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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외교를 뒤흔든 말

인류와 말


말은 인간에게 매우 쓸모 있는 동물이다. 지금도 자동차가 낼 수 있는 힘을 표시할 때 마력(馬力, HP: Horse Power)라는 단위를 쓸 정도로 말은 힘이 세다. 또한 말은 가장 빠를 때는 시속 50km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빠르며, 하루에 길게는 100km까지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지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말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육상에서 인류의 교통과 수송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물이었다.


백마도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전주최씨 인재공파 재와종택 全州崔氏 訒齋公派 䏁窩宗宅)


고려 시대에도 물론 말은 중요한 자원이었다. 고려는 전국에 걸쳐 22개의 역도(驛道)를 설정하고, 『고려사』에 기재된 것만으로도 총 525개의 역을 설치하여 전국적으로 촘촘한 교통망을 구축해두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기록이지만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고려 때와 비슷한 수인 504개 역에 총 5,380필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 시대에도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의 군사들도 말을 탔다. 936년 후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에서 태조 왕건(王建)은 총 4만 명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한다. 그 수에는 얼마간의 과장이 있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군사적으로도 말을 적극 활용했음은 분명하다. 1107년에 여진 정벌을 위해 나섰던, 윤관(尹瓘)을 대장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의 주력 부대는 기병대인 신기군(神騎軍)이었다.

이처럼 교통과 운송, 의례와 군사 등 여러 방면에서 쓰였던 말은 고려가 주변국들과 교역했던 가장 중요한 물품의 한 가지이기도 했다. 특히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 그리고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말은 외교의 판 자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몽골제국과 말


13세기 초, 지금의 몽골 동부에서 작은 부족으로 시작한 몽골인들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대규모 정복과 팽창의 배경에는 변함없이 말이 있었다. 몽골 기병대는 가공할 만한 기동력과 위력을 선보이며, 나타나는 곳마다 적들을 무너뜨렸다. 이들은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쉬지 않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1231년부터 1259년까지 약 30년 동안 여러 번에 나누어 고려를 침공한 것도 거의 전원이 기마병이었다. 몽골제국이 강력한 기병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수의 말이 필요했다. 몽골제국 정부는 자신들이 차지한 유라시아 곳곳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양질의 말을 안정적으로 공급하였다. 그 가장 동쪽의 목마장이 제주도에 있었다.


제주마 (출처: 국가유산청)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이어진 삼별초(三別抄) 반란의 마지막 근거지는 제주도였다. 힘으로 이를 진압한 이후 몽골제국은 풍부한 초지와 맑은 물, 따뜻한 날씨 등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제주도를 자신들의 목마장으로 삼았다. 조선 초에 편찬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현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몽골제국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마장은 크게 두 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쪽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의 수산평(水山坪)과 서쪽의 한경면 고산리 일대인 차귀평(遮歸坪)이 그곳이다. 말과 함께 몽골어로 ‘하치’라고 하는 전문적인 목축 기술자들도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대로 그곳에 살며 몽골제국의 목축 기술과 문화를 제주도에 전파하였다. 이후 고려 정부는 협상 끝에 몽골제국으로부터 제주도의 관할권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제주도의 목마장과 거기서 자라나던 말의 소유권은 여전히 몽골 측이 차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제주 서귀포 성산읍 수산리와 한경면 고산리 일대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몽골어로 ‘하치’라고 하는 전문적인 목축 기술자들도 이주시켰다.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몽골제국이 제주도에 설치한 목마장은 크게 두 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쪽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의 수산평(水山坪)과 서쪽의 한경면 고산리 일대인 차귀평(遮歸坪)이 그곳이다. 말과 함께 몽골어로 ‘하치’라고 하는 전문적인 목축 기술자들도 이주해왔다.




