병을 ‘마음의 병’이라 진단하고, 이 마음의 병으로 생긴 일체의 병을 중화탕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사무사(思無邪)·행호사(行好事)·막기심(莫欺心)·행방편(行方便)·수본분(守本分) 등의 마음을 다스는 ‘30가지 약제를 잘 씹어서 가루로 만들고 심화(心火) 1근과 신수(腎水) 2 주발을 사용하여 약한 불로 반쯤 달여 놓고 끊임없이 살피면서 시간이나 계절에 걸림 없이 언제든지 따뜻하게 하여 마신다’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황의 중화탕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처방이다. 아파서 입원한 적이 없던 내가 추석에 응급실행을 하게 된 것은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바이러스 감염이 주원인이지만 스트레스가 내 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것에 담당 의사 또한 동의했다. 나는 평소 주변 사람들의 시기 어린 말들에 상처받고 그것을 쉽게 잊지 못한 채 그 말들을 곱씹는 편이었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사시나무 떨듯 휘청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황의 중화탕을 마시며 내 마음을 다스려 보기로 했다. 혹여 내 말끝에 사특함이 배어 있지는 않나, 그래서 남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가 반문하면서….
내 병명은 전정신경염(vestibular neuritis)이다. 나는 프렌젤 안경(Frenzel glasses)을 쓴 채 머리를 심하게 흔들고, 양쪽 귀에 번갈아가며 뜨거운 바람과 찬 바람을 넣어 내 안구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전정기능검사인 ‘비디오 전기 안진 검사’를 받았다. 응급실에서의 여러 검사, 며칠간의 입원 등으로 진료비가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적게 나왔다. 만약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의료보험 민영화 국가였다면 나는 고액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대 증원과 의사들의 파업’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국가든 의사든 제발 이황의 중화탕을 마시고, 수본분(守本分, 자신의 직분에 맞는 일) 했으면 좋겠다.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의협과 줄다리기를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한 최고의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게다가 우리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 안정원, 김준완, 양석형, 채송화 같은 의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의사가 해야하는 일,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포스터〉 (출처: tvN)
의료 소외 지역 활성화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때, 영주 제민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조선 최초의 지방 공립 병원 제민루의 긍휼(矜恤) 정신은 지금도 필요하다. 국가와 의사 사이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요즘이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에게 ‘촌철활인(寸鐵活人)’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영주 제민루 옆 서천〉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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