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 오천의 한 가문을 들여다보는 일은 곧 17세기 조선 사회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관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유교적 교양, 제의(祭儀)와 친족 네트워크, 지역사회와 중앙정치의 연결, 질병과 재해에 대한 대응, 책과 글의 축적과 보존이, 모두 가(家)라는 작은 무대 위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연출되었기 때문이다. 김광계(1580–1646)의 『매원일기(梅園日記)』는 바로 그 무대의 일일 기록이다. 1603년(선조 36년) 정월 초하루부터 1645년(인조 23년) 9월 30일까지 이어지는 방대한 일기는, 결번을 제외하고도 약 28년간의 촘촘한 생활사·지성사 기록을 남긴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특정한 ‘사상가’가 아니라 지역의 저명 사족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점이 사료적 가치를 배가한다. 그는 도산서원의 원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며, 서적의 수집과 관리, 제례의 주관, 친족·이웃과의 교류, 그리고 서울 정국을 읽는 독법을 한 몸에 실천했다. 가정은 학당이자 서고(書庫), 사당이자 회합소, 때론 병상과 구휼의 장이었으며, 동시에 작은 뉴스룸이었다. 『매원일기』를 읽는 일은, 문자 그대로 그 모든 공간을 하루 단위로 통과하는 일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표지, 광산김씨 예안파 후조당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김광계, 『매원일기』 , 광산김씨 예안파 후조당종택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한 유학자의 하루는 ‘책’으로 여닫는다. 그러나 책 읽기가 관념적 수양으로만 붙박이는 것은 아니다. 김광계는 장마철과 환절기에 책을 꺼내어 ‘포쇄(曝曬)’하고, 친족과 더불어 교정과 검열을 반복한다. 포쇄란 책 속의 습기를 햇빛과 바람에 노출시켜 말리는 작업을 가리킨다. 이렇게 거풍(擧風)의 과정을 거치면 종이에 스며든 습기가 제거되어, 부식이나 벌레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이는 서적을 장기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다. 1628년 6월, 그는 아이들과 아우들을 움직여 장서 점검을 작은 집안 행사로 전환한다. 원문은 간결하지만, 거기엔 책과 함께 사는 집의 호흡이 오롯이 실려 있다.
“무진년(1628, 인조 6) 6월 22일 글을 익혔다. 아이들에게 책을 포쇄하도록 하였다. 대서大暑로 6월중六月中이다. 6월 24일 아이와 함께 선대의 서적을 살펴 보았다. 오후에 비가 조금 내렸다. 6월 25일 비가 내렸다. 아우들과 함께 서적을 검열하였다. 7월 7일 가묘에 전奠을 드린 뒤에 서적을 교정하고 검열하였다. 입추立秋로 7월절七月節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28년 6월 22일~7월 7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사랑채 마루에 책을 널어 말리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책은 사물인 동시에 의례의 대상이다. ‘장서 포쇄’는 단순한 곰팡이 방지에 그치지 않는다. 포쇄의 길일을 가려 의례 후에 책을 ‘교정·검열’한다는 서술은, 서적 관리가 가학의 한 축임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대목은 실록 관리 제도의 포쇄와 민간의 포쇄 관행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도서관 보존학 지식과 맞물리는 한국형 ‘서책 보존 문화’의 생활화라고 요약해도 무방하다.
‘책의 집’은 동시에 ‘뉴스의 집’이다. 서울 정세를 전하는 조보(朝報)는 지방 사족에게 정치 감수성의 교과서였다. 1634년 1월 17일,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입수해 읽는다. 이후 1638년과 1644년의 조보 수령 기록까지 이어지면서, 중앙의 논쟁·인사·정책이 예안의 사랑방을 오간다.
“갑술년(1634, 인조 12) 1월 17일 갑진 『상서』를 외우고, 경보京報(조보)를
보았다.”
“무인년(1638, 인조 16) 3월 11일 갑술 강재江齋에 와 정월과 이월의
조보를 보았다.”
“갑신년(1644, 인조 21) 4월 11일 무진 예안 현감이 조보를 보내어 왔다.
1월부터 3월 19일까지이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4년 1월 17일; 1638년 3월 11일; 1644년 4월 11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서울발 속보가 지역사회를 어떻게 통과하는지, 이 간단한 기록만큼 생생히 보여주는 자료도 드물다. 조보가 수령을 통해 유통되고, 몇 달 치를 모아 한 번에 열람하는 관행은 정보를 ‘읽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김광계가 같은 날의 일기에 중앙의 탄핵·파직과 논계(論啓) 소식을 덧붙여 기록하는 대목을 보면, ‘집’은 소문을 여과하고 판단을 모의하는 작은 공론장으로 기능했다. 『매원일기』가 제공하는 이 미시적 장면들은, 중앙정치-향촌사회의 정보 흐름을 단선적 전달이 아닌 상호작용으로 재구성하게 만든다.
