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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보고 듣고 소통한다,
‘강(江)’이 흐른다

인간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항상 물에 의지해 왔습니다. 인간은 물을 찾아서 모여들었고, 집단 생활의 출발도 물과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이 필요했고, 농사와 어로를 통해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큰 강을 중심으로 인간이 모여 살기 시작했고, 점점 집단화되면서 규모도 커졌습니다. 이른바 4대 문명이라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황허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은 모두 큰 강의 근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는 많은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금강, 낙동강, 영산강, 한강 등의 큰 강을 비롯해 천(川)이라 불리는 작은 물길들이 전국 곳곳에서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삶을 시작했던 처음부터 물을 찾아서 모여 살았던 것처럼 현대인들도 큰 강의 주변에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발생했던 순간부터 인간의 주변에는 항상 강이 있었습니다. 강은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는 모든 순간을 같이 하면서 많은 일들을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는 인간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주는 구원의 존재로, 어느 순간에는 홍수 등의 재해로 인간 모두를 위협하는 멸망의 존재로 위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역할이 바뀌어도 강은 변함없이 언제나 인간의 옆에 있었습니다.

인류 문명이 시작될 때 사람들이 강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발전했던 상황은 지금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큰 강이 잘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강 주변으로 나들이 가거나 운동하는 사람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강에서 라면과 치맥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다는 뉴스를 보면 강이 가지는 매력이 세계적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 역시 해외여행을 갔을 때, 유명한 강을 구경하러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강’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장소였을까요? 우리 모두에게는 강에 대한 수많은 추억이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웹진 〈담談〉 11월호의 주제는 ‘江’입니다. 여섯 분의 필자께서 주제에 맞춰 강에 관련된 정말 흥미롭고 몰입하기 좋은 원고와 작품들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훌륭한 원고와 작품들을 통해 강이 갖는 역사성과 장소성을 파악해보고, 또 우리의 삶과 기억에서 강이 갖는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유현재 교수는 ‘강(江), 삶의 터전에서 문화의 매개로’에서 한반도에서 강의 역할과 그 주변 지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역사적 의미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한강과 낙동강에 배를 띄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던 행위의 실상과 역사적 의미를 통해 ‘나루’가 현재 바다의 항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뱃사람들이 항해의 안정을 위해 모셨던 역사 인물과 신당에 무사운행을 기원하던 행위, 객주와 모여든 인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여러 놀이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상위계층 사람들이 강변에 별장과 정자를 만들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것은 강의 풍경이 한국의 문화유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설명해 주었습니다.

오성인 작가는 ‘영산강, 삶을 품고 시간을 잇다’에서 여러 시인들이 강을 동경하고 문학의 자양분으로 삼았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특히 영산강 주변을 산책하면서 느꼈던 향기와 여러 사람들의 모습, 떠오르는 단상들을 통해 시인들이 자주 강을 노래했던 이유를 찾았습니다. 영산강은 예전부터 두 세력이 충돌하거나 정치 권력의 흐름도 바꾸는 길목 역할을 했고, 조선시대가 되어서는 경제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영산포 설치를 통해 경제 활동이 더욱 활성화 되었지만 일제의 물류 징집 기지로 사용되었다는 아픔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면서 강은 ‘시간의 노래이자 존재의 증언’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서은경 작가는 웹툰 ‘독 선생전’ 20화 「강나루에 서서」에서 과거제도를 둘러싼 사람들의 욕망과 윤리 문제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이 귀여운 고양이 벼루와 함께 강바람을 쐬러 나가는 이야기를 그려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과거 급제는 조선시대 사대부 대부분에게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의 대학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모든 것에 집중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많은 것처럼 조선시대 사대부 역시 과거 급제를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는 것이 쉽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는 도덕적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할지 고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과 도덕적 원칙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고민하게 해주는 에피소드였습니다.

이수진 작가는 ‘선인의 이야기’ 「물 : 잠기든가, 헤엄치든가」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과 국립창극단의 창극 〈물:리어〉의 분석을 통해 인류의 문화에서 물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영화 〈괴물〉에서는 한강이 휴식 공간의 역할을 맡았던 시점에 강 속에서 갑자기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나타나게 되었던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발생한 사건을 통해 너무나도 평범했던 주인공 가족이 어린 생명을 구해내고 괴물이 사라지게 하면서 한강이 다시 시민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서사의 의미를 풀이해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창극 〈물:리어〉에서는 리어왕에서 왕을 떼고 물을 붙여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의미와 리어의 비극이 물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묘사되는 부분들을 풀이해 주었습니다.

이문영 작가는 소설 ‘백이와 목금’ 「물귀신이 나오다」에서 큰 강의 나루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뱃사공과 물귀신을 통해 아픈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강의 모습과 영혼의 위로에 대해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 속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해치는 사악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죽어서도 편안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영혼들이 귀신이 되었기 때문에 원한을 풀어준다면 이들은 아무런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무당들은 귀신을 제압하거나 물리치는 존재가 아니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강과 귀신이 가지는 상징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김정철 연구원은 ‘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강물, 하늘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강이 ‘걱정과 비극의 장소’, ‘흥겨움과 유람의 장소’, ‘깨달음의 장소’로 위치하면서 하늘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의미를 사료와 함께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강은 비가 많이 오면 홍수, 비가 적게 오면 가뭄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홍수와 가뭄은 사람들의 생활 공간을 사라지게 만들거나 더 심할 경우에는 수많은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지만 강은 슬픔과 비극의 장소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추억을 남기는 장소가 되기도 했고, 변화하는 자연과 사람을 통해 깨달음의 장소로 위치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역사 속에서 강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글이었습니다.

