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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亂)을 소재로 그린 만화들,
《정가네 소사》에서 《백정 동록개》까지

1. 《정가네 소사》



(출처: 정용연)


“시상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당게.”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어김없이 전쟁 이야기를 하셨다.
1950년. 아버지 나이 스무 살 때다.
전쟁 개시 보름 만에 마을로 쳐들어온 인민군은
인공기를 내건 뒤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논과 밭이 몇 마지기인지 세는 것은 물론,
곡식이 얼마나 산출되는지 조사하였다.
조사가 얼마나 꼼꼼한지 목화솜이 몇 송이인지
일일이 세게 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목화 다래조차 함부로 먹어선 안 되었다.
그렇잖아도 놀란 가슴을 더 놀라게 한 건 논두렁에 나있는 콩을 세라는 지시였다.
이 많은 콩을 어찌 셀 것인가?
마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악독한 지주라도 논두렁의 콩은 건드리지 않는 게
오랜 세월 내려온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완전한 혁명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인민재판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을 처형했다.
마을에서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두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은 현지에서 병력을 조달하였다.
마을 청년들 상당수가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
아버지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낮에는 뽕나무밭에 숨고
밤에는 마루 밑에 엎드려 숨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출처: 정용연)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불거졌다.
입산자(入山者)로 몰려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순사였고, 해방 이후 경찰로 변신한 외삼촌을 찾아가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더하여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군 입대를 서둘렀다.
어머니 또한 전쟁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졌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나갈 수 없었고 어머니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송첨지 댁 머슴 창식이는 인민군을 따라나섰고
산지기 황 씨는 부역자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마을 공기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멀리서 사람 그림자만 봐도 두려움에 발길을 돌렸다.

이십 대 중반 ‘하데스의 밤’이란 단편만화로 데뷔를 했지만 나는 후속작을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스토리를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도 진부하단 소리만 들었다.
하늘은 왜 내게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원망했지만 소용없었다.
한계에 부딪힌 나는 서른 무렵 만화를 포기했다.
더 이상 만화는 내 삶에 없었다.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귀소본능을 가진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언제부터인가 발걸음은 만화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무엇이라도 그려야 했기에 부모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를 우리만화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우리만화》에 실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지나자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라며 편집자로부터 그만두라는 전화가 올까 싶었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전쟁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 삶의 변곡점이 된 사건들을 반드시 그려야 했다.
죽고 죽이는 이야기가 칸을 메우고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작업 기간 내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는 아버지 말씀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 결과가 《정가네소사》 1·2·3권이다.




2. 《목호의 난 1374 제주》



(출처: 정용연)


《정가네소사》를 출간하고 몇 개월 지난 뒤다.
한 출판사로부터 제주 4·3에 대한 책을 한 권 그려 달라 의뢰를 받았다.
계약금이 입금되자마자 제주도로 가 4·3유적지 곳곳을 돌아보며 4·3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후 스토리를 한 권 분량 썼지만 출판사 반응은 떨떠름했다.
다시 써오란 것이다.
도저히 더 잘 쓸 자신이 없어 계약금을 돌려주며 없던 일로 하였다.
대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목호의 난’이었다.
4·3에 비견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교과서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역사 마니아라 자부하던 나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침 만화무크지 《보고》가 창간되었고
연재 제안을 받은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목호의 난을 그리기 시작했다.


(출처: 정용연)


목호의 난은 기존에 발생했던 난과는 성질이 달랐다.
원·명교체기 이민족인 몽골과 결부된 난이었다.
1273년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 진압된 뒤
몽골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말 생산 기지로 삼는다.
연간 1,500명 가량의 말사육사가 주둔하는데
이들은 제주 원주민과 혼인을 통해 유대가 깊어진다.
그렇게 세대를 거듭하다 100년이 지나선 일체화되기에 이른다.
고려에선 이들을 기를 목(牧) 오랑캐 호(胡)자를 써 ‘목호’라 불렀다.

반원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공민왕에게 제주는 기필코 수복해야 할 땅이었다.
그리하여 관리를 제주에 파견하지만 가는 족족 죽임을 당한다.
그 사이 원을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고려에게 말 2,000필을 바치라 한다.
고려로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을 대적하기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이에 고려는 목호에게 말 2,000필을 바치라 요구하지만 300필을 바치는 것에 그친다.
공민왕에게 목호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였다.
반드시 빼내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영(崔瑩)을 도통사로 삼고
전선 314척에 25,000 병력을 제주에 실어 보낸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할 때 동원했던 병력의 두 배였다.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호는 항복하지 않았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 일관된 그들의 태도다.

