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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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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무대나 영화, 매체에서 자주 다뤄지는 가족은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보다는 대안 가족이 주를 이룬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구성원으로 진입하지 못하거나 탈락당했거나 애당초 없었거나, 스스로 거부했거나 등 다양한 이유로 본래의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혈연으로 주어진 가족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관계를 통해 가족처럼 혹은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를 형성하곤 한다.

하지만 조선시대가 배경이 되면 대안 가족이 끼어들 여지는 많지 않다. 있는 가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생존이기 때문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그랬다. 영화 《최종병기 활》(2011)은 화려한 액션으로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지만 굵은 줄거리만 보자면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둘만 남은 오누이의 이야기다. 역적 가문이라 앞날이 먹칠한 듯 컴컴했던 그들이지만 누이를 연모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들이 혼인을 올리던 그날, 여동생이 청군에게 납치를 당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행군하는 그들을 쫓는 것은 가족의 마지막 편린인 동생을 찾기 위해 나선 오빠다. 그가 쓰는 무기도 세상 떠난 부친의 유품이었던 활이다. 활은 아버지이자 그의 뒷배인 가족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가족의 상봉은 필연이다.


영화 《최종병기 활》 포스터 (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


서울시극단에서 2024년에 공연한 연극 《퉁소소리》(2024)는 1621년(광해군 13년) 조위한이 써서 펴낸 소설 『최척전』이 원작이다. 고선웅이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2025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백상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작품은 원작을 최대한 담으면서 현대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가족에게로”다. 가족에게로 향하는 길을 막거나 가족을 떨어트리는 것은 언제나 전쟁이다.


조위한의 『최척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극 《퉁소소리》 2024년 포스터 (출처: 서울시극단) 더보기


주인공 옥영은 공부하러 그의 이웃을 찾아온 최척에게 반하여 그에게 편지를 건넨다. 과거를 준비하던 최척은 옥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만 옥영과의 혼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옥영을 나이 많고 권세 높은 부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옥영 모친을 넘어 약혼을 하긴 했는데 혼인을 앞두고 최척은 덜컥 징발되어 전쟁에 나가게 된다.

최척을 처음 옥영과 떼어놓은 전쟁은 정유재란이다. 그가 전쟁에 나가 소식이 끊긴 사이에 옥영의 모친은 얼른 옥영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최척이 돌아오면서 둘은 극적으로 혼인을 하고 첫아들 몽석을 낳는다.


연극 《퉁소소리》 공연 장면 (출처: 세종문화회관) 더보기


이제부터 ‘평범’하게 사나 싶었지만 남원이 함락되면서 옥영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조부가 맡아주었던 몽석은 행방불명이 되고 최척은 명나라 장수 여유문에게 이끌려 중국으로 가게 된다.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가족들은 이때부터 서로를 향한다. 아니 사실 이 지점부터 이 작품은 최척전이 아니라 옥영전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최척이 어쨋거나 중국에서 자리를 잡고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남장하고 잡혀가 남자로 오인을 받은 옥영은 그 이후 일본 어선에서 노예살이를 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자신의 일본인 주인과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가 될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진심을 인정받는다. 그러는 내내 옥영은 한 번도 자신의 성별을 들키지 않고 남자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한두 달도 아니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르지만 옥영은 매일매일 가족을 떠올리며 최척이 읊어주었던 시를 읊는다. 무역을 위해 안남까지 내려갔던 옥영은 거기에서 또 시를 읊고 마침 그곳에 상선을 몰고 왔던 최척은 아내의 시를 듣자 대뜸 퉁소를 꺼내 불기 시작한다. 그 곡조를 알아들은 옥영은 소리 높여 남편을 부르고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이역만리 타국인 안남(베트남)에서 재회한다. 각자 잡혀갔던 중국과 일본이 아니라 제3국에서 만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연극 《퉁소소리》 공연 장면 (출처: 세종문화회관) 더보기


