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5년 12월 6일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내어 얕은 곳에서 고의로 배를 난파시키고 쌀을 횡령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10월 28일
1751년 10월 28일, 쌀 1289섬 8말 6되 9홉 9작, 팥 212섬 등의 곡물을 실은 선척이 보량간나미면(保良干羅味面) 강포(枉浦) 앞바다에 이르러 난파되었는데 건져낸 쌀이 1004, 팥이 212섬이고 건져내지 못한 쌀이 285섬 8말 6되 9홉 9작의 많은 수에 이르는데 사공 등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감독관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으며, 사공들은 미리 60섬의 쌀을 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연도(烟島)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가 그 곳에서 난파되었다면 이치에 맞을 듯도 하지만 백 리 큰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온전하다가 바람 없고 물 얕은 송포(松浦)에서 침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사공이 전부 살았고 선척도 그대로인데 건져내지 못한 수가 이미 이처럼 많다면 고의로 난파시킨 상황이 명백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남포(藍浦) 황죽도(篁竹島)의 난파사건에서도 빈 포대가 떠오른 것이 60개나 되었으며 선주 김두남(金斗南)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고 선가(船價) 162섬을 청탁하여 쌀과 팥을 먼저 가져가 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수없이 내서 국가의 곡식을 홈쳐먹고 고의로 난파시키는 상황이 허다하였다.
“강남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김성일, 경연일기(經筵日記),
1572년 1월 21일
오늘은 『중용혹문』을 강독했다. 강독이 마치자 유희춘은 어제 경연에서 제기한 조운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도 선조에게 조운선의 규격 문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운 운영의 문제는 총체적이었다.
유희춘은 조군(漕軍)의 폐단은 그들을 구휼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군의 생활이 어렵게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특별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자신의 직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선박의 문제가 있었다. 선박은 조군 문제 해결과는 방향이 달랐다. 문제는 간단했는데 5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 아니면 10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검토관 윤탁연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도 1000석의 배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선박을 조운 운영에 그대로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윤탁연은 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전을 보면 1000석의 배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강남은 조선과 달랐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1000곡(斛)을 날랐다고 하는데 1곡(斛)은 1석(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石)의 크고 작음이 강남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7월 10일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더욱이 조정에서 엄중한 뜻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법령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져서 말린 건열미는 새 쌀로 바꿔줘야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다시 걷어서 내야 하니 모두가 다 불쌍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일 아닌가.
“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6월 12일 ~ 1781년 6월 18일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은 배를 만들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14년 4월 6일 ~ 1614년 4월 26일
1614년 4월 6일, 얼마 전 김광계는 작은 배를 한 척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탈 배가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마을 공동의 배라서 아무래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서로 배를 타기 위해 아우성을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뱃사공이 보이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광계는 따로 배를 한 척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조선소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해 놓았다.
4월 26일에 배가 완성되었다. 김광계는 집안 어른을 모시고 강에 나가서 완성된 배에 올라탔다. 노를 저어 강을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저마다 술을 가지고 와서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한 채로 노닐다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신과 공작새”
권문해, 초간일기(草澗日記),
1589년 7월 13일
1589년 7월 13일, 낙동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고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기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에는 사람들도 가득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가득 모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새 한 쌍’이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권문해도 그동안 그림과 책으로만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에 한달음에 낙동강으로 달려갔다.
권문해는 공작새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았다. 공작새의 모습은 마치 꿩 같은 모습에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으며,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보았던 공작새 모습 그대로였다. 공작새의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고,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다 길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