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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삶을 품고 시간을 잇다


강을 사랑한 시인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전문)”면서 강변의 풍경을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향에 은유한 소월 김정식(1902~1934)부터 “저것 봐, 저것 봐,/네보담도 내보담도/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 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울음이 타는 가을 江」 부분)” 라고 노래했던 박재삼(1933~1997),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울음은 강을 만들었다/너에게 가려고//, (「강」 부분)”라고 이야기한 안도현(1961~)까지 강을 동경하고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았던 많은 시인처럼 돌아보면 내 일상도 강과 밀착돼 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나는 강변으로 자주 나가 걷는다. 집에서 오분 정도를 걸어 나가면 영산포 홍어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은 담양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영산강 자전거길의 정확히 중간 지점이다. 홍어 삭히는 향기가 강바람에 실려 알싸하게 풍기는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가깝게는 나주 지역민들, 멀게는 담양, 광주 등에서 출발해 목포로 향하거나 목포에서 올라오는 자전거 라이더들과 만나곤 한다.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바라본 영산대교(광주 방향) 모습 (출처: 작가 제공)


늘 제자리에서 흐르는 듯하지만 계절, 기분 등의 환경적 요소에 따라 이따금 다르게 느껴지곤 하는 강변에서 나는 작고 빛바랜 수첩이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그때그때 생각나는 단상을 메모해 둔다. 강과 함께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며 쓰는 글은 도시에서 창작되는 것과는 형식이나 정서적 측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 인위적으로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솔직담백하게 담긴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어쩌면 시인들이 강을 노래한 이유와도 상통할지 모른다.




삼한 통일의 기반이 되다


영산강은 예로부터 ‘남도의 젖줄’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남도 담양군 병풍산 북쪽에 소재한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하여 장성, 광주, 나주, 함평, 영암, 무안 전남의 여러 시·군을 차례로 거쳐 종국에는 목포 앞바다로 흘러드는 전라남도에서 시작해 끝나는 강인 까닭이다. 영산강이라는 이름은 강의 중류 지점에 있는 영산포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고려말 공민왕(1330~1374) 때 왜구의 약탈이 끊이지 않자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 섬인 영산도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나주 남쪽 강변으로 터전을 옮겨 정착하기 시작했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이 일대를 영산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이러한 영산강 이야기를 하면서 왕건과 견훤의 이야기는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삼한을 통일한 신라는 이백여 년 동안 찬란한 황금기를 누렸으나 점차 말기로 접어들면서 귀족들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빈번했고 그 여파로 국력이 쇠퇴하면서 중앙정부는 지역 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자 전국 각지에서 일부 관리들과 호족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고 옛 고구려 지역에서는 승려 출신인 궁예(?~918)가, 서남해를 비롯한 옛 백제 지역에서는 견훤(?~936)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면서 후삼국시대가 도래했다.


나주 느러지 전망대(동강면 소재)에서 바라본 늘어지 마을(무안군 몽탄면 소재) 모습 (출처: 작가 제공)


당시 나주의 명칭은 금성(錦城)으로, 수로와 육로가 만나는 전략적 요충지인 동시에 서남부 지역의 해상 세력이 중국과 교역을 하던 거점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태봉의 궁예는 수하 장수였던 왕건(877~943)으로 하여금 이곳을 장악하게 하여 후백제가 남중국의 오월(907~978)과 교류하는 것을 차단·봉쇄하려고 하였다.

