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셨습니까?”
백이가 아버지 정 진사의 부름에 사랑채로 왔다.
“그래, 들어오너라.”
정 진사가 곰방대를 탁탁 털며 말했다. 사랑채 안에는 어머니도 와 있었다.
“흠흠, 이제 너도 슬슬 시집갈 나이가 되고 있으니…”
“아직 멀었습니다!”
깜짝 놀란 백이가 아버지 말을 잘라먹었다.
“소녀, 나이 이제 열다섯입니다. 아직 시집갈 나이는 아닙니다!”
“어허, 누가 들으면 내일 시집가는 줄 알겠구나.”
“그, 그러시면…”
백이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시집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네…”
백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입후(立後)를 해야 하겠구나.”
입후. 후계자를 세운다는 말, 즉 양자를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 진사에게 자식이라고는 여아인 백이 밖에 없으니,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판이었다.
「입후성문(入後成文)」, 전의이씨 영해 동애후손가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입후명문(入後明文)」, 영주 선성김씨 무송헌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그런데 아버님은 3대 독자신데…”
정 진사는 3대 독자였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집안의 재산은 고스란히 아들로 물려져서 이렇게 대부호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그런데 네 현숙부(고조 할아버지의 동생)에게 자손들이 있어서 네 종숙부 집에 아들이 둘 있더구나. 둘째를 우리 집 양자로 들이면 어떨까 한다. 올해 나이 열두 살이라 하니, 네가 잘 보살펴 주면 될 듯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생각이나 마나 사실은 결정된 사안을 통보하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백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땀 흘려 쌓아놓은 재산이 저 먼 고조할아버지에서 갈라진 집안의 남자아이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이상하기만 했지만 그게 나라의 법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는 내 핏줄이니, 시집갈 때 크게 재산을 챙겨줄 것이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열두 살이면 아직 어린아이니, 지금부터 정을 두면 네가 시집간 뒤에도 친정이 건재하여 네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하긴 그랬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친정이 남아있겠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친정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시집가지 않고 평생 부모님과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도 양반가에서는 쉽지 않은 데다가 데릴사위야말로 생판 남인 거니까 차라리 고조할아버지의 후손을 양자로 들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양자가 온다고?”
목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넌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안 하셔?”
“응? 나?”
“그래, 너도 외동딸이잖아.”
“난 시집 안 걸 건데?”
“뭐야?”
“그냥 세책방 지키다가 죽을 거야. 귀찮게 시집은 왜 가?”
“그 귀찮은 거 나는 가고?”
“넌 양반이잖아. 난 상민이고.”
“얼씨구? 네가 언제 양반 대접은 해 준 적이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목금이 히죽 웃었다.
“아아, 그래, 그래. 아가씨, 이제 남동생을 보시게 되었네요. 경하드리옵나이다.”
백이가 닭살 돋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주먹을 꽉 쥐고 목금에게 을러댔다.
“죽을래?”
“살래!”
목금이 혀를 날름 내밀고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거기 안 서!”
백이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목금을 잡으러 따라나섰다.
“어허! 이게 무슨 경거망동이냐?”
“앗, 아버지…”
백이가 우뚝 멈춰서서 인사를 올렸다.
“오늘 재선이 오는 날이니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아, 오늘이었죠?”
“가서 얌전히 있어라. 처음 보는 동생한테 못나 보이는 누나 되지 말고.”
동생 오는데, 왜 얌전히 있어야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백이는 아버지 말에 따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재선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쩌다 이리 늦었느냐? 아이가 피곤하겠구나.”
돌쇠가 머리를 조아렸다.
“오다가 이상하게 길을 잃었습니다. 수백 번 다닌 망허산 고개인데 참 이상하게 처음 가는 곳처럼 낯설더라고요.”
“모자란 놈 같으니! 재선이는 괜찮으냐?”
“도련님은 무사합니다.”
“배고파!”
나귀 위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툴툴댔다.
“허허, 그놈 기운차구나.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우선 밥부터 먹자.”
