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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
조선의 지방 공립 병원,
제민루(濟民樓)에 올라

프롤로그



추석 연휴가 시작된 날, 나는 눈을 뜨면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돌연 나를 흘겨보며 덮칠 듯했고, 눈을 감으면 나를 향한 사람들의 모진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 끊임없이 나를 각성시켰다. 꼬박 이틀,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는 상태로 침대에 누워 다섯 걸음도 안 되는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고 침대에서 토하고, 눕길 반복했다.

정말 운이 좋았다. 추석 연휴 끝자락, 응급실 간호사가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고 주사를 맞고 혈액 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로 엑스레이(X-ray) 촬영과 CT 영상 검사를 하는 동안 꿈속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던 나는 약 기운 탓인지 조금씩 현실로 돌아왔다. 119 소방대원의 목소리, 기저귀에 소변을 보라는 간호사의 말에 한사코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악을 쓰며 우는 남자아이 소리, 응급실을 채우는 기계음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나는 코끼리 코 100바퀴를 돈 것처럼 세상과 함께 빙빙 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눈을 떴다. 응급실 천장의 커튼 사이로 ‘경증 환자 구역’이라는 팻말이 희미하게 보였다.

‘정부, 경증 환자는 응급의료센터 이용 자제 부탁’이라는 뉴스가 생각났다. 나는 이틀을 참고 탈수(저혈량성 쇼크의 원인 중 하나인 탈수) 직전에 응급실에 왔는데, 내가 못 올 곳을 왔나, 나 때문에 정말 위급한 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사망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질 때쯤,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왔다. 그는 내 머리를 침대 밖으로 쭉 빼고 내 머리를 잡고 왼쪽으로 돌려 1분, 오른쪽으로 돌려 1분을 유지하며 내 상태를 살폈다. 의사 가운에 밴 담배 냄새와 좌·우 머리 회전에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뱅뱅 정신없이 돌아가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얘졌다 했다. 곧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이비인후과 입원 명령을 내렸다.


〈안동성소병원 응급실 모습〉 (출처: 안동성소병원)


나는 응급실 침대에 누운 채 병실로 옮겨졌다. 엘리베이터 천장 조명등에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환자인 내가 낯설어 눈을 감았다. 나도 환자가 되어 응급실에 갈 수 있고, 입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그래도 입원해 치료 잘 받으면 이전처럼 흔들림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지방 의료 공백의 현실


‘아프면 병원에 간다’는 당연한 명제에 ‘중증’이라는 조건이 붙은 요즘, 지방 사람들은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 1차 개인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2차 종합병원과 3차 상급종합병원 대부분이 서울과 경기도에 집중되어 있다(물론, 서울·경기에 인구 밀도가 높긴 하다). 안동은 2개의 종합병원과 안동의료원이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대부분의 지방 소도시에는 갈만한 병원이 별로 없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할머니들께서는 청송과 영양, 봉화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 오셨는데, 한 분은 뉴스에서 본 것처럼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겨우 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이송되셨다고 했다. 2024년인 지금도 여전히 수도권과 지방의 의료 수준과 혜택의 차이가 이렇게 큰데, 600년 전, 한양이 아닌 지방에 살았던 선조들은 아프면 어디로 갔을까? 치료받을 곳이 있긴 했을까?

조선시대에도 의료기관이 있었다. 하지만 신분에 따라 갈 수 있는 곳이 달랐다. 내의원(內醫院)은 왕실의 의료기관, 혜민서(惠民署)는 백성들 담당 의료기관, 활인서(活人署)는 주로 가난한 백성들의 전염병 치료를 전담하던 의료기관이었다.

근년 이래로 돌림병이 대단히 성하여서, 1년 동안 사망한 것과 구제된 수효를 상고해 보면, 서울 활인원(活人院)에서는 살아난 사람이 열에 여덟아홉은 되는데, 외방에서는 한 도(道)에서만도 사망한 자가 거의 사천 명이나 되니, 어찌하여 서울과 외방이 이같이 서로 다른가.

