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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매원일기』에 담긴 17세기 예안 사족가의 일상적 풍경

예안 오천의 한 가문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17세기 조선 사회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관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유교적 교양, 제의(祭儀)와 친족 네트워크, 지역사회와 중앙정치의 연결, 질병과 재해에 대한 대응, 책과 글의 축적과 보존이, 모두 가(家)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김광계(1580–1646)의 『매원일기(梅園日記)』는 바로 그 무대의 일일 기록이다. 1603년(선조 36년) 정월 초하루부터 1645년(인조 23년) 9월 30일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일기는, 결번을 제외하고도 약 28년간의 촘촘한 생활사·지성사 기록을 남긴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특정한 ‘사상가’가 아니라 지역의 저명 사족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점이 사료적 가치를 배가한다. 그는 도산서원의 원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서적의 수집과 관리, 제례의 주관, 친족·이웃과의 교류, 그리고 서울 정국을 읽는 독법을 한 몸에 실천했다. 가정은 학당이자 서고(書庫), 사당이자 회합소, 때론 병상과 구휼의 장이었으며, 동시에 작은 뉴스룸이었다. 『매원일기』를 읽는 일은, 문자 그대로 그 모든 공간을 하루 단위로 통과하는 일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표지, 광산김씨 예안파 후조당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김광계, 『매원일기』 , 광산김씨 예안파 후조당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책의 집


한 유학자의 하루는 ‘책’으로 여닫는다. 그러나 책 읽기가 관념적 수양으로만 붙박이는 것은 아니다. 김광계는 장마철과 환절기에 책을 꺼내어 ‘포쇄(曝曬)’하고, 친족과 더불어 교정과 검열을 반복한다. 포쇄란 책 속의 습기를 햇빛과 바람에 노출시켜 말리는 작업을 가리킨다. 이렇게 거풍(擧風)의 과정을 거치면 종이에 스며든 습기가 제거되어, 부식이나 벌레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이는 서적을 장기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1628년 6월, 그는 아이들과 아우들을 움직여 장서 점검을 작은 집안 행사로 전환한다. 원문은 간결하지만, 거기엔 책과 함께 사는 집의 호흡이 오롯이 실려 있다.

“무진년(1628, 인조 6) 6월 22일 글을 익혔다. 아이들에게 책을 포쇄하도록 하였다. 대서大暑로 6월중六月中이다. 6월 24일 아이와 함께 선대의 서적을 살펴 보았다. 오후에 비가 조금 내렸다. 6월 25일 비가 내렸다. 아우들과 함께 서적을 검열하였다. 7월 7일 가묘에 전奠을 드린 뒤에 서적을 교정하고 검열하였다. 입추立秋로 7월절七月節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28년 6월 22일~7월 7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사랑채 마루에 책을 널어 말리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책은 사물인 동시에 의례의 대상이다. ‘장서 포쇄’는 단순한 곰팡이 방지에 그치지 않는다. 포쇄의 길일을 가려 의례 후에 책을 ‘교정·검열’한다는 서술은, 서적 관리가 가학의 한 축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대목은 실록 관리 제도의 포쇄와 민간의 포쇄 관행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도서관 보존학 지식과 맞물리는 한국형 ‘서책 보존 문화’의 생활화라고 요약해도 무방하다.




뉴스의 집


‘책의 집’은 동시에 ‘뉴스의 집’이다. 서울 정세를 전하는 조보(朝報)는 지방 사족에게 정치 감수성의 교과서였다. 1634년 1월 17일,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입수해 읽는다. 이후 1638년과 1644년의 조보 수령 기록까지 이어지면서, 중앙의 논쟁·인사·정책이 예안의 사랑방을 오간다.

