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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대의 내란,
홍경래난은 어떻게 전국에 알려졌나

홍경래난, 열흘 만에 전국을 뒤흔들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홍경래진도(洪景來陣圖)》〉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왕조 역사상 유일한 ‘내란(內亂)’이었다. 권력 획득에 실패한 주도세력이 일부 지역을 장기간 실효지배하는 상태를 일컫는 ‘내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한 것은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유일하다. 오랜 시간 조직적인 준비과정을 거치고, 한시적이나마 국가의 일정 영역을 점령하여 정부군과 맞대결을 벌인 대규모 변란은 조선 역사상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1811년(순조 11년) 겨울, 이 전대미문의 내란은 평안도에서 일어났다.

“관서는 곧 풍패의 고향이라, 짓밟히는 것을 참지 못하고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하여금 병사를 일으켜 백성을 구하게 하니 의로운 깃발이 이르는 곳마다 소생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홍경래가 내건 이 기치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었다. 그는 주변 고을에서 군사력과 군자금을 모으며 오랜 기간 준비했고, 마침내 곽산·가산·철산 등 청북 8읍을 일시에 점령하기에 이른다.

홍경래군의 조직력은 놀라웠다. 스스로를 평서대원수로 칭한 홍경래는 체계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기존 수령들의 인부를 빼앗고 그들을 가두거나 해하였으며, 단순한 폭력행사에 그치지 않고 수하들을 점령지역의 수령으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더불어 주변 고을에서는 물자가 조달되었고, 자원하는 인력도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일반적인 민란이나 변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반란이 일시적인 봉기나 약탈에 그쳤다면, 홍경래난은 장기적인 실효지배를 목표로 했다. 민란의 성격도 있었지만, 동시에 조직적인 병란(兵亂)이자 내란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차별과 소외를 받아온 평안도에서, 그것도 병자호란(1636) 이후 180여 년간 이어진 태평성대 속에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조선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1899년 편찬한 『가산군읍지(嘉山郡邑誌)』〉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특히 반란의 초기,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가산군수 정시(鄭蓍) 부자의 순절이었다. 신미년 12월 18일 새벽 평안도 가산에서 일어난 이 비극적 사건은 3일 만에 조정에 보고되어 조보에 실렸고, 그로부터 열흘도 안 되어 가산에서 직선거리로 천여 리(약 437km)나 떨어진 경상북도 안동까지 전해졌다. 한겨울 눈길을 헤치고 고갯길을 돌아가야 했으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멀고 오래 걸렸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정시 부자의 순절 소식은 놀라운 속도로 전해졌던 것이다. 반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선천·곽산·용천·철산·태천 등이 연이어 함락되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선천군수 김익순(金益淳)과 곽산군수 이장겸(李章謙)이 적에게 투항한 사실이었다. 특히 김익순은 이름난 재상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었기에, 그의 투항 소식은 전국의 사대부들에게 크나큰 여파를 몰고 왔다.




조선의 뉴스 미디어, 조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중인 조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반란의 소식이 이토록 빠르게 전국에 퍼져나간 것은 조보(朝報)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과 어전, 의정부 내에서 다루어진 국정현안과 오간 대화들을 사관들이 속기한 후 승정원에서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조보는 전국의 관리와 문인들에게 가장 신뢰할 만한 정부 종합 소식지로 기능했다. 서울에서는 당일 중으로 매일 발송했고, 지방에는 4-5일 치를 묶어 보냈다. 조보는 각 지방 관아 소속 경저리(京邸吏)들이 등사와 배송을 담당했기에 저지(邸紙)·저보(邸報)·난보(爛報) 등으로도 불렸다. 임금과 왕실의 동정, 국가적 의례와 행사, 관료의 상주와 장계, 인사와 포상, 과거 시행, 재해와 범죄 등 각 분야의 소식이 총체적으로 실려 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조보의 광범위한 유통이다. 공식 경로가 아닌 개인 교류 차원에서도 조보는 매우 활발히 공유되었다. 교통이 낙후된 궁벽한 지역에서는 10-15일 치씩 축(軸)으로 묶은 ‘조지축’이 안부 인사 겸 선물로써 인편을 통해 서로 간에 왕래되었다. 이는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중요한 뉴스를 SNS로 공유하는 것과 닮아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행을 떠났던 이들이 의주와 책문, 요동 등지에서도 조보를 받아보고 서울의 소식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1811년 동지사은사행의 일원이었던 이정수는 연경으로 가는 길에 정시의 순절과 홍경래군의 정주성 농성 소식을 들었다. 심양에서 이 소식을 접한 그는 분통을 터뜨렸고, 귀국길에는 변란의 주요 길목을 조심스레 살피며 지나갔다. 실제로 조보의 이러한 영향력은 홍경래난 당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간원 정언 안상묵(安尙默)은