그 까닭을 캐어 보면 활인원(活人院)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약이나 음식을 알맞게 하여 주기 때문에 살아나는 자가 많고, 외방에서는 구휼(救恤)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어린애들까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이같이 많은 것이니, 말하기에도 가슴 아픈 일이다.

『세종실록』 116권, 「돌림병 구휼을 지시하다」


1447년(세종 29) 세종 때의 기록을 보면, 한양과 지방의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극명하게 차이남을 보여준다. 8~90%의 생존율을 보인 활인원은 고려 때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가난한 병자와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동서대비원은 태종 때 불교 명칭인 대비(大悲) 대신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린다’라는 활인(活人)을 넣어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라 했다.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두어 행려병자(行旅病者)들을 위한 공간으로 썼다. 그러다 세조 때 동서활인원을 활인서로 바꾸었다.

세종은 활인원이 환자에게 약(藥)과 음식을 제공하고 환자 간호에 마음을 다했기에 그들을 살릴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돌림병을 구휼하는 법이 『원육전(元六典)』·『속육전(續六典)』에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각도의 지방관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방에서 돌림병 사망자가 속출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각 도의 감사(監司)와 개성부(開城府)의 유수(留守)에게 백성들의 돌림병 구휼(救恤)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덧붙여 세종은 ‘백성이 장수 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다.

외방(外方)에는 의약(醫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각 도에 의학교수(醫學敎授) 한 사람을 보내어 계수관(界首官)마다 하나의 의원(醫院)을 설치하고, 양반의 자제(子弟)들을 뽑아 모아 생도(生徒)로 삼고, 글을 알며 조심성 있고 온후한 사람을 뽑아 교도(敎導)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을 익히게 하고, 교수관(敎授官)은 두루 다니면서 설명을 권장하고, 약을 채취(採取)하는 정부(丁夫)를 정속(定屬)시켜 때때로 약재(藥材)를 채취하여 처방(處方)에 따라 제조하여,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즉시 구료(救療)하게 하소서.

『태조실록』 3권, 「각도에 의학교수와 의원을 두고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여
백성의 질병을 치료토록 청하다」


위 기록은 세종 이전부터 공립 지방 병원 건립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건국 2년이었던 1393년(태조 2), 대사헌·형조 판서·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며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우마의방(牛馬醫方)』 등의 의학서적을 저술한 의학자, 김희선(金希善, ?~1408)은 전국 각 도에 의원을 설치하고 의학교수를 두어 병자들을 치료하고 돌볼 것을 건의했다.

김희선은 양반의 자제들에게 의학지식을 가르쳐 지방 백성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지금 했다면 ‘특권층 자녀의 입시 비리’ 혹은 ‘특권층 자녀, 의대 입학 특혜 논란’ 등으로 연일 언론을 장식했을 사안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양반 자제가 의술을 배운다는 것은 씨알도 안 먹히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의사가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고소득을 자랑하고 있어 많은 부모와 자녀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기술직으로 천시받던 직군 중 하나였기에 양반 자제 중에서 의업에 종사하려는 자들이 없었다.

천시받는 기술직이라고 해서 아무나 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의관은 의과(醫科)를 통해 선발했는데, 정규 선발 시험인 식년시와 비정기 선발 시험인 증광시를 통해 의관을 뽑았다. 선발된 의관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약재를 재배하고 관리하는 것이었으며 오늘날의 수의사 역할도 했다. 그리고 의학 교육을 하고 의학서적을 편찬하기도 했다. 조선의 의사는 한의사·약사·수의사에 의학교수 업무까지 담당했으나 기술직으로 천시받았기에 공립 지방 병원 건립은 양반들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방 공립 병원, 제민루(濟民樓)


