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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난리 통에 죽은 귀신을 달래다


〈1700년대 제작한 《도성도(都城圖)》의 일부분. 여제를 지내는 여단이 보인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망허촌의 사또 한익범은 한양 조정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지난달에 발생했던 역병을 달래기 위한 여제(厲祭)를 지내라는 공문이 온 것이다. 역병은 세책방 낭자의 활약으로 다 물리쳤는데 그 내용을 담은 장계(狀啓)가 도착하기 전에 여제를 올리는 결정이 내려져 내려온 모양이었다. 역병이 없으니 굳이 여제를 지낼 필요는 없다는 내용의 장계를 다시 올려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걸 올리는 사이에 다시 조정에서 공문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그냥 시키는 대로 여제를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이 마을에서 지내보니,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라 여제를 올리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기도 했다.

“에이, 고민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예방을 들라 해라.”

한 사또는 예방을 불러다 여제를 지내는 문제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에, 저…저희는 작은 고을이라 여제단이 없습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제사인지라 사실 제단부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여제를 올리는 것에 대해 물어보자 예방이 납작 엎드렸다.

“하긴 지내본 적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그, 그렇습니다. 소인이 듣기로는 『오례의(五禮儀)』에 제단의 형태에 대해서 나온다는 말이 있던데, 그 책을 가지고 있진 않사옵니다.”

“오호, 그래. 책이 있다? 그럼 그 책을 구하면 되겠구만.”

한 사또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로 행차하시려고 하십니까? 어느 양반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가요?”

“흠, 흠.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짚이는 곳이 있네. 알겠으니 물러가게.”

예방을 물리친 한 사또는 얼른 의관을 챙겨 동헌을 나섰다. 당당히 찾아가 볼 건수가 생겼으니 세책방의 목금 낭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이명기(李命基, 1756~1813)가 그린 《허목 초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리 오너라.”

세책방 대문 앞에 서서 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렀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목금의 얼굴이 쏙 나왔다.

“어머나, 사또 나리 오셨어요.”

목금이 나와서 인사를 올렸다. 한 사또는 이 가게에는 왜 늘 올 때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어디 출타하셨느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좀 됐습니다.”

“실례되는 이야기였구나. 미안하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행차하셨는지요?”

“이건 비밀인데, 조정에서 여제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왔다. 문제는 나도 그렇고, 예방도 그렇고 여제를 지내 본 적이 없어서 아는 게 없네. 우선 제단 만드는 문제부터 잘 몰라서 책을 좀 찾아볼까 싶어서 오게 되었지.”

목금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는 입을 열었다.

“여제단에 대한 내용은 미수 대감(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책 『기언(記言)』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단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면 몰라도 이번은 역귀 때문에 지내라 하신 별제이니 굳이 제단을 쌓지 않아도 될 겁니다.”

목금의 말에 한 사또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옳거니, 좋은 말이다. 그럼 제사는 어디서 지내야 하겠느냐?”


〈안동시 묵계리에 있는 성황당〉 (출처: 김태욱의 문화재가 있는 풍경)


“여제는 본래 성황신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성황단에서 하면 됩니다. 다만 우리 고을에는 성황단도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고을 입구의 큰 느티나무 앞에 서낭당이 있으니 임시방편으로 그곳에서 별여제를 지내면 될 것 같습니다.”

“서낭당이라... 내가 부임할 때 딱히 가옥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집이 있는 건 아니고 느티나무 주위에 금줄을 둘러놓았는데, 마을에선 거길 서낭당이라 부릅니다.”

“그럼 거기에 상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된다는 건가?”

“맞습니다. 성황위 위패를 가운데 놓고 왼쪽에는 병기에 맞아 횡사한 자, 수적과 화적에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 당해 죽은 자, 누명을 쓰고 형벌에 죽은 자,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병에 죽은 자의 여섯 신위를 놓습니다. 또 오른쪽에는 맹수와 독충에게 해를 입은 자, 굶주려죽거나 얼어 죽은 자, 전쟁에서 죽은 자, 위급함을 당해 자살한 자, 담에 깔려 죽은 자, 사후 자손이 없는 자의 여섯 신위를 놓습니다. 경우에 따라 번개를 맞아 죽은 자와 난산으로 죽은 자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나라에서는 제물로 양 세 마리와 돼지 세 마리를 쓰는데 우리 고을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돼지 한 마리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목금의 자세한 설명에 한 사또가 새삼 감탄하였다.

