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정용연)
“시상에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당게.”
아버지는 술이 거나해지면 어김없이 전쟁 이야기를 하셨다.
1950년. 아버지 나이 스무 살 때다.
전쟁 개시 보름 만에 마을로 쳐들어온 인민군은
인공기를 내건 뒤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고 한다.
논과 밭이 몇 마지기인지 세는 것은 물론,
곡식이 얼마나 산출되는지 조사하였다.
조사가 얼마나 꼼꼼한지 목화솜이 몇 송이인지
일일이 세게 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목화 다래조차 함부로 먹어선 안 되었다.
그렇잖아도 놀란 가슴을 더 놀라게 한 건 논두렁에 나있는 콩을 세라는 지시였다.
이 많은 콩을 어찌 셀 것인가?
마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악독한 지주라도 논두렁의 콩은 건드리지 않는 게
오랜 세월 내려온 불문율이었던 것이다.
인민군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완전한 혁명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인민재판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으로 분류된 이들을 처형했다.
마을에서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두 명이 죽어나갔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은 현지에서 병력을 조달하였다.
마을 청년들 상당수가 의용군으로 끌려 나갔다.
아버지는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낮에는 뽕나무밭에 숨고
밤에는 마루 밑에 엎드려 숨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출처: 정용연)
문제는 전쟁이 끝난 뒤 불거졌다.
입산자(入山者)로 몰려 처형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순사였고, 해방 이후 경찰로 변신한 외삼촌을 찾아가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더하여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군 입대를 서둘렀다.
어머니 또한 전쟁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졌다.
외할머니는 장사를 나갈 수 없었고 어머니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었다.
송첨지 댁 머슴 창식이는 인민군을 따라나섰고
산지기 황 씨는 부역자로 몰려 총살을 당했다.
마을 공기가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멀리서 사람 그림자만 봐도 두려움에 발길을 돌렸다.
이십 대 중반 ‘하데스의 밤’이란 단편만화로 데뷔를 했지만 나는 후속작을 낼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스토리를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도 진부하단 소리만 들었다.
하늘은 왜 내게 이야기꾼으로서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원망했지만 소용없었다.
한계에 부딪힌 나는 서른 무렵 만화를 포기했다.
더 이상 만화는 내 삶에 없었다.
생활인으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귀소본능을 가진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언제부터인가 발걸음은 만화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할 이야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무엇이라도 그려야 했기에 부모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를 우리만화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우리만화》에 실었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석 달이 지나자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라며 편집자로부터 그만두라는 전화가 올까 싶었지만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전쟁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 삶의 변곡점이 된 사건들을 반드시 그려야 했다.
죽고 죽이는 이야기가 칸을 메우고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작업 기간 내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는 아버지 말씀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 결과가 《정가네소사》 1·2·3권이다.
(출처: 정용연)
《정가네소사》를 출간하고 몇 개월 지난 뒤다.
한 출판사로부터 제주 4·3에 대한 책을 한 권 그려 달라 의뢰를 받았다.
계약금이 입금되자마자 제주도로 가 4·3유적지 곳곳을 돌아보며 4·3에 관한 책을 읽었다.
이후 스토리를 한 권 분량 썼지만 출판사 반응은 떨떠름했다.
다시 써오란 것이다.
도저히 더 잘 쓸 자신이 없어 계약금을 돌려주며 없던 일로 하였다.
대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목호의 난’이었다.
4·3에 비견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교과서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역사 마니아라 자부하던 나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마침 만화무크지 《보고》가 창간되었고
연재 제안을 받은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목호의 난을 그리기 시작했다.
(출처: 정용연)
목호의 난은 기존에 발생했던 난과는 성질이 달랐다.
원·명교체기 이민족인 몽골과 결부된 난이었다.
1273년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완전 진압된 뒤
몽골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두어 말 생산 기지로 삼는다.
연간 1,500명 가량의 말사육사가 주둔하는데
이들은 제주 원주민과 혼인을 통해 유대가 깊어진다.
그렇게 세대를 거듭하다 100년이 지나선 일체화되기에 이른다.
고려에선 이들을 기를 목(牧) 오랑캐 호(胡)자를 써 ‘목호’라 불렀다.
반원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공민왕에게 제주는 기필코 수복해야 할 땅이었다.
그리하여 관리를 제주에 파견하지만 가는 족족 죽임을 당한다.
그 사이 원을 몰아내고 중원의 패자로 등장한 명나라는 고려에게 말 2,000필을 바치라 한다.