1614년 9월 1일, 과거 시험에 낙방한 김광계는 예안으로 돌아가는 길에 일직(一直)에 사는 류실 누이 집에 들러 자고 가기로 했다. 누이가 차려준 저녁상을 받아 맛있게 먹은 후에 (중략) 그렇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 들어와 영해(寧海) 누이의 부고를 전해 주었다. 김광계는 너무 놀라서 믿을 수가 없었다. 종을 불러 물어보니 지난달 27일에 당홍역(唐紅疫)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매원(梅園) 김광계(金光繼, 1580~1646)
『매원일기(梅園日記)』, 「이시명에게 시집간 누이가 당홍역에 걸려서 죽다」


안동 예안에 살았던 김광계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으로 시집간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된다. 영해 누이는 임진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오빠와 손위 누이들의 귀여움을 받다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집간 지 7년 만에 어린 자식 둘을 남겨 두고 당홍역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광계는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영해로 갈 수 없었다. 그때는 이미 김광계가 사는 마을에도 전염병이 돌아 그의 아내가 할머니와 아픈 아우를 서당으로 피접(避接)을 보내 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광계는 누이가 죽은 지 한 달 보름이 지나서야 영해에 갔지만 그땐 이미 조문객도 없고, 빈소에는 붉은 만장과 혼백 상자만이 놓여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누이의 빈소에서 김광계는 설움이 북받쳐 목 놓아 통곡하였다.

당홍역 또는 당독역(唐毒疫)은 오늘날의 성홍열(猩紅熱)을 이르는 말이다. 1613년(광해군 5)부터 1614년(광해군 6) 사이에 당홍역이 유행하여 왕명에 따라 허준(許浚, 1539~1615)이 당홍역에 대한 치료 약방문 『벽역신방(辟疫神方)』을 편찬했다. 성홍열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무서운 병이었으나 지금은 이 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허준의 『벽역신방』 태백산본〉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성홍열과 함께 법정 2급 감염병에 속하는 홍역은 홍역 바이러스(measles viru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발진성 전염병이다. 2급 감염병은 전파 가능성을 고려하여 발생 또는 유행 시 24시간 이내 신고하고 격리가 필요한 감염병을 말하는데, 홍역은 주로 호흡기 분비물 등의 비말(飛沫)을 통해 전파되며 감염력이 매우 높아 지금도 생후 12~15개월이 되면 MMR 백신 접종을 필수로 하고 있다. 홍역에 걸리면 코플릭 반점(Koplik’s spot)이라고 하는 볼 안쪽 점막에 좁쌀알만 한 회백색 반점이 나타나고 고열이 난다. 한 번 홍역을 앓으면 영구적인 면역력을 얻게 되지만 예방접종이 없던 조선에서 홍역은 천연두와 함께 조선을 뒤흔든 무서운 역병이었다.

홍역은 평등하여 임금의 아들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1720년(숙종 46) ‘왕세자가 홍진(紅疹)을 앓아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였다’(『숙종실록』 권65, 숙종 46년 2월 26일 계해 첫 번째 기사.), 1743년(영조 19) ‘왕세자가 홍진을 앓아 약원(藥院)에 명하여 괴원(槐院)으로 옮겨 숙직하게 했다’는 기록을 보면 홍역은 왕세자라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혜민서와 활인서가 없는 지방의 일반 백성들에게 당홍역이나 홍역이 찾아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반들은 피접이라도 가면 되는데, 초가집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살아야 했던 백성들은 전염병이 창궐하면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을 위한 병원은 없었을까?

경상북도 영주에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 지방 병원, 제민루(濟民樓)가 있다고 하여 영주시 가흥동 구학공원을 찾았다. 서천(西川) 옆을 따라 올라가면 구릉 위에 제민루가 있다. 제민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1층은 개방된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은 대청과 방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이 있지만 현재 안전상의 이유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제민루〉


