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홍경래진도(洪景來陣圖)》〉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왕조 역사상 유일한 ‘내란(內亂)’이었다. 권력 획득에 실패한 주도세력이 일부 지역을 장기간 실효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 ‘내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것은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유일하다. 오랜 시간 조직적인 준비과정을 거치고, 한시적이나마 국가의 일정 영역을 점령하여 정부군과 맞대결을 벌인 대규모 변란은 조선 역사상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1811년(순조 11년) 겨울, 이 전대미문의 내란은 평안도에서 일어났다.
“관서는 곧 풍패의 고향이라, 짓밟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하여금 병사를 일으켜 백성을 구하게 하니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마다 소생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홍경래가 내건 이 기치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는 주변 고을에서 군사력과 군자금을 모으며 오랜 기간 준비했고, 마침내 곽산·가산·철산 등 청북 8읍을 일시에 점령하기에 이른다.
홍경래군의 조직력은 놀라웠다.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로 칭한 홍경래는 체계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기존 수령들의 인부를 빼앗고 그들을 가두거나 해하였으며, 단순한 폭력행사에 그치지 않고 수하들을 점령지역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더불어 주변 고을에서는 물자가 조달되었고, 자원하는 인력도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민란이나 변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반란이 일시적인 봉기나 약탈에 그쳤다면, 홍경래난은 장기적인 실효지배를 목표로 했다. 민란의 성격도 있었지만, 동시에 조직적인 병란(兵亂)이자 내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차별과 소외를 받아온 평안도에서, 그것도 병자호란(1636) 이후 180여 년간 이어진 태평성대 속에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조선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1899년 편찬한 『가산군읍지(嘉山郡邑誌)』〉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특히 반란의 초기,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가산군수 정시(鄭蓍) 부자의 순절이었다. 신미년 12월 18일 새벽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난 이 비극적 사건은 3일 만에 조정에 보고되어 조보에 실렸고, 그로부터 열흘도 안 되어 가산에서 직선거리로 천여 리(약 437km)나 떨어진 경상북도 안동까지 전해졌다. 한겨울 눈길을 헤치고 고갯길을 돌아가야 했으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멀고 오래 걸렸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정시 부자의 순절 소식은 놀라운 속도로 전해졌던 것이다. 반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선천·곽산·용천·철산·태천 등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선천군수 김익순(金益淳)과 곽산군수 이장겸(李章謙)이 적에게 투항한 사실이었다. 특히 김익순은 이름난 재상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었기에, 그의 투항 소식은 전국의 사대부들에게 크나큰 여파를 몰고 왔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중인 조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반란의 소식이 이토록 빠르게 전국에 퍼져나간 것은 조보(朝報)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과 어전, 의정부 내에서 다루어진 국정현안과 오간 대화들을 사관들이 속기한 후 승정원에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조보는 전국의 관리와 문인들에게 가장 신뢰할 만한 정부 종합 소식지로 기능했다. 서울에서는 당일 중으로 매일 발송했고, 지방에는 4-5일 치를 묶어 보냈다. 조보는 각 지방 관아 소속 경저리(京邸吏)들이 등사와 배송을 담당했기에 저지(邸紙)·저보(邸報)·난보(爛報) 등으로도 불렸다. 임금과 왕실의 동정, 국가적 의례와 행사, 관료의 상주와 장계, 인사와 포상, 과거 시행, 재해와 범죄 등 각 분야의 소식이 총체적으로 실려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조보의 광범위한 유통이다. 공식 경로가 아닌 개인 교류 차원에서도 조보는 매우 활발히 공유되었다. 교통이 낙후된 궁벽한 지역에서는 10-15일 치씩 축(軸)으로 묶은 ‘조지축’이 안부 인사 겸 선물로써 인편을 통해 서로 간에 왕래되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중요한 뉴스를 SNS로 공유하는 것과 닮아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행을 떠났던 이들이 의주와 책문, 요동 등지에서도 조보를 받아보고 서울의 소식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1811년 동지사은사행의 일원이었던 이정수는 연경으로 가는 길에 정시의 순절과 홍경래군의 정주성 농성 소식을 들었다. 심양에서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분통을 터뜨렸고, 귀국길에는 변란의 주요 길목을 조심스레 살피며 지나갔다. 실제로 조보의 이러한 영향력은 홍경래난 당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간원 정언 안상묵(安尙默)은