강은 항상 흐르면서 인간의 역사에 함께했습니다. 긴 시간 동안 강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등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사정에 따라 여러 감정에 빠지면서도 계속 강을 찾아왔습니다. 강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은 우리의 이야기를 항상 들어주고 묵묵히 지켜봐 주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사람들이 계속 강을 사랑하고 찾아가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은 앞으로도 계속 흐를 것이고 우리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감정들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강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묵묵하게 흐르면서 자신의 소리로 계속 전달할 것입니다. 모든 지역을 연결하고 소통하면서….




편집자 소개

이규철
이규철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전기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다시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역사콘텐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에서 근무 중이다. 대표 저서와 논문으로는 『정벌과 사대 –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연산군 대 대외정벌 추진 과정을 통해서 본 외교 역량의 약화」, 「서울史의 경계 확장과 역사적 소재의 활용 - 단종·연산군을 중심으로 -」, 「1419년 대마도 정벌 전후 조선과 명-일본의 표면적 신뢰와 내면적 불신」 등이 있다. 조선전기 국제관계의 변화, 역사콘텐츠의 활용 및 역사학 분야의 저변 확대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5년 12월 6일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내어 얕은 곳에서 고의로 배를 난파시키고 쌀을 횡령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10월 28일

1751년 10월 28일, 쌀 1289섬 8말 6되 9홉 9작, 팥 212섬 등의 곡물을 실은 선척이 보량간나미면(保良干羅味面) 강포(枉浦) 앞바다에 이르러 난파되었는데 건져낸 쌀이 1004, 팥이 212섬이고 건져내지 못한 쌀이 285섬 8말 6되 9홉 9작의 많은 수에 이르는데 사공 등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감독관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으며, 사공들은 미리 60섬의 쌀을 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연도(烟島)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가 그 곳에서 난파되었다면 이치에 맞을 듯도 하지만 백 리 큰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온전하다가 바람 없고 물 얕은 송포(松浦)에서 침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사공이 전부 살았고 선척도 그대로인데 건져내지 못한 수가 이미 이처럼 많다면 고의로 난파시킨 상황이 명백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남포(藍浦) 황죽도(篁竹島)의 난파사건에서도 빈 포대가 떠오른 것이 60개나 되었으며 선주 김두남(金斗南)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고 선가(船價) 162섬을 청탁하여 쌀과 팥을 먼저 가져가 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수없이 내서 국가의 곡식을 홈쳐먹고 고의로 난파시키는 상황이 허다하였다.

“강남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김성일, 경연일기(經筵日記),
1572년 1월 21일

오늘은 『중용혹문』을 강독했다. 강독이 마치자 유희춘은 어제 경연에서 제기한 조운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도 선조에게 조운선의 규격 문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운 운영의 문제는 총체적이었다.

유희춘은 조군(漕軍)의 폐단은 그들을 구휼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군의 생활이 어렵게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특별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자신의 직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선박의 문제가 있었다. 선박은 조군 문제 해결과는 방향이 달랐다. 문제는 간단했는데 5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 아니면 10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검토관 윤탁연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도 1000석의 배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선박을 조운 운영에 그대로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윤탁연은 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전을 보면 1000석의 배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강남은 조선과 달랐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1000곡(斛)을 날랐다고 하는데 1곡(斛)은 1석(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石)의 크고 작음이 강남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7월 10일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더욱이 조정에서 엄중한 뜻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법령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져서 말린 건열미는 새 쌀로 바꿔줘야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다시 걷어서 내야 하니 모두가 다 불쌍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일 아닌가.

“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6월 12일 ~ 1781년 6월 18일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은 배를 만들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14년 4월 6일 ~ 1614년 4월 26일

1614년 4월 6일, 얼마 전 김광계는 작은 배를 한 척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탈 배가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마을 공동의 배라서 아무래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서로 배를 타기 위해 아우성을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뱃사공이 보이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광계는 따로 배를 한 척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조선소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해 놓았다.

4월 26일에 배가 완성되었다. 김광계는 집안 어른을 모시고 강에 나가서 완성된 배에 올라탔다. 노를 저어 강을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저마다 술을 가지고 와서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한 채로 노닐다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신과 공작새”

권문해, 초간일기(草澗日記),
1589년 7월 13일

1589년 7월 13일, 낙동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고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기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에는 사람들도 가득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가득 모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새 한 쌍’이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권문해도 그동안 그림과 책으로만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에 한달음에 낙동강으로 달려갔다.

권문해는 공작새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았다. 공작새의 모습은 마치 꿩 같은 모습에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으며,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보았던 공작새 모습 그대로였다. 공작새의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고,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다 길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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