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대 제작한 《도성도(都城圖)》의 일부분. 여제를 지내는 여단이 보인다.〉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망허촌의 사또 한익범은 한양 조정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지지난달에 발생했던 역병을 달래기 위한 여제(厲祭)를 지내라는 공문이 온 것이다. 역병은 세책방 낭자의 활약으로 다 물리쳤는데 그 내용을 담은 장계(狀啓)가 도착하기 전에 여제를 올리는 결정이 내려져 내려온 모양이었다. 역병이 없으니 굳이 여제를 지낼 필요는 없다는 내용의 장계를 다시 올려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걸 올리는 사이에 다시 조정에서 공문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느니 그냥 시키는 대로 여제를 올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동안 이 마을에서 지내보니, 여긴 정말 이상한 곳이라 여제를 올리면 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되기도 했다.
“에이, 고민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예방을 들라 해라.”
한 사또는 예방을 불러다 여제를 지내는 문제에 관하여 물어보았다.
“에, 저…저희는 작은 고을이라 여제단이 없습니다.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제사인지라 사실 제단부터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여제를 올리는 것에 대해 물어보자 예방이 납작 엎드렸다.
“하긴 지내본 적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그, 그렇습니다. 소인이 듣기로는 『오례의(五禮儀)』에 제단의 형태에 대해서 나온다는 말이 있던데, 그 책을 가지고 있진 않사옵니다.”
“오호, 그래. 책이 있다? 그럼 그 책을 구하면 되겠구만.”
한 사또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로 행차하시려고 하십니까? 어느 양반가에 있다는 이야기가 있던가요?”
“흠, 흠.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짚이는 곳이 있네. 알겠으니 물러가게.”
예방을 물리친 한 사또는 얼른 의관을 챙겨 동헌을 나섰다. 당당히 찾아가 볼 건수가 생겼으니 세책방의 목금 낭자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 이명기(李命基, 1756~1813)가 그린 《허목 초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리 오너라.”
세책방 대문 앞에 서서 소리를 높여 사람을 불렀다. 문이 빼꼼 열리더니 목금의 얼굴이 쏙 나왔다.
“어머나, 사또 나리 오셨어요.”
목금이 나와서 인사를 올렸다. 한 사또는 이 가게에는 왜 늘 올 때마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버지는 어디 출타하셨느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좀 됐습니다.”
“실례되는 이야기였구나. 미안하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행차하셨는지요?”
“이건 비밀인데, 조정에서 여제를 올리라는 명이 내려왔다. 문제는 나도 그렇고, 예방도 그렇고 여제를 지내 본 적이 없어서 아는 게 없네. 우선 제단 만드는 문제부터 잘 몰라서 책을 좀 찾아볼까 싶어서 오게 되었지.”
목금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는 입을 열었다.
“여제단에 대한 내용은 미수 대감(허목(許穆), 1595~1682)이 쓴 책 『기언(記言)』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단을 세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리면 몰라도 이번은 역귀 때문에 지내라 하신 별제이니 굳이 제단을 쌓지 않아도 될 겁니다.”
목금의 말에 한 사또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옳거니, 좋은 말이다. 그럼 제사는 어디서 지내야 하겠느냐?”
〈안동시 묵계리에 있는 성황당〉 (출처: 김태욱의 문화재가 있는 풍경)
“여제는 본래 성황신께 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성황단에서 하면 됩니다. 다만 우리 고을에는 성황단도 따로 있지는 않습니다. 대신 고을 입구의 큰 느티나무 앞에 서낭당이 있으니 임시방편으로 그곳에서 별여제를 지내면 될 것 같습니다.”
“서낭당이라... 내가 부임할 때 딱히 가옥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는데?”
“집이 있는 건 아니고 느티나무 주위에 금줄을 둘러놓았는데, 마을에선 거길 서낭당이라 부릅니다.”
“그럼 거기에 상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된다는 건가?”
“맞습니다. 성황위 위패를 가운데 놓고 왼쪽에는 병기에 맞아 횡사한 자, 수적과 화적에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 당해 죽은 자, 누명을 쓰고 형벌에 죽은 자,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병에 죽은 자의 여섯 신위를 놓습니다. 또 오른쪽에는 맹수와 독충에게 해를 입은 자, 굶주려죽거나 얼어 죽은 자, 전쟁에서 죽은 자, 위급함을 당해 자살한 자, 담에 깔려 죽은 자, 사후 자손이 없는 자의 여섯 신위를 놓습니다. 경우에 따라 번개를 맞아 죽은 자와 난산으로 죽은 자를 추가하기도 합니다. 나라에서는 제물로 양 세 마리와 돼지 세 마리를 쓰는데 우리 고을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돼지 한 마리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목금의 자세한 설명에 한 사또가 새삼 감탄하였다.