“삼가 아룁니다. 신이 관서의 적변 소식을 듣고서 마음이 놀라고 안타까워 곧바로 창을 들고 함께 하여 목을 치고 싶었으니 무릇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 누군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쇠약하고 용렬한 데다 무지하여 사정을 듣지 못하다가 다만 난보에 나온 바에 의지하여 궁리한 계책이라 하기에는 부족하오나 한 마디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라며 조보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상소를 올렸다. 조정의 대신들조차 장계를 직접 받아보는 위치가 아니라면 조보에 나온 소식을 보고 간언 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상주에 있는 도남서원〉 (출처: 한국관광여행신문)


한편 각 지역의 지식인들도 이 사건에 격렬히 반응했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丁若鏞)은 전라도 유생들에게 창의를 촉구하는 통문을 썼다. 더불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목민심서』·『경세유표』·『대동수경』 등 주요 저서에서 홍경래난을 반복적으로 인용하며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기도 했다. 영남 진주에 있던 박지서(朴旨瑞)는 “박천 진두의 오합지졸들은 쓸어버렸으나 정주성 안 개미떼 같은 무리는 아직 섬멸하지 못했다” 며 분노에 찬 격문을 썼다. 관직에 있지 않은 평범한 선비들도 매일 바뀌는 전황에 한숨짓거나 기뻐했으며, 전황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자 우울해하거나 답답함을 호소했다. 마침내 이듬해 4월 홍경래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상주의 도남서원에 있던 정종로(鄭宗魯)는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이처럼 조보는 단순한 관보가 아닌, 조선의 실질적인 뉴스 미디어였다. 1811년 12월 말부터 1812년 10월경까지 조보는 홍경래난 관련 소식을 전국에 매일 실어 날랐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터넷 뉴스를 통해 현재 상황을 파악하듯, 조선의 식자층들은 조보를 통해 홍경래난의 전개 상황을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조보로 홍경래난을 바라본 사람들


이 충격적인 사건을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했다. 몇몇 기록이 새롭게 발견되었는데 관상감에서 매년 간행해 나누어주는 ‘책력(冊曆)’, ‘시헌서(時憲書)’에 남아있던 것이다. 달력이자 생활필수품이었던 시헌서에는 날짜와 절기뿐 아니라 별자리·방위·길흉과 농사일에 관한 정보가 실렸고, 메모할 수 있는 여백도 있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보던 이 책자에, 1811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전국의 수많은 이들이 홍경래난 관련 소식을 적어 넣었다.


〈안동권씨 수곡문중에서 기탁한 『역서오(曆書五)』. 오른쪽 윗부분 상단에 정시 부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안동권씨 수곡문중의 『역서오(曆書五)』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맑음. 눈이 몇 치나 내렸다. 평안도 박천 근처에 큰 도적 세력이 일어나 예닐곱 읍을 연이어 범하고 가산군수 정시 부자를 12월 21일에 죽였다.”

“도적의 우두머리는 이희저·김윤정에 선봉장은 홍가놈이고 주모자는 우군칙으로, 자못 천문지리를 알아 선생이라 불리며 학창의를 입고 깃털 부채를 들고 있다고 한다. 용골산성의 별장은 형세가 절박해지자 자결하였는데 영남인이다. 선천군수 김익순은 투항하여 적진의 초관이 되었는데 청음(김상헌)의 후손이라 한다.”