재선이는 기운찬 정도가 아니었다. 밥상을 받자 반찬들을 그냥 손으로 덥석 잡아서 먹기 시작했다. 정 진사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좀 더 나이가 든 첫째를 입후할 것을 그랬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앗, 뜨거.”
재선이는 밥도 맨손으로 집었다가 뜨겁다고 난리를 쳤다.
“이 녀석아! 너는 수저 쓰는 법도 모르느냐?”
정 진사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수저? 수저?”
“숟가락과 젓가락 말이다.”
이거 어쩌다 반편이를 떠맡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게 말하지.”
재선이는 숟가락으로 밥을 한입 가득 퍼서 넣었다. 하지만 반찬은 여전히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정 진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채 밖에서 살그머니 안쪽을 훔쳐보고 있던 백이도 그 모습에 아버지랑 똑같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완전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였다. 열두 살이 아니라 일곱 살도 안 돼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
“뭐야? 문안 인사를 안 왔어?”
재선이는 아침에 문안 인사도 드리러 오질 않았다. 앞으로 가문을 책임질 종손이 되어야 하는데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백이는 더는 못 참겠다 싶어서 재선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야, 자냐? 나 누난데, 들어간다!”
그렇게 고함을 치는데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진짜 들어간다!”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어서, 백이는 정말로 댓돌로 올라서서 방문을 확 밀어서 열어버렸다.
“어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만 얌전히 펼쳐져 있을 뿐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삼월아, 삼월아!”
백이가 큰소리로 하녀를 불렀다. 동갑내기 삼월이가 얼른 달려왔다.
“아씨, 부르셨어요?”
“재선이는 어디 갔느냐?”
“모, 모르는데요?”
삼월이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방에 빗자루가 있던데? 청소하고 나온 거 아니냐?”
싸리빗자루,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내창마을 살림살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아니에요. 저는 아침밥 짓느라 이쪽은 얼씬도 안 했는 걸요.”
“뭐야? 그럼 이 자식 어딜 간 거야?”
행랑채에 있는 돌쇠도 아무도 대문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 빗장이 그냥 걸려 있잖아요. 사람이 나가면 밖에서 빗장을 걸 수는 없죠.” 맞는 말이었다.
사라진 재선이는 해가 진 뒤에야 나타났다. 어느 틈에 돌아왔는지 방문을 스르륵 밀고 마당으로 내려선 것이다.
“야, 재선아!”
집안의 기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백이가 큰소리로 새 동생을 불렀다.
“왜?”
“너, 아침에 문안 인사도 안 드리고 어딜 간 거야?”
“아무 데도 안 갔는데?”
“점심때도 없어 놓고 무슨 거짓부렁이야?”
“점심때도 아무 데도 안 갔는데?”
버르장머리만 없는 게 아니라 거짓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이었다. 백이는 더 상대할 수가 없어서 쪼르르 사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파양해야 해요.”
정 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아이가 오자마자 파양한다고 할 수 있느냐. 아직 어려서 예의범절을 못 배운 모양이니 며칠만 말미를 줘보자꾸나.”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재선이는 코끝 하나 보이질 않았다. 마침 목금이 놀러 왔기에 백이는 목금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낮에 없어진다고?”
“그래! 지금도 없어. 가볼래?”
백이가 목금을 데리고 재선의 방에 갔다. 목금은 방구석에 세워져 있는 싸리 빗자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싸리빗자루,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살림살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빗자루, 너희 집 거 아닌데?”
백이가 까르르 웃었다.
“넌 우리집 빗자루도 다 아냐?”
“너, 가서 불돌이 좀 데려와.”
불돌이는 망허산에서 데려온 양수지조(陽燧之鳥)다. 불길 속에서 살고 불길을 뿜어낸다. 지금은 백이네 구들장 밑에서 살고 있다.
목금이 이런 말을 하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 백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후다닥 나가서 불돌이를 불러왔다.
목금이는 방문을 꼭꼭 닫더니 빗자루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안 튀어나오면 확 불 질러 버린다. 여기 양수지조 불돌이가 와 있거든.”
“목금아, 뭐라는 거야? 거기 누가 있어?”
