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가)라는 글자는 단순히 한 채의 집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家는 하루하루의 삶이 포개지는 따뜻한 공간이자 기억과 역사가 축적된 사회적 그물망입니다. 어린 시절 마당을 가득 메웠던 웃음소리와 저녁 밥상머리의 온기를 품은 장소가 家라면, 한편으로 家는 핏줄과 성씨로 이어진 거대한 흐름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삶을 보듬는 안식처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기초 단위로서 家는 공동체와 전통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쌓이면서 家는 한층 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전란과 이주로 흩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며 쌓아온 그리움, 오랜 풍습 속에 이어져 온 가문의 이름과 기억, 그리고 시대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하는 가족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이 家라는 한 글자 안에 스며 있습니다. 家는 때로는 생존의 방식으로, 때로는 그리움의 이름으로, 그리고 늘 곁을 지키는 중력처럼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번 웹진 〈담談〉 9월호는 ‘家’라는 한 글자를 주제로 여섯 명의 필진이 작품들을 풀어놓았습니다. 한 지붕 아래 여섯 식구가 각각 다른 것처럼 모두 역시 다채롭고 풍성합니다.
권기석의 글은 조선시대 족보에 담긴 가족 개념의 변화와 확장을 조망합니다. 족보는 단지 혈통을 정리한 문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 속에서 집단이자 네트워크로서의 ‘가족’을 구성한 살아 있는 기록물이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문중 중심의 폐쇄적 성격이 강화되었지만 동시에 여러 가문과 성씨를 잇는 다층적 연결망으로의 기능도 유지하고 있었음을 짚어냅니다.
박춘우 본부장은 ‘명인안동소주’의 3대 계승자로서 가업을 지키는 일을 ‘혈연을 넘어 사회와 연결된 책임’이라 표현합니다. 전통은 단지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장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실천이며 가문이 지켜온 가치는 새로운 시대에도 계속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는 전통 제조 방식에 현대적 품질관리와 마케팅을 더해 전통주를 세계로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시장의 변화와 소비 트렌드의 급변 속에서 ‘전통’이라는 두 글자는 때로 무거운 짐이지만, 가문이 지켜온 이름과 가치가 그 무게를 버텨낼 이유라고 말합니다.
서은경의 웹툰 ‘독 선생전’ 18화 「아내의 묘지명」에서는 엄격하던 선비가 아내의 묘지명을 통해 마음을 드러내고 자식들은 그 글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묘지명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사별한 가족을 잇는 감정의 끈이며 그 글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은 다시금 가족 전체를 감싸 안습니다. 이처럼 가족은 사랑과 슬픔을 기억하고 나누는 정서 공동체이자 시간을 건너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웹툰은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수진은 연극 「퉁소소리」를 통해 ‘집으로의 귀환’을 향한 끈질긴 가족의 여정을 그립니다. 전쟁과 이별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家가 단지 혈연이나 주거의 의미를 넘어 함께 하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연극은 절절하고도 힘 있는 대답을 건넵니다.
이문영의 소설 ‘백이와 목금’ 「입후立後 대소동」은 자손이 없으면 후계를 위해 양자를 드리는 전통인 '입후(立後)'를 소재로 혈연 계승을 둘러싼 가족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그립니다. 또한 도깨비 소년을 양자로 들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가족이 혈연에만 갇힌 틀을 넘어 관계와 책임, 정서로 이어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가문을 잇는 일’이란 단지 제도나 형식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마음과 결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권지은은 ‘스토리테마파크’에 담긴 김광계의 「매원일기」를 통해 17세기 예안 사족가의 삶을 다각도로 조망합니다. 집은 학당, 사당, 병상, 서고, 회합소의 기능을 모두 지녔고 구성원들은 책을 같이 말리고 조보를 함께 읽으며 공적·사적 삶을 엮어냈습니다. 가족은 지식과 윤리, 감정과 의례를 동시에 나누는 작은 사회였고 일기는 그 삶을 하나의 윤리적 공동체로 엮어낸 살아 있는 증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매원일기」는 家를 통해 사회를 배우는 교과서입니다.
家란 결국 개인을 둘러싼 작은 이야기를 넘어서 집단의 기억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 집안의 족보에 기록된 이름들은 살아 숨 쉰 시간의 목록이며 세대를 관통해 흘러온 기억의 강줄기이기도 합니다. 가족은 그 강물을 받아 오래도록 간직하고 때로는 새로운 물줄기를 더해 흘러가게 만듭니다. 할아버지의 삶이 아버지를 거쳐 아들에게 이어지고 어머니의 사랑이 딸과 손녀에게 전해지듯 家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어 우리를 시간 속에 연결해 줍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옛말처럼 家는 우리 존재의 근간이 되는 힘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형태나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家의 본질은 끝없이 모습을 바꾸면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고 되살아납니다. 가족이라는 인연은 고난과 격변 속에서도 우리 마음을 붙잡아주는 중력이며 새로운 희망으로 자신을 다시 만들어가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기억을 품은 집이자 시간을 건너는 다리로서 家는 앞으로도 우리 삶의 중심에 흔들림 없이 자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이번 웹진 <담談> 9월호은 따뜻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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