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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입후 대소동

“부르셨습니까?”

백이가 아버지 정 진사의 부름에 사랑채로 왔다.

“그래, 들어오너라.”

정 진사가 곰방대를 탁탁 털며 말했다. 사랑채 안에는 어머니도 와 있었다.

“흠흠, 이제 너도 슬슬 시집갈 나이가 되고 있으니…”

“아직 멀었습니다!”

깜짝 놀란 백이가 아버지 말을 잘라먹었다.

“소녀, 나이 이제 열다섯입니다. 아직 시집갈 나이는 아닙니다!”

“어허, 누가 들으면 내일 시집가는 줄 알겠구나.”

“그, 그러시면…”

백이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네가 시집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불렀다.”

“네…”

백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입후(立後)를 해야 하겠구나.”

입후. 후계자를 세운다는 말, 즉 양자를 들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정 진사에게 자식이라고는 여아인 백이 밖에 없으니, 양자를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판이었다.


「입후성문(入後成文)」, 전의이씨 영해 동애후손가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입후명문(入後明文)」, 영주 선성김씨 무송헌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그런데 아버님은 3대 독자신데…”

정 진사는 3대 독자였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집안의 재산은 고스란히 아들로 물려져서 이렇게 대부호가 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그런데 네 현숙부(고조 할아버지의 동생)에게 자손들이 있어서 네 종숙부 집에 아들이 둘 있더구나. 둘째를 우리 집 양자로 들이면 어떨까 한다. 올해 나이 열두 살이라 하니, 네가 잘 보살펴 주면 될 듯하다. 네 생각은 어떠냐?”

생각이나 마나 사실은 결정된 사안을 통보하는 것에 다르지 않았다. 백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증조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땀 흘려 쌓아놓은 재산이 저 먼 고조할아버지에서 갈라진 집안의 남자아이에게 넘어간다는 것이 어찌 생각하면 이상하기만 했지만 그게 나라의 법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는 내 핏줄이니, 시집갈 때 크게 재산을 챙겨줄 것이다. 아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열두 살이면 아직 어린아이니, 지금부터 정을 두면 네가 시집간 뒤에도 친정이 건재하여 네게도 큰 도움이 될 거다.”

하긴 그랬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땐 친정이 남아있겠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친정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시집가지 않고 평생 부모님과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도 양반가에서는 쉽지 않은 데다가 데릴사위야말로 생판 남인 거니까 차라리 고조할아버지의 후손을 양자로 들이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다.




*


“그래서 양자가 온다고?”

목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넌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안 하셔?”

“응? 나?”

“그래, 너도 외동딸이잖아.”

“난 시집 안 걸 건데?”

“뭐야?”

“그냥 세책방 지키다가 죽을 거야. 귀찮게 시집은 왜 가?”

“그 귀찮은 거 나는 가고?”

“넌 양반이잖아. 난 상민이고.”

“얼씨구? 네가 언제 양반 대접은 해 준 적이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목금이 히죽 웃었다.

“아아, 그래, 그래. 아가씨, 이제 남동생을 보시게 되었네요. 경하드리옵나이다.”

백이가 닭살 돋은 듯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주먹을 꽉 쥐고 목금에게 을러댔다.

“죽을래?”

“살래!”

목금이 혀를 날름 내밀고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거기 안 서!”

백이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목금을 잡으러 따라나섰다.

“어허! 이게 무슨 경거망동이냐?”

“앗, 아버지…”

백이가 우뚝 멈춰서서 인사를 올렸다.

“오늘 재선이 오는 날이니 얌전히 있으라 하지 않았느냐?”

“아, 오늘이었죠?”

“가서 얌전히 있어라. 처음 보는 동생한테 못나 보이는 누나 되지 말고.”

동생 오는데, 왜 얌전히 있어야 하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백이는 아버지 말에 따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재선은 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쩌다 이리 늦었느냐? 아이가 피곤하겠구나.”

돌쇠가 머리를 조아렸다.