백이가 보기엔 목금이가 벽을 보고 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빗자루가 꿈틀하고는 부풀어 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로 변해버렸다.
“재, 재선이?”
“히히, 누나, 나야.”
목금이 팔을 허리에 올리고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너, 이놈, 아직도 장난질이야? 본 모습으로 안 돌아가?”
“헤헤.”
재선이는 다시 펑 소리를 내더니 공중에 둥둥 뜬 불덩이가 되었다.
“이, 이게 뭐야?”
백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은 너희 양자가 아니야. 망허산에 사는 도깨비야.”
“그, 그럼 저건 도깨비불?”
“도깨비는 낮에는 자기 본체로 변하거든. 이놈은 사람이 오래 쓰던 싸리 빗자루야. 밤에는 재선이로 변신한 거고.”
목금이 도깨비불을 보면서 호통을 쳤다.
“이 통 안으로 들어가!”
목금이 호리병을 들고 흔들자 도깨비불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목금이 얼른 뚜껑을 닫았다.
“재선이 올 때 이상한 일 없었어?”
백이는 돌쇠가 한 말을 떠올렸다.
“망허산 고개에서 길을 잃어서 이상했다고 했어.”
“거기로 가야겠다. 진짜 재선이는 거기 있을 거야.”
벌써 이틀이 지났다. 재선이가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마당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백이와 목금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방문을 열었다.
“도련님!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인가?”
정 진사네 땅을 소작하고 있는 임 씨네의 둘째 임익재가 축 늘어진 재선이를 들쳐업고 마당에 서 있었다.
“말도 마라. 내가 일찍 볼 일이 있어 망허산 고개를 넘어가는 데 길가에 이 도련님이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완전 탈진한 상태라 간신히 말을 하는데, 정 진사 나리 댁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일세.”
정 진사도 뛰쳐나와 재선이를 사랑채에 눕히고 의원을 불러오라, 물을 가져와라, 팔다리를 주물러라 난리가 났다. 목금이도 불려 가 재선이 팔다리를 주무르며 정신을 차리게 도왔다.
알고 보니 도깨비가 장난을 쳐 돌쇠를 홀리고는 재선이를 납치해 고목 구멍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재선이가 간신히 고목을 탈출해서 길가까지 어찌어찌 기어나왔는데, 이미 탈진해서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깨비장난 같은 건 믿지 않는 정 진사는 엄한 돌쇠만 혼내고 말았다.
“어디 천둥벌거숭이를 재선이로 착각해서 데리고 왔던 것이냐! 다행히 재선이가 무사히 와서 망정이지. 못난 놈.”
정 진사는 다행히 그 천둥벌거숭이는 진짜 재선이가 오자 달아나 버렸다고 믿었다. 하지만 백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목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첫날 길가까지 왔으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재선이를 보지 못했을까? 그 고개는 하루에도 열댓 명은 오르내리잖아?”
“도깨비도 생각이 있었지. 재선이한테 도깨비감투를 씌워놓았던 거야.”
한국 전래 동화 『도깨비 감투』 표지, 배효정 글 · 김경아 그림 (출처: 훈민출판사)
“도깨비감투?”
“귀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감투인데, 그걸 쓰면 사람이 보이지 않게 돼.”
《도깨비감투》 어린이 인기동화 34화 (출처: 유튜브 대발이TV)
“와, 그런 게 있어?”
“그럼. 여기 있지롱.”
목금이 품에서 감투 하나를 꺼냈다. 백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재선이 팔다리 주무를 때 보니까 품속에 있더라. 잘못 사용하면 큰일 나는 물건이라 내가 얼른 챙겼어.”
“와, 와! 줘봐, 나 좀 써보게.”
“안 돼. 태워버릴 거야.”
“뭐? 안 돼! 태울 거면 나 줘! 이리 내놔!”
“안 된다니까!”
백이는 목금을 잡으려 뛰고, 목금이는 안 잡히려고 마당을 뱅뱅 돌며 뛰었다. 그걸 본 정 진사가 이마를 짚었다. 저것들, 언제 철이 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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