후백제는 나주를 포함한 서남해 일대를 기반으로 삼아 건국되었는데 초기에는 무진주(광주광역시)를 점령하는 등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후 견훤이 도읍을 완산주(전주)로 옮기면서 중심지에서 밀려난 나주 지역 호족들 사이에서 소외감과 정치적 박탈감이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더불어 전남 동부 지역의 호족들, 예를 들어 순천의 박영규와 김총, 광주의 지훤 등 일부가 견훤과 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으며, 이들과 견훤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유대감이 끈끈했던 반면, 나주 세력과는 다소 거리감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901년, 견훤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러자 그는 신라 본토로의 진격을 보류하고 군세를 남하시켜 나주 남쪽 해안가 마을들을 중심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충돌은 당시 지역 사회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주 일대가 아직은 후백제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견훤의 군사 활동을 계기로 정치적·군사적 독립성을 점차 상실하며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거리감을 갖고 있었을 나주 호족들은 후백제 정권에 더욱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에 왕건은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오다련을 포섭하여 이 일대를 태봉의 영토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 일은 단순한 정치적 전환을 넘어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고려가 갖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견훤으로서는 참으로 뼈아픈 실수일 수밖에 없었다.




영산강의 명과 암


이처럼 역사의 갈피 속에서 단순한 자연지형에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두 세력이 충돌하고 정치 권력의 흐름까지도 바꾸는 길목이었던 영산강은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활동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영산강 유역에는 농경지와 마을이 번성했고 각종 어업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들은 영산창을 통해 서울까지 운송되었다. 영산창은 조선 정부가 곡물을 저장하고 관리하던 조창 중 하나로, 영산강 유역의 내륙 수운 중심지인 영산포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강점기에도 이어져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선박이 운행되면서 영산포는 해상 운송과 철도 교통이 연결되는 남도의 물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전라도 내륙에서 생산된 쌀과 각종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징집하고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것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심히 씁쓸할 따름이다.


영산강 하구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근래에 와서 영산강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수질 오염과 농업용수 부족, 홍수 피해 같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1972년부터 1981년까지 정부 차원에서‘영산강 종합개발계획’이 추진되어 목포와 영암 사이에 ‘하굿둑’을 지어 바닷물이 강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농사에 쓸 깨끗한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했으나 이 일로 인해 강물의 흐름이 멈추고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구역이 사라지면서 생태계가 붕괴되고 오염 물질이 강바닥에 쌓이는 문제를 초래했다. 더욱이 영산강은 한강, 낙동강, 금강에 비해 유량이 적어 오염에 특히 취약했다. 여기에 2008년,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죽산보(나주)와 승촌보(광주) 같은 새로운 구조물이 생기면서 강물 유속은 더 느려지고 녹조와 악취 같은 환경 문제도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한때 보를 철거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대로 존치하기로 결정하면서 영산강은 옛날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강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물을 조절하는 강이 되고 말았다.

최근 들어 사람들은 강이 지니는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심각성이 주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자연 존재의 일부로서 영산강도 그 흐름 안에 있다. 자전거길이 강을 따라 놓이는가 하면 악화된 영산강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각계각층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보와 댐의 철거 여부를 두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누군가는 생태 복원을 위해 과감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이는 농업용수와 치수 문제를 이유로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맞선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영산강은 환경과 산업, 자연 생태와 인간의 삶이 맞부딪히는 경계선으로 존재한다.




시간의 노래이자 존재의 증언


그러나 영산강을 그저 환경과 개발, 찬반의 갈등 구도로만 바라보는 것은 이 강의 존재 의미를 축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농업의 생명선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연 생태의 보고로 혹은 고향의 기억이 깃든 삶의 배경으로 자리한 이 강은 각기 다른 삶과 시선들을 따뜻하게 포용하며 흐른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나눈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존재를 이어준다고 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영산포 홍어거리에서 바라본 늦가을 오후 영산강(목포 방향) 모습 (출처: 작가 제공)


강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이 스며든 거대한 생명체와 같다. 영산강이 남도의 젖줄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농업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과거와 현재를 잇고 나와 타인을 연결한다. 물길을 따라 흐르는 모든 생명과 기억은 서로 얽히고 스며들며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강의 숨통을 틀어막고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그 흐름을 함부로 재단하기도 하지만 강은 기어코 다시 스스로 길을 찾아 흐른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동시에 회복의 언어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 시간의 노래이자 존재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은 서두르지 않는다. 굽이진 곳을 만나면 느리게 걸어가다가 낮은 곳으로 다시 천천히 나아가며 목마른 세상을 적시고 어루만진다. 그 움직임 속에서 강은 자신만의 길을 완성한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때때로 멈추고 돌아섰다가 다시 흐르기를 거듭한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계속하는 마음 아닐까. 수많은 세월의 이야기와 자취를 품은 채 오늘도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영산강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나를 돌아본다. 언젠가 나의 삶 역시 저 한 줄기 강처럼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 속에서 잔잔히 흘러갈 것이다.




