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도 큰 사회, 가문’이라는 주제는 나에게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 병의 술이 지역을 넘어 국가를 대표하는 술이 되기까지는 한 가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역 농민의 땀, 장인의 손끝, 소비자의 신뢰가 모두 모여야 가능하다. 안동의 논에서 수확한 쌀이 우리 손을 거쳐 술로 태어나고, 다시 지역과 세계 소비자에게 전해지는 순환 속에서 나는 ‘가문’이라는 울타리가 혈연을 넘어 사회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 가문은 3대에 걸쳐 안동소주를 빚어왔다. 할아버지 박재서 명인은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6호로 지정되어 평생 전통 증류식 소주의 맥을 지켜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술을 빚는 일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한평생을 바쳐 전통과 명예를 지켜야 하는 사명”이라고 하셨다.
3대에 걸쳐 안동소주를 빚고 있는 박재서 명인, 아들 박찬관 대표, 손자 박춘우 본부장 (출처: 필자 제공)
박재서 명인과 아들 박찬관 대표가 밑술을 만들기 위해 누룩과 고두밥을 섞고 있다. (출처: 명인안동소주)
아버지 박찬관 대표는 그 전통의 토대 위에 현대 소비자의 감각과 경영 마인드를 더해 ‘명인안동소주’를 전국과 세계에 알리셨다. 전통과 혁신, 두 단어가 한 사람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나는 대학에서 미생물학, 대학원에서 발효공학을 전공하며 과학적 기반을 쌓았다. 발효학 실험실에서 배운 이론과 데이터는 훗날 전통주 제조 공정 개선에 큰 무기가 되었다. 사회에 나아가 다양한 경험을 쌓은 뒤 2016년, 본격적으로 가업에 뛰어들었다. 현재는 전수 보조자이자 영업총괄본부장으로 연구개발과 해외 마케팅, 그리고 현장 운영을 함께 책임지고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늘 술 빚는 풍경과 함께였다. 마당 한 편에서 쌀을 씻는 소리, 고운 누룩이 익어가는 구수한 냄새, 증류기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양조장은 나에게 놀이터이자 배움터였다. 발효통 위에 올라가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술이 살아 숨 쉬고 있구나’ 하는 호기심을 느꼈다.
방학이 되면 양조장에서 쌀을 나르고 술독을 닦았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은 술 한 병이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그리고 장인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몸으로 체득한 것이었다.
안동소주를 만들기 위한 덧술을 담그고 발효하는 항아리 (출처: 명인안동소주)
그러나 가업이 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장의 변화, 경기 침체, 소비 트렌드의 급변은 언제나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때로는 ‘전통’이라는 두 글자가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문이 지켜온 이름과 가치는 그 무게를 이겨낼 이유이기도 했다.
가업을 잇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오랜 세월 양조장에서 생산을 책임지던 공장장님이 쓰러지셨고, 나는 단숨에 생산 전 과정을 맡게 되었다. ‘도와주는 손’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 된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환풍 시설 작동을 깜빡한 채 장시간 작업하다가 실신했던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양조장 내 안전 장비를 대폭 보강했고, 모든 공정에 2인 1조 원칙을 도입했다. 발효실을 지하로 옮겨 온습도 관리를 체계화하고, 온도 센서를 통한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도 구축했다.
이 경험을 통해 전통 제조 과정에 현대적 안전·품질관리 체계를 결합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통 계승’임을 깨달았다. 전통과 현대 기술은 결코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보완해 더 나은 품질로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명인안동소주의 핵심은 500년 역사의 ‘3단사입법’이다. 세 번에 걸쳐 누룩과 원료를 나누어 넣어 발효시키는 이 방식은 술맛의 깊이와 향을 극대화한다. 100% 안동산 쌀과 좋은 물이 그 바탕이 된다. 은은한 곡향과 누룩향이 어우러진 부드럽고 깊은 풍미는 이 공정 덕분이다.
명인안동소주 제조방법 (출처: 명인안동소주)
나는 여기에 현대 기술을 접목했다. 기존의 상압식 직접 증류에서 감압식 간접 증류로 개선하여 불필요한 탄내를 제거하고, 곡향과 발효 향을 온전히 살렸다. 숙성 기간 역시 1년 이상으로 유지하여 술의 부드러움과 풍미를 한층 끌어올렸다.
발효 온도와 기간, 증류 방식의 미세 조정은 모두 과학적 데이터와 경험이 결합 된 결과이다. 이는 ‘전통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가 느끼는 맛의 균형과 완성도를 높이는 길이었다.
전통을 지킨다는 것은 변화를 경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전통이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호흡하며 미래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마케팅과 브랜딩에도 변화를 시도했다. SNS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젊은 세대 취향을 반영한 패키지 디자인, 전통주와 어울리는 푸드 페어링 제안이 그 예이다. 병 모양과 라벨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한정판 제품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선보였을 때 준비 물량이 전량 완판되었다. 현재 카카오톡 선물하기, 주요 오픈마켓을 통해 20~30대 소비자가 안동소주를 쉽게 접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술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주를 통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경험하고 있다.
젊은 세대의 취향을 반영한 명품안동소주의 패키지 디자인 (출처: 필자 제공)
해외 시장 개척은 나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이다. 경상북도청과 안동소주협회가 함께 스코틀랜드를 방문해 위스키의 본고장에서 시음회를 열었다. 처음엔 다소 생소해하던 현지인들이 시음 후 “한국에도 이런 술이 있구나”라며 놀랐고, 곡향과 깊이를 극찬했다. 시음회 이후 영국 현지 바와 레스토랑에서 판매 문의가 이어졌다. K-팝과 한류 문화에 관심이 깊은 현지 소비자들의 반응은 안동소주의 세계화 가능성을 확신하게 했다. 현재는 세계인에게 친숙한 위스키 타입의 ‘오크통 숙성 안동소주’를 개발하고 있다. 프랑스산·국산 오크통을 활용해 5년 이상 숙성한 40도 제품, 기존 안동소주와 블렌딩 해 가볍게 숙성한 25도 제품, 두 가지 버전을 준비 중이다. 목표는 서양 소비자에게 익숙한 풍미를 제공하면서도, 안동소주의 전통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오크통에서 숙성 중인 안동소주 (출처: 필자 제공)
경북대학교 국제인재개발원 외국인 학생들이 명인안동소주 체험장에서 안동소주를 맛보고 있다.
(출처: 필자 제공)
술은 한 사람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소비자들이 전통주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통해 자신의 ‘맛과 향’을 발견하길 바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남과 비교하거나 사회의 기준에만 맞추기보다, 각자의 리듬과 취향에 맞춰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것. 그것이 내가 가업을 이어오며 배운 삶의 철학이다.
나에게 가문은 단순히 혈연이 아니라, 그 안에 축적된 가치와 책임이다. 전통을 지키되 시대의 변화에 귀 기울이며, 명인안동소주를 한국을 넘어 세계 무대에서도 당당히 소개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전통을 품고, 시대와 호흡하는 술을 만들고자 한다. 안동소주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는 날까지,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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