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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집단인가, 네트워크인가 :
족보(族譜)가 담은 공동체

가족을 규정하는 용어


순수한 한국어인 ‘집’ 또는 한자어 ‘가(家)’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는 마당이 있는 고향 집을, 누군가는 신축 아파트의 세련된 거실을, 또 다른 누군가는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식구들을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집’과 ‘가’, 두 낱말 모두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람이 들어가 살기 위한 물질적 주거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집 안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집합, 즉 가족(家族)을 가리키기도 한다. 생활공간으로서 집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마땅히 전통 건축에 관해 공부해야 하겠지만, 생활공동체로서 집의 역사는 곧 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사람의 역사이다. 유사(有史) 이래로 어떤 형태로든 가족이 존재했으므로 가족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연원을 같이 한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가족의 구성이나 범위는 매우 다양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혼인과 혈연을 토대로 형성되는 공동체인데,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가족을 형성하는 관습이나 방식, 법제 등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가(家)를 단위로 묶인 집단이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은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가족(家族), 가문(家門), 가계(家系), 문중(門中), 문벌(門閥), 친족(親族), 혈족(血族), 혈속(血屬), 친속(親屬), 가속(家屬), 가솔(家率), 솔권(率眷), 식구(食口), 식솔(食率) 등이 있는데, 어떤 단어는 단단한 울타리에 묶인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기도 하고, 또 다른 단어는 느슨한 끈과 같이 이어진 관계, 곧 ‘연(緣)’의 확장을 강조하기도 한다.


『풍산류씨세보』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창령이씨족보묘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가족’은 주거 공간인 ‘가(집)’를 같이한다는 의미도 내포할 때가 많다. ‘식구’는 말 그대로 한솥밥을 먹는 사이이고, 여기에 거느린다는 뜻의 ‘솔(率)’이 붙은 ‘식솔’도 비슷한 의미이며, 집에서 거느리는 ‘가솔’이나 돌본다는 뜻을 더한 ‘솔권’, 붙일 속[屬]이 들어간 ‘가속’도 마찬가지 뜻이다. 이들은 모두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로서의 가족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 물리적인 주거 공간인 ‘가’를 벗어난 대상까지 의미를 확장시켜 주는 글자들이 붙을 수 있다. 먼저 ‘혈족’이나 ‘혈속’, 즉 피붙이는 피로 이어진 겨레라는 뜻으로서 의미상 ‘혈연’의 의미를 더 강조하는 느낌이지만, 한집에 살지 않아도 혈연으로 연결되면 하나라는 확장된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친족’이나 ‘친속’도 ‘가’를 벗어났지만 혈연관계가 존재하는 사람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가문’이나 ‘문중’처럼 가족 관련 용어에 ‘문(門)’이 들어가게 되면, 가족 단위보다 크면서도 폐쇄적인 집단을 의미하는 어감이 한층 강해진다. 특히 ‘문벌’은 ‘학벌(學閥)’이나 ‘재벌(財閥)’처럼 특권을 세습하는 배타적 뉘앙스가 아주 강한 용어이다. ‘친족’이나 ‘친속’, ‘가계’ 등의 용어들이 단순히 혈연 및 혼인을 통해 이어지는 폭넓은 연결망을 나타낼 뿐, 어떤 특권의 독점을 내포하지는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족과 관련된 다양한 용어에서 드러나듯, 가족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장되면서, 사회관계의 확장으로 형성되는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도 있고, 어떤 배타적인 혈연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혈연의 인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존재한다. 먼 조상일수록 실제 대면한 적이 없다보니 기억하기 어려워지고, 부모와 조부모를 함께하는 4촌 이내의 근친은 자연스레 알고 지내게 되지만, 같은 증조부모에게서 나온 6촌 이상의 원친(遠親)은 점차 이름과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관계의 실감도 옅어지게 마련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가족관계에 관한 기록이다. 간단한 계보 정보를 담은 기록은 어떤 인물의 생애 기록을 담은 묘비나 행장, 일기 등 많은 글에서 확인되며, 관청에서 관리하는 호적 등 공문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족보(族譜)는 가족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도식화한 대표적인 가계(家系) 기록이다.




