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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물 : 잠기든가, 헤엄치든가

큰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은 늘 상징적이다. 세느강을 배경으로 한 〈퐁네프의 연인들(1991)〉, 〈비포 선셋(2004)〉, 비엔나의 도나우 운하가 등장했던 비포 선셋의 전 이야기인 〈비포 선 라이즈(1995)〉에서 흐르는 강들은 늘 그들의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그러나 곧 흘러가 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보여주곤 한다.

산도 많고 강도 많은 한국에서, 강을 배경으로 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이다. 영화 〈괴물〉에서 한강은 단순히 괴물이 도사리는 장소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서울의 젖줄로 여겨지던 한강이지만 오랫동안 한강은 물고기 한 마리 살 수 없는 악취 나는 죽은 물에 가까웠다. 영화가 개봉했을 즈음 간신히 물고기가 다시 돌아왔고 한강 둔치는 공원으로 탈바꿈했고 “짜장면 시키신 분!”하고 어디든 배달까지 가능한 휴식의 공간으로 확장됐다. 이 간신히 돌아온 강물에서 괴물이 솟구친다. 그 뒷 배경에는 미군이 무단으로 방류했던 포름알데히드가 있다. 겉으로는 간신히 생명이 돌아온 강이지만 그 강은 ‘다시’ 오염되어 인간이 그 대가를 치른다. 혹독하게….


영화 〈괴물〉(2006) (출처: 영화사청어람㈜)


주인공인 ‘강’두는 ‘평범’이라는 기준에서 살짝 벗어난 인물이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만은 누구보다 강한 인물이다. 딸 현서가 그의 눈 앞에서 괴물에게 잡혀간다. 강두가 현서의 손을 놓친 그 순간 그의 눈앞에서. 한강 공원 작은 매점에 구겨지듯 들어가 살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그에게 한강은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가 가족을 빼앗아 가는 공포의 공간이 된다. 공포였다가 분노였다가 체념이었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까지 한강은 내내 그 자리에서 소용돌이친다. 한국 사회가 지닌 근본적인 결함은 한강이고 그 결함은 괴물로 드러나 직접 사람을 해친다. 대체적으로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지지만, 그 물이 권력으로 오염되고 권력으로 통제되면서 강은 그 자체가 거대한 폭력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팡질팡 흩어졌던 강두의 가족은 똘똘 뭉쳐 한강으로 돌아가는데, 한강에는 현서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격리와 고립을 뚫고 강을 다시 생명으로 돌려놓기 위해 돌진한다. 결국 이들은 한 어린 생명을 구해내지만 그 아이는 현서는 아니다. 현서는 아니지만 가족은 그 아이를 품는다. 괴물이 제거된 한강은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강물은 다시 조용히 흐른다.

2021년에 초연된 국립창극단의 창극 〈물:리어〉는 리어왕에서 왕 자(字)를 떼고 그 앞에 물을 붙여 새롭게 해석한 창극으로 올라왔다. 이 작품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된 것은 단연 물이었다. 작품을 각색한 배삼식 작가는 노자사장의 중심이 되는 물로 리어왕을 재해석 했다고 하며, 그런 만큼 리어의 첫 대사도 원작과 사뭇 다르지만 무엇보다 무대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동선을 띄워 뗏목 위의 인생들인듯 아슬아슬한 삶을 보여준다. 원작 세익스피어의 리어왕의 첫 대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과 배경을 설명해주는 장치이자 그가 막내딸인 코딜리어를 얼마나 편애하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물 속의 리어왕 대사는 다르다.

“개울을 따라 달리고 장난치며 때로 벼랑을 만나 아득히 떨어지며 하얗게 부서져 소리치며 솟구치다 여울에 꿈을 꾸며 다시 흐르고 흘러 흘러 물이여 멀고 먼 길 너의 그 모든 노래 이제 잦아드는 저 가없는 바다.”