“갑술년(1634, 인조 12) 1월 17일 갑진 『상서』를 외우고, 경보京報(조보)를
보았다.”
“무인년(1638, 인조 16) 3월 11일 갑술 강재江齋에 와 정월과 이월의
조보를 보았다.”
“갑신년(1644, 인조 21) 4월 11일 무진 예안 현감이 조보를 보내어 왔다.
1월부터 3월 19일까지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월 17일; 1638년 3월 11일; 1644년 4월 11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서울발 속보가 지역사회를 어떻게 통과하는지, 이 간단한 기록만큼 생생히 보여주는 자료도 드물다. 조보가 수령을 통해 유통되고, 몇 달 치를 모아 한 번에 열람하는 관행은 정보를 ‘읽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김광계가 같은 날의 일기에 중앙의 탄핵·파직과 논계(論啓) 소식을 덧붙여 기록하는 대목을 보면, ‘집’은 소문을 여과하고 판단을 모의하는 작은 공론장으로 기능했다. 『매원일기』가 제공하는 이 미시적 장면들은, 중앙정치-향촌사회의 정보 흐름을 단선적 전달이 아닌 상호작용으로 재구성하게 만든다.




사적·공적의 집


가학과 정보는 의례와 생활 속에서 비로소 살이 붙는다. 가묘에 전을 드린 뒤 서책을 교정하는 순서는, 제의와 독서가 분리되지 않는 생활 리듬을 보여준다. 제례는 규범이자 훈련이었고, 서책은 기억과 규범을 담는 용기(容器)였다. 학문과 예가 동일한 호흡을 공유하는 이 ‘집의 시간표’는,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공적/사적’의 이분법을 무색하게 만든다. 조선시대의 가문은 근대 이후의 ‘사적 가족 단위’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 사회구조였다. 그것은 사(私)의 울타리 안에서 친족 관계망과 생활경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공(公)의 장치로서 향촌의 규범 실천과 정보 유통, 교육·의례·구휼 기능을 수행했다. 가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엄격히 분리되기 이전의 사회에서, 두 영역이 맞물리는 경계 공간이자 사회적 커먼즈(commons)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가문은 단순한 혈연집단을 넘어 지역사회의 정치·문화·경제 자본을 축적하고 재분배하는 핵심 단위로 기능했다.

『매원일기』가 더없이 생생해지는 지점은, 위기의 순간에 집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줄 때다. 1628년 늦가을, 연이어 질환과 화재가 겹친 사건은, 지역 공동체의 응답 방식과 가족의 회복탄력성을 드러낸다.

“무진년(1628, 인조 6) 9월 28일 『상서』를 외웠다. ○ 이도以道가 류실 누님을 모시고 왔다. 9월 29일 『상서』를 외웠다. 누님이 곽란을 앓아 몹시 아파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나았다. ○ 김영원金永元 씨가 와서 잤다. 10월 1일 무자 누님이 곽란을 앓은 뒤에 소주를 조금 마시고 전과 같은 증상이 다시 나타나 구토 증세를 보이고 심지어 한참 동안 기가 끊어지기도 하여 온 집안이 허둥거리고 소란스러웠다. 날이 저물어서야 깨어났다. 일과를 접었다. ”

“10월 8일 『상서』를 보았다. ○ 밤에 집에 불이 났으나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도와준 덕분에 사랑채 두 칸만 탔다. 10월 9일 불탄 곳을 좀 수리하였다. 화재를 당한 일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왔다. 10월 10일 또 어제처럼 수리하였다. 입동立冬으로 10월절十月節이다. 10월 15일 아침에 사당에 참배를 하였다. 이날은 곧 류실 누님의 생일이어서 오후에 여러 형제들과 함께 할머니 앞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광계, 『매원일기』, 1628년 9월 28일~10월 15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병을 이겨낸 형제를 반기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산불을 끄는 마을 사람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이 연쇄 기록은 단순히 병증에 대한 기록이나 사고 보고가 아니다. 병상과 화재, 수리와 참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생일 잔치가 한 호흡으로 엮여 있다. 이웃은 야간의 불을 끄러 달려오고, 집안은 이틀 뒤 이미 ‘복구된 일상’을 상연한다. 사당에 든 참례는 의례와 감정의 균형추다.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안도의 공기가 의례의 리듬 속에 배분된다. ‘작지만 큰 사회’로서의 집이 어떻게 위기를 처리하는지, 이만큼 압축된 서사도 드물다.




치유의 집


집은 또 하나의 ‘치유 공간’이었다. 질병에 대한 기록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며, 감정의 진폭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울림이 큰 대목은 유모(乳母)의 임종을 지키는 기록이다. 60여 년을 함께한 노비 출신 유모에 대해, 김광계는 『소학』의 덕목을 빌려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이 장면은 ‘가’라는 공간이 정(情)을 매개로 신분을 넘어선 윤리적 공동체로 작동했음을 웅변한다.