이 기록의 주인은 날씨·작황·물가·제사·병세·토정비결 등 일상의 자잘한 일들 사이에 이 충격적인 소식을 함께 적어넣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안동에 사는 사람이 평안도에서 벌어진 정시의 죽음과 김익순의 투항, 전투의 흐름과 적진의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자료다. 또한 홍경래군이 가산군수 부자를 해한 사건에 대해 언급한 저자의 메모가 바로 1811년의 역서 12월 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21일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했지만 실제로 가산군수 정시 부자가 순절한 날짜는 12월 18일 새벽이고, 이 일이 조보에 실린 것이 12월 21일이다. 안동에 거주하던 저자가 12월 22일과 31일 사이의 기간에, 즉 해당 사건이 조보에 실린 지 열흘 안에 소식을 접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엄산일기』〉 (출처: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이외에도 시헌력에 홍경래난에 대해 기록한 예가 또 있다. 『엄산일기(弇山日記)』는 1812년 동지사은사행에 참여하기도 했던 의관 현재덕(玄在德)이 1802년부터 1833년까지 시간순으로 당해 관상감에서 간행한 시헌력의 공란에 쓴 일기이다.

“조석 문안을 드리고, 하사하신 음식을 공경히 받들었다. 관서의 군대가 연이어 접전하는 사이 적도들이 나뉘어 선천·곽산·용천·철산·태천의 청북 5읍을 범하였다. 흉봉이 드세지자 관군이 북쪽까지 쫓아가 협격하여 태천과 곽산을 수복했다. 비록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았지만 아직 시원하게 승첩한 것은 아니니 참으로 분하고 원통하다. (…) 가장 심한 일은 가산군수 정시가 적도를 꾸짖고 부자가 명을 받들어 굽히지 않은 것이니 그 충절이 뛰어나다(…) 선천군수 김익순, 곽산군수 이장겸이 적에게 투항한 일은 살려는 속셈이니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

경모궁에서 근무하고 있던 저자는 평안도와 거리가 먼 서울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했고, 홍경래군의 핵심 인물이나 난의 전개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화공을 써서 정주성을 공략한 일, 각 의병장들의 활약에 대해서도 자세히 담겨있다.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얻은 기사에서 홍경래난의 전후시말만을 따로 묶어 편집본을 만들기도 했다. 무관이었던 노상추는 조보를 읽고 기록해두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인물로 평생동안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1811~1812년 66세의 부산 가덕도 첨사로 근무할 당시에 쓴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7월 25일(을미). 아침에 구름 끼고 흐림. 하인들에게 금월 삯대를 지급하였다. 하루종일 조지 베낀 것을 고준[복사한 문서를 원본과 맞춰봄]하였다. 12월 서적란[홍경래난]이 일어난 처음부터 조지 중에서 참고할 만한 것을 베껴놓았는데 책자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들 일기 작성자들이 서울과 안동, 그리고 부산이라는, 평안도와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서 홍경래난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인으로서 당시 전황에 대해 이토록 정확히 기록할 수 있었던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노상추의 언급은 조보를 통해 홍경래난의 상황을 파악하여 기록을 남기고, 이에 그치지 않고 해당 사건에 대한 정보와 기록만을 따로이 정리하여 편집본을 엮는 행위가 조선의 식자층에게 보편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집을 남기지 못한 무명의 개인들이 지역에 상관없이 홍경래난에 대해 보편적 상식을 함께 공유한 경로와 그에 관련된 글쓰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홍경래난에 관련된 기록만 모아 엮은 편집본의 양이 상당하고 대개 비슷한 내용인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매산 홍직필 초상》. 홍직필 후손 일가가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출처: 연합뉴스)