다시 만나 다시 가족이 된 두 사람은 중국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최척을 따라 중국에서 살면서 아들 몽선을 낳는다. 이들은 차남 몽선이 장성하여 장가를 들 때까지 중국에서 잘 살아간다. 그리고 몽선이 혼인하겠다고 데리고 온 연인은 조선에 간 이후 소식이 끊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홍도다. 이 집안의 남자들은 대대로 의견이 뚜렷한 여성을 만나는 징크스라도 있는지 한없이 나긋나긋한 몽선에 비해 몽선과 혼인하겠다는 홍도는 장군감이다.

홍도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파병되었던 아버지 진위경을 언젠가는 꼭 찾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조선에서 온 몽선에게 관심을 두고 사랑에 빠진 여성이다. 몽선은 꼭 조선인에게 장가 보내겠다고 생각했던 옥영과 최척이지만 홍도의 진심에 둘을 혼인시킨다. 비록 첫아들을 잃었고 조선에 아버지를 두고 왔어도 옥영과 최척은 둘이 함께 하는 곳이 집이라 여기며 몽선과 홍도를 돌보지만 이들에게 또 한 번 전쟁이 다가온다.

다 늙은 최척이 중국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다시 징집당하는데 그는 명나라 군으로 출정했지만 명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최척은 청나라의 포로가 되는데 그곳에서 신세 한탄을 하다가 신세 한탄 배틀을 벌이게 되는 같은 조선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어렸을 때 전쟁통에 부모에게서 떨어졌다는 그의 장남 몽석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두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탈출하여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할 명분이 생겼는데, 이런 두 사람이 울고 웃으며 재회하는 것을 다 들은 사람은 같은 조선인 출신의 경비병이다. 그의 도움으로 탈출한 두 사람은 중국에는 더 있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조선으로 내달린다.

그러는 사이에 중국에 남은 옥영은 아들인 몽선과 홍도에게 이제는 중국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명나라의 신하로 살아온 최척이 청나라로 바꾼 중국에서 살아갈 수 없을 터라고. 옥영의 판단은 늘 위기에서 빛을 낸다. 옥영은 전쟁통인 육로를 피해 바닷길을 택한다. 중국 배를 만나면 중국 배인 척, 일본 배를 만나면 일본 배인 척하는 데, 이때 빛을 발하는 것이 지난날 배워두었던 옥영의 일본어 실력이다. 천신만고 끝에 조선에 당도한 옥영과 아들 며느리는 지난날 조선에서 살았던 집으로 내닫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편인 최척과 죽은 줄 알았던 장남 몽석을 만다는데 재회는 이게 다가 아니다. 배탈이 심하게 난 최척에게 지나가던 중국인이 침을 놔주는데, 이 중국인이 바로 오래전 임진왜란 때 파병되어 조선을 떠돌던 홍도의 아버지 진위경이다.

마치 세익스피어의 끝이 좋으면 다 좋다처럼 헤어진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인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한 삼백 년은 산 듯한 노인이다. 그는 자신이 바로 최척이라며 이 모든 이야기는 틀림없이 사실임을 보증한다. 그의 등 뒤로 지나간 모든 인물들이 등장하며 《퉁소소리》는 막을 내린다.


연극 《퉁소소리》 공연 장면 (출처: 세종문화회관) 더보기


최척이 공연히 능력을 인정받아 명나라 관리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동안 가족을 잃지 않겠다고, 잃어버린 가족을 찾겠다고 국경을 몇 개라도 넘고 배를 만들어 바닷길이라도 마다 않고 항해를 떠나는 결단력은 옥영의 것이다. 애당초 옥영은 자신의 모친이 제시하는 길을 순순히 걷지 않고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 인물이다. 옥영과 최척이 벌이는 초반의 낯간지럽고 뜨거운 연애사는 이후 벌어지는 이별과 만남, 이별과 만남의 끈질긴 집념의 근거를 보여준다.