가학과 정보는 의례와 생활 속에서 비로소 살이 붙는다. 가묘에 전을 드린 뒤 서책을 교정하는 순서는, 제의와 독서가 분리되지 않는 생활 리듬을 보여준다. 제례는 규범이자 훈련이었고, 서책은 기억과 규범을 담는 용기(容器)였다. 학문과 예가 동일한 호흡을 공유하는 이 ‘집의 시간표’는, 우리가 흔히 상정하는 ‘공적/사적’의 이분법을 무색하게 만든다. 조선시대의 가문은 근대 이후의 ‘사적 가족 단위’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합적 사회구조였다. 그것은 사(私)의 울타리 안에서 친족 관계망과 생활경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공(公)의 장치로서 향촌의 규범 실천과 정보 유통, 교육·의례·구휼 기능을 수행했다. 가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엄격히 분리되기 이전의 사회에서, 두 영역이 맞물리는 경계 공간이자 사회적 커먼즈(commons)였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가문은 단순한 혈연집단을 넘어 지역사회의 정치·문화·경제 자본을 축적하고 재분배하는 핵심 단위로 기능했다.
『매원일기』가 더없이 생생해지는 지점은, 위기의 순간에 집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줄 때다. 1628년 늦가을, 연이어 질환과 화재가 겹친 사건은, 지역 공동체의 응답 방식과 가족의 회복탄력성을 드러낸다.
“무진년(1628, 인조 6) 9월 28일 『상서』를 외웠다. ○ 이도以道가 류실 누님을 모시고 왔다. 9월 29일 『상서』를 외웠다. 누님이 곽란을 앓아 몹시 아파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나았다. ○ 김영원金永元 씨가 와서 잤다. 10월 1일 무자 누님이 곽란을 앓은 뒤에 소주를 조금 마시고 전과 같은 증상이 다시 나타나 구토 증세를 보이고 심지어 한참 동안 기가 끊어지기도 하여 온 집안이 허둥거리고 소란스러웠다. 날이 저물어서야 깨어났다. 일과를 접었다. ”
“10월 8일 『상서』를 보았다. ○ 밤에 집에 불이 났으나 동네 사람들이 와서 도와준 덕분에 사랑채 두 칸만 탔다. 10월 9일 불탄 곳을 좀 수리하였다. 화재를 당한 일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왔다. 10월 10일 또 어제처럼 수리하였다. 입동立冬으로 10월절十月節이다. 10월 15일 아침에 사당에 참배를 하였다. 이날은 곧 류실 누님의 생일이어서 오후에 여러 형제들과 함께 할머니 앞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광계, 『매원일기』, 1628년 9월 28일~10월 15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병을 이겨낸 형제를 반기는 모습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산불을 끄는 마을 사람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이 연쇄 기록은 단순히 병증에 대한 기록이나 사고 보고가 아니다. 병상과 화재, 수리와 참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생일 잔치가 한 호흡으로 엮여 있다. 이웃은 야간의 불을 끄러 달려오고, 집안은 이틀 뒤 이미 ‘복구된 일상’을 상연한다. 사당에 든 참례는 의례와 감정의 균형추다. 슬픔과 두려움, 그리고 안도의 공기가 의례의 리듬 속에 배분된다. ‘작지만 큰 사회’로서의 집이 어떻게 위기를 처리하는지, 이만큼 압축된 서사도 드물다.
집은 또 하나의 ‘치유 공간’이었다. 질병에 대한 기록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며, 감정의 진폭을 숨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울림이 큰 대목은 유모(乳母)의 임종을 지키는 기록이다. 60여 년을 함께한 노비 출신 유모에 대해, 김광계는 『소학』의 덕목을 빌려 찬탄을 아끼지 않는다. 신분제 사회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이 장면은 ‘가’라는 공간이 정(情)을 매개로 신분을 넘어선 윤리적 공동체로 작동했음을 웅변한다.