제민루는 언제 지어졌을까? 『영주읍지(榮州邑誌)』에 따르면, 1418년(태종 18) 영주 군수 이윤상(李允商)이 의원 3칸을 지어 내의원에 진상할 약재를 건조하고 저장하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1433년(세종 15) 영주 군수 반저(潘渚)가 1371년(공민왕 20) 영주에 향교를 세운 하륜(河崙, 1347~1416)의 뜻을 계승하여, 향교의 옛터에 동재(東齋)와 남루(南樓)를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경상도 편에, ‘제민루는 군수 반저가 세웠으니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초기의 제민루는 학교와 의국의 기능을 두루 담당했다. 그래서 영주 인근의 여러 학자들은 제민루에 모여 경전을 공부하거나 틈틈이 의술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강학 장소로 사용되던 제민루의 역할은 이후 이산서원(伊山書院) 탄생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약관의 나이에 제민루를 방문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지어 서원 건립 과정을 설명하며, 경북의 사족(士族)들이 의국 제민루를 임시로 빌려 공부하다 보니 늘 불편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영주 군수 안상(安瑺, 1511~1573)이 영주 유림의 도움을 받아 32칸 규모의 서원을 완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산서원 건립 이후 제민루는 약재를 모아 내의원에 공물을 납부하고, 백성들을 치료하는 등 의국의 역할에 충실했다. 『영주읍지』의 「의원입의(醫院立議)」에 의국 제민루의 운영 전반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제민루는 약물 제조를 위한 양인 4명을 차출하여 군역(軍役)을 면제하고 천역(賤役)을 시키지 않는다는 규칙을 두었다. 이는 약물 제조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약물 제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양질의 약물을 얻기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물과 약재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약값을 치르지 않은 채 강제로 약물을 취하려는 자와 후일에 내겠다며 핑계를 대는 자는 비록 관원이라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조항을 두었으며, 약재를 사고팔기 위한 목적 외의 약방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지방관이나 관청의 서리들, 그리고 향촌 사족들 모두 제민루의 규칙을 지키도록 요구했으며, 의국의 공정한 운영을 훼손하면 그에 따른 징벌을 내렸다.

1641년(인조 19) 제민루에는 『동의보감(東醫寶鑑)』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포함한 9종의 의서를, 1643년(인조 21)에는 중국 송·원대의 황실 의약을 집대성한 『어약원방(御藥院方)』 의서까지 갖추었다고 『잡물질불망기(雜物秩不忘記)』에 기록되어 있다. 제민루 소장 의서는 매해 증가했는데, 제민루에서 활동했던 명의는 없었을까?

사마시에 합격한 후 한성부 남부 참봉을 역임, 이후 곧바로 낙향하여 유의(儒醫)로 활동한 이석간(李碩幹, 1509~1574)이 있다. 이석간의 의술은 영남뿐만 아니라 서울까지 왕진 요청을 받았을 만큼 유명했다. 오랜 임상 경험과 치료법이 담긴 이석간의 『경험방(經驗方)』은 후에 채득기(蔡得己)·박렴(朴濂)·허임(許任)과 같은 유명한 유의들의 처방과 함께 수집·편집되어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으로 출간, 조선 후기까지 널리 활용되었다고 한다.

어스름에 계당에 이르러 들어가서 선생님을 뵈오니, 선생님께서 가래와 열이 많아서 말씀하시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나를 보시고는, “청량산에서 오는가?”라고 하시기에 감회를 말씀드렸더니 단지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중략) 구성(龜城 영주)의 참봉 이석간(李碩幹), 기성(箕城 풍기)의 생원 민응기(閔應祺), 분천(汾川)의 판사 이연량(李衍樑) 등이 모두 모여 맥을 짚고 약을 조제하였으나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이때 집 안팎에서 함께 시중을 든 사람이 칠십여 명이었으나 많은 사람의 정성이 통하지 못하고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8일 신축일에 선생님께서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송암집(松巖集)』 제5권,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이석간이 당시 의술로 유명했다는 것은 1570년(선조 3) 이황이 돌아가시기 전, 그를 마지막으로 진맥하고 약을 처방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석간은 의학을 공부하여 자신과 가족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턱없이 부족한 의원과 약재 수급의 어려움은 지방의 의료 낙후를 초래하며, 향촌 사회의 안녕을 위협했다. 이때 ‘백성을 구제한다’는 공립 지방 의국, 제민루의 건립과 운영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실천인 동시에 ‘자신의 본마음을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이상적 인간, 성인(聖人)이 되고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공적 참여라 할 수 있다.