섬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붉은 피가 들판을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살육 대상은 목호에 그치지 않았다.
어린아이와 여자들 그리고 노인까지 고려군의 손에 죽어나갔다.
당시 제주 인구의 반 가까이 목숨을 잃었으니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4·3과 닮은꼴이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고려 편을 들기보다는 제주 원주민과 목호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제주 원주민에겐 고려나 몽골이나 매한가지로 외부세력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목호에게 제주는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땅이었다.
끝 닿을 데 없이 치닫는 갈등.
그 속에서 피어난 고려여자 버들아기와 몽골남자 석곡리보개의 사랑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였다.
원고는 시작한 지 6년이 지나 《목호의 난 1374 제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3. 《친정 가는 길》


가족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린 작품이 《목호의 난 1374 제주》였다면
《친정 가는 길》은 남자 작가로서 여자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린 작품이다.


(출처: 정용연)


주인공은 양반가 첫째 며느리인 송심과 둘째 며느리인 숙영이다.
이들은 동서지간으로 사이가 좋다.
하지만 성격은 각기 달라 첫째 며느리인 송심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반면
숙영은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남자 종과 함께 달아나 서북 땅에 정착한 숙영은 금광으로 큰돈을 번다.
서북 땅은 본디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아왔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벼슬다운 벼슬이 주어지지 않았다.


(출처: 정용연)


몰락 양반 홍경래(洪景來)는 조정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규합하며 세를 불려 나간다.
나는 실재 역사와 달리 홍경래를 혁명적인 사상가로 설정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주장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혁명에 성공하면 숙영은 관직에 오를 것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혁명은 실패했고 홍경래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숙영의 남편 역시 지도부와 운명을 같이 한다.
정부군이 여자는 살려줄 때, 숙영은 훗날을 기약하며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작품은 미완성으로 1권이 출간돼 있는 상태다.
언젠가 시간을 내 어지러웠던 정주성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그릴 것이다.




4. 《백정 동록개》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누구는 혁명이라 일컫고 누구는 난이라 일컫는다.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쓴
한말의 지식인 매천 황현(黃玹)은 동학도들을 줄곧 동비라고 하였다.
조정은 물론 지배 계급인 양반들 모두 황현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리이기에 발본색원하여 씨를 말려야 했다.


(출처: 정용연)


동록개는 내 고향 김제에 살던 백정으로 동네개로 불렸다.
동네개가 변하여 동록개가 된 것이다.
천하디 천한 백정 신분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 집을 지었고 그 집을
금구 대접주인 김덕명에게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며 바친다.
집은 동학혁명 당시 집강소로 쓰이며 주민자치제의 기원이 된다.
동록개는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고 입으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바친 집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집강소 건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있는 《백정 동록개》는 동학혁명보다 집 짓는 과정에 집중한다.
비록 차별받는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삶이 마냥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맛보았던 삶의 고통과 기쁨을
컷과 컷 그리고 페이지로 연결해 그려나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 210쪽 분량을 완성했고 100여 쪽을 더 그려 완성할 계획이다.


(출처: 정용연)


평온함을 깨뜨리는 것이 난이다.
난이 일어나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가 없다.
삶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어떤 이들은 이를 기회로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얄궂지만 평온한 시대보다 어지러운 시대에 드라마가 많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 전쟁 등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군사독재시절을 지나왔다.
누군가가 흘린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루었고 덕분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어두운 역사다.
근래 난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과거 어두운 시간으로 회귀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이를 잘 막아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하루빨리 지금의 혼란이 정리되어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길 바란다.