명나라와 고려의 유산 상속 분쟁


1368년, 몽골제국은 중국 땅에서 밀려나 만리장성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제주도에 남겨진 목마장과 말, 그리고 하치, 그러니까 그 관리인들은 국적을 잃어버렸다. 고려 정부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이를 접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몽골제국을 몰아내고 새로운 중원의 주인이 된 명나라, 특히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몽골제국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과거 몽골제국이 소유하였던 모든 것은 마땅히 새 황조인 명나라의 소유로 승계되어야 한다.”라고 공언하였다. 제주도의 말도 그 일부였다. 1370년 공민왕은 재빨리 제주도 문제를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렸다. 공민왕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첫째, 제주도의 영토와 주민, 그리고 목마장과 그 관리인들은 고려가 접수, 관할한다. 둘째, 다만 거기서 생산되는 말은 일정 수를 명나라에 바치겠다. 이 합의안은 과거 오랫동안 고려와 몽골제국이 지켜온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민왕은 주원장에게 선수를 쳐서 제주도에 대한 전반적인 관할권을 확고히 하면서도, 명 측이 주장하는 몽골제국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일정 부분 인정하는 절충안을 내밀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일단 뚜렷한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1374년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이 해에는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한 엄청난 사건이 연달아 터졌는데, 그 일련의 사건들 한가운데에는 말이 있었다. 그해 4월, 주원장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약속한 말 2,000필을 보내오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 무렵 명나라는 북쪽으로 옮겨간 몽골제국의 잔여 세력들을 추격하며 전투를 이어가고 있었으니 최대한 많은 전투용 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그 공급처로 제주도를 떠올렸던 것이다. 명나라 사신이 개경에 머무르며 연일 재촉하는 사이, 제주도에 남아있던 몽골인 하치들은 말 징발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고려는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평정하였다. 최영(崔瑩)의 책임 하에 2만 5,605명에 달하는 대군이 제주도에 상륙하였다. 하치들은 밀리고 밀린 끝에 제주도의 남쪽 끝, 지금의 서귀포시 법환동 앞바다의 작은 섬인 범섬으로 도피했고, 끝내 거기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목호의 난)


1374년 목호(牧胡 하치)들이 말 징발을 거부하며 난을 일으키자, 최영은 2만 5천의 군사로 이들을 진압하였다.
목호들은 범섬(호도 虎島)로 물러나 끝까지 저항했다.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고려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명나라 사신단은 개경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평양에 머물고 있던 중, 공민왕이 시해당했다. 고려군이 온통 제주도에 파견되어 개성이 힘의 공백 상태에 놓인 와중이었다. 뒤이어 본국으로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은 압록강을 건넌 직후 고려 측 호송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공민왕 시해와 명 사신 피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은 고려와 명나라 관계를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이 모든 파국의 연쇄는 제주도의 말 문제에서 비롯되었고, 역설적으로 그 갈등을 풀어낼 열쇠 또한 제주도의 말에 달려 있었다. 결국 말은 단순한 교통수단이나 가축을 넘어, 고려 말 동아시아 정세를 뒤흔든 정치적·군사적 자원이자 역사의 무대 한가운데 놓여 있던 존재였다.




명의 고려 말 강탈


우왕 재위 기간(1374-88) 고려는 지독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전국을 휩쓸며 약탈을 일삼는 왜구(倭寇)의 출몰이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왜구의 침입은 14년 동안 총 378회에 달했는데, 단순히 계산하면 연평균 27회, 즉 한 달에 두 번 꼴로 침입해왔다는 뜻이었다. 단지 해안지역뿐만 아니라 개경의 코앞, 강화도 일대까지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그 와중에 새롭게 중원의 패자로 등극한 명나라는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명 태조 주원장은 자신이 파견했던 사신이 고려에서 변을 당한 사건, 그리고 공민왕이 시해당한 사건을 빌미로 삼아 고려를 정벌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을 일삼았다.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고려 지배층에게 주원장의 협박은 결코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명과의 외교 복원, 그를 통한 안전 보장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우왕은 즉위한 직후부터 명나라에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책봉이란 단지 의례적인 절차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다. 명이 고려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불가침 약속이기도 했다.

주원장은 책봉의 대가로 고려의 말을 요구했다. 그는 고려의 “성의를 시험하겠다.”며 매년 1천 필의 말을 무상으로 내놓으라고 했다. 애초에 ‘조공’이란 보내는 쪽에서 그 무엇을 얼마나 보낼지 정하는 것이 동아시아 외교에서 오랜 전통이었다. 그런데 주원장은 정확한 품목과 수량을 지목했던 것이다. 무척 당황한 고려는 그 부당함을 여러 번 강조했으나, 주원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협박의 수위를 높여갔다. 고려는 결국 주원장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 줄다리기 끝에 1384년, 고려는 말 5천 여 필을 명 측에 제공했다. 우왕이 책봉을 받은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 번 더 1천 필까지, 명은 최종적으로 고려로부터 말 6,299필을 무상으로 뜯어냈다.