족보, 계보를 기록하고 기억하다.


족보는 가족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기록이지만, 실제 역사적으로 출현 족보의 수록 범위는 작성자의 선택과 집중 여부에 따라 달랐다. 이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족보를 지칭할 때 주로 쓰인 용어의 차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에서 유래한 한국의 족보는 저명한 조상을 둔 수많은 친족을 망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족보(族譜)’라는 명칭이 보편화되었고, 한편으로 족보의 표제에는 세대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세보(世譜)’라는 용어도 자주 보인다. 그렇지만 족보의 범위가 특정 신분을 이어받는 소수의 가족 구성원에 국한된 일본이나 류큐(琉球) 왕국(현재의 오키나와)에서는 ‘가보(家譜)’라는 명칭이 일반적이다. 한편, 중국처럼 유교적 제향(祭享)과 가계 계승을 실현하기 위한 종법(宗法)에 따른 가족공동체가 일찍부터 발달한 사회에서는 ‘종보(宗譜)’라는 명칭이 흔히 사용되었다.


류큐 왕국의 ‘가보(家譜)’
국가에서 직접 관리했기 때문에 ‘수리지인(首里之印)’이라는 관인이 찍혀 있고,
2부를 작성하여 한 부는 왕성(王城)인 슈리성(首里城) 안에 있는 ‘계도좌(系圖座)’라는 관청에서 관리하고,
다른 한 부는 계보를 제출한 사족(士族) 가문에서 보관하였다.
(출처: 필자 촬영 / 소장: 오키나와현 나하시립박물관)


