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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와 목금

물귀신이 나오다

“사공이 사라졌다고?”

이방의 보고에 사또 한익범은 미간을 찌푸렸다. 망허촌은 북쪽으로 망허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망허천이 흐른다. 망허천을 건너면 갈대촌이 있다. 망허천이 깊은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배가 없으면 물자를 나르기가 쉽지 않았다.

큰 강의 나루에 있는 배는 나라에 역을 진 사람이 사공을 하게 마련이었지만(나라의 역은 평민이 지는 것인데, 사공 노릇은 다들 하기 싫어하는 천민의 일과 같아서 이러한 사람을 ‘신량역천 身良役賤’이라고 불렀다.) 지방 고을의 작은 강에 있는 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망허촌이 갈대촌보다는 좀 더 큰 마을이라서 망허촌 사람들이 추렴하여 배를 사고 사공을 기용했다.

하지만 몇 년 전 태풍이 왔을 때 배가 날아가버린 뒤로는 배 없이 지내다가(뗏목을 놓고 줄로 연결해서 이동했다.) 정 진사가 큰맘 먹고 배를 마련하고 사공도 기용하여 강을 건너다닐 수 있게 했다. 물론 뱃삯을 내야했고, 그러기 싫은 사람들은 뗏목을 이용했다. 뗏목은 사람들이 모여야 건널 수 있으니 때가 맞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삯을 내고 배를 타야만 했다.

정 진사는 큰 이문을 남길 생각이 없었지만, 사공은 조금씩 삯을 더 불러 뒷돈을 챙겼다. 다들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딱히 정 진사에게 일러바치지는 않았다.


「정유도선수리시하기」 표지_도산서원운영위원회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정유도선수리시하기」 내지_도산서원운영위원회 기탁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사공이 도망친 걸까요, 아니면 죽은 걸까요?”

이방이 조심스레 물었는데, 그거야 한익범도 알 길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지 않아 풀렸다. 망허천 물굽이 있는 곳에서 사공의 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공의 시신 옆에는 칼에 찔려 죽은 듯한 사내의 시신도 함께 있었다. 그 사내는 호패가 없어서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동네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사공은 외상이 없어서 물에 빠져 죽은 것인가 싶었지만 검시를 맡은 오작 조광수가 뜻밖의 말을 했다.

“시신이 물에 빠져서 부푼 것은 맞지만, 물에 빠져 죽은 것은 아닙니다.”

“물에서 건진 시신인데,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고?”

우락부락하게 생긴 조광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위와 폐에서 물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익사했다면 폐에 물이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럼 왜 죽었단 말인가?”

“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수리에 충격 받은 흔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사후에 생긴 상처입니다. 아마 물에 떠내려가다가 바위 같은데 부딪쳐서 생겼을 것입니다.”

한익범이 곰곰 생각하다 물었다.

“흠, 사공의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 질문에 이방이 대답했다.

“호패로 보니 올해 일흔입니다.”

“그럼 혹 노환으로 죽은 건 아닌가?”

조광수가 머리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한익범은 직접 시신을 살펴보았다. 사공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건 뭔가에 크게 놀란 것 같은 얼굴 아닌가?”

이방도 다가와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익범은 감영에 보낼 보고서에 검시 내용을 자세히 적고 밀봉을 했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달이 떴다. 고된 하루였다고 생각하고 퇴청 준비를 하는데, 순라를 나갔던 나졸이 황급히 뛰어들어 와 부복했다.

“사또 나리,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강을 건너던 양민이 갑자기 물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뭐라? 물속으로 빨려들어가? 망허천에서 벌어진 건가? 좀더 자세히 고하라. 네가 직접 본 일이냐?”

“네, 순라를 돌다가 직접 보았습니다. 오늘 사공이 없는 관계로 뗏목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고 있었는데 뗏목 가에 서 있던 남자가 뭔가에 붙들린 것처럼 물에 빠지더니…. 허우적거리다가 갑자기 물귀신이 발을 잡아끈 것처럼 물속으로 쑥 빠져들어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구했느냐?”

“소인은 거리가 멀어서 구할 도리가 없었고, 뗏목 위에 있던 사람들이 장대를 내밀고 구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럼 시신도 못 찾았단 말이냐?”

“네, 그래서 빨리 수색을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어서 가보자.”

한익범이 나루터에 도착하자 더 큰 일이 벌어진 상태였다. 이미 세 사람이나 뗏목에서 떨어져 물속으로 빨려들어가버렸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뗏목 가운데에 몰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이 많이 어두워 나루에 모인 사람들은 횃불을 치켜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줄을 당겨서 이리 건너오시오!”