한 사람의 신민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홍경래난을 기록하고 공감한 수많은 이들의 글은, 멀리서 전황을 전해 듣고 마냥 승첩을 기다려야 했으되, 무력감에 젖어 있기보다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갔다. 당시 재야문인으로 지내고 있던 37세의 홍직필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 들으니 가산의 군수가
잠깐 사이에 살신성인했다 하네
온 집안이 목숨을 가벼이 여기니
한 번 죽음은 구산보다 무겁다오
이불(李芾)이 어찌 적을 따랐으랴
명황은 안진경(顔眞卿)을 몰랐다오
바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하루도 못되어 관서를 깨끗이 하리라
聞道嘉山守
成仁造次間
全家輕性命
一死重邱山
李芾寧從賊
明皇不識顔
風聲動天地
不日可淸關


그는 정시를 당나라 안녹산의 난 때 끝까지 성을 지켰던 안진경과 함께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정시를 안진경에 비유한 순조의 전교가 1812년 정월 10일 조보에 실리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전교는 거의 모든 조보 편집본에 문장과 표현이 일치되어 실려있는데, 언문으로 번역되어 방문(榜文)으로 내걸렸을 것까지 감안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듣고 아는 표현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 지방 수령의 충절이 전국적으로 회자되는 순간이었다.

난이 진압된 지 몇 개월 지난 1812년 7월 8일의 조보에는 평산부사 서익순(徐翼淳)이 전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과 이름이 동음이기에 봉순(鳳淳)으로 바꾸고 싶다는 소지를 올렸다는 내용이 실렸다. 실소를 자아내는 기록이지만 홍경래군에 항복했던 모반죄인인 김익순의 이름과 죄상이 전국에 낱낱이 알려졌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어떠한 고초를 겪었을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50년 후의 이야기, 소설이 된 홍경래난


이렇게 전국적으로 공유된 정보는 시간이 지나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홍경래난과 관련된 공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지언정, 수많은 조보 편집본과 개인 기록은 한글로 번역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그리고 난 발생 후 50년이 지난 1861년에는 이 사건을 다룬 한글 방각본소설 『신미록』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는 당시의 상세한 기록들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넘어 하나의 서사로 재탄생한 순간이었다.


〈단국대학교 소장 한글방각본 『신미녹』〉 (출처: 단국대학교)


한문 기록을 일일이 들춰보지 않아도, 혹은 한자를 읽을 줄 모르더라도 상관없었다. 『신미록』의 독자들은 이제 홍경래난 때 변절자 김익순이 무슨 말로 용서를 빌었으며 충의지사 정시와 관기 운낭이 어떤 행동을 했고 긴박했던 정주성 전투는 어떻게 끝맺었는지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이야기는 기존의 ‘사실에 없었’으나 ‘있었을 법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의 빈틈을 훌륭하게 채웠고, 이미 잊혀져 가는 역사였던 홍경래난을 다시금 대중 앞에 데려다 놓았다.

이처럼 홍경래난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록 속에 남겨졌다. 평안도와 수천 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들은 조보를 들여다보며 이 먼 곳의 전쟁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였다. 시헌서 귀퉁이에 남긴 짧은 메모에서부터 격문과 시문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사건을 증언하고 기억하고자 했다. 머나먼 곳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들 모두의 역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50년이 지나 『신미록』이라는 이야기가 되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가 되어 더 오래, 더 널리 기억되었다.




집필자 소개

성아사
성아사
연세대학교에서 고전소설 전공으로 문학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학교, 성공회대학교, 한양대학교에서 인문학 강의를 맡고 있으며, 『홍경래실기』의 교주본을 집필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근현대 홍경래난 서사 간 교섭 양상과 서사화 맥락 탐구」, 「의기 연홍의 초상, 운낭자상에 대한 재해석 -홍경래난 텍스트와의 영향 관계를 중심으로」가 있다.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저상일월, 박한광·박득녕·박주대·박면진·박희수·박영래 등, 미상

1862년 2월 29일, 올해는 봄부터 각처에서 화재가 일고, 역병 또한 곳곳마다 돌았다. 진주에서는 백성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시초는 토지 1결당 관아에서 배정하는 역 때문이었는데, 본래 큰 부담이 아니었던 결역이 근년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대여섯 배, 많게는 일곱 여덟 배로 늘어나자 백성들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성난 진주 백성들이 군수와 영장, 아전들을 결박하고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인근 고을 사람들도 집집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무리를 모았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8천 명이라고도 하고 8만 명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었는데, 곧바로 관아를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또 민들은 영장, 이속들을 마당에 끌어내어 결박하였는데, 이 때문에 관아에 속한 사람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자, 다른 지방에서도 민들이 부호가에 몰려가 불을 질렀으며 관아에 쳐들어가 수령, 이속, 영장들을 결박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진주 지방으로 급파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성난 민심이 들불같이 일어나 박규수도 차마 관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배회했다고 한다.