“오다가 이상하게 길을 잃었습니다. 수백 번 다닌 망허산 고개인데 참 이상하게 처음 가는 곳처럼 낯설더라고요.”

“모자란 놈 같으니! 재선이는 괜찮으냐?”

“도련님은 무사합니다.”

“배고파!”

나귀 위에 앉아 있던 꼬맹이가 툴툴댔다.

“허허, 그놈 기운차구나.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우선 밥부터 먹자.”

재선이는 기운찬 정도가 아니었다. 밥상을 받자 반찬들을 그냥 손으로 덥석 잡아서 먹기 시작했다. 정 진사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좀 더 나이가 든 첫째를 입후할 것을 그랬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앗, 뜨거.”

재선이는 밥도 맨손으로 집었다가 뜨겁다고 난리를 쳤다.

“이 녀석아! 너는 수저 쓰는 법도 모르느냐?”

정 진사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한소리를 하고 말았다.

“수저? 수저?”

“숟가락과 젓가락 말이다.”

이거 어쩌다 반편이를 떠맡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게 말하지.”

재선이는 숟가락으로 밥을 한입 가득 퍼서 넣었다. 하지만 반찬은 여전히 손으로 집어서 먹었다. 정 진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채 밖에서 살그머니 안쪽을 훔쳐보고 있던 백이도 그 모습에 아버지랑 똑같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완전 천둥벌거숭이 그 자체였다. 열두 살이 아니라 일곱 살도 안 돼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음 날 아침.

“뭐야? 문안 인사를 안 왔어?”

재선이는 아침에 문안 인사도 드리러 오질 않았다. 앞으로 가문을 책임질 종손이 되어야 하는데 버릇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백이는 더는 못 참겠다 싶어서 재선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야, 자냐? 나 누난데, 들어간다!”

그렇게 고함을 치는데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진짜 들어간다!”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어서, 백이는 정말로 댓돌로 올라서서 방문을 확 밀어서 열어버렸다.

“어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부자리만 얌전히 펼쳐져 있을 뿐 사람은 온데간데없었다.

“삼월아, 삼월아!”

백이가 큰소리로 하녀를 불렀다. 동갑내기 삼월이가 얼른 달려왔다.

“아씨, 부르셨어요?”

“재선이는 어디 갔느냐?”

“모, 모르는데요?”

삼월이는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방에 빗자루가 있던데? 청소하고 나온 거 아니냐?”


싸리빗자루,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내창마을 살림살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아니에요. 저는 아침밥 짓느라 이쪽은 얼씬도 안 했는 걸요.”

“뭐야? 그럼 이 자식 어딜 간 거야?”

행랑채에 있는 돌쇠도 아무도 대문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여기 빗장이 그냥 걸려 있잖아요. 사람이 나가면 밖에서 빗장을 걸 수는 없죠.” 맞는 말이었다.

사라진 재선이는 해가 진 뒤에야 나타났다. 어느 틈에 돌아왔는지 방문을 스르륵 밀고 마당으로 내려선 것이다.

“야, 재선아!”

집안의 기강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백이가 큰소리로 새 동생을 불렀다.

“왜?”

“너, 아침에 문안 인사도 안 드리고 어딜 간 거야?”

“아무 데도 안 갔는데?”

“점심때도 없어 놓고 무슨 거짓부렁이야?”

“점심때도 아무 데도 안 갔는데?”

버르장머리만 없는 게 아니라 거짓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놈이었다. 백이는 더 상대할 수가 없어서 쪼르르 사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파양해야 해요.”

정 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아이가 오자마자 파양한다고 할 수 있느냐. 아직 어려서 예의범절을 못 배운 모양이니 며칠만 말미를 줘보자꾸나.”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도 재선이는 코끝 하나 보이질 않았다. 마침 목금이 놀러 왔기에 백이는 목금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낮에 없어진다고?”

“그래! 지금도 없어. 가볼래?”