국립창극단 〈리어〉 (출처: 국립극장)



리어가 부르는 이 첫 소절은 이미 리어가 인생을 다 살았고 마치 인생에 무엇 하나 더 바라지 않는 신선같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렇게 한갓진 대사 뒤에 그에게 밀어닥치는 고난은 가히 천재지변급이다. 2021년 초연을 2024년에 재연을 올린 이 창극은 안무가인 정영두의 물 속에서의 안무가 돋보이며 창극이라기 보다는 창을 활용한 뮤지컬에 가깝다. 대사와 작창이 어디가 시작고 끝인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매끄럽게 이어졌던 전작 ‘트로이의 여인’들과 달리 ‘물:리어’에서는 대사는 대사고 노래는 노래다. 그리고 대부분의 노래는 철저하게 감상이며 드라마는 대사로 이어진다. 노래 자체로 아름다우나 노래가 시작되면 드라마가 멎고 노래를 감상하는 시간으로 들어가면서 극의 흐름이 느려지곤 한다. 그리고, 물이 있다. 마치 그리스 비극에서 흔히 그렇듯이 코러스들이 “물이여, 리어여”라고 외친다. 마치 물을 잊을까 걱정이라도 되는 듯…. 하지만 물은 무대 위에 계속 존재한다. 심지어 배우들이 물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물은 때로는 배우보다 더 많은 시선을 앗아간다. “상선(上善)은 약수(若水)일러니 만물을 이로이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저어하는 낮은 데로 임하는” 첫 대목의 물 소개는 바로 이어지는 내용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리어의 딸들은 거칠게 물을 거스르며 물에 피를 섞는다. 하지만 물은 마를 수는 있어도 찢어질 수는 없는 물질이다. 리어의 비극에는 순환조차 없다. 누가 돌아올 것인가. 남는 것은 물에 휘감긴 오만 감정뿐이다. 하여 첫 대목은 그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철이 들지 않은 리어의 한갓진 꿈인지, 그가 지향했던 이상향인지 알 수가 없다. 아쉬운 것은 역동적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판소리가 이 안에서는 마치 싯구를 읊는 경기민요처럼 인물의 내면의 외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용도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국립창극단 〈리어〉 (출처: 국립극장)


창극 〈물:리어〉에는 강이나 바다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어리어 있고 폭풍우가 리어의 심정을 대변하며 몰아친다. 분노와 슬픔으로 폭풍우여 몰아치라고 소리 지르지만 그의 깨달음은 늘 너무 늦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물’은 지구의 구성요소로서의 물이 아니라 담기는 그릇에 따라 바뀌는 인간 내면의 불안정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씻어내리는 정화,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드러낸다. 비, 폭풍, 눈물, 바다의 이미지로 물은 비이성적이며 감정의 폭발을 보여준다. 폭풍을 정면으로 맞아치는 늙은 리어는 번개와 천둥에 광기를 폭발시키지만 한 편으로는 쏟아져 내리는 비로 한 때 왕이었던 그의 오만과 어리석음을 씻어내리고 정화된다. 극 초반 입만 산 첫째 딸과 둘째 딸의 아첨을 눈치채지 못하고 코딜리어의 진심을 오해하는 장면은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못한다. 모두가 아는데 리어왕 눈에만 보이지 않는 ‘사랑’은 그의 코딜리어에 대한 사랑이 진심인지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삶을 살아온 왕으로서 그의 내면은 이기적이고 자만에 가득찬 어린아이가 자리잡고 있다. 그가 첫째 딸과 둘째 딸의 성을 오가며 그럭저럭 임금으로서의 삶에 만족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불손했다는 이유 하나로 딸들에게 준 권력을 돌이키고 그들을 응징하려고 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가 얼마나 막내만 편애하며 첫째와 둘째를 무시했을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의 딸들은 그 자신의 초상과도 같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딸들은 그와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할 운명인 것이다. 창극 〈물:리어〉는 그렇게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이 작품을 보며 아쉬운 것은 리어왕 역을 꼭 젊은 배우가 해야 했는가, 김준수 배우가 매우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창극단에 이 역할을 할 배우가 정녕 젊디젊은 배우밖에 없는가 하는 의문이다.