“무인년(1638, 인조 16) 5월 4일 병인 집에 있으면서 치재하였다. 유모가 갑인년(1554)에 태어났으니 나이가 아흔 살에 가까운데, 병세가 몹시 위중하여 아주 걱정스럽다. 기묘년(1639, 인조17) 9월 5일 기미 유모가 이질을 얻은 지 벌써 몇 달이어서 날로 더 초췌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하니, 근심됨을 말할 수가 없다. 오후에 말을 타고 교외로 나아가니 긴 강은 맑고 깨끗하며 단풍잎은 정말로 붉었다. 그길로 강을 건너 정지서당定止書堂에 가서 이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나의 강사로 와서 잤다. 9월 7일 신유 이건以健ㆍ이도以道와 조카 선𥑻ㆍ오익훈吳益勳ㆍ우필대禹必大가 보러 왔다. 금삼달琴三達도 잠깐 왔다. 날이 저물었을 때 유모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 매우 급하게 달려왔으나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고 초경에 숨이 끊어졌다. 이 여종은 내가 태어나 여덟 달이 되었을 때, 조모께서 젖을 먹여 키우도록 명하셔서 집안에서 60여 년을 살았다.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함이 없었고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부지런하고 굳세었다. 마음을 다하여 윗사람을 섬기고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가엽게 여겼으며, 굳은 일을 몸소 행하되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니, 거의 『소학小學』에서 말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잃었으니 다만 나를 길러준 은혜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이다. 통곡하고 통곡하였다. 9월 8일 임술 초상 치르는 일을 살펴보았다. 9월 9일 계해 새벽에 관을 끌어내어 오야지촌五野只村의 남향한 언덕에 장사를 치렀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8년 5월 4일; 1639년 9월 5~10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이 장례 기록은 가학의 윤리적 토대를 조용히 비춘다. 『소학』의 구절을 자발적으로 호출하는 습속 자체가, 김광계에게 윤리가 생활언어였음을 보여준다. 할머니의 명으로 유모가 양육을 전담했다는 회고는, 양반가의 보육 체제가 얼마나 유기적이고 장기적이었는지 알게 한다. 유모의 장수(享年 88세)가 덧붙는 수사는, ‘가’의 시간성이 한 사람의 생애 곡선을 온전히 감싼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례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조카와 아우의 문상을 받으며 ‘문을 닫고 조리한다’. 공과 사, 예와 병, 감정과 절차가 뒤섞이는 한 장면은, 가정의 윤리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투명한 프리즘이다.

여기까지의 사례만으로도 『매원일기』의 시간과 공간이 충분히 드러나지만, 핵심은 이 모든 것이 ‘분절된 항목’이 아니라 ‘연결된 생활’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책을 포쇄한 손이 사당의 신주 앞에서 공손히 합장하고, 같은 손이 화마를 치운 뒤 서책의 먼지를 다시 턴다. 조보의 논쟁이 사랑채의 화로 곁에서 이어지고, 그 곁에 질병과 간호, 장례와 문상의 절차가 포개진다. 그는 몸으로 『소학』을 실천하고, 눈으로 한유를 읽고, 귀로 조보를 듣는다. 그리고 그 모든 독해의 자리들이 모여 한 채의 집을 이룬다.

이 집은 ‘작지만 큰 사회’였다. 경제와 예, 지식과 정치는 분과가 아니라 생활의 연루망이다. 김광계의 집에서 포획되는 윤리적 장면들—위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태도, 친족과 이웃의 상호부조, 서책의 관리와 의례의 실행, 공(公) 정보의 사(私)적 토론—은, 미시사적 세부의 밀도로 인해 오히려 구조적 장면으로 떠오른다. 『매원일기』는 특정 가문의 일상 기록을 넘어, 17세기 조선 사회의 삶과 질서를 규범화한 ‘살아 있는 생활헌장’이라 할 수 있다.