명태조 주원장은 고려에 총 2만 5천여 필의 말을 빼앗다시피 거래해 갔다.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이 정도 수량은 고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는 조공의 액수를 줄여줄 것을 거듭 요청했다. 주원장은 앞으로는 3년에 한 번, 말 50필씩만 가져오라고 크게 인심을 썼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그는 1387년에는 5천 필, 그리고 13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1만 필 등 총 1만 5천 필의 말을 교역이라는 명목으로 고려에서 앗아갔다. 값은 물론 주원장 마음대로 정했는데, 시가보다 훨씬 낮은 금액이었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뒤, 1394년에도 주원장은 또 다시 말 1만 필 교역을 요구했다. 말로는 교역이었지만 공정한 거래,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거래는 아니었다. 그때부터 2년 동안, 서울에서 의주를 거쳐 요동으로 향하는 길은 조선에서 명에 보내는 말들의 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왜 하필 말이었을까?


말은 전근대 가장 강력한 무기의 하나였다. 과거 거의 모든 왕조의 개창자들이 그러했듯, 주원장 역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도 정복해야 할 천하가 남아있었다. 산해관(山海關) 너머 요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몽골제국의 잔당들도 말발굽으로 짓밟지 않고서는 굴복시키기 쉽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는 고려 역시 잠재적으로 적국, 최소한 경쟁국이 될 수도 있었다.

고려가 주원장에게 대거 말을 뜯긴 1380년대 말, 요동은 치열한 전쟁터였다. 고려에서 넘어간 말들은 당연히 전장에 투입되었다. 요동에서 몽골제국의 잔당들과 전투를 벌이던 명군이 타고 있던 말 가운데 상당수는 고려에서 건너간 것이었다. 1388년, 참다못한 고려는 요동 공격에 나섰다. 이성계(李成桂)가 이끌고 압록강가에 닿은 고려군에는 군사가 총 38,830명에 말이 총 21,682필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까지 고려가 명에 빼앗긴 말이 총 1만 1,299필이었으니, 만약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고려가 가용할 수 있는 기병대의 수는 1.5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이야 다 아는 대로이다. 고려군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공격 대상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왕실이 되었다. 고려 말은 적과 싸우기 위한 군사 자원이었지만, 동시에 내부 권력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말이 달리는 방향 하나가 왕조의 흥망을 갈랐던 것이다.


요동 벌판에서 원나라의 잔당들과 전투를 벌였던 명군의 말은 상당수 고려에서 건너간 것이었으며,
당시 말머리가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왕조의 흥망이 갈렸다. (출처: 공유마당, 저작자 midoba91)


몽골인들이 풀어서 키운 말, 주원장이 요구한 수천 필의 말, 제주 목장에서 끊임없이 실려 나간 말. 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말이 단순한 가축, 혹은 군사 자원이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핵심 교역품이었음을 말해준다. 몽골은 제국의 팽창을 말에 의존했고, 명은 고려를 상대로 말의 공급을 강제하거나 거래를 요구했다. 고려의 말은 전쟁터를 달리기도 했지만, 외교의 협상장에서도 중요한 카드로 기능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손에 쥐어진 고삐를 보면, 말은 권력의 수레를 이끄는 힘이었다.




집필자 소개

정동훈
정동훈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에서 미래의 초등학교 교사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고려시대 외교문서 연구』, 『황제의 말과 글 - 조선을 대하는 명나라 황제의 두 얼굴 -』 등의 책을 썼다. 한국과 중국 왕조 사이의 외교사, 역사의 기록이 만들어 전해지고 기억이 구성되는 과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새 말(馬)을 사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7년 1월 13일

김광계는 다른 양반들처럼 늘 말을 타고 다녔다. 제천 할아버지 댁을 갈 때도, 재종숙들 집에 갈 때도, 향교에 갈 때도, 서원에 갈 때도, 향시를 보러 갈 때도,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도 언제나 그는 그 말에 짐을 싣기도 하고, 타기도 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2년 전 겨울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말의 배까지 차디찬 물이 차올라서 김광계의 바지가 다 젖고, 말도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이십일 정도 지나서 김광계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서울로 가면서 그 말에다가 짐을 싣고 타고 갔었다. 그 때 말의 걸음이 매우 느려 같이 가던 친구들을 따라 가지 못하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길에 드러눕고 말아서 말고삐를 잡았던 하인과 김광계가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말을 전세내다”