“삼가 아룁니다. 신이 관서의 적변 소식을 듣고서 마음이 놀라고 안타까워 곧바로 창을 들고 함께 하여 목을 치고 싶었으니 무릇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 누군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쇠약하고 용렬한 데다 무지하여 사정을 듣지 못하다가 다만 난보에 나온 바에 의지하여 궁리한 계책이라 하기에는 부족하오나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라며 조보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대신들조차 장계를 직접 받아보는 위치가 아니라면 조보에 나온 소식을 보고 간언 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상주에 있는 도남서원〉 (출처: 한국관광여행신문)
한편 각 지역의 지식인들도 이 사건에 격렬히 반응했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丁若鏞)은 전라도 유생들에게 창의를 촉구하는 통문을 썼다. 더불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목민심서』·『경세유표』·『대동수경』 등 주요 저서에서 홍경래난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며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기도 했다. 영남 진주에 있던 박지서(朴旨瑞)는 “박천 진두의 오합지졸들은 쓸어버렸으나 정주성 안 개미떼 같은 무리는 아직 섬멸하지 못했다” 며 분노에 찬 격문을 썼다. 관직에 있지 않은 평범한 선비들도 매일 바뀌는 전황에 한숨짓거나 기뻐했으며, 전황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자 우울해하거나 답답함을 호소했다. 마침내 이듬해 4월 홍경래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상주의 도남서원에 있던 정종로(鄭宗魯)는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보는 단순한 관보가 아닌, 조선의 실질적인 뉴스 미디어였다. 1811년 12월 말부터 1812년 10월경까지 조보는 홍경래난 관련 소식을 전국에 매일 실어 날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터넷 뉴스를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하듯, 조선의 식자층들은 조보를 통해 홍경래난의 전개 상황을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했다. 몇몇 기록이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관상감에서 매년 간행해 나누어주는 ‘책력(冊曆)’, ‘시헌서(時憲書)’에 남아있던 것이다. 달력이자 생활필수품이었던 시헌서에는 날짜와 절기뿐 아니라 별자리·방위·길흉과 농사일에 관한 정보가 실렸고, 메모할 수 있는 여백도 있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보던 이 책자에,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전국의 수많은 이들이 홍경래난 관련 소식을 적어 넣었다.
〈안동권씨 수곡문중에서 기탁한 『역서오(曆書五)』. 오른쪽 윗부분 상단에 정시 부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안동권씨 수곡문중의 『역서오(曆書五)』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맑음. 눈이 몇 치나 내렸다. 평안도 박천 근처에 큰 도적 세력이 일어나 예닐곱 읍을 연이어 범하고 가산군수 정시 부자를 12월 21일에 죽였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이희저·김윤정에 선봉장은 홍가놈이고 주모자는 우군칙으로, 자못 천문지리를 알아 선생이라 불리며 학창의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들고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의 별장은 형세가 절박해지자 자결하였는데 영남인이다. 선천군수 김익순은 투항하여 적진의 초관이 되었는데 청음(김상헌)의 후손이라 한다.”
이 기록의 주인은 날씨·작황·물가·제사·병세·토정비결 등 일상의 자잘한 일들 사이에 이 충격적인 소식을 함께 적어넣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안동에 사는 사람이 평안도에서 벌어진 정시의 죽음과 김익순의 투항, 전투의 흐름과 적진의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자료다. 또한 홍경래군이 가산군수 부자를 해한 사건에 대해 언급한 저자의 메모가 바로 1811년의 역서 12월 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21일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지만 실제로 가산군수 정시 부자가 순절한 날짜는 12월 18일 새벽이고, 이 일이 조보에 실린 것이 12월 21일이다. 안동에 거주하던 저자가 12월 22일과 31일 사이의 기간에, 즉 해당 사건이 조보에 실린 지 열흘 안에 소식을 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엄산일기』〉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이외에도 시헌력에 홍경래난에 대해 기록한 예가 또 있다. 『엄산일기(弇山日記)』는 1812년 동지사은사행에 참여하기도 했던 의관 현재덕(玄在德)이 1802년부터 1833년까지 시간순으로 당해 관상감에서 간행한 시헌력의 공란에 쓴 일기이다.