몇 십 년간 수령들의 침학이 지속되더니, 결국 터질 일이 터지고 만 셈이다. 박득녕은 민란의 책임이 썩은 관리들에게 있음을 통감하였다. 한편 민란의 불길이 예천까지 번지면, 우리 집안은 무사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정감록을 믿다가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

노상추일기, 노상추,
1785-03-23 ~ 1785-03-24

끔찍한 날이었다. 노상추를 비롯한 문무백관은 서수문 밖에 차례로 늘어서 역모를 꾀한 죄인 이율(李瑮)이 능지처참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다음날에는 술사 주경채(朱絅采)가 모래밭에서 목이 베였다. 이율을 역모죄로 고발한 것은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었다. 그는 현재 관직이 없었기에 전 판서 김종수(金鍾秀)와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을 통해 조정에 역모를 알렸다.

김이용은 자신의 사촌이 이율과 친하게 지냈기에 자신도 그와 교제하였으나, 이율이 가진 불순한 사상들 때문에 오래 가까이 지내기는 꺼려졌다고 미리 선을 그으면서 그의 불순한 사상에 대해 왕에게 진술하기 시작하였다. 이율이 어느 날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사주팔자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에 김이용은 이율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사주팔자를 점쳐달라고 하였다. 이율이 가져온 김이용의 사주풀이는 ‘이 사주팔자는 마땅히 사업(事業)이 있을 것이다. 10년 동안 쭈그리고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제후로 봉해지게 된다. 흉악한 해(害)가 사방으로 이를 것이니, 남방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이용은 제후로 봉해지는 것은 무엇이며, 흉악한 해는 또 무엇이냐고 이율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율은 “제후로 봉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내년 이후에는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인데, 북쪽의 도적들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는 나라가 장차 셋으로 갈라진다고 하니, 나는 장차 가족을 데리고 일찌감치 난리를 피하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김이용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고 물었지만 이율에게 답을 들을 수는 없었고, 하동에 갔을 때 유가(劉哥), 정가(鄭哥), 김가(金哥) 세 사람이 난리가 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연관이 있는 듯한 양(梁)씨 성을 가진 사람은 서울에 살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 ‘잔악한 것들을 없앤다.’ 등 《수호지(水滸志)》에 나오는 송강(宋江)의 말을 편지에 써서 보냈으며, 홍국영의 사촌 동생이 얽혀 있는 듯하였다.

또한 하동에는 250살이라고 하는 도인 이현성(李玄晟)이 있어서, 군사를 일으킬 방향을 지시하고, 500년 된 사슴과 400년 된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녹정(鹿精)과 웅정(熊精)이 있다고 했다. 녹정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은 말기에 셋으로 갈라져 100여 년간 싸우다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다. 통일할 사람은 정가(鄭哥) 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 싸움은 나주(羅州)에서 먼저 일어난다. 유가(劉哥), 이가(李哥), 구가(具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거사하여 반정(反正)할 텐데, 거사 시기는 을사년 7, 8월이 아니면 병오년 정월이나 2월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이용의 증언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도인이니 진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정감록」과 「진정비결(眞淨秘訣)」의 전복적 내용이 비밀스럽게 퍼져나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대도독 등의 자리에 올려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했다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왔다. 왕은 전국의 지방관들에게 이 사건을 면밀히 수사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군사 조직은 실상이 없는 허무한 것들이었다.

왕은 이율을 심문하고는, 대대로 녹을 먹던 집안의 후손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며 능지처참을 선고하였다. 일종의 본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신앙은 늘 조정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역모사건으로 번져나갔다..