〈제민루 편액〉




이황의 처방전



제민루가 지금의 보건소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고 하지만 과거의 의료는 예방보다는 진단과 치료에 역점을 두었다. 지방 병원 건립과 운영이 쉽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의서를 편찬하여 보급하는 것으로 향촌 사회의 열악한 의료 상황에 대응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의료는 예방접종, 건강 증진, 보건교육, 개인 청결 유지 등의 일차적 예방 활동을 중시하고 있다. 1차 예방은 건강한 개인을 대상으로 질병이나 특정 건강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질병을 예방하거나 만일 발생하더라도 질병 발생 정도를 약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황은 이미 ‘양생(養生)’ 즉, 예방에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그의 저서 『활인심방(活人心方)』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인(聖人)은 병들기 전에 다스리고
의사(醫師)는 병이 난 후에 고친다.

퇴계 이황, 『활인심(活人心)』 서문


이황은 중국 명나라 주건(朱權, 1378~1448)이 쓴 『구선활인심법(臞僊活人心法)』을 원본으로 삼아 『활인심』을 필사하고, 이후에 자신이 생각한 내용을 덧붙여 건강과 장수의 비법을 덧붙여 ‘사람을 살리는 마음의 방책’이라고 하는 『활인심방』을 남겼다. 이 책은 조선의 성리학자 이황이 도교의 양생 사상을 바탕으로 쓴 건강 비책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활인심방』 전시〉


오로지 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일체의 병을 치료한다.
이것을 복용하면 원기(元氣)가 충실하고 질병을 일으키는 기운이 침입하지 못하니
만 가지 병이 생기지 않고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으며
긴 세월을 근심 없이 지낼 수 있다.

퇴계 이황, 『활인심방』, 「중화탕(中和湯)」


이황은 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는 일체의 병을 ‘마음의 병’이라 진단하고, 이 마음의 병으로 생긴 일체의 병을 중화탕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사무사(思無邪)·행호사(行好事)·막기심(莫欺心)·행방편(行方便)·수본분(守本分) 등의 마음을 다스는 ‘30가지 약제를 잘 씹어서 가루로 만들고 심화(心火) 1근과 신수(腎水) 2 주발을 사용하여 약한 불로 반쯤 달여 놓고 끊임없이 살피면서 시간이나 계절에 걸림 없이 언제든지 따뜻하게 하여 마신다’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황의 중화탕은 지금의 나에게 딱 맞는 처방이다. 아파서 입원한 적이 없던 내가 추석에 응급실행을 하게 된 것은 스트레스로 인한 면역력 저하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바이러스 감염이 주원인이지만 스트레스가 내 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것에 담당 의사 또한 동의했다. 나는 평소 주변 사람들의 시기 어린 말들에 상처받고 그것을 쉽게 잊지 못한 채 그 말들을 곱씹는 편이었다. 나는 작은 바람에도 사시나무 떨듯 휘청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황의 중화탕을 마시며 내 마음을 다스려 보기로 했다. 혹여 내 말끝에 사특함이 배어 있지는 않나, 그래서 남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가 반문하면서….