“잘 알겠다. 그리고…”

한 사또가 머뭇거리다 말을 삼켰다.

“아니, 됐다. 고맙다.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으마.”

“사또 나리가 하시는 일에 일개 백성이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목금이 눈을 내리깔며 인사를 하자 한 사또의 심장이 갑작스레 방망이질을 쳤다. 얼굴로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 같아 한 사또는 급히 뒤로 돌아 세책방을 빠져나왔다.


〈강원도 인제군에서는 1901년 소실된 중앙단을 2001년에 복원하였다.
중앙단은 조선시대 각 도의 중앙에서 여제를 지낸 곳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새벽녘도 아닌 오후인데 집 밖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웬 안개지?”

하지만 겨울철에는 이렇게 갑자기 운무(雲霧)가 생기기도 하는 일이라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점점 이상해지고 말았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길이 끝나질 않았다.

“여기가…어디지?”

한 사또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혼잣말을 내뱉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대답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누구냐?”

“원통히 죽었는데 후손마저 없어 제삿밥 한번 먹지 못하니 기운이 없어 구천에 가지도 못한 불쌍한 혼령이옵니다.”

한 사또는 소름이 쫙 끼쳤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어쩌다 죽었단 말인가?”

안개가 옅어지면서 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더러운 누더기 상의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관복을 입은 사내에게 찔려 죽었죠. 그저 산길을 넘던 소금장수였는데 난데없이 염탐꾼이라 하며 다짜고짜 죽이고 말았습죠.”

누더기 옷 사내 뒤에는 벙거지에 전복을 입고 장창을 손에 든 사내가 있었다. 사내가 장창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사또께서 여제를 올려 우리의 배를 채우고 우리의 원통함을 대신 하늘에 고해 구천으로 갈 길을 열어주실진대, 네놈은 무슨 불만이 있어서 이렇게 징징 대는 거냐?”

누더기 옷 사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일 셈이냐?”

“죽었는데 뭘 또 죽여? 나는 너 같은 놈은 본 적도 없다. 나도 너처럼 억울하게 죽어서 구천에 못 가고 있는 귀신일 뿐이야. 그리고 나도 너처럼 병사 손에 죽었지.”

한 사또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흠흠, 그럼 너는 어쩌다 죽었단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난리가 났다 하여 장군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싸우라고 해서 싸우다 보니 서로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창칼을 휘두르고 활을 날렸을 뿐입죠.”

“어? 그럼 나랑은 다른 건데? 나는 평서대원수를 따른다는 작자에게 죽었는데...”

“평서대원수가 누구여? 나도 평안도 난리에 휩쓸려 죽긴 했는데,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 부하에게 죽었던가...”


[화력조선 시네마] "정주성" 1811년 홍경래의 난 최후의 전투   더보기
〈홍경래의 난은 18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 4월까지 정주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홍경래의 난 최후의 전투를 영화화한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 시네마 《정주성》〉
(출처: 국립진주박물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한 사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보니, 거기 백성은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역적의 수하에게 억울하게 죽었고, 너는 역적 이괄(李适)의 부하로 반역에 동참했다가 죽었구나. 너 같은 놈을 위해서 여제를 지낼까보냐!”

병사가 흠칫 놀라는 듯했다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오호, 잘 나신 사또님의 말씀이 그런 거구려. 역적 놈 밑에 있다 죽은 놈은 원귀가 되어 떠돌면서 사람을 해쳐도 된다는 허락이오?”

“뭣이라? 이 놈이 감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병사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듯했다.

“들어라, 이 풋내기 사또 놈아. 나는 먹을 것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하고 죽어라 논밭 일하다가 군역이 떨어져 저 북방으로 끌려갔다. 집에 형편이 되면 군포를 내고 아니 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집에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저 추운 곳에서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오랑캐 때문에 무서워 밤에 오줌을 지리며 살다가 난데없이 병마절도사가 한양으로 진군한다는 명에 끌려 나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단 거냐?”

병사는 이미 반쯤은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악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또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이 불학무식하다 해도 임금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북방을 지켜야 할 병사가 남쪽으로 창칼을 돌려 한양으로 간다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먹는 게 당연하다. 순순히 반역의 명을 따랐다는 것은 반역에 한 발 집어넣어 뭔가 수가 나길 바랐다는 것이지.”