집필자 소개

정용연 작가
정용연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전 3권)을 비롯 고려 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난을 소재로 그린 《목호의 난 1374 제주》, 삼대에 걸친 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한 《의병장 희순》, 황해도와 평안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여성의 연대기인 《친정 가는 길》, 진주성 1차 전투를 다룬 《진주성》 등의 단행본이 있으며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백정 동록개》를 그리고 있다.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저상일월, 박한광·박득녕·박주대·박면진·박희수·박영래 등, 미상

1862년 2월 29일, 올해는 봄부터 각처에서 화재가 일고, 역병 또한 곳곳마다 돌았다. 진주에서는 백성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시초는 토지 1결당 관아에서 배정하는 역 때문이었는데, 본래 큰 부담이 아니었던 결역이 근년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대여섯 배, 많게는 일곱 여덟 배로 늘어나자 백성들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성난 진주 백성들이 군수와 영장, 아전들을 결박하고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인근 고을 사람들도 집집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무리를 모았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8천 명이라고도 하고 8만 명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었는데, 곧바로 관아를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또 민들은 영장, 이속들을 마당에 끌어내어 결박하였는데, 이 때문에 관아에 속한 사람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자, 다른 지방에서도 민들이 부호가에 몰려가 불을 질렀으며 관아에 쳐들어가 수령, 이속, 영장들을 결박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진주 지방으로 급파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성난 민심이 들불같이 일어나 박규수도 차마 관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배회했다고 한다.

몇 십 년간 수령들의 침학이 지속되더니, 결국 터질 일이 터지고 만 셈이다. 박득녕은 민란의 책임이 썩은 관리들에게 있음을 통감하였다. 한편 민란의 불길이 예천까지 번지면, 우리 집안은 무사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정감록을 믿다가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

노상추일기, 노상추,
1785-03-23 ~ 1785-03-24

끔찍한 날이었다. 노상추를 비롯한 문무백관은 서수문 밖에 차례로 늘어서 역모를 꾀한 죄인 이율(李瑮)이 능지처참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다음날에는 술사 주경채(朱絅采)가 모래밭에서 목이 베였다. 이율을 역모죄로 고발한 것은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었다. 그는 현재 관직이 없었기에 전 판서 김종수(金鍾秀)와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을 통해 조정에 역모를 알렸다.

김이용은 자신의 사촌이 이율과 친하게 지냈기에 자신도 그와 교제하였으나, 이율이 가진 불순한 사상들 때문에 오래 가까이 지내기는 꺼려졌다고 미리 선을 그으면서 그의 불순한 사상에 대해 왕에게 진술하기 시작하였다. 이율이 어느 날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사주팔자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에 김이용은 이율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사주팔자를 점쳐달라고 하였다. 이율이 가져온 김이용의 사주풀이는 ‘이 사주팔자는 마땅히 사업(事業)이 있을 것이다. 10년 동안 쭈그리고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제후로 봉해지게 된다. 흉악한 해(害)가 사방으로 이를 것이니, 남방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이용은 제후로 봉해지는 것은 무엇이며, 흉악한 해는 또 무엇이냐고 이율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율은 “제후로 봉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내년 이후에는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인데, 북쪽의 도적들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는 나라가 장차 셋으로 갈라진다고 하니, 나는 장차 가족을 데리고 일찌감치 난리를 피하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김이용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고 물었지만 이율에게 답을 들을 수는 없었고, 하동에 갔을 때 유가(劉哥), 정가(鄭哥), 김가(金哥) 세 사람이 난리가 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연관이 있는 듯한 양(梁)씨 성을 가진 사람은 서울에 살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 ‘잔악한 것들을 없앤다.’ 등 《수호지(水滸志)》에 나오는 송강(宋江)의 말을 편지에 써서 보냈으며, 홍국영의 사촌 동생이 얽혀 있는 듯하였다.

또한 하동에는 250살이라고 하는 도인 이현성(李玄晟)이 있어서, 군사를 일으킬 방향을 지시하고, 500년 된 사슴과 400년 된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녹정(鹿精)과 웅정(熊精)이 있다고 했다. 녹정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은 말기에 셋으로 갈라져 100여 년간 싸우다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다. 통일할 사람은 정가(鄭哥) 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 싸움은 나주(羅州)에서 먼저 일어난다. 유가(劉哥), 이가(李哥), 구가(具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거사하여 반정(反正)할 텐데, 거사 시기는 을사년 7, 8월이 아니면 병오년 정월이나 2월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이용의 증언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도인이니 진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정감록」과 「진정비결(眞淨秘訣)」의 전복적 내용이 비밀스럽게 퍼져나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대도독 등의 자리에 올려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했다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왔다. 왕은 전국의 지방관들에게 이 사건을 면밀히 수사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군사 조직은 실상이 없는 허무한 것들이었다.