에필로그



내 병명은 전정신경염(vestibular neuritis)이다. 나는 프렌젤 안경(Frenzel glasses)을 쓴 채 머리를 심하게 흔들고, 양쪽 귀에 번갈아가며 뜨거운 바람과 찬 바람을 넣어 내 안구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전정기능검사인 ‘비디오 전기 안진 검사’를 받았다. 응급실에서의 여러 검사, 며칠간의 입원 등으로 진료비가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적게 나왔다. 만약 우리나라가 미국처럼 의료보험 민영화 국가였다면 나는 고액의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의대 증원과 의사들의 파업’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국가든 의사든 제발 이황의 중화탕을 마시고, 수본분(守本分, 자신의 직분에 맞는 일) 했으면 좋겠다.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의협과 줄다리기를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한 최고의 정책을 펼쳤으면 좋겠다. 게다가 우리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이익준, 안정원, 김준완, 양석형, 채송화 같은 의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의사가 해야하는 일,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포스터〉 (출처: tvN)


의료 소외 지역 활성화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때, 영주 제민루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백성을 구제한다’라는 조선 최초의 지방 공립 병원 제민루의 긍휼(矜恤) 정신은 지금도 필요하다. 국가와 의사 사이에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요즘이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로 서로에게 ‘촌철활인(寸鐵活人)’할 수 있다면 좋겠다.


〈영주 제민루 옆 서천〉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국학진흥원, 『백성을 치유한 선비의사 유의(儒醫)』, 2021 정기기획전,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 박물관, 2021.
2. 퇴계 이황 편저, 이윤희 역해, 『활인심방』, 예문서원, 2008.
3. 신병주, 『우리 역사 속 전염병』, 매일경제신문사, 2022.
4. 박영규, 『메디컬 조선』, 김영사, 2021.
5. 한미경 글, 순미 그림, 『역병이 돈다, 조선을 구하라!』, 현암주니어, 2021.
6. 이정열, 『공중보건학개론』, 은하출판사, 2019.
7. 이정열, 『보건간호학 개요』, 은하출판사, 2019.
8. 김호, 「16~17세기 조선의 지방 醫局 운영: 경북 영주의 濟民樓를 중심으로」, 『국학연구』 37호, 한국국학진흥원, 2018.
9. 김호, 「환난상휼의 실천, 16·17세기 향촌 사족들의 지방 의국(醫局) 운영」, 『역사와 현실』 127호, 한국역사연구회, 2023.
10. 김영나, 「18세기 영주 濟民樓 소속 노비의 모습」, 『嶺南學』 85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3.
11.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
“마마를 피해 안동 집으로 보낸 아내가 마마에 걸리다”

마마배송굿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5.04.~1761.06.25

근래 하양현감 김경철의 근심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과 또 하나는 가뭄으로 보리와 밀이 모두 말라버린 것, 그리고 얼마 전부터 경상감영이 있는 대구부와 하양현 일대에 마마가 퍼져 여러 사람이 마마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 등이다.

고민 끝에 김경철은 일단 자신을 따라 하양현에 와 있는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말을 꺼냈을 때 아내는 아픈 남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김경철은 거듭 설득했고, 침 치료를 받기 위해 사람을 부르자 아내는 김경철이 침을 다 맞고 나면 떠나겠다고 했다.

4월 26일부터 시작한 김경철의 침 치료가 5월 3일에 끝났는데, 확실히 하루가 다르게 증세가 나아진 듯하였다. 김경철은 바로 다음 날인 5월 4일에 아내의 행차를 출발시켰다. 아들인 갑동이가 모시고 가고, 손자인 쾌득(快得)도 따라갔다. 행차가 떠나가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김경철을 돌아봤다. 김경철은 자신의 오랜 병환으로 아내의 고생이 더욱 많았던 것을 알기에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4일에 아내의 행차를 따라갔던 사람과 말은 10일에 돌아왔는데, 여기서 출발한 지 나흘 만에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했다. 조카들이 모두 내려오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쉬웠다.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 김경철은 다시 약을 먹으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며 하양의 높은 산마다 올라 기우제를 지냈다. 이틀에 한 번씩 하양현의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다 보니 김경철의 병증이 다시 악화하였다. 너무 아픈 날은 직접 산에 오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을 보내서 기우제를 지내야 했다.