“무인년(1638, 인조 16) 5월 4일 병인 집에 있으면서 치재하였다. 유모가 갑인년(1554)에 태어났으니 나이가 아흔 살에 가까운데, 병세가 몹시 위중하여 아주 걱정스럽다. 기묘년(1639, 인조17) 9월 5일 기미 유모가 이질을 얻은 지 벌써 몇 달이어서 날로 더 초췌해지고 숨이 끊어질 듯하니, 근심됨을 말할 수가 없다. 오후에 말을 타고 교외로 나아가니 긴 강은 맑고 깨끗하며 단풍잎은 정말로 붉었다. 그길로 강을 건너 정지서당定止書堂에 가서 이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저물어 나의 강사로 와서 잤다. 9월 7일 신유 이건以健ㆍ이도以道와 조카 선𥑻ㆍ오익훈吳益勳ㆍ우필대禹必大가 보러 왔다. 금삼달琴三達도 잠깐 왔다. 날이 저물었을 때 유모의 병세가 더욱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 매우 급하게 달려왔으나 이미 말을 하지 못하였고 초경에 숨이 끊어졌다. 이 여종은 내가 태어나 여덟 달이 되었을 때, 조모께서 젖을 먹여 키우도록 명하셔서 집안에서 60여 년을 살았다.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함이 없었고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부지런하고 굳세었다. 마음을 다하여 윗사람을 섬기고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가엽게 여겼으며, 굳은 일을 몸소 행하되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니, 거의 『소학小學』에서 말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잃었으니 다만 나를 길러준 은혜에 그칠 뿐만이 아닌 것이다. 통곡하고 통곡하였다. 9월 8일 임술 초상 치르는 일을 살펴보았다. 9월 9일 계해 새벽에 관을 끌어내어 오야지촌五野只村의 남향한 언덕에 장사를 치렀다.”
김광계, 『매원일기』, 1638년 5월 4일; 1639년 9월 5~10일 (출처 : 스토리테마파크)
이 장례 기록은 가학의 윤리적 토대를 조용히 비춘다. 『소학』의 구절을 자발적으로 호출하는 습속 자체가, 김광계에게 윤리가 생활언어였음을 보여준다. 할머니의 명으로 유모가 양육을 전담했다는 회고는, 양반가의 보육 체제가 얼마나 유기적이고 장기적이었는지 알게 한다. 유모의 장수(享年 88세)가 덧붙는 수사는, ‘가’의 시간성이 한 사람의 생애 곡선을 온전히 감싼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례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조카와 아우의 문상을 받으며 ‘문을 닫고 조리한다’. 공과 사, 예와 병, 감정과 절차가 뒤섞이는 한 장면은, 가정의 윤리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투명한 프리즘이다.
여기까지의 사례만으로도 『매원일기』의 시간과 공간이 충분히 드러나지만, 핵심은 이 모든 것이 ‘분절된 항목’이 아니라 ‘연결된 생활’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책을 포쇄한 손이 사당의 신주 앞에서 공손히 합장하고, 같은 손이 화마를 치운 뒤 서책의 먼지를 다시 턴다. 조보의 논쟁이 사랑채의 화로 곁에서 이어지고, 그 곁에 질병과 간호, 장례와 문상의 절차가 포개진다. 그는 몸으로 『소학』을 실천하고, 눈으로 한유를 읽고, 귀로 조보를 듣는다. 그리고 그 모든 독해의 자리들이 모여 한 채의 집을 이룬다.
이 집은 ‘작지만 큰 사회’였다. 경제와 예, 지식과 정치는 분과가 아니라 생활의 연루망이다. 김광계의 집에서 포획되는 윤리적 장면들—위를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태도, 친족과 이웃의 상호부조, 서책의 관리와 의례의 실행, 공(公) 정보의 사(私)적 토론—은, 미시사적 세부의 밀도로 인해 오히려 구조적 장면으로 떠오른다. 『매원일기』는 특정 가문의 일상 기록을 넘어, 17세기 조선 사회의 삶과 질서를 규범화한 ‘살아 있는 생활헌장’이라 할 수 있다.
『매원일기』는 ‘가’를 통해 사회를 배우는 교과서다. ‘가’라는 공간과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포쇄된 책장을 넘기며, 조보를 돌려 읽으며, 병상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사당에 술 한 잔 올리며 실천하는 삶의 배움터였다. 김광계의 집은 작은 학교이자 작은 서고, 작은 사당이자 작은 뉴스룸, 작은 구휼소이자 작은 회의장이었다. 이 ‘작지만 큰 사회’의 일상적 작동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정이야말로 지식의 축적과 윤리의 습속, 공론의 준비와 상호부조가 만나는 최초의 공적 공간이라는 점을, 『매원일기』는 날마다 한 줄씩 증언한다.
일기 국역 총서 『매원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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