악귀가 된 병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맞다. 나 같은 무지렁이 백성이 신분을 상승할 기회라는 것이 반역 말고 뭐가 있었겠느냐? 바보 같은 이괄 놈 밑에 있던 것이 잘못이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사귀신(無祀鬼神)이 되었는데, 나를 천도할 의무를 저버리는 네놈은 이괄과 뭐가 다르냐?”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 감로왕도(順天 仙巖寺 西浮屠庵 甘露王圖)》에 묘사된 두 명의 아귀(餓鬼, 배고픈 귀신)아귀는 수륙재(水陸齋)에서 감로를 먹고 극락왕생하게 된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무사귀신이란 후계자가 없는, 즉 제사를 받들 후손이 없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한 사또도 악귀의 말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저 혼령이 저지른 잘못은 살았을 때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벌로 청산된 셈이었다. 이제 저 혼령이 무사귀신이 되어 악귀로 변해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대신 제사 지내주는 것은 사또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과 출신인 한 사또는 이치가 그렇다고 해도 반역도의 안식을 바란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질 않았다.

“보아하니 너도 아직 젊은 몸이라 후사가 없는 모양이니, 무사귀신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지 직접 느껴보게 해주마!”

악귀는 갑자기 몸이 두 배로 커지더니 그대로 한 사또를 덮쳤다. 한 사또가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재빨리 칼을 뽑아내 악귀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감히 사또에게 덤벼들다니!”

분명히 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검은 악귀는 갈라지는 듯하더니 몸이 더 커져서 다시 한 사또에게 덮쳤다. 칼로 내리칠 때마다 점점 더 몸집을 불리더니 이제는 아예 서낭당의 느티나무만 해졌다.

“이런...”

한 사또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사람이 악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젠 끝장이구나 싶었을 때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며 악귀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사또 나리, 무사하세요?”

달려온 사람은 목금이었다. 그 옆에 백이도 함께 있었다.

“목금 낭자, 백이 낭자! 여긴 위험하니 빨리 물러서라.”

“이젠 위험하지 않아요.”

목금이 말했다.

“저 괴물은 ‘그슨대’라는 악귀에요. 어둠 속에서 살지요. 사람들이 살기를 보내면 그걸 받아먹고 더 커져요.”

“그럼 갑자기 왜 줄어들…”

한 사또는 그제야 백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 속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았다. 바구니 안에는 백이가 자기네 집 아궁이에서 키우는 양수지조(陽燧之鳥) 불돌이가 들어있었다.

“그슨대는 빛이 있어야 쫓아낼 수 있어요.”


〈양산 《통도사 건륭40년명 현왕탱(通度寺 乾隆四十年 現王幀)》.
현왕탱은 사람이 죽은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현왕여래와 그의 권속을 묘사한 불화이다.〉
(출처: 통도사 성보박물관)


그슨대의 탈이 벗겨지자 창을 든 병사가 다시 나타났다. 병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신인(神人)을 몰라 뵙고 허튼 짓을 했습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이미 죽은 귀신이 살려달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목금이 사또의 소매를 살짝 당기고는 말했다.

“사또 나리께서 죽음에 구분을 두신 모양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죽기 전에 어땠는지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살아서 행위는 염라대왕이 알아서 벌을 내리든 상을 내리든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승에 가야 하겠지요. 저들이 저승에 가지 않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아무 죄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사또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낭자 말이 맞다. 이미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죄를 물으려 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건 염라대왕에게 맡기고 나는 우리 고을 백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여긴 어디고, 어찌 알고 온 건가?”

목금이 대답했다.

“백이가 소녀 집으로 오다가 사또 나리가 관아가 아니라 망허산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하여 걱정이 되어 찾으러 왔습니다.”

“내가 또 신세를 지었구나. 정말 고맙다.”

한 사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목금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일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진주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저상일월, 박한광·박득녕·박주대·박면진·박희수·박영래 등, 미상

1862년 2월 29일, 올해는 봄부터 각처에서 화재가 일고, 역병 또한 곳곳마다 돌았다. 진주에서는 백성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시초는 토지 1결당 관아에서 배정하는 역 때문이었는데, 본래 큰 부담이 아니었던 결역이 근년에 이르러서는 해마다 대여섯 배, 많게는 일곱 여덟 배로 늘어나자 백성들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성난 진주 백성들이 군수와 영장, 아전들을 결박하고 모두 살해하였다고 한다.

