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6년 1월 26일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7년 1월 16일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형제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6월 14일 ~ 1636년 6월 24일
병자년의 전란을 앞둔 6월, 김광실의 집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모였다. 14일에는 둘째 아우 김광실이 용성(龍城)으로부터 왔다. 김광계는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피곤함을 잊고 아우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닷새 뒤에는 제사가 있어서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6월 19일에는 제사를 지냈고, 이 때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20일에는 제사를 하고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조카들은 모두 물러나 서원으로 갔다. 6월 23일에도 형제들끼리 손님을 치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24일에는 비로소 엉덩이를 떼고 금발(琴撥)을 만나러 함께 갔다. 그러나 금발은 마침 집에 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 대신에 김시익(金時翼)을 만나보고 왔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지낸 평화로운 한 달이었다.
“위조된 족보를 불태우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3년 12월 18일
서족들이 위조한 족보에 관한 송사가 10월 26일에 열렸다고 한다. 비록 노상추는 서울에 있느라 소장만 작성하고 송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우 노상근이 참석해서 위조한 족보들을 모두 태우라는 판결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와서 노상추와 맞선 서족들을 꾸짖어 주셨는데, 과연 꿈이 들어맞았나 보다.
노상근은 종중에서 되돌려 받아 모아놓은 집안의 족보들을 사당 앞에서 태우면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 고하였다고 한다. 그때 쓴 축문을 가져왔기에 노상추가 읽어 보았다. “유세차(維歲次) 계해년(1803) 11월 15일, 6대손 상근(尙根)이 감히 현(顯) 6대조부 선무랑 행 안기도(安奇道) 찰방 부군의 묘(墓)에 밝게 고합니다. 계사년(1773)에 불초한 후손이 무능하게 대처하여 위보가 만들어져 적서의 구별이 없어지니, 동령(動令)·세령(世寧)의 계보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종통이 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어두워진 지 32년이니 그동안 조상의 혼령도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바른 데로 돌리기를 도모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에 위보를 거둬들여 묘정(墓庭)에서 불살라버리면, 춘추의 의리가 바루어지고 선조의 영령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오늘 문란해진 종통을 크게 바로잡고 삼가 술과 과일을 올려 지극한 정을 공경히 펴면서 삼가 경건하게 고합니다.” 노상추는 이에 32년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지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6월 27일 ~ 1616년 7월 1일
1616년 6월 27일, 김택룡의 사위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는데 7월 1일에 김택룡의 두 번째 첩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28일 권근오가 또 채소[채물(菜物)]를 보내왔다.
6월 29일, 택룡은 두 번째 첩[부실(副室)]의 삼년상 제사[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7월 1일, 택룡은 두 번째 첩의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와 이서, 홍붕 등이 와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택룡의 장녀는 액(厄)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고,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 어미의 신주(神主)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1월 26일 ~ 1782년 1월 26일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04년 3월 8일 ~ 1617년 3월 19일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7년 3월 19일,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