백이가 목금을 데리고 재선의 방에 갔다. 목금은 방구석에 세워져 있는 싸리 빗자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싸리빗자루,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살림살이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이 빗자루, 너희 집 거 아닌데?”

백이가 까르르 웃었다.

“넌 우리집 빗자루도 다 아냐?”

“너, 가서 불돌이 좀 데려와.”

불돌이는 망허산에서 데려온 양수지조(陽燧之鳥)다. 불길 속에서 살고 불길을 뿜어낸다. 지금은 백이네 구들장 밑에서 살고 있다.

목금이 이런 말을 하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 백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후다닥 나가서 불돌이를 불러왔다.

목금이는 방문을 꼭꼭 닫더니 빗자루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 안 튀어나오면 확 불 질러 버린다. 여기 양수지조 불돌이가 와 있거든.”

“목금아, 뭐라는 거야? 거기 누가 있어?”

백이가 보기엔 목금이가 벽을 보고 말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빗자루가 꿈틀하고는 부풀어 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남자아이로 변해버렸다.

“재, 재선이?”

“히히, 누나, 나야.”

목금이 팔을 허리에 올리고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너, 이놈, 아직도 장난질이야? 본 모습으로 안 돌아가?”

“헤헤.”

재선이는 다시 펑 소리를 내더니 공중에 둥둥 뜬 불덩이가 되었다.

“이, 이게 뭐야?”

백이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은 너희 양자가 아니야. 망허산에 사는 도깨비야.”

“그, 그럼 저건 도깨비불?”

“도깨비는 낮에는 자기 본체로 변하거든. 이놈은 사람이 오래 쓰던 싸리 빗자루야. 밤에는 재선이로 변신한 거고.”

목금이 도깨비불을 보면서 호통을 쳤다.

“이 통 안으로 들어가!”

목금이 호리병을 들고 흔들자 도깨비불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목금이 얼른 뚜껑을 닫았다.

“재선이 올 때 이상한 일 없었어?”

백이는 돌쇠가 한 말을 떠올렸다.

“망허산 고개에서 길을 잃어서 이상했다고 했어.”

“거기로 가야겠다. 진짜 재선이는 거기 있을 거야.”

벌써 이틀이 지났다. 재선이가 무사할지 걱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마당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백이와 목금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방문을 열었다.

“도련님!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인가?”

정 진사네 땅을 소작하고 있는 임 씨네의 둘째 임익재가 축 늘어진 재선이를 들쳐업고 마당에 서 있었다.

“말도 마라. 내가 일찍 볼 일이 있어 망허산 고개를 넘어가는 데 길가에 이 도련님이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완전 탈진한 상태라 간신히 말을 하는데, 정 진사 나리 댁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일세.”

정 진사도 뛰쳐나와 재선이를 사랑채에 눕히고 의원을 불러오라, 물을 가져와라, 팔다리를 주물러라 난리가 났다. 목금이도 불려 가 재선이 팔다리를 주무르며 정신을 차리게 도왔다.

알고 보니 도깨비가 장난을 쳐 돌쇠를 홀리고는 재선이를 납치해 고목 구멍 속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재선이가 간신히 고목을 탈출해서 길가까지 어찌어찌 기어나왔는데, 이미 탈진해서 쓰러졌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깨비장난 같은 건 믿지 않는 정 진사는 엄한 돌쇠만 혼내고 말았다.

“어디 천둥벌거숭이를 재선이로 착각해서 데리고 왔던 것이냐! 다행히 재선이가 무사히 와서 망정이지. 못난 놈.”

정 진사는 다행히 그 천둥벌거숭이는 진짜 재선이가 오자 달아나 버렸다고 믿었다. 하지만 백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목금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첫날 길가까지 왔으면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재선이를 보지 못했을까? 그 고개는 하루에도 열댓 명은 오르내리잖아?”

“도깨비도 생각이 있었지. 재선이한테 도깨비감투를 씌워놓았던 거야.”


한국 전래 동화 『도깨비 감투』 표지, 배효정 글 · 김경아 그림 (출처: 훈민출판사)

“도깨비감투?”