옥영의 집은 자신의 가족이 있는 곳이다. 중국에서 최척과 함께 지내며 아들을 낳고 살았으며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최척이 전장으로 끌려가자 그 집을 미련 없이 버린다. 정세 파악도 수준급이다. 자신의 손으로 꾸린 자신만의 가족은 며느리를 얻으며 더 확장된다. 그리고 옥영의 이 집념이 며느리의 잃어버린 가족까지 한자리에 모으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집이란 땅과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다. 때로 가족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상처를 입힌다. 상처를 입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이라면 깊이 상처 입을 이유가 없다. 가족이란 사랑하여 상처를 주지만 그 상처를 감싸안는 존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최고 드라마틱한 가족 상봉사를 그리는 《퉁소소리》는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 수상 기념으로 올해 9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다시 공연된다.


연극 《퉁소소리》 2025년 포스터 (출처: 서울시극단) 더보기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밤새도록 뮤지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6년 1월 26일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7년 1월 16일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형제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6월 14일 ~ 1636년 6월 24일

병자년의 전란을 앞둔 6월, 김광실의 집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모였다. 14일에는 둘째 아우 김광실이 용성(龍城)으로부터 왔다. 김광계는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피곤함을 잊고 아우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닷새 뒤에는 제사가 있어서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6월 19일에는 제사를 지냈고, 이 때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20일에는 제사를 하고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조카들은 모두 물러나 서원으로 갔다. 6월 23일에도 형제들끼리 손님을 치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24일에는 비로소 엉덩이를 떼고 금발(琴撥)을 만나러 함께 갔다. 그러나 금발은 마침 집에 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 대신에 김시익(金時翼)을 만나보고 왔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지낸 평화로운 한 달이었다.

“위조된 족보를 불태우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3년 12월 18일

서족들이 위조한 족보에 관한 송사가 10월 26일에 열렸다고 한다. 비록 노상추는 서울에 있느라 소장만 작성하고 송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우 노상근이 참석해서 위조한 족보들을 모두 태우라는 판결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와서 노상추와 맞선 서족들을 꾸짖어 주셨는데, 과연 꿈이 들어맞았나 보다.

노상근은 종중에서 되돌려 받아 모아놓은 집안의 족보들을 사당 앞에서 태우면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 고하였다고 한다. 그때 쓴 축문을 가져왔기에 노상추가 읽어 보았다. “유세차(維歲次) 계해년(1803) 11월 15일, 6대손 상근(尙根)이 감히 현(顯) 6대조부 선무랑 행 안기도(安奇道) 찰방 부군의 묘(墓)에 밝게 고합니다. 계사년(1773)에 불초한 후손이 무능하게 대처하여 위보가 만들어져 적서의 구별이 없어지니, 동령(動令)·세령(世寧)의 계보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종통이 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어두워진 지 32년이니 그동안 조상의 혼령도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바른 데로 돌리기를 도모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에 위보를 거둬들여 묘정(墓庭)에서 불살라버리면, 춘추의 의리가 바루어지고 선조의 영령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오늘 문란해진 종통을 크게 바로잡고 삼가 술과 과일을 올려 지극한 정을 공경히 펴면서 삼가 경건하게 고합니다.” 노상추는 이에 32년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지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6월 27일 ~ 1616년 7월 1일

1616년 6월 27일, 김택룡의 사위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는데 7월 1일에 김택룡의 두 번째 첩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28일 권근오가 또 채소[채물(菜物)]를 보내왔다.

6월 29일, 택룡은 두 번째 첩[부실(副室)]의 삼년상 제사[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7월 1일, 택룡은 두 번째 첩의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와 이서, 홍붕 등이 와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택룡의 장녀는 액(厄)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고,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 어미의 신주(神主)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1월 26일 ~ 1782년 1월 26일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04년 3월 8일 ~ 1617년 3월 19일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7년 3월 19일,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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