“조석 문안을 드리고, 하사하신 음식을 공경히 받들었다. 관서의 군대가 연이어 접전하는 사이 적도들이 나뉘어 선천·곽산·용천·철산·태천의 청북 5읍을 범하였다. 흉봉이 드세지자 관군이 북쪽까지 쫓아가 협격하여 태천과 곽산을 수복했다. 비록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지만 아직 시원하게 승첩한 것은 아니니 참으로 분하고 원통하다. (…) 가장 심한 일은 가산군수 정시가 적도를 꾸짖고 부자가 명을 받들어 굽히지 않은 것이니 그 충절이 뛰어나다(…) 선천군수 김익순, 곽산군수 이장겸이 적에게 투항한 일은 살려는 속셈이니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경모궁에서 근무하고 있던 저자는 평안도와 거리가 먼 서울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했고, 홍경래군의 핵심 인물이나 난의 전개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화공을 써서 정주성을 공략한 일, 각 의병장들의 활약에 대해서도 자세히 담겨있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얻은 기사에서 홍경래난의 전후시말만을 따로 묶어 편집본을 만들기도 했다.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기록해두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인물로 평생동안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1811~1812년 66세의 부산 가덕도 첨사로 근무할 당시에 쓴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7월 25일(을미).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림. 하인들에게 금월 삯대를 지급하였다. 하루종일 조지 베낀 것을 고준[복사한 문서를 원본과 맞춰봄]하였다. 12월 서적란[홍경래난]이 일어난 처음부터 조지 중에서 참고할 만한 것을 베껴놓았는데 책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들 일기 작성자들이 서울과 안동, 그리고 부산이라는, 평안도와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서 홍경래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인으로서 당시 전황에 대해 이토록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던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노상추의 언급은 조보를 통해 홍경래난의 상황을 파악하여 기록을 남기고, 이에 그치지 않고 해당 사건에 대한 정보와 기록만을 따로이 정리하여 편집본을 엮는 행위가 조선의 식자층에게 보편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집을 남기지 못한 무명의 개인들이 지역에 상관없이 홍경래난에 대해 보편적 상식을 함께 공유한 경로와 그에 관련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홍경래난에 관련된 기록만 모아 엮은 편집본의 양이 상당하고 대개 비슷한 내용인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매산 홍직필 초상》. 홍직필 후손 일가가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출처: 연합뉴스)
한 사람의 신민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홍경래난을 기록하고 공감한 수많은 이들의 글은, 멀리서 전황을 전해 듣고 마냥 승첩을 기다려야 했으되, 무력감에 젖어 있기보다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갔다. 당시 재야문인으로 지내고 있던 37세의 홍직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 들으니 가산의 군수가
잠깐 사이에 살신성인했다 하네
온 집안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니
한 번 죽음은 구산보다 무겁다오
이불(李芾)이 어찌 적을 따랐으랴
명황은 안진경(顔眞卿)을 몰랐다오
바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하루도 못되어 관서를 깨끗이 하리라
聞道嘉山守
成仁造次間
全家輕性命
一死重邱山
李芾寧從賊
明皇不識顔
風聲動天地
不日可淸關
그는 정시를 당나라 안녹산의 난 때 끝까지 성을 지켰던 안진경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정시를 안진경에 비유한 순조의 전교가 1812년 정월 10일 조보에 실리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전교는 거의 모든 조보 편집본에 문장과 표현이 일치되어 실려있는데, 언문으로 번역되어 방문(榜文)으로 내걸렸을 것까지 감안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아는 표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지방 수령의 충절이 전국적으로 회자되는 순간이었다.
난이 진압된 지 몇 개월 지난 1812년 7월 8일의 조보에는 평산부사 서익순(徐翼淳)이 전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과 이름이 동음이기에 봉순(鳳淳)으로 바꾸고 싶다는 소지를 올렸다는 내용이 실렸다. 실소를 자아내는 기록이지만 홍경래군에 항복했던 모반죄인인 김익순의 이름과 죄상이 전국에 낱낱이 알려졌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어떠한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공유된 정보는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홍경래난과 관련된 공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언정, 수많은 조보 편집본과 개인 기록은 한글로 번역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그리고 난 발생 후 50년이 지난 1861년에는 이 사건을 다룬 한글 방각본소설 『신미록』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의 상세한 기록들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하나의 서사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단국대학교 소장 한글방각본 『신미녹』〉 (출처: 단국대학교)
한문 기록을 일일이 들춰보지 않아도, 혹은 한자를 읽을 줄 모르더라도 상관없었다. 『신미록』의 독자들은 이제 홍경래난 때 변절자 김익순이 무슨 말로 용서를 빌었으며 충의지사 정시와 관기 운낭이 어떤 행동을 했고 긴박했던 정주성 전투는 어떻게 끝맺었는지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이야기는 기존의 ‘사실에 없었’으나 ‘있었을 법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의 빈틈을 훌륭하게 채웠고, 이미 잊혀져 가는 역사였던 홍경래난을 다시금 대중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이처럼 홍경래난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 속에 남겨졌다. 평안도와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은 조보를 들여다보며 이 먼 곳의 전쟁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였다. 시헌서 귀퉁이에 남긴 짧은 메모에서부터 격문과 시문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증언하고 기억하고자 했다. 머나먼 곳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들 모두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50년이 지나 『신미록』이라는 이야기가 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 더 오래, 더 널리 기억되었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