어떤 목적이든 족보를 편찬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계보를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기억의 목적이나 방식은 시대나 국가에 따라 다르지만, 자신의 혈통적 근원과 그를 매개로 친족들을 인식하고자 한다는 근본 목적은 공통적이었다. 계보를 기억해야 하는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계보 기록은 왕족이나 귀족 같은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았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족보는 신분제 사회에서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수단이었는데, 조선시대 위조 족보가 성행한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양반으로 인정받아 군역에서 벗어나려는 목적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족보는 기본적으로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가족’을 위해 만든 기록이다. 지배 신분층의 국가적 관리를 위해서 관인(官印)을 찍어서 관리한 류큐의 가보와는 이런 점에서 확연히 구별된다. 조선의 족보 편찬자들은 어떤 신분적 우위를 인정받기 위한 목적보다는, 조상을 기억하며 제사를 올리고 뿌리가 같은 친족을 알아보며 돈독히 지내고자 하는 것을 족보 편찬의 이유로 내세웠다. 그들은 족보에 실린 수많은 사람들이 근원을 따져보면 한 사람으로 귀속되는데 귀천이 갈라지고 길 가다 마주친 남남처럼 되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 족보가 처음 출현할 때는 조정의 고위 관료층에 국한되었는데 점차 모든 양반 사족을 넘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명문 양반과 한 족보에 실려 그 문벌 의식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뜻이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기록으로만 인지할 수 있는 먼 친족에게까지도 소가족 내에서나 통용되던 공경과 우애라는 가족 윤리를 확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우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와 수(隋)·당대(唐代)에는 관리 등용에 참고하기 위한 귀족제적인 족보가 유행하다가, 송대(宋代)에 들어와서 사대부 계층의 학문적 성취를 드러내고 향촌의 유교적 가족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도덕적 의미의 족보가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벌 의식과 가족 윤리를 함께 추구한 조선시대 족보는 그 전개 과정에서 현실의 가족과 상호 작용하면서 진화하고 있었다. 족보는 현실의 가족제도나 관념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족보가 이상(理想)으로 추구한 가족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한 매개체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전기와 후기 족보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족보이자 현존하는 최초의 간행본 족보인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1476년)는 아들과 딸의 자손을 구별하지 않고 무제한 수록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 권씨 성을 가진 인원, 즉 내손(內孫: 本孫 또는 姓孫이라고도 함)보다 성씨가 다른 외손(外孫)의 인원이 훨씬 많았고, 기존 연구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과거급제자나 관료층의 절반 이상이 실려 있을 정도였다. 이 인원들은 지배층 전반을 포괄하는 수준이라서 권씨 가문의 구성원이라는 공동체 인식을 공유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규모로 보인다. 이 족보의 편찬자들이 혈연과 혼인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범위까지 확대하여 당시의 사회 상층부에 속해 있던 수많은 작은 가족들을 연결하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이런 족보는 특정한 가족 집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개별 가족 사이를 종횡으로 엮어주는 ‘연결망’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안동권씨성화보』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안동권씨성화보』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집단과 네트워크의 경계에서 진화하는 족보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상황이 달라진다.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부계(父系)의 원리를 바탕으로 동성(同姓)만을 수록하는 방향으로 족보의 편집 방식이 점진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딸을 우리 가족이 아닌 남의 가족으로 떠나보내는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여기고 장남을 구심점으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 원리에 따라 같은 성씨를 잇는 여러 아들과 그 배우자 및 자녀로 구성된 가족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성씨와 본관을 가진 동성 친족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문중(門中)이라는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족보는 단순한 관계망의 집단이 아니라 실질적인 조직 명부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문중 내에서 이루어지는 제사, 재산 상속, 상호 부조(扶助) 등 각종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하는 기록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족보는 이전의 가족공동체에 비해서 큰 규모이면서도 나름의 정체성과 배타성을 띤 집단의 경계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가 단순히 성씨·본관, 그리고 각파(各派)로 구별되는 문중 집단을 가르는 울타리 역할만 하고, 관계망의 확장 기능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었다. 실은 조선 후기 족보에도 수많은 타성(他姓), 즉 다른 문중과 연결점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실려 있다. 족보에는 여전히 성씨가 다른 사위들이 딸의 자리에 실리고 있었고, 다른 문중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의 기록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상세해졌다. 이들은 여러 성씨 문중을 연결해 주는 계보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더 큰 네트워크를 형성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조선 전기 족보에서 타성의 외손을 무제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을 대신하여, 조선 후기 족보에서는 성씨가 달라지는 사위-외손 계보를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해당 족보를 찾아서 열람하라는 일종의 참조 표시를 달아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비유하자면 오늘날의 인터넷에서 웹 문서끼리 서로 연결해 주는 링크와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개별 성씨 족보는 단일 족보로서 완결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수많은 다른 성씨 족보와 연결되어야만, 하나로 엮인 가족 관계 빅데이터를 담은 자료군(資料群)으로서 제구실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주신(金柱臣, 1661~1721)의 「수곡집(壽谷集)」에 수록된 육세보도(六世譜圖)
현재의 ‘나[己]’는 수많은 부모의 부모들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로부터 출현했음을 보여준다.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결국 가족은 ‘집단’이기도 하고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족보는 이 두 측면을 모두 품은 기록이다. 족보가 표현한 가족은 성씨별로 구축된 단단한 성벽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느슨하면서도 넓게 뻗은 관계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족보는 문중 집단의 명부이면서, 각 성씨는 물론 시대와 지역을 넘는 거대한 ‘인적 네트워크 지도’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개인의 친분이나 희망에 따른 선택보다는 혈연이나 혼인을 매개로 한다는 점이 다를 뿐, 오늘날의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처럼 수많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 왔다.

오늘날은 온라인으로 열람과 등재가 가능한 디지털 족보가 등장하면서 가족 네트워크는 또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국제적인 결혼과 이민, 그리고 월드 와이드 웹에 힘입어 가족 네트워크와 이를 담은 가계기록은 디지털 데이터의 형태로 쉽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단일 민족처럼 인식된 한국의 족보에서도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위구르 등지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진 성씨들이 있다. 다만 족보의 첫 번째 조상, 즉 시조(始祖)에 대해서는 족보 외에는 교차 검증할 만한 다른 사료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인정하기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국가 간의 통혼이 빈번했던 유럽 왕가(王家)나 대륙을 넘어선 이민자의 역사로 점철된 미국 등지에서는 국경을 넘어선 가족 네트워크의 추적이 낯선 작업이 아니다. 이렇듯 네트워크의 관점에서 족보 속에 담긴 가족의 확장은 무궁무진하다.