한익범이 큰소리로 명했지만 사람들은 움직이질 못했다. 나루에 모여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줄에 손을 대면 바로 물속으로 끌려갑니다! 줄을 당기라는 건 죽으라는 명과 같습니다!”

“뭣이라?”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말했다.

“이건 물귀신의 장난질이 분명합니다.”

“무당을 불러와 귀신을 달래야 합니다.”

“그건 아니지! 지엄한 관장의 명으로 귀신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한익범은 목청을 가다듬고 강물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 고을의 관장 한익범이다. 너희 물속의 귀신은 듣거라. 어떤 불만이 있어서 무고한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냐? 할 말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내게 말하라.”

그 순간 물이 순간적으로 핏빛으로 변했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강물이 크게 요동치는 바람에 뗏목에 있던 사람들은 꺄악 비명을 질렀다. 한익범은 침착하게 다시 말했다.

“강이란 땅과 땅을 갈라 구역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 먼 산으로부터 물을 날라와 땅을 윤택하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다. 강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니 겸손함을 알고, 어떤 일이 있어도 위로 올라가지 않아 순리를 따른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어찌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흉물이 되어버렸단 말인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조용해져야 마땅하리라.”

한익범의 말이 끝나자 강물이 크게 요동쳤다. 뗏목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뗏목이 거칠게 흔들렸지만 다행히 사람들이 떨어지진 않았다.

한익범은 사람들의 비명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사또 나리~ 사또 나리~”

그 소리는 강가에서, 아니 강물 속에서 들리고 있었다. 한익범이 강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또 나리~ 억울하옵니다~”

“무엇이 억울하단 말이냐?”

한익범의 발이 강물 속으로 한 발, 두 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향이 그립습니다~ 만리 타향에서 돌아갈 길이 없사옵니다~”

“자세히 고하라.”

한익범은 우렁차게 소리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나오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은 사또가 왜 강으로 자꾸 걸어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용감한 나졸 하나가 한익범의 팔을 붙들었다.

“사또 나리, 왜 강으로 들어가십니까?”

“놓아라! 나를 부르고 있다!”

한익범이 팔을 뿌리치고 계속 강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무릎까지 물이 찼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초록색 뱀이 한익범의 허리를 감싸더니 강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익범이 용을 쓰며 강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초록색 뱀의 힘이 너무 강해서 결국은 강물 밖으로 끌려나오고 말았다.

“초록아, 수고했다.”

초록색 뱀이 한 소녀의 손목으로 올라가는 듯하더니 순간 초록색 팔찌로 변했다. 한익범은 자신이 꿈을 꾸는가 싶었다.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어? 어?…. 세책방 낭자 아닌가?”

초록색 팔찌를 차고 있는 소녀는 세책방의 목금이었다. 그 옆에 정 진사댁 백이 낭자도 함께 있었다.

“어찌 이곳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백이가 대답했다.

“물귀신들의 저주에 걸리셨습니다. 물속으로 빨려들어갈 뻔 하셨어요.”

“물귀신? 그럼 저 뗏목이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도 물귀신 때문인가?”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물귀신들이 화가 났어요.”

“무슨 일로 화가 났단 말이냐?”

“저 물귀신들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주러 온 명나라 군사들입니다.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30명 군사가 모두 수장되었지요.”


『고대일록』(1593년 10월 11일)에 있는 ‘명나라 군사 30명 익사(낙동강 도하 시)’ 기록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그럼 우리나라의 은인 아니더냐? 왜 지금 와서 해꼬지를 하는 것이냐?”

“물에 빠져 죽은 사공 때문입니다. 사공은 그동안 배삯을 조금씩 착복해 왔는데 그걸 들고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에 급히 배를 건너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배를 몰았는데, 그 사람의 행낭에 두둑한 엽전 꿰미가 있는 것을 보고 욕심이 동해 그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한익범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 마치 본 듯이 말하는구나.”

“강 속으로 사람의 피가 흘러내리자 깊이 잠들어있던 고혼들이 깨어났습니다. 그들은 명나라의 강남 사람들로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배를 모는 사공을 불러 고향으로 배를 저으라 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사공은 자기가 칼로 찔러 죽인 사람의 혼령이 복수를 하러 온 줄 알고 놀라서 죽고 말았습니다.”

“자업자득이었군.”

“낮이 되자 힘을 잃었던 고혼, 그러니까 물귀신들은 해가 지자 다시 깨어났습니다. 뗏목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붙들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물속으로 끌려들어가 죽고 만 것이군.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느냐? 아니, 그 전에 낭자는 대체 이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목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배씨 자매를 기억하시지요?”

“그럼, 기억하다마다.”