『매원일기』는 ‘가’를 통해 사회를 배우는 교과서다. ‘가’라는 공간과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포쇄된 책장을 넘기며, 조보를 돌려 읽으며, 병상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사당에 술 한 잔 올리며 실천하는 삶의 배움터였다. 김광계의 집은 작은 학교이자 작은 서고, 작은 사당이자 작은 뉴스룸, 작은 구휼소이자 작은 회의장이었다. 이 ‘작지만 큰 사회’의 일상적 작동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정이야말로 지식의 축적과 윤리의 습속, 공론의 준비와 상호부조가 만나는 최초의 공적 공간이라는 점을, 『매원일기』는 날마다 한 줄씩 증언한다.


일기 국역 총서 『매원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집필자 소개

권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고전번역학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가계·혼맥·학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지식 네트워크의 형성과 변용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書院의 社會史: 庶類系 儒賢의 登場과 社會的 外裝-章山書院의 사례를 중심으로-」, 「묘문·행장류를 통해 본 성호학파의 여성 인식」 등이 있다.
“큰 딸이 사내아이를 출산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6년 1월 26일

1596년 1월 26일, 시집간 큰 딸아이가 어젯밤부터 기운이 불편하고, 출산의 기미가 있어서 즉시 고모 방으로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종일 머물다가 오늘 밤이 깊은 해시 무렵에 출산을 하였다. 방안에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가득 퍼졌다. 온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몹시 기뻐하였다.

오희문은 그 무렵 정계번, 이기수 등과 한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해산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방에서 나와 하늘을 우러러보니, 시간은 밤 12시경이었고, 정확하게는 해시였다. 사위인 신응구는 한질을 앓아 오래 누워있고 일어나질 못하였는데, 아들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기뻐해 마지않았다. 오희문은 딸이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해야 할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사위의 집은 사내가 귀하였는데, 이렇듯 아들을 낳았으니 앞으로 딸도 시댁에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감초를 달인 이후 아이에게 먹였다. 딸아이 역시 다른 곳은 무탈하였고, 다만 힘을 너무 쓴 나머지 미역국이 입에 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무사하게 출산한 것이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오희문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란의 와중에도 무사히 아들을 출산한 큰 딸이 무척 기특하였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7년 1월 16일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형제가 모여 화목한 시간을 보내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6월 14일 ~ 1636년 6월 24일

병자년의 전란을 앞둔 6월, 김광실의 집에는 모처럼 형제들이 모였다. 14일에는 둘째 아우 김광실이 용성(龍城)으로부터 왔다. 김광계는 산소에 성묘를 다녀온 피곤함을 잊고 아우와 종일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 날인 15일에는 형제들이 모여 사당에 참배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형제들끼리 모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닷새 뒤에는 제사가 있어서 모두 모이게 된 것이다.

6월 19일에는 제사를 지냈고, 이 때 조카들까지 모두 모였다. 20일에는 제사를 하고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시며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조카들은 모두 물러나 서원으로 갔다. 6월 23일에도 형제들끼리 손님을 치르며 시간을 보내다가, 24일에는 비로소 엉덩이를 떼고 금발(琴撥)을 만나러 함께 갔다. 그러나 금발은 마침 집에 있지 않아 허탕을 쳤다. 대신에 김시익(金時翼)을 만나보고 왔다. 모처럼 형제가 모여 지낸 평화로운 한 달이었다.

“위조된 족보를 불태우다”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803년 12월 18일

서족들이 위조한 족보에 관한 송사가 10월 26일에 열렸다고 한다. 비록 노상추는 서울에 있느라 소장만 작성하고 송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아우 노상근이 참석해서 위조한 족보들을 모두 태우라는 판결까지 얻어냈다고 한다. 그날 밤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와서 노상추와 맞선 서족들을 꾸짖어 주셨는데, 과연 꿈이 들어맞았나 보다.

