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한국어인 ‘집’ 또는 한자어 ‘가(家)’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마당이 있는 고향 집을, 누군가는 신축 아파트의 세련된 거실을, 또 다른 누군가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을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집’과 ‘가’, 두 낱말 모두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한 물질적 주거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집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집합, 즉 가족(家族)을 가리키기도 한다. 생활공간으로서 집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마땅히 전통 건축에 관해 공부해야 하겠지만, 생활공동체로서 집의 역사는 곧 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사람의 역사이다. 유사(有史) 이래로 어떤 형태로든 가족이 존재했으므로 가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연원을 같이 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가족의 구성이나 범위는 매우 다양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혼인과 혈연을 토대로 형성되는 공동체인데,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가족을 형성하는 관습이나 방식, 법제 등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가(家)를 단위로 묶인 집단이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가족(家族), 가문(家門), 가계(家系), 문중(門中), 문벌(門閥), 친족(親族), 혈족(血族), 혈속(血屬), 친속(親屬), 가속(家屬), 가솔(家率), 솔권(率眷), 식구(食口), 식솔(食率) 등이 있는데, 어떤 단어는 단단한 울타리에 묶인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단어는 느슨한 끈과 같이 이어진 관계, 곧 ‘연(緣)’의 확장을 강조하기도 한다.
『풍산류씨세보』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창령이씨족보묘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가족’은 주거 공간인 ‘가(집)’를 같이한다는 의미도 내포할 때가 많다. ‘식구’는 말 그대로 한솥밥을 먹는 사이이고, 여기에 거느린다는 뜻의 ‘솔(率)’이 붙은 ‘식솔’도 비슷한 의미이며, 집에서 거느리는 ‘가솔’이나 돌본다는 뜻을 더한 ‘솔권’, 붙일 속[屬]이 들어간 ‘가속’도 마찬가지 뜻이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 물리적인 주거 공간인 ‘가’를 벗어난 대상까지 의미를 확장시켜 주는 글자들이 붙을 수 있다. 먼저 ‘혈족’이나 ‘혈속’, 즉 피붙이는 피로 이어진 겨레라는 뜻으로서 의미상 ‘혈연’의 의미를 더 강조하는 느낌이지만, 한집에 살지 않아도 혈연으로 연결되면 하나라는 확장된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친족’이나 ‘친속’도 ‘가’를 벗어났지만 혈연관계가 존재하는 사람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가문’이나 ‘문중’처럼 가족 관련 용어에 ‘문(門)’이 들어가게 되면, 가족 단위보다 크면서도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는 어감이 한층 강해진다. 특히 ‘문벌’은 ‘학벌(學閥)’이나 ‘재벌(財閥)’처럼 특권을 세습하는 배타적 뉘앙스가 아주 강한 용어이다. ‘친족’이나 ‘친속’, ‘가계’ 등의 용어들이 단순히 혈연 및 혼인을 통해 이어지는 폭넓은 연결망을 나타낼 뿐, 어떤 특권의 독점을 내포하지는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에서 드러나듯, 가족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서, 사회관계의 확장으로 형성되는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도 있고, 어떤 배타적인 혈연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혈연의 인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한다. 먼 조상일수록 실제 대면한 적이 없다보니 기억하기 어려워지고, 부모와 조부모를 함께하는 4촌 이내의 근친은 자연스레 알고 지내게 되지만, 같은 증조부모에게서 나온 6촌 이상의 원친(遠親)은 점차 이름과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관계의 실감도 옅어지게 마련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가족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간단한 계보 정보를 담은 기록은 어떤 인물의 생애 기록을 담은 묘비나 행장, 일기 등 많은 글에서 확인되며, 관청에서 관리하는 호적 등 공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족보(族譜)는 가족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식화한 대표적인 가계(家系) 기록이다.