“잘 알겠다. 그리고…”
한 사또가 머뭇거리다 말을 삼켰다.
“아니, 됐다. 고맙다. 내가 이 은혜는 꼭 갚으마.”
“사또 나리가 하시는 일에 일개 백성이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목금이 눈을 내리깔며 인사를 하자 한 사또의 심장이 갑작스레 방망이질을 쳤다. 얼굴로 열기가 확 올라오는 것 같아 한 사또는 급히 뒤로 돌아 세책방을 빠져나왔다.
〈강원도 인제군에서는 1901년 소실된 중앙단을 2001년에 복원하였다.
중앙단은 조선시대 각 도의 중앙에서 여제를 지낸 곳이다.〉
(출처: 오마이뉴스)
새벽녘도 아닌 오후인데 집 밖은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웬 안개지?”
하지만 겨울철에는 이렇게 갑자기 운무(雲霧)가 생기기도 하는 일이라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것이 점점 이상해지고 말았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길이 끝나질 않았다.
“여기가…어디지?”
한 사또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혼잣말을 내뱉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대답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누구냐?”
“원통히 죽었는데 후손마저 없어 제삿밥 한번 먹지 못하니 기운이 없어 구천에 가지도 못한 불쌍한 혼령이옵니다.”
한 사또는 소름이 쫙 끼쳤지만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어쩌다 죽었단 말인가?”
안개가 옅어지면서 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더러운 누더기 상의에는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관복을 입은 사내에게 찔려 죽었죠. 그저 산길을 넘던 소금장수였는데 난데없이 염탐꾼이라 하며 다짜고짜 죽이고 말았습죠.”
누더기 옷 사내 뒤에는 벙거지에 전복을 입고 장창을 손에 든 사내가 있었다. 사내가 장창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말했다.
“사또께서 여제를 올려 우리의 배를 채우고 우리의 원통함을 대신 하늘에 고해 구천으로 갈 길을 열어주실진대, 네놈은 무슨 불만이 있어서 이렇게 징징 대는 거냐?”
누더기 옷 사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일 셈이냐?”
“죽었는데 뭘 또 죽여? 나는 너 같은 놈은 본 적도 없다. 나도 너처럼 억울하게 죽어서 구천에 못 가고 있는 귀신일 뿐이야. 그리고 나도 너처럼 병사 손에 죽었지.”
한 사또가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흠흠, 그럼 너는 어쩌다 죽었단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난리가 났다 하여 장군을 따라갔을 뿐입니다. 싸우라고 해서 싸우다 보니 서로 역적이라고 부르면서 창칼을 휘두르고 활을 날렸을 뿐입죠.”
“어? 그럼 나랑은 다른 건데? 나는 평서대원수를 따른다는 작자에게 죽었는데...”
“평서대원수가 누구여? 나도 평안도 난리에 휩쓸려 죽긴 했는데,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 부하에게 죽었던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한 사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보니, 거기 백성은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역적의 수하에게 억울하게 죽었고, 너는 역적 이괄(李适)의 부하로 반역에 동참했다가 죽었구나. 너 같은 놈을 위해서 여제를 지낼까보냐!”
병사가 흠칫 놀라는 듯했다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오호, 잘 나신 사또님의 말씀이 그런 거구려. 역적 놈 밑에 있다 죽은 놈은 원귀가 되어 떠돌면서 사람을 해쳐도 된다는 허락이오?”
“뭣이라? 이 놈이 감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병사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듯했다.
“들어라, 이 풋내기 사또 놈아. 나는 먹을 것도 없는 집에서 태어나 글도 배우지 못하고 죽어라 논밭 일하다가 군역이 떨어져 저 북방으로 끌려갔다. 집에 형편이 되면 군포를 내고 아니 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 집에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저 추운 곳에서 언제 쳐들어 올지 모르는 오랑캐 때문에 무서워 밤에 오줌을 지리며 살다가 난데없이 병마절도사가 한양으로 진군한다는 명에 끌려 나왔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단 거냐?”