“대북의 잔당이 관직에 제수되었단 이야기를 듣다”

계암일록, 김령, 1631-04-05

1631년 4월 5일, 날은 맑은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예안 현감이 안부를 묻는 편지를 꿩 한 마리와 함께 보내왔다. 그리고 조보를 함께 보내주었는데, 안동 부사 홍명구가 어제 예안현에 들렀을 때 가져다준 것이라 하였다. 조보에는 가도의 소식과 함께 새로운 인사 소식이 실려 있었다.

어제 홍명구에게 가도의 반란 수괴 유흥치가 부하의 손에 죽었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보에는 그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유흥치가 자기의 어미를 오랑캐 진중에 인질로 보내어 연합을 맹세하였는데, 그것이 발각되면서 부하들이 심하게 동요한 듯하였다. 그의 부하 중 심세구, 장도라는 자들이 6-7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흥치와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들 중 장도가 임시로 유격장이 되었는데, 조보에는 그가 글도 잘하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반란 수괴 유흥치가 죽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 가도의 새 수장이 되었으니, 서쪽 변방의 근심은 조금 풀리지 않겠는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실린 인사 소식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박경범이란 자가 가평 군수가 되었는데, 이 박경범은 과거 대북의 잔당이었다. 그는 대북 중에서도 골수였는데, 반정 이후에 죄를 면한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군수란 자리는 목민관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 자리인데,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폐조의 신하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히다니! 과연 이 나라의 인사권자들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막을 살펴보니, 원주 목사인 이영도가 이조 판서인 정경세에게 천거하여 박경범을 천릉의 감역관으로 삼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인사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평 군수로 낙점된 듯하였다. 정경세란 자는 남인들 사이에서도 중망이 있는 인사였는데, 이렇듯 망령된 인사를 자행하다니, 김령은 심히 실망스러웠다.

“선산에서 익명서 사건이 발생하다”

계암일록, 김령, 1628-10-08

1628년 10월 8일, 어제 오전에 류시원과 종조카 김광철이 왔다. 김광철이 어제 선산에서 돌아왔는데, 선산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산의 아전이 익명서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기로 한 8명의 이름이 쓰여 있고, 그중 안동부사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김령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틀림없이 부사를 증오하고 원망하여 예측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세상이 말세여서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이 사건을 선산부사 신광립이 감사에게 보고했다 하던데, 감사는 벌써 조정에 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들으니, 안동의 심부사가 익명서 변고 때문에 관직을 사직하려 한다고 한다. 이 사건이 극히 무리하다는 것은 아주 조금의 식견만 있어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심부사는 비록 청렴성과 조심성은 모자란 사람이지만, 천성이 너그러워 주변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백성들에게 세금 거두는 것도 예안현감처럼 각박하지 않아서, 지난번에는 삼수량을 면포로 바꾸어 납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가격도 면포 4필당 쌀 1석씩으로 쳐주어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긴 바 있었다. 볼만한 치적이 있는 수령인데도 이런 불측한 일로 수령직을 내놓으려 하고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했다.

“변란에 발을 담근 왕족을 처벌하라”

김령, 계암일록,
1624-03-18 ~ 1624-05-10

1624년 3월 18일, 반정공신 이귀는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차자(箚子)를 올려 난중 그의 10가지 죄를 스스로 헤아려 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믿고 임금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인성군(仁城君)을 벌하도록 청한 것이었다. 이귀는 그 뒤로도 세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섞어 인성군을 치죄할 것을 청했다.

3월 29일, 임금은 이에 대해 “경의 말이 지극히 잘못되었다. 의혹을 분별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비답을 내려 그의 청을 거절했다.

5월 10일, 이귀는 세 차례의 차자로 인성군을 공격하고는, 심지어 갑옷 입은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그의 집을 에워쌌다. 이에 정 부제학이 인성군의 결백을 고하는 차자를 올렸다가 이귀에게 배척을 당해 강상(江上)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임금은 이귀와 정부제학에게 화해하라고 하였지만, 부제학은 곧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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