족보는 가족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기록이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출현 족보의 수록 범위는 작성자의 선택과 집중 여부에 따라 달랐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족보를 지칭할 때 주로 쓰인 용어의 차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에서 유래한 한국의 족보는 저명한 조상을 둔 수많은 친족을 망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족보(族譜)’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었고, 한편으로 족보의 표제에는 세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세보(世譜)’라는 용어도 자주 보인다. 그렇지만 족보의 범위가 특정 신분을 이어받는 소수의 가족 구성원에 국한된 일본이나 류큐(琉球) 왕국(현재의 오키나와)에서는 ‘가보(家譜)’라는 명칭이 일반적이다. 한편, 중국처럼 유교적 제향(祭享)과 가계 계승을 실현하기 위한 종법(宗法)에 따른 가족공동체가 일찍부터 발달한 사회에서는 ‘종보(宗譜)’라는 명칭이 흔히 사용되었다.
류큐 왕국의 ‘가보(家譜)’
국가에서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수리지인(首里之印)’이라는 관인이 찍혀 있고,
2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왕성(王城)인 슈리성(首里城) 안에 있는 ‘계도좌(系圖座)’라는 관청에서 관리하고,
다른 한 부는 계보를 제출한 사족(士族) 가문에서 보관하였다.
(출처: 필자 촬영 / 소장: 오키나와현 나하시립박물관)
어떤 목적이든 족보를 편찬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계보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기억의 목적이나 방식은 시대나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의 혈통적 근원과 그를 매개로 친족들을 인식하고자 한다는 근본 목적은 공통적이었다. 계보를 기억해야 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계보 기록은 왕족이나 귀족 같은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족보는 신분제 사회에서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조선시대 위조 족보가 성행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양반으로 인정받아 군역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족보는 기본적으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가족’을 위해 만든 기록이다. 지배 신분층의 국가적 관리를 위해서 관인(官印)을 찍어서 관리한 류큐의 가보와는 이런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조선의 족보 편찬자들은 어떤 신분적 우위를 인정받기 위한 목적보다는, 조상을 기억하며 제사를 올리고 뿌리가 같은 친족을 알아보며 돈독히 지내고자 하는 것을 족보 편찬의 이유로 내세웠다. 그들은 족보에 실린 수많은 사람들이 근원을 따져보면 한 사람으로 귀속되는데 귀천이 갈라지고 길 가다 마주친 남남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 족보가 처음 출현할 때는 조정의 고위 관료층에 국한되었는데 점차 모든 양반 사족을 넘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명문 양반과 한 족보에 실려 그 문벌 의식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기록으로만 인지할 수 있는 먼 친족에게까지도 소가족 내에서나 통용되던 공경과 우애라는 가족 윤리를 확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와 수(隋)·당대(唐代)에는 관리 등용에 참고하기 위한 귀족제적인 족보가 유행하다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 사대부 계층의 학문적 성취를 드러내고 향촌의 유교적 가족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도덕적 의미의 족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벌 의식과 가족 윤리를 함께 추구한 조선시대 족보는 그 전개 과정에서 현실의 가족과 상호 작용하면서 진화하고 있었다. 족보는 현실의 가족제도나 관념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족보가 이상(理想)으로 추구한 가족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 족보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족보이자 현존하는 최초의 간행본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년)는 아들과 딸의 자손을 구별하지 않고 무제한 수록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 권씨 성을 가진 인원, 즉 내손(內孫: 本孫 또는 姓孫이라고도 함)보다 성씨가 다른 외손(外孫)의 인원이 훨씬 많았고, 기존 연구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과거급제자나 관료층의 절반 이상이 실려 있을 정도였다. 이 인원들은 지배층 전반을 포괄하는 수준이라서 권씨 가문의 구성원이라는 공동체 인식을 공유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규모로 보인다. 이 족보의 편찬자들이 혈연과 혼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대하여 당시의 사회 상층부에 속해 있던 수많은 작은 가족들을 연결하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이런 족보는 특정한 가족 집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개별 가족 사이를 종횡으로 엮어주는 ‘연결망’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안동권씨성화보』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안동권씨성화보』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부계(父系)의 원리를 바탕으로 동성(同姓)만을 수록하는 방향으로 족보의 편집 방식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딸을 우리 가족이 아닌 남의 가족으로 떠나보내는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여기고 장남을 