인근 고을 사람들도 집집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무리를 모았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8천 명이라고도 하고 8만 명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흰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었는데, 곧바로 관아를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또 민들은 영장, 이속들을 마당에 끌어내어 결박하였는데, 이 때문에 관아에 속한 사람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자, 다른 지방에서도 민들이 부호가에 몰려가 불을 질렀으며 관아에 쳐들어가 수령, 이속, 영장들을 결박하고 불을 질렀다.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임명하여 진주 지방으로 급파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성난 민심이 들불같이 일어나 박규수도 차마 관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배회했다고 한다.

몇 십 년간 수령들의 침학이 지속되더니, 결국 터질 일이 터지고 만 셈이다. 박득녕은 민란의 책임이 썩은 관리들에게 있음을 통감하였다. 한편 민란의 불길이 예천까지 번지면, 우리 집안은 무사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되었다.

“정감록을 믿다가 역모에 연루된 사람들”

노상추일기, 노상추,
1785-03-23 ~ 1785-03-24

끔찍한 날이었다. 노상추를 비롯한 문무백관은 서수문 밖에 차례로 늘어서 역모를 꾀한 죄인 이율(李瑮)이 능지처참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다. 다음날에는 술사 주경채(朱絅采)가 모래밭에서 목이 베였다. 이율을 역모죄로 고발한 것은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었다. 그는 현재 관직이 없었기에 전 판서 김종수(金鍾秀)와 훈련대장 구선복(具善復)을 통해 조정에 역모를 알렸다.

김이용은 자신의 사촌이 이율과 친하게 지냈기에 자신도 그와 교제하였으나, 이율이 가진 불순한 사상들 때문에 오래 가까이 지내기는 꺼려졌다고 미리 선을 그으면서 그의 불순한 사상에 대해 왕에게 진술하기 시작하였다. 이율이 어느 날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사주팔자를 잘 보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에 김이용은 이율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사주팔자를 점쳐달라고 하였다. 이율이 가져온 김이용의 사주풀이는 ‘이 사주팔자는 마땅히 사업(事業)이 있을 것이다. 10년 동안 쭈그리고 고생하다가 하루아침에 제후로 봉해지게 된다. 흉악한 해(害)가 사방으로 이를 것이니, 남방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김이용은 제후로 봉해지는 것은 무엇이며, 흉악한 해는 또 무엇이냐고 이율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율은 “제후로 봉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상한 사람의 말을 들으니, 내년 이후에는 도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날 것인데, 북쪽의 도적들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는 나라가 장차 셋으로 갈라진다고 하니, 나는 장차 가족을 데리고 일찌감치 난리를 피하려고 한다.”라고 대답하였다.

김이용은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고 물었지만 이율에게 답을 들을 수는 없었고, 하동에 갔을 때 유가(劉哥), 정가(鄭哥), 김가(金哥) 세 사람이 난리가 난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들과 연관이 있는 듯한 양(梁)씨 성을 가진 사람은 서울에 살면서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한다.’, ‘잔악한 것들을 없앤다.’ 등 《수호지(水滸志)》에 나오는 송강(宋江)의 말을 편지에 써서 보냈으며, 홍국영의 사촌 동생이 얽혀 있는 듯하였다.

또한 하동에는 250살이라고 하는 도인 이현성(李玄晟)이 있어서, 군사를 일으킬 방향을 지시하고, 500년 된 사슴과 400년 된 곰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녹정(鹿精)과 웅정(熊精)이 있다고 했다. 녹정이 말하기를 ‘동국(東國)은 말기에 셋으로 갈라져 100여 년간 싸우다가 비로소 하나로 통합된다. 통일할 사람은 정가(鄭哥) 성을 가진 사람이고, 그 싸움은 나주(羅州)에서 먼저 일어난다. 유가(劉哥), 이가(李哥), 구가(具哥) 성을 가진 세 사람이 거사하여 반정(反正)할 텐데, 거사 시기는 을사년 7, 8월이 아니면 병오년 정월이나 2월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이용의 증언 이외에도 전국적으로 도인이니 진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관련자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정감록」과 「진정비결(眞淨秘訣)」의 전복적 내용이 비밀스럽게 퍼져나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여기저기에서 자신을 대도독 등의 자리에 올려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했다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왔다. 왕은 전국의 지방관들에게 이 사건을 면밀히 수사하도록 지시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군사 조직은 실상이 없는 허무한 것들이었다.