배씨 자매는 한익범이 망허촌에 사또로 처음 부임했을 때 만난 귀신들이었다.

“사공과 한 사람이 물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배씨 자매에게 내막을 알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군. 그럼 어찌 해야 하겠나? 여제를 크게 벌여 저 고혼을 위로해야 하겠나?”

백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봐야 잠깐 마음이 식을 뿐이겠죠. 결국은 또 고향에 가고 싶어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다시 인명 사고가 날 것입니다.”

“그렇군. 그럼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느냐?”

목금이 말했다.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나누기도 하지요. 우리가 죽으면 삼도천이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강은 모든 것을 이어주는 신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 하늘에 뜬 달은 모든 강에 비춘다고 하지요. 저희는 미르(용)님께 부탁하여 저 가련한 영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물 위로 소용돌이가 회오리바람처럼 하늘 끝까지 뻗어올라갔다. 마치 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놀라서 외쳤다.

“용오름이다!”

한익범이 말했다.

“그럼… 저것이….”

“네. 미르님께서 영혼들을 인솔해 떠나셨어요.”

“이제 안심해도 되는 것이겠구나. 낭자들에게 큰 은혜를 받았구나.”

한익범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자 백이가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우리 마을 일인 걸요.”

백이는 사또의 절에 너무 놀라 목금의 얼굴이 발그레해진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익범이 슬그머니 목금을 곁눈질 하는 것도 몰랐고.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소설 『정생, 꿈 밖은 위험해』,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유사역사학 비판』을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얼어붙은 한강을 배로 건너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5년 12월 6일

1715년 12월 6일. 오늘 엄경수는 서호로 행차에 나섰다. 날씨가 추워서 노량진에 얼음이 얼었고 양화진에는 떠도는 얼음덩이가 강을 덮고 있었다. 새로 언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서 밟고 건너기는 어려웠으며, 강을 떠도는 얼음덩이가 또한 배를 띄우기 어렵게 만들어서 원하는 데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양화진 하류에 당도하니 작은 배가 왕래하고 있었는데, 배에는 대여섯 사람 탈 수 있고 말은 실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말을 강촌에 맡겨두고 엄경수만 배에 올랐다.

뱃사공 둘이서 하나는 노를 젓고 하나는 뱃머리에 서서 나무 방망이로 얼음을 깨면서 길을 냈다. 이때 갑자기 조수가 밀려들며 강의 얼음덩이가 떠내려와서 소리가 마치 우레가 쿠르릉 쿠르릉 치는 것처럼 온 강에 울렸다. 배 안의 사람들이 술렁대자 뱃사공이 말하기를 “배가 강 가운데에서 얼음덩이를 만나면 배가 걸려서 나가지 않습니다. 마치 물고기 비늘이 겹겹이 포개지듯이 쌓여서 배보다 높아지고, 잘못하면 배는 그대로 얼음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침몰할 때도 있어 겨울철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내어 얕은 곳에서 고의로 배를 난파시키고 쌀을 횡령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10월 28일

1751년 10월 28일, 쌀 1289섬 8말 6되 9홉 9작, 팥 212섬 등의 곡물을 실은 선척이 보량간나미면(保良干羅味面) 강포(枉浦) 앞바다에 이르러 난파되었는데 건져낸 쌀이 1004, 팥이 212섬이고 건져내지 못한 쌀이 285섬 8말 6되 9홉 9작의 많은 수에 이르는데 사공 등은 한 명도 빠져 죽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감독관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으며, 사공들은 미리 60섬의 쌀을 취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연도(烟島)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가 그 곳에서 난파되었다면 이치에 맞을 듯도 하지만 백 리 큰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온전하다가 바람 없고 물 얕은 송포(松浦)에서 침몰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사공이 전부 살았고 선척도 그대로인데 건져내지 못한 수가 이미 이처럼 많다면 고의로 난파시킨 상황이 명백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남포(藍浦) 황죽도(篁竹島)의 난파사건에서도 빈 포대가 떠오른 것이 60개나 되었으며 선주 김두남(金斗南)은 애초부터 승선하지 않았고 선가(船價) 162섬을 청탁하여 쌀과 팥을 먼저 가져가 버리는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당시 뱃놈들이 간특한 꾀를 수없이 내서 국가의 곡식을 홈쳐먹고 고의로 난파시키는 상황이 허다하였다.

“강남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김성일, 경연일기(經筵日記),
1572년 1월 21일

오늘은 『중용혹문』을 강독했다. 강독이 마치자 유희춘은 어제 경연에서 제기한 조운 문제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오늘도 선조에게 조운선의 규격 문제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조운 운영의 문제는 총체적이었다.