구심점으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 원리에 따라 같은 성씨를 잇는 여러 아들과 그 배우자 및 자녀로 구성된 가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성씨와 본관을 가진 동성 친족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문중(門中)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족보는 단순한 관계망의 집단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직 명부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문중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재산 상속, 상호 부조(扶助) 등 각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하는 기록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족보는 이전의 가족공동체에 비해서 큰 규모이면서도 나름의 정체성과 배타성을 띤 집단의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가 단순히 성씨·본관, 그리고 각파(各派)로 구별되는 문중 집단을 가르는 울타리 역할만 하고, 관계망의 확장 기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실은 조선 후기 족보에도 수많은 타성(他姓), 즉 다른 문중과 연결점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실려 있다. 족보에는 여전히 성씨가 다른 사위들이 딸의 자리에 실리고 있었고, 다른 문중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의 기록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상세해졌다. 이들은 여러 성씨 문중을 연결해 주는 계보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더 큰 네트워크를 형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 족보에서 타성의 외손을 무제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을 대신하여, 조선 후기 족보에서는 성씨가 달라지는 사위-외손 계보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해당 족보를 찾아서 열람하라는 일종의 참조 표시를 달아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인터넷에서 웹 문서끼리 서로 연결해 주는 링크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개별 성씨 족보는 단일 족보로서 완결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성씨 족보와 연결되어야만, 하나로 엮인 가족 관계 빅데이터를 담은 자료군(資料群)으로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의 「수곡집(壽谷集)」에 수록된 육세보도(六世譜圖)
현재의 ‘나[己]’는 수많은 부모의 부모들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로부터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결국 가족은 ‘집단’이기도 하고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족보는 이 두 측면을 모두 품은 기록이다. 족보가 표현한 가족은 성씨별로 구축된 단단한 성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느슨하면서도 넓게 뻗은 관계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족보는 문중 집단의 명부이면서, 각 성씨는 물론 시대와 지역을 넘는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 지도’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개인의 친분이나 희망에 따른 선택보다는 혈연이나 혼인을 매개로 한다는 점이 다를 뿐, 오늘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처럼 수많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 왔다.
오늘날은 온라인으로 열람과 등재가 가능한 디지털 족보가 등장하면서 가족 네트워크는 또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국제적인 결혼과 이민,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에 힘입어 가족 네트워크와 이를 담은 가계기록은 디지털 데이터의 형태로 쉽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단일 민족처럼 인식된 한국의 족보에서도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위구르 등지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성씨들이 있다. 다만 족보의 첫 번째 조상, 즉 시조(始祖)에 대해서는 족보 외에는 교차 검증할 만한 다른 사료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인정하기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국가 간의 통혼이 빈번했던 유럽 왕가(王家)나 대륙을 넘어선 이민자의 역사로 점철된 미국 등지에서는 국경을 넘어선 가족 네트워크의 추적이 낯선 작업이 아니다. 이렇듯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족보 속에 담긴 가족의 확장은 무궁무진하다.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공작 루이 3세(재위 1568~1593년)의 가계도
부모 양쪽으로 이어지는 귀족 혈통을 표현하고 있다.(출처: 위키백과)
지난 7월 21일 ‘한국 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문화계, 역사학계, 국회의원 등 정치계 인사들 및 각 성씨 종중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출범했다. 한국 족보 중에는 아직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예가 거의 없는 실정이므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진정성과 완전성, 세계적 중요성 등의 요건을 갖춘 선본(善本)을 골라 그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별 성씨 문중의 위신이나 명예를 초월하여, 세계인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족 네트워크의 보고(寶庫)로서 한국 족보가 가진 잠재력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