독일의 뷔르템베르크 공작 루이 3세(재위 1568~1593년)의 가계도
부모 양쪽으로 이어지는 귀족 혈통을 표현하고 있다.(출처: 위키백과) 더보기


지난 7월 21일 ‘한국 족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위원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문화계, 역사학계, 국회의원 등 정치계 인사들 및 각 성씨 종중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출범했다. 한국 족보 중에는 아직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예가 거의 없는 실정이므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진정성과 완전성, 세계적 중요성 등의 요건을 갖춘 선본(善本)을 골라 그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는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별 성씨 문중의 위신이나 명예를 초월하여, 세계인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가족 네트워크의 보고(寶庫)로서 한국 족보가 가진 잠재력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집필자 소개

권기석
권기석
서울대학교에서 조선시대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 사업단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논문으로는 「조선 정조(正祖)의 족보 활용과 탕평정치 - 『양문양공외예보(梁文襄公外裔譜)』와 『모당내외손록(慕堂內外孫錄)』을 중심으로 -」, 「木活字 사용과 족보 간행의 활성화: 조선시대 족보와 중국 明·淸代 족보의 비교」, 「조선시대 용뇌(龍腦)의 의료적 활용과 유통」 등이 있다. 조선시대 족보를 주제로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동유라시아 물품 연구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6년 1월 26일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7년 1월 16일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형제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6월 14일 ~ 1636년 6월 24일

병자년의 전란을 앞둔 6월, 김광실의 집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모였다. 14일에는 둘째 아우 김광실이 용성(龍城)으로부터 왔다. 김광계는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피곤함을 잊고 아우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닷새 뒤에는 제사가 있어서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6월 19일에는 제사를 지냈고, 이 때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20일에는 제사를 하고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조카들은 모두 물러나 서원으로 갔다. 6월 23일에도 형제들끼리 손님을 치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24일에는 비로소 엉덩이를 떼고 금발(琴撥)을 만나러 함께 갔다. 그러나 금발은 마침 집에 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 대신에 김시익(金時翼)을 만나보고 왔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지낸 평화로운 한 달이었다.

“위조된 족보를 불태우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3년 12월 18일

서족들이 위조한 족보에 관한 송사가 10월 26일에 열렸다고 한다. 비록 노상추는 서울에 있느라 소장만 작성하고 송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우 노상근이 참석해서 위조한 족보들을 모두 태우라는 판결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와서 노상추와 맞선 서족들을 꾸짖어 주셨는데, 과연 꿈이 들어맞았나 보다.

노상근은 종중에서 되돌려 받아 모아놓은 집안의 족보들을 사당 앞에서 태우면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 고하였다고 한다. 그때 쓴 축문을 가져왔기에 노상추가 읽어 보았다. “유세차(維歲次) 계해년(1803) 11월 15일, 6대손 상근(尙根)이 감히 현(顯) 6대조부 선무랑 행 안기도(安奇道) 찰방 부군의 묘(墓)에 밝게 고합니다. 계사년(1773)에 불초한 후손이 무능하게 대처하여 위보가 만들어져 적서의 구별이 없어지니, 동령(動令)·세령(世寧)의 계보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종통이 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어두워진 지 32년이니 그동안 조상의 혼령도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바른 데로 돌리기를 도모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에 위보를 거둬들여 묘정(墓庭)에서 불살라버리면, 춘추의 의리가 바루어지고 선조의 영령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오늘 문란해진 종통을 크게 바로잡고 삼가 술과 과일을 올려 지극한 정을 공경히 펴면서 삼가 경건하게 고합니다.” 노상추는 이에 32년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지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6월 27일 ~ 1616년 7월 1일

1616년 6월 27일, 김택룡의 사위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는데 7월 1일에 김택룡의 두 번째 첩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28일 권근오가 또 채소[채물(菜物)]를 보내왔다.

6월 29일, 택룡은 두 번째 첩[부실(副室)]의 삼년상 제사[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7월 1일, 택룡은 두 번째 첩의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와 이서, 홍붕 등이 와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택룡의 장녀는 액(厄)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고,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 어미의 신주(神主)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1월 26일 ~ 1782년 1월 26일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04년 3월 8일 ~ 1617년 3월 19일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7년 3월 19일,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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