미상, 을묘청의변(乙卯淸議辨),
1855년 8월 12일

1855년 8월 12일, 김수근의 서원을 안동에 세울려고 할 때의 일이다. 아침에 류치흠의 관사(館舍)에 갔더니, 자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어느 날 고향으로 출발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전세를 낸 말[馬]이 낭패가 되어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말을 구한다면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패로 말을 빌려 타며 임지로 가는 길”

금난수, 성재일기(惺齋日記),
1581년 12월 6일 ~ 1581년 12월 25일

금난수는 경안역(현 경기도 광주)에서 처남 조목과 사마시 급제 동기인 찰방 박길보(朴吉甫)를 만나 좋은 말을 지급받았다. 경안역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 이미 만족스러웠건만, 박길보는 다음에 금난수가 들른 덕풍역(현 경기도 하남시)에도 서리 김사호(金士浩)를 보내 금난수를 잘 대접해 줄 것을 연통해 놓았다. 이런 인맥 덕인지, 금난수는 들르는 역마다 매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천역, 유춘역, 가흥역을 지나 연원역(현 충청북도 충주)에서도 찰방 민의(閔椅)가 금난수를 반기며 고급 등급의 말과 말구종을 지급해 주었다.

좋은 말을 탄 덕에 피로감 없이 창락역(현 경상북도 영주시)까지 온 금난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고 말 먹이만을 먹인 뒤, 집까지 곧바로 달렸다. 12월 6일에 출발하여 약 이레 만에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의를 불러 말의 병을 치료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8년 5월 2일

1608년 5월 2일, 김광계는 종을 불러 말(馬)의원을 불러 오라고 일렀다. 지난달 21일에 김광계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박기원과 홍차회를 만나고 서원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다행히 김광계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서원에 도착하자마자 술이라도 마시려 했었다.

그 후에도 말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의원을 부르려다가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루면서 그냥 타고 다니기엔 불안해서 말의원을 부른 것이다.

“온 식구와 새해를 맞이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1월 1일

1598년 1월 1일, 오늘은 무오년 새해가 밝는 날이다. 동이 트기 전에 아우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부모와 조부모, 죽전숙부모에게 제사를 모두 지낸 다음, 작년 죽은 딸아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집에 종과 말이 없어 성묘를 드리지 못하니 한스러웠지만, 그나마 사당에서 온 식구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세 가지 색의 육탕과 네 가지의 어육 구이, 포, 혜, 오색 과일, 떡, 면을 준비해 지냈다. 전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갖추어진 제사상이었다.

늦은 오후에 사람들이 와서 새해의 덕담을 건넸다. 오는 사람마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판관 최중운과 참봉 최경수 및 그 두 아들이 찾아왔기에 술과 음식을 대접해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희문은 과음을 하여 저녁에 구토까지 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과음하여 구토까지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잠에 들면서 오희문은 올해 무오년은 작년처럼 슬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마흔 한 살 설날을 맞이하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2년 1월 1일

1712년 1월 1일. 올해 엄경수는 마흔한 살이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마흔 살을 마치 노인처럼 여겼는데, 고개를 둘러보니 40살을 먹었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쉰 살에 9년이 모자라는 나이였다. 스스로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살이 새삼 놀라웠다.

예전 성인의 말씀에, ‘마흔 살, 쉰 살이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 또한 끝일 뿐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경수는 명성이 알려진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엄경수 역시 그저 그런 변변치 못한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씁쓸하면서도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그칠 뿐이란 말인가!

“소머리 굽고 노래하며 질펀하게 보낸 새해”

김성탁, 제산일기(霽山日記),
1732년 1월 2일

천연두 때문에 온 동네에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슬픈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해맞이의 힘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함께 모여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즐기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울한 얼굴로 다니던 김성탁(金聖鐸) 역시 운곡의 이호 형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왁자한 분위기 덕에 조금씩 웃음을 찾아 갔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호 형 집의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수십 명의 손님들이 들어찬 사랑방에는 등잔불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종들이 바삐 내어오는 상들 위에는 쇠머리를 구운 고기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준비했는지, 어느 손님이 가져왔는지 촌 막걸리도 있었는데 그 시큼한 맛이 고기와 잘 어우러졌다. 술이 들어가자 다들 불콰한 얼굴로 서로 노래를 시켰다. 서로 주고받는 노래의 흥이 모두의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려 주었다. 하지만 김성탁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술에 취해 종종 광대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설한 말을 섞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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