국립창극단 〈리어〉 (출처: 국립극장)

영화 〈괴물〉(2006) (출처: 영화사청어람㈜)


영화 속 물은 스펙터클 하다. 한강은 넓은 강이다. 그 강을 헤엄쳐 와서 사람을 죽이는 괴물과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현서를 구하기 위해 강가에 서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폭풍우 속의 리어왕을 얼핏 닮았다. 이 비와 강은 극복되어야 할 강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괴물 속의 소나기는 지나가고, 가족은 결핍을 안고 다시 삶을 이어가지만 오만과 자만의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던 리어는 반성과 자책과 정화를 통해서도 다시 삶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이 물은, 강물은 누구의 것인가? 불멍과 물멍의 시대에 그 강물을 소유하려 드는 자가 있다면 리어의 결말을 보기를…. 물속에 잠기든가 물속에서 즐거이 헤엄치는 방법 말고도, 그저 바라보는 방법도 있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 〈뮤지컬 스토리〉, <밤새도록 뮤지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5년 12월 6일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내어 얕은 곳에서 고의로 배를 난파시키고 쌀을 횡령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10월 28일

1751년 10월 28일, 쌀 1289섬 8말 6되 9홉 9작, 팥 212섬 등의 곡물을 실은 선척이 보량간나미면(保良干羅味面) 강포(枉浦) 앞바다에 이르러 난파되었는데 건져낸 쌀이 1004, 팥이 212섬이고 건져내지 못한 쌀이 285섬 8말 6되 9홉 9작의 많은 수에 이르는데 사공 등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감독관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으며, 사공들은 미리 60섬의 쌀을 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연도(烟島)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가 그 곳에서 난파되었다면 이치에 맞을 듯도 하지만 백 리 큰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온전하다가 바람 없고 물 얕은 송포(松浦)에서 침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사공이 전부 살았고 선척도 그대로인데 건져내지 못한 수가 이미 이처럼 많다면 고의로 난파시킨 상황이 명백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남포(藍浦) 황죽도(篁竹島)의 난파사건에서도 빈 포대가 떠오른 것이 60개나 되었으며 선주 김두남(金斗南)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고 선가(船價) 162섬을 청탁하여 쌀과 팥을 먼저 가져가 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수없이 내서 국가의 곡식을 홈쳐먹고 고의로 난파시키는 상황이 허다하였다.

“강남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김성일, 경연일기(經筵日記),
1572년 1월 21일

오늘은 『중용혹문』을 강독했다. 강독이 마치자 유희춘은 어제 경연에서 제기한 조운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도 선조에게 조운선의 규격 문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운 운영의 문제는 총체적이었다.

유희춘은 조군(漕軍)의 폐단은 그들을 구휼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군의 생활이 어렵게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특별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자신의 직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선박의 문제가 있었다. 선박은 조군 문제 해결과는 방향이 달랐다. 문제는 간단했는데 5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 아니면 10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검토관 윤탁연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도 1000석의 배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선박을 조운 운영에 그대로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윤탁연은 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전을 보면 1000석의 배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강남은 조선과 달랐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1000곡(斛)을 날랐다고 하는데 1곡(斛)은 1석(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石)의 크고 작음이 강남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7월 10일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더욱이 조정에서 엄중한 뜻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법령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져서 말린 건열미는 새 쌀로 바꿔줘야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다시 걷어서 내야 하니 모두가 다 불쌍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일 아닌가.

“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6월 12일 ~ 1781년 6월 18일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은 배를 만들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14년 4월 6일 ~ 1614년 4월 26일

1614년 4월 6일, 얼마 전 김광계는 작은 배를 한 척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탈 배가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마을 공동의 배라서 아무래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서로 배를 타기 위해 아우성을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뱃사공이 보이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광계는 따로 배를 한 척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조선소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해 놓았다.

4월 26일에 배가 완성되었다. 김광계는 집안 어른을 모시고 강에 나가서 완성된 배에 올라탔다. 노를 저어 강을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저마다 술을 가지고 와서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한 채로 노닐다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신과 공작새”

권문해, 초간일기(草澗日記),
1589년 7월 13일

1589년 7월 13일, 낙동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고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기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에는 사람들도 가득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가득 모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새 한 쌍’이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권문해도 그동안 그림과 책으로만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에 한달음에 낙동강으로 달려갔다.

권문해는 공작새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았다. 공작새의 모습은 마치 꿩 같은 모습에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으며,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보았던 공작새 모습 그대로였다. 공작새의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고,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다 길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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