“귀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감투인데, 그걸 쓰면 사람이 보이지 않게 돼.”


《도깨비감투》 어린이 인기동화 34화 (출처: 유튜브 대발이TV) 더보기

“와, 그런 게 있어?”

“그럼. 여기 있지롱.”

목금이 품에서 감투 하나를 꺼냈다. 백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재선이 팔다리 주무를 때 보니까 품속에 있더라. 잘못 사용하면 큰일 나는 물건이라 내가 얼른 챙겼어.”

“와, 와! 줘봐, 나 좀 써보게.”

“안 돼. 태워버릴 거야.”

“뭐? 안 돼! 태울 거면 나 줘! 이리 내놔!”

“안 된다니까!”

백이는 목금을 잡으려 뛰고, 목금이는 안 잡히려고 마당을 뱅뱅 돌며 뛰었다. 그걸 본 정 진사가 이마를 짚었다. 저것들, 언제 철이 드나.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소설 『정생, 꿈 밖은 위험해』,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6년 1월 26일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7년 1월 16일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형제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6월 14일 ~ 1636년 6월 24일

병자년의 전란을 앞둔 6월, 김광실의 집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모였다. 14일에는 둘째 아우 김광실이 용성(龍城)으로부터 왔다. 김광계는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피곤함을 잊고 아우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닷새 뒤에는 제사가 있어서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6월 19일에는 제사를 지냈고, 이 때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20일에는 제사를 하고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조카들은 모두 물러나 서원으로 갔다. 6월 23일에도 형제들끼리 손님을 치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24일에는 비로소 엉덩이를 떼고 금발(琴撥)을 만나러 함께 갔다. 그러나 금발은 마침 집에 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 대신에 김시익(金時翼)을 만나보고 왔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지낸 평화로운 한 달이었다.

“위조된 족보를 불태우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3년 12월 18일

서족들이 위조한 족보에 관한 송사가 10월 26일에 열렸다고 한다. 비록 노상추는 서울에 있느라 소장만 작성하고 송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우 노상근이 참석해서 위조한 족보들을 모두 태우라는 판결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와서 노상추와 맞선 서족들을 꾸짖어 주셨는데, 과연 꿈이 들어맞았나 보다.

노상근은 종중에서 되돌려 받아 모아놓은 집안의 족보들을 사당 앞에서 태우면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 고하였다고 한다. 그때 쓴 축문을 가져왔기에 노상추가 읽어 보았다. “유세차(維歲次) 계해년(1803) 11월 15일, 6대손 상근(尙根)이 감히 현(顯) 6대조부 선무랑 행 안기도(安奇道) 찰방 부군의 묘(墓)에 밝게 고합니다. 계사년(1773)에 불초한 후손이 무능하게 대처하여 위보가 만들어져 적서의 구별이 없어지니, 동령(動令)·세령(世寧)의 계보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종통이 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어두워진 지 32년이니 그동안 조상의 혼령도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바른 데로 돌리기를 도모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에 위보를 거둬들여 묘정(墓庭)에서 불살라버리면, 춘추의 의리가 바루어지고 선조의 영령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오늘 문란해진 종통을 크게 바로잡고 삼가 술과 과일을 올려 지극한 정을 공경히 펴면서 삼가 경건하게 고합니다.” 노상추는 이에 32년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지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6월 27일 ~ 1616년 7월 1일

1616년 6월 27일, 김택룡의 사위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는데 7월 1일에 김택룡의 두 번째 첩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28일 권근오가 또 채소[채물(菜物)]를 보내왔다.

6월 29일, 택룡은 두 번째 첩[부실(副室)]의 삼년상 제사[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7월 1일, 택룡은 두 번째 첩의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와 이서, 홍붕 등이 와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택룡의 장녀는 액(厄)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고,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 어미의 신주(神主)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1월 26일 ~ 1782년 1월 26일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04년 3월 8일 ~ 1617년 3월 19일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7년 3월 19일,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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