집필자 소개

오성인
오성인
2013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 산문집 『세상에 없는 사람』이 있다.

“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5년 12월 6일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내어 얕은 곳에서 고의로 배를 난파시키고 쌀을 횡령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10월 28일

1751년 10월 28일, 쌀 1289섬 8말 6되 9홉 9작, 팥 212섬 등의 곡물을 실은 선척이 보량간나미면(保良干羅味面) 강포(枉浦) 앞바다에 이르러 난파되었는데 건져낸 쌀이 1004, 팥이 212섬이고 건져내지 못한 쌀이 285섬 8말 6되 9홉 9작의 많은 수에 이르는데 사공 등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감독관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으며, 사공들은 미리 60섬의 쌀을 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연도(烟島)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가 그 곳에서 난파되었다면 이치에 맞을 듯도 하지만 백 리 큰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온전하다가 바람 없고 물 얕은 송포(松浦)에서 침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사공이 전부 살았고 선척도 그대로인데 건져내지 못한 수가 이미 이처럼 많다면 고의로 난파시킨 상황이 명백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남포(藍浦) 황죽도(篁竹島)의 난파사건에서도 빈 포대가 떠오른 것이 60개나 되었으며 선주 김두남(金斗南)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고 선가(船價) 162섬을 청탁하여 쌀과 팥을 먼저 가져가 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수없이 내서 국가의 곡식을 홈쳐먹고 고의로 난파시키는 상황이 허다하였다.

“강남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김성일, 경연일기(經筵日記),
1572년 1월 21일

오늘은 『중용혹문』을 강독했다. 강독이 마치자 유희춘은 어제 경연에서 제기한 조운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도 선조에게 조운선의 규격 문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운 운영의 문제는 총체적이었다.

유희춘은 조군(漕軍)의 폐단은 그들을 구휼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군의 생활이 어렵게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특별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자신의 직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선박의 문제가 있었다. 선박은 조군 문제 해결과는 방향이 달랐다. 문제는 간단했는데 5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 아니면 10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검토관 윤탁연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도 1000석의 배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선박을 조운 운영에 그대로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윤탁연은 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전을 보면 1000석의 배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강남은 조선과 달랐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1000곡(斛)을 날랐다고 하는데 1곡(斛)은 1석(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石)의 크고 작음이 강남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7월 10일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더욱이 조정에서 엄중한 뜻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법령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져서 말린 건열미는 새 쌀로 바꿔줘야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다시 걷어서 내야 하니 모두가 다 불쌍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일 아닌가.

“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6월 12일 ~ 1781년 6월 18일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은 배를 만들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14년 4월 6일 ~ 1614년 4월 26일

1614년 4월 6일, 얼마 전 김광계는 작은 배를 한 척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탈 배가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마을 공동의 배라서 아무래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서로 배를 타기 위해 아우성을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뱃사공이 보이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광계는 따로 배를 한 척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조선소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해 놓았다.

4월 26일에 배가 완성되었다. 김광계는 집안 어른을 모시고 강에 나가서 완성된 배에 올라탔다. 노를 저어 강을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저마다 술을 가지고 와서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한 채로 노닐다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신과 공작새”

권문해, 초간일기(草澗日記),
1589년 7월 13일

1589년 7월 13일, 낙동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고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기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에는 사람들도 가득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가득 모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새 한 쌍’이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권문해도 그동안 그림과 책으로만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에 한달음에 낙동강으로 달려갔다.

권문해는 공작새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았다. 공작새의 모습은 마치 꿩 같은 모습에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으며,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보았던 공작새 모습 그대로였다. 공작새의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고,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다 길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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