왕은 이율을 심문하고는, 대대로 녹을 먹던 집안의 후손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며 능지처참을 선고하였다. 일종의 본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신앙은 늘 조정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역모사건으로 번져나갔다..

“대북의 잔당이 관직에 제수되었단 이야기를 듣다”

계암일록, 김령, 1631-04-05

1631년 4월 5일, 날은 맑은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예안 현감이 안부를 묻는 편지를 꿩 한 마리와 함께 보내왔다. 그리고 조보를 함께 보내주었는데, 안동 부사 홍명구가 어제 예안현에 들렀을 때 가져다준 것이라 하였다. 조보에는 가도의 소식과 함께 새로운 인사 소식이 실려 있었다.

어제 홍명구에게 가도의 반란 수괴 유흥치가 부하의 손에 죽었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보에는 그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유흥치가 자기의 어미를 오랑캐 진중에 인질로 보내어 연합을 맹세하였는데, 그것이 발각되면서 부하들이 심하게 동요한 듯하였다. 그의 부하 중 심세구, 장도라는 자들이 6-7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흥치와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들 중 장도가 임시로 유격장이 되었는데, 조보에는 그가 글도 잘하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반란 수괴 유흥치가 죽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 가도의 새 수장이 되었으니, 서쪽 변방의 근심은 조금 풀리지 않겠는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실린 인사 소식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박경범이란 자가 가평 군수가 되었는데, 이 박경범은 과거 대북의 잔당이었다. 그는 대북 중에서도 골수였는데, 반정 이후에 죄를 면한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군수란 자리는 목민관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 자리인데,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폐조의 신하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히다니! 과연 이 나라의 인사권자들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막을 살펴보니, 원주 목사인 이영도가 이조 판서인 정경세에게 천거하여 박경범을 천릉의 감역관으로 삼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인사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평 군수로 낙점된 듯하였다. 정경세란 자는 남인들 사이에서도 중망이 있는 인사였는데, 이렇듯 망령된 인사를 자행하다니, 김령은 심히 실망스러웠다.

“선산에서 익명서 사건이 발생하다”

계암일록, 김령, 1628-10-08

1628년 10월 8일, 어제 오전에 류시원과 종조카 김광철이 왔다. 김광철이 어제 선산에서 돌아왔는데, 선산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산의 아전이 익명서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기로 한 8명의 이름이 쓰여 있고, 그중 안동부사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김령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틀림없이 부사를 증오하고 원망하여 예측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세상이 말세여서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이 사건을 선산부사 신광립이 감사에게 보고했다 하던데, 감사는 벌써 조정에 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들으니, 안동의 심부사가 익명서 변고 때문에 관직을 사직하려 한다고 한다. 이 사건이 극히 무리하다는 것은 아주 조금의 식견만 있어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심부사는 비록 청렴성과 조심성은 모자란 사람이지만, 천성이 너그러워 주변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백성들에게 세금 거두는 것도 예안현감처럼 각박하지 않아서, 지난번에는 삼수량을 면포로 바꾸어 납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가격도 면포 4필당 쌀 1석씩으로 쳐주어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긴 바 있었다. 볼만한 치적이 있는 수령인데도 이런 불측한 일로 수령직을 내놓으려 하고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했다.

“변란에 발을 담근 왕족을 처벌하라”

김령, 계암일록,
1624-03-18 ~ 1624-05-10

1624년 3월 18일, 반정공신 이귀는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차자(箚子)를 올려 난중 그의 10가지 죄를 스스로 헤아려 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믿고 임금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인성군(仁城君)을 벌하도록 청한 것이었다. 이귀는 그 뒤로도 세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섞어 인성군을 치죄할 것을 청했다.

3월 29일, 임금은 이에 대해 “경의 말이 지극히 잘못되었다. 의혹을 분별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비답을 내려 그의 청을 거절했다.

5월 10일, 이귀는 세 차례의 차자로 인성군을 공격하고는, 심지어 갑옷 입은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그의 집을 에워쌌다. 이에 정 부제학이 인성군의 결백을 고하는 차자를 올렸다가 이귀에게 배척을 당해 강상(江上)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임금은 이귀와 정부제학에게 화해하라고 하였지만, 부제학은 곧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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