고려로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명을 대적하기엔 국력의 차이가 너무나 컸다.
이에 고려는 목호에게 말 2,000필을 바치라 요구하지만 300필을 바치는 것에 그친다.
공민왕에게 목호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였다.
반드시 빼내야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최영(崔瑩)을 도통사로 삼고
전선 314척에 25,000 병력을 제주에 실어 보낸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할 때 동원했던 병력의 두 배였다.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호는 항복하지 않았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 일관된 그들의 태도다.
섬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붉은 피가 들판을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살육 대상은 목호에 그치지 않았다.
어린아이와 여자들 그리고 노인까지 고려군의 손에 죽어나갔다.
당시 제주 인구의 반 가까이 목숨을 잃었으니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4·3과 닮은꼴이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고려 편을 들기보다는 제주 원주민과 목호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제주 원주민에겐 고려나 몽골이나 매한가지로 외부세력일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목호에게 제주는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온 땅이었다.
끝 닿을 데 없이 치닫는 갈등.
그 속에서 피어난 고려여자 버들아기와 몽골남자 석곡리보개의 사랑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닌 평화였다.
원고는 시작한 지 6년이 지나 《목호의 난 1374 제주》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가족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린 작품이 《목호의 난 1374 제주》였다면
《친정 가는 길》은 남자 작가로서 여자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린 작품이다.
(출처: 정용연)
주인공은 양반가 첫째 며느리인 송심과 둘째 며느리인 숙영이다.
이들은 동서지간으로 사이가 좋다.
하지만 성격은 각기 달라 첫째 며느리인 송심은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반면
숙영은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남자 종과 함께 달아나 서북 땅에 정착한 숙영은 금광으로 큰돈을 번다.
서북 땅은 본디 중앙 정부로부터 차별을 받아왔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벼슬다운 벼슬이 주어지지 않았다.
(출처: 정용연)
몰락 양반 홍경래(洪景來)는 조정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규합하며 세를 불려 나간다.
나는 실재 역사와 달리 홍경래를 혁명적인 사상가로 설정하여
여성의 사회 진출을 적극 주장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혁명에 성공하면 숙영은 관직에 오를 것이었다.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혁명은 실패했고 홍경래와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숙영의 남편 역시 지도부와 운명을 같이 한다.
정부군이 여자는 살려줄 때, 숙영은 훗날을 기약하며 살아남는 길을 택한다.
작품은 미완성으로 1권이 출간돼 있는 상태다.
언젠가 시간을 내 어지러웠던 정주성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그릴 것이다.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명칭을 달리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누구는 혁명이라 일컫고 누구는 난이라 일컫는다.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을 쓴
한말의 지식인 매천 황현(黃玹)은 동학도들을 줄곧 동비라고 하였다.
조정은 물론 지배 계급인 양반들 모두 황현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무리이기에 발본색원하여 씨를 말려야 했다.
(출처: 정용연)
동록개는 내 고향 김제에 살던 백정으로 동네개로 불렸다.
동네개가 변하여 동록개가 된 것이다.
천하디 천한 백정 신분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 집을 지었고 그 집을
금구 대접주인 김덕명에게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며 바친다.
집은 동학혁명 당시 집강소로 쓰이며 주민자치제의 기원이 된다.
동록개는 문헌에는 기록되지 않고 입으로만 전하는 인물이다.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가 바친 집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집강소 건물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집이 언제 지어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있는 《백정 동록개》는 동학혁명보다 집 짓는 과정에 집중한다.
비록 차별받는 삶이었지만 그렇다고 삶이 마냥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맛보았던 삶의 고통과 기쁨을
컷과 컷 그리고 페이지로 연결해 그려나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 210쪽 분량을 완성했고 100여 쪽을 더 그려 완성할 계획이다.
(출처: 정용연)
평온함을 깨뜨리는 것이 난이다.
난이 일어나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가 없다.
삶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어떤 이들은 이를 기회로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한다.
얄궂지만 평온한 시대보다 어지러운 시대에 드라마가 많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국 전쟁 등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분단국가에서 태어나 군사독재시절을 지나왔다.
누군가가 흘린 피와 땀으로 민주화를 이루었고 덕분에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어두운 역사다.
근래 난이란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과거 어두운 시간으로 회귀할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현명한 국민들은 이를 잘 막아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하루빨리 지금의 혼란이 정리되어 평온한 일상이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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