왕은 이율을 심문하고는, 대대로 녹을 먹던 집안의 후손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하며 능지처참을 선고하였다. 일종의 본보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정감록」 신앙은 늘 조정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역모사건으로 번져나갔다..

“대북의 잔당이 관직에 제수되었단 이야기를 듣다”

계암일록, 김령, 1631-04-05

1631년 4월 5일, 날은 맑은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예안 현감이 안부를 묻는 편지를 꿩 한 마리와 함께 보내왔다. 그리고 조보를 함께 보내주었는데, 안동 부사 홍명구가 어제 예안현에 들렀을 때 가져다준 것이라 하였다. 조보에는 가도의 소식과 함께 새로운 인사 소식이 실려 있었다.

어제 홍명구에게 가도의 반란 수괴 유흥치가 부하의 손에 죽었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보에는 그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유흥치가 자기의 어미를 오랑캐 진중에 인질로 보내어 연합을 맹세하였는데, 그것이 발각되면서 부하들이 심하게 동요한 듯하였다. 그의 부하 중 심세구, 장도라는 자들이 6-7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흥치와 그의 형제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이들 중 장도가 임시로 유격장이 되었는데, 조보에는 그가 글도 잘하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반란 수괴 유흥치가 죽고 의리를 아는 인물이 가도의 새 수장이 되었으니, 서쪽 변방의 근심은 조금 풀리지 않겠는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실린 인사 소식은 기가 막힌 것이었다. 박경범이란 자가 가평 군수가 되었는데, 이 박경범은 과거 대북의 잔당이었다. 그는 대북 중에서도 골수였는데, 반정 이후에 죄를 면한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게다가 군수란 자리는 목민관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 자리인데,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폐조의 신하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히다니! 과연 이 나라의 인사권자들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막을 살펴보니, 원주 목사인 이영도가 이조 판서인 정경세에게 천거하여 박경범을 천릉의 감역관으로 삼도록 권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인사들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가평 군수로 낙점된 듯하였다. 정경세란 자는 남인들 사이에서도 중망이 있는 인사였는데, 이렇듯 망령된 인사를 자행하다니, 김령은 심히 실망스러웠다.

“선산에서 익명서 사건이 발생하다”

계암일록, 김령, 1628-10-08

1628년 10월 8일, 어제 오전에 류시원과 종조카 김광철이 왔다. 김광철이 어제 선산에서 돌아왔는데, 선산에서 큰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산의 아전이 익명서를 발견하였는데, 거기에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기로 한 8명의 이름이 쓰여 있고, 그중 안동부사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김령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틀림없이 부사를 증오하고 원망하여 예측할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러한 계획을 세운 것 같았다. 세상이 말세여서 인심이 이와 같으니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이 사건을 선산부사 신광립이 감사에게 보고했다 하던데, 감사는 벌써 조정에 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들으니, 안동의 심부사가 익명서 변고 때문에 관직을 사직하려 한다고 한다. 이 사건이 극히 무리하다는 것은 아주 조금의 식견만 있어도 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심부사는 비록 청렴성과 조심성은 모자란 사람이지만, 천성이 너그러워 주변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백성들에게 세금 거두는 것도 예안현감처럼 각박하지 않아서, 지난번에는 삼수량을 면포로 바꾸어 납부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가격도 면포 4필당 쌀 1석씩으로 쳐주어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긴 바 있었다. 볼만한 치적이 있는 수령인데도 이런 불측한 일로 수령직을 내놓으려 하고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했다.

“변란에 발을 담근 왕족을 처벌하라”

김령, 계암일록,
1624-03-18 ~ 1624-05-10

1624년 3월 18일, 반정공신 이귀는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차자(箚子)를 올려 난중 그의 10가지 죄를 스스로 헤아려 고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공을 믿고 임금에게 몇 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인성군(仁城君)을 벌하도록 청한 것이었다. 이귀는 그 뒤로도 세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섞어 인성군을 치죄할 것을 청했다.

3월 29일, 임금은 이에 대해 “경의 말이 지극히 잘못되었다. 의혹을 분별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비답을 내려 그의 청을 거절했다.

5월 10일, 이귀는 세 차례의 차자로 인성군을 공격하고는, 심지어 갑옷 입은 병사들까지 동원하여 그의 집을 에워쌌다. 이에 정 부제학이 인성군의 결백을 고하는 차자를 올렸다가 이귀에게 배척을 당해 강상(江上)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임금은 이귀와 정부제학에게 화해하라고 하였지만, 부제학은 곧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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