한 달 정도 지난 6월 14일에 며칠 전 안동 집에 보냈던 태몽(太蒙)이 돌아와서 집안 식구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김경철의 아내는 몸이 아파 종일 신음하고 있고, 며느리의 병도 차도가 없다고 했다. 마마에 걸릴까 봐 아내를 안동 집으로 보냈는데, 신음이 나올 정도로 몸이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다음 날 김경철은 여름 고과에서 최하의 평가를 받고 파직되고 말았다.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으나 어차피 병이 낫질 않아 여러 번 사직을 청했던 상황이니 차라리 잘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게다가 아내와 며느리의 병증이 심상치 않아 마음이 온통 집으로 가 있었으니 빨리 정리하고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집에 소식을 알리고 곧 출발하겠다고 전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 갑동이 20일에 하양현에 도착했다. 아들은 소식을 듣자마자 17일에 출발하였으나 물에 막혀 이제야 도착했다고 했다. 김경철은 먼저 식구들의 소식을 물었는데, 아내는 계속 아픈 상황인데 두창(頭瘡)과 상풍(傷風)의 병증이라고 했다. 근심과 염려가 끝이 없었다.

김경철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기 위해 며칠 동안 서둘러서 하양에서의 신변을 정리하고 25일에 아들과 함께 하양을 출발했다.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의 병세를 살펴보고 병이 나을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자신의 병도 깊고, 온 가족이 이리 아프니 답답하기만 했다.

“소실의 만성 복통”

이우석, 하은일록,
1884-10-03~1884-12-09

한겨울이다. 오늘도 저물녘에 눈이 내렸다. 이우석(李愚錫)이 며칠 집을 비웠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그저께부터 소실이 복통이 나서 고통이 매우 심했다고 한다. 집에서는 계양탕(桂養湯)을 달여 복용시켰으나 증세에 차도가 없다.

소실이 아픈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두 달 전인 10월에도 밤중에 자다가 닭 울 때쯤 복통이 도져 앉으나 누우나 불편하다면서 고통을 호소하였다. 그때는 평진탕(平陳湯)을 달여 먹였는데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복통에 잘 듣는 약이 무엇일까. 그때도 한 사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생을 했다. 정기산(正氣散)이니 소체환(消滯丸)이니 하는 약들을 연이어 먹여봐도 효험이 없었다. 애꿎은 아내는 그 후에도 며칠간 밤새도록 괴로워했다. 보다 못한 이우석은 임경운(林慶雲)이라는 사람을 시켜 의원 박생(朴生)에게 증세를 기록해 보냈다. 다음날 돌아온 임경운은 처방을 가지고 왔지만, 이미 아내의 병은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처방 덕분인지 병이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복통은 차도를 보였다. 대신 이우석 자신이 감기로 드러눕는 바람에 집안에 약 냄새는 그칠 날이 없었다. 그렇게 두 달쯤 아무 일이 없었는데 다시 아내의 복통이 도진 것이다.

이번에는 그때 임경운을 통해 받아온 처방대로 초기부터 약쑥을 달여 아내에게 먹여보았다. 과연 의원이 처방이 효험이 있었는지 조금은 증상이 덜한 것 같았다. 연일 추운 날씨에 아내까지 몸이 좋지 않아 참으로 걱정스럽다. 부디 당분간은 복통이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우석은 하염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약복용이 효험이 없어 침 치료를 시작하다”

김경철, 경상도하양현일록,
1761-04-26~1761-05-03

김경철은 그동안 몸이 아파서 여러 처방으로 약을 먹은 지 벌써 5달이 넘었다. 그러나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아무래도 약만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듯하여 침술에 능한 최윤정(崔允貞)을 불렀다. 4월 26일 최윤정이 와서 침을 놨고, 그 후로 매일매일 최윤정에게 침을 맞았는데 5월 3일까지 침 1도(度)를 다 맞았다.

이렇게 꾸준히 침을 맞은 이후에 김경철은 가슴이 막힌 것 같은 증상이 약간 줄어든 듯했다. 효과가 지속되면 앞으로 침 치료를 더 받아볼 생각이 들었다.