병사는 이미 반쯤은 사람 모습이 아니었다. 검은 악귀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또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이 불학무식하다 해도 임금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북방을 지켜야 할 병사가 남쪽으로 창칼을 돌려 한양으로 간다고 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먹는 게 당연하다. 순순히 반역의 명을 따랐다는 것은 반역에 한 발 집어넣어 뭔가 수가 나길 바랐다는 것이지.”
악귀가 된 병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맞다. 나 같은 무지렁이 백성이 신분을 상승할 기회라는 것이 반역 말고 뭐가 있었겠느냐? 바보 같은 이괄 놈 밑에 있던 것이 잘못이었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무사귀신(無祀鬼神)이 되었는데, 나를 천도할 의무를 저버리는 네놈은 이괄과 뭐가 다르냐?”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 감로왕도(順天 仙巖寺 西浮屠庵 甘露王圖)》에 묘사된 두 명의 아귀(餓鬼, 배고픈 귀신)아귀는 수륙재(水陸齋)에서 감로를 먹고 극락왕생하게 된다.〉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무사귀신이란 후계자가 없는, 즉 제사를 받들 후손이 없는 귀신이라는 뜻이다. 한 사또도 악귀의 말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저 혼령이 저지른 잘못은 살았을 때의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벌로 청산된 셈이었다. 이제 저 혼령이 무사귀신이 되어 악귀로 변해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대신 제사 지내주는 것은 사또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과 출신인 한 사또는 이치가 그렇다고 해도 반역도의 안식을 바란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질 않았다.
“보아하니 너도 아직 젊은 몸이라 후사가 없는 모양이니, 무사귀신이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운지 직접 느껴보게 해주마!”
악귀는 갑자기 몸이 두 배로 커지더니 그대로 한 사또를 덮쳤다. 한 사또가 호락호락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재빨리 칼을 뽑아내 악귀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감히 사또에게 덤벼들다니!”
분명히 해치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검은 악귀는 갈라지는 듯하더니 몸이 더 커져서 다시 한 사또에게 덮쳤다. 칼로 내리칠 때마다 점점 더 몸집을 불리더니 이제는 아예 서낭당의 느티나무만 해졌다.
“이런...”
한 사또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사람이 악귀를 상대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젠 끝장이구나 싶었을 때 갑자기 밝은 빛이 비치며 악귀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사또 나리, 무사하세요?”
달려온 사람은 목금이었다. 그 옆에 백이도 함께 있었다.
“목금 낭자, 백이 낭자! 여긴 위험하니 빨리 물러서라.”
“이젠 위험하지 않아요.”
목금이 말했다.
“저 괴물은 ‘그슨대’라는 악귀에요. 어둠 속에서 살지요. 사람들이 살기를 보내면 그걸 받아먹고 더 커져요.”
“그럼 갑자기 왜 줄어들…”
한 사또는 그제야 백이가 들고 있는 바구니 속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알았다. 바구니 안에는 백이가 자기네 집 아궁이에서 키우는 양수지조(陽燧之鳥) 불돌이가 들어있었다.
“그슨대는 빛이 있어야 쫓아낼 수 있어요.”
〈양산 《통도사 건륭40년명 현왕탱(通度寺 乾隆四十年 現王幀)》.
현왕탱은 사람이 죽은 3일 후에 받는 심판을 주재하는 현왕여래와 그의 권속을 묘사한 불화이다.〉
(출처: 통도사 성보박물관)
그슨대의 탈이 벗겨지자 창을 든 병사가 다시 나타났다. 병사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신인(神人)을 몰라 뵙고 허튼 짓을 했습니다. 부디 살려주십시오.”
이미 죽은 귀신이 살려달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목금이 사또의 소매를 살짝 당기고는 말했다.
“사또 나리께서 죽음에 구분을 두신 모양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죽기 전에 어땠는지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살아서 행위는 염라대왕이 알아서 벌을 내리든 상을 내리든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승에 가야 하겠지요. 저들이 저승에 가지 않으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아무 죄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 사또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낭자 말이 맞다. 이미 죽은 사람의 혼령에게 죄를 물으려 한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건 염라대왕에게 맡기고 나는 우리 고을 백성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겠다. 그런데 여긴 어디고, 어찌 알고 온 건가?”
목금이 대답했다.
“백이가 소녀 집으로 오다가 사또 나리가 관아가 아니라 망허산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하여 걱정이 되어 찾으러 왔습니다.”
“내가 또 신세를 지었구나. 정말 고맙다.”
한 사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목금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일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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