유희춘은 조군(漕軍)의 폐단은 그들을 구휼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군의 생활이 어렵게 때문에 그들에게 일정한 특별 지원을 해 주면 충분히 자신의 직분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선박의 문제가 있었다. 선박은 조군 문제 해결과는 방향이 달랐다. 문제는 간단했는데 5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 아니면 1000석의 배를 건조할 것인지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다.

이때 검토관 윤탁연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도 1000석의 배를 시험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선박을 조운 운영에 그대로 쓰는 것에는 반대했다. 윤탁연은 배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전을 보면 1000석의 배가 운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았다. 하지만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중국의 강남은 조선과 달랐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1000곡(斛)을 날랐다고 하는데 1곡(斛)은 1석(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석(石)의 크고 작음이 강남과 우리나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년 7월 10일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더욱이 조정에서 엄중한 뜻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무리 법령에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나 건져서 말린 건열미는 새 쌀로 바꿔줘야 하고, 건지지 못한 쌀은 다시 걷어서 내야 하니 모두가 다 불쌍한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는 일 아닌가.

“노자 떨어진 나그네의 설움”

노상추,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1781년 6월 12일 ~ 1781년 6월 18일

노상추는 상주(尙州) 소속의 고마(雇馬, 빌린 말)와 마부(馬夫)에게 돈 300동을 주었다. 주머니에서 돈이 쑥 빠져나갔다.

상주 인근인 어곡참(魯谷站)에 이르자 마부가 노상추에게 말했다. “소인 주인집이 읍내인데, 여기서 10리밖에 안 됩니다. 또 관가에 바칠 편지도 있으니 오늘은 그쪽으로 들어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겠습니다.” 노상추는 마부가 집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온 것은 그 마부가 아닌 다른 어린 마부와 말이었다. 어쨌거나 마부와 말만 있으면 갈 수 있으므로 군소리 없이 길을 나섰는데, 낙동진(洛東津)에 다다르자 어린 마부는 돈을 주지 않으면 더 길을 갈 수 없다고 우겼다. 노상추가 서울에서 마부에게 준 300동의 돈은 여기까지 유효했다. 노상추가 지금은 돈이 없고, 집에 가서 돈을 더 줄 터이니 그러지 말고 선산까지 가자고 어린 마부를 달래 보았으나 그는 듣지 않고 노상추와 노상추의 짐을 버리고 돌아가 버렸다. 노상추는 결국 짐은 낙동진의 참막(站幕)에 맡겨둔 채로, 동행하던 이동식의 말과 마부를 빌려 와은참(臥隱站)까지 갔다. 와은참에서 노상추의 집까지는 10리 거리였다. 노상추는 땡볕 아래 10리를 걸어 겨우겨우 집에 도착하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작은 배를 만들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14년 4월 6일 ~ 1614년 4월 26일

1614년 4월 6일, 얼마 전 김광계는 작은 배를 한 척 만들기로 했다. 몇 년 전에 동네 사람들이 함께 탈 배가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했었다. 그러나 그 배는 마을 공동의 배라서 아무래도 불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는 서로 배를 타기 위해 아우성을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뱃사공이 보이지 않아 배를 탈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김광계는 따로 배를 한 척 갖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오래전부터 벼르기만 하다가 결국 조선소에 배를 만들어 달라고 해 놓았다.

4월 26일에 배가 완성되었다. 김광계는 집안 어른을 모시고 강에 나가서 완성된 배에 올라탔다. 노를 저어 강을 오르내리며 노래를 부르고 놀았다. 저마다 술을 가지고 와서 서로 권하여 크게 취한 채로 노닐다가 해가 지고 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사신과 공작새”

권문해, 초간일기(草澗日記),
1589년 7월 13일

1589년 7월 13일, 낙동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고을 사람들까지도 모여들기 시작하여 낙동강 주변에는 사람들도 가득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가득 모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작새 한 쌍’이다. 일본 국왕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현소(玄蘇)가 임금에게 바치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권문해도 그동안 그림과 책으로만 보았던 공작새를 실제 볼 수 있는 기회에 한달음에 낙동강으로 달려갔다.

권문해는 공작새의 모습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보았다. 공작새의 모습은 마치 꿩 같은 모습에 크기는 강가에 있는 학과 같았으며, 정수리 뒤에도 긴 털이 있고, 해오라기의 정강이와 닭의 부리를 하여 병풍 속에 보았던 공작새 모습 그대로였다. 공작새의 몸은 푸르고 검으며 사이사이 무늬가 있고, 긴 꼬리는 묵은 깃이 털갈이를 한 것이고 새로 나온 것은 아직 다 길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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