노상근은 종중에서 되돌려 받아 모아놓은 집안의 족보들을 사당 앞에서 태우면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 고하였다고 한다. 그때 쓴 축문을 가져왔기에 노상추가 읽어 보았다. “유세차(維歲次) 계해년(1803) 11월 15일, 6대손 상근(尙根)이 감히 현(顯) 6대조부 선무랑 행 안기도(安奇道) 찰방 부군의 묘(墓)에 밝게 고합니다. 계사년(1773)에 불초한 후손이 무능하게 대처하여 위보가 만들어져 적서의 구별이 없어지니, 동령(動令)·세령(世寧)의 계보가 문란해지기 시작하여 종통이 서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대의(大義)가 이미 어두워진 지 32년이니 그동안 조상의 혼령도 편안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로소 바른 데로 돌리기를 도모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이에 위보를 거둬들여 묘정(墓庭)에서 불살라버리면, 춘추의 의리가 바루어지고 선조의 영령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이에 오늘 문란해진 종통을 크게 바로잡고 삼가 술과 과일을 올려 지극한 정을 공경히 펴면서 삼가 경건하게 고합니다.” 노상추는 이에 32년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 같았다.

“두 번째 첩의 삼년상 제사를 지내다”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6년 6월 27일 ~ 1616년 7월 1일

1616년 6월 27일, 김택룡의 사위 권근오가 제사에 쓸 쌀을 보냈는데 7월 1일에 김택룡의 두 번째 첩의 제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28일 권근오가 또 채소[채물(菜物)]를 보내왔다.

6월 29일, 택룡은 두 번째 첩[부실(副室)]의 삼년상 제사[재기(再期)]라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도록 시켰다. 이복(李福)에게는 약과를 만들도록 하였다.

다음 날 7월 1일, 택룡은 두 번째 첩의 제사를 지냈다. 진사 박회무와 이서, 홍붕 등이 와서 제사에 참여하였다.

택룡의 장녀는 액(厄)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았고, 차녀와 두 아이는 모두 상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아이들 어미의 신주(神主)를 누 위로 옮겨 놓고 죽은 아내의 부모의 신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입후(入後)를 둘러싼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대립”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1월 26일 ~ 1782년 1월 26일

6월, 서울에 다녀온 노상추는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성곡 족숙의 초상 때 정한 양자 노경엽이 파양되어 쫓겨났다는 것이다. 처음에 임의로 들였던 양자의 부인이 “시아버지(성곡 족숙)가 허락하지 않았다.”라며 노경엽을 기어이 쫓아내어 버렸다는데, 백송 족숙과 성곡 족숙모는 이 일에 어이가 없는 듯했다. 왜냐하면 성곡 족숙을 시아버지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며느리는 이번에 성곡 족숙의 상에서 상복을 한 번 입기 전에는 성곡 족숙과 족숙모를 보러 온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복을 입기는 했으나 빈소를 지키지도 않았다.

성곡 족숙모는 명목상의 며느리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시어미의 명을 따라야 할 것이 아니냐며, 죽은 시아비의 명을 운운하는 것이 괘씸하다고 울면서 화를 냈다. 노부인이 홀로 신주를 지키는 집안은 쓸쓸하기 그지없어 처량해 보였다. 노상추는 아들을 낳아 후사가 끊기게 하지 않는 일의 중요함을 곱씹었다.

“화마가 출몰하는 잔인한 3월 - 선조의 산소와 뒷산이 불에 타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04년 3월 8일 ~ 1617년 3월 19일

1608년 2월 19일, 바람이 불었다. 김령은 오시쯤, 서북쪽에서 들불이 일어나 우리 동네 뒷산으로 번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종들을 시켜 불을 끄도록 했다.

1610년 윤 3월 8일, 김령은 시를 지어 읊으며 걸어서 금정암(琴鄭菴)에 올라가는데 묘연(卯緣)이 수고했다. 암자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암자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중대를 내려다보니 하늘과 땅 같았다. 남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산불이 나서 연기가 올라오니 매우 애석했다.

1617년 3월 19일, 마감(麻甘)의 5대 조고와 고조고 산소가 있는 산에 이르러 보니, 들불이 번져 소나무는 다 탔고 봉분만 겨우 불길을 면한 상태였다. 놀랍고도 분한 일이다. 금계(金溪)에 도착하니 자첨이 맞아들여 말을 쉬게 하고 점심을 차려냈다. 주촌(周村)에 들러 잠시 서고모(庶姑母)를 보고 돌아왔다. 평보 형이 우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나와서 술을 내어 바닥에 자리를 깔고 여러 잔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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