“눈병으로 세상이 온통 흐릿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3-05-17~07-18

1643년 5월 17일, 아침에 밖에 나가니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세상이 온통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광계는 눈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낮에 날이 맑게 갰지만, 김광계의 눈앞은 말끔하지가 않았다. 김광계가 마지막으로 눈병을 앓았던 것은 1609년, 34년 전이었다.

이 날부터 7월 중순이 되어서까지 눈병이 낫지를 않았다. 7월 16일에는 눈이 아파서 결국 책도 보지 않고 온종일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가로운 것도 좋았지만 눈을 써서 섬세하게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몇 달간 눈병 때문에 처리를 하지 못하였으니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김광계는 눈병 치료를 위해서 의원을 만나보지도 않았고, 젊을 때처럼 초정의 약수에 눈을 씻으러 가지도 않았다.

“약 짓다가 약 짓는 연기에 중독되다”

군관청(軍官廳)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상추, 노상추일기,
1787-12-25~1787-12-28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노상추에게 갑산 부사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별말 없이 단지 갑산부 관아에 와 달라는 말만 간략히 적혀 있었다. 부 관아에 가 보니, 갑산 부사가 얼마 전 함흥에서 만병환(萬病丸)을 만드는 약재를 사 왔으니 함께 약 짓는 것을 의논하고 약을 달여 보자는 것이었다. 정말 약 이름처럼 만병통치약인지 그 처방을 알 수는 없었으나 하룻밤 동안 꼬박 달여야 하는, 공이 많이 들어가는 약인 듯했다.

노상추는 결국 갑산 부사가 붙드는 바람에 밤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부 관아의 군관청에서 약 달이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런데 약탕기에 피어오르는 김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자던 방과 다른 방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신음하는 노상추를 돌보던 하인이 말하기를, 해가 떠도 부르시지를 않기에 방에 들어가 보니 쓰러져 계시더라며, 연기를 마신 것 같다고 했다. 해가 질 때까지 정신을 도무지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 약을 달이며 한방에서 잤던 책방의 황조언(黃調彦) 석사(碩士)도 노상추 옆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래도 하루 만에 증상은 나아졌지만, 약을 달이자고 했던 갑산 부사는 미안했는지 다음날 연회를 열어 주었다.

“의국 사람을 불러 약을 조제하다”

약탕기 김광계, 매원일기,
1642-05-11~1642-05-13

나이가 들어갈수록 김광계의 약에 대한 관심은 깊어져만 갔다. 자신이 직접 약을 조제하기도 하고, 서울에서 약장수가 오면 귀한 약재를 받아놓기도 했다.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놓고 환약을 만들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역시 조제법이 어려운 것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1642년 5월 11일, 김광계는 이날 몸이 아파서 일과를 접고 쉬었다. 하던 일을 하지 못해서 더욱 마음이 찜찜하였는데, 이게 모두 건강 때문이다 싶었는지, 결국 안동 읍내에 있는 의국(醫局)에서 막숙(莫叔)을 불러와서 자음지황환(滋陰地黃丸)을 조제하도록 하였다. 자음지황환은 숙지황환(熟地黃丸)이라고도 부르는데, 빈혈과 신허(腎虛)로 눈앞이 아찔하며 잘 보이지 않을 때 쓰는 약이다. 하루 만에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약이 아닌지 막숙은 여러 날 김광계의 집에 머물러야 했다.

김광계가 글을 읽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동안, 막숙은 자음지황환 2첩을 조제하고, 추가로 소풍산(消風散) 15첩을 조제하였다. 소풍산은 풍간(風癎)을 치료하기 위해 먹는 약인데, 풍간은 간질이나 뇌혈관장애 후유증의 일종이다. 김광계가 조제하라고 한 두 약이 치료하는 병의 공통적인 특징은 기가 허해서 걸리는 병이라는 것인데, 김광계가 스스로 허약해졌다고 느꼈던 것 같다. 작업은 그 다음날인 5월 13일 오후에서야 겨우 끝났고, 마침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의국 사람은 비로소 돌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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