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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감독이 말하는 말 이야기

사극에는 왜 말이 필요할까?


붉은 말의 해. 사극을 만드는 감독으로서 왠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사극에서 말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고증을 따지기 전에 화면만 봐도 그렇습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나타나지 않으면 왠지 카리스마가 덜하고, 병사들이 말을 타고 돌진하지 않는 전투 신은 뭔가 김이 샙니다. 역마를 타고 달려오는 전령이 있어야 긴박감이 살아납니다. 한마디로 ‘말 없는 사극은 말이 안 되는 사극’인 것입니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촬영 현장 (출처: 필자 제공)


역사적으로도 말은 참으로 중요했습니다. 전쟁터에서 말이 주는 우세는 절대적이어서 훌륭한 기병이 있느냐 없느냐가 승패를 가르곤 했지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서도 전장에 뒤늦게 도착한 김종현 장군의 1만 기병이 승패를 반전시켰듯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말을 국가 전략물자로 취급해 함부로 도축하지 못하게 했고, 고사에는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천금을 주고 죽은 말의 뼈까지 샀다는 일화(千金買骨)도 있습니다. 말은 단지 탈것이 아니라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왕부터 무장까지, 누구나 위엄을 보이려면 말 위에 올라타야 했습니다. 신라 시대에는 말 장식에 골품 신분제가 적용되어 진골 귀족은 금으로 된 장식을, 6두품은 놋쇠와 구리, 5품은 이하는 나무나 쇠로 된 것을 했다고 하죠.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출처: 필자 제공)



“말이 말을 안 듣는다”


이처럼 실제 역사적인 중요성과 더불어, 전투 장면의 박진감과 인물들 간의 신분 관계까지 보여주는 ‘말’. 그런데 말입니다. 말은 그 중요도만큼 촬영 현장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존재이기도 합니다. “말이 말을 안 듣는다!” 촬영 현장에서 농담처럼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말을 안 듣는 말이 등장하면 현장에서는 마냥 웃어넘기지 못합니다. 촬영 현장에서는 말 그대로 시간이 돈입니다. 특히 말이 등장하는 정도의 씬이라면 전투 씬 혹은 그보다 더 큰 전쟁 씬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하루에 수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여됩니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찍는 것 그리고 하루라도 덜 찍는 것이 사극 촬영의 숙명이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주인공의 장엄한 대사 중간에 똥을 싸지 말라고 한들 말이 말을 들을 리 없지요. 저물녘에 맞춰 산 능선에 멋들어지게 일렬로 서보라고 한들 눈앞에 있는 풀을 뜯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듣지 않는 말을 만나 촬영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져버린다면 이제 농담은 공포로 바뀌게 됩니다. 아직 다 찍지 못한 장면들이 많기에 스텝들은 발을 동동 구릅니다.


말을 안아 주는 최수종 배우 (출처: 필자 제공)


하지만 이럴 때 촬영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첫째도 배려, 둘째도 배려입니다. 말은 인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기에 더욱 배려하고 기다려줘야 합니다. 촬영의 완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전이기 때문입니다. 말과의 촬영을 서둘렀다가는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과 함께하는 촬영 현장에서는 ‘동물 촬영 시의 방송제작가이드라인’을 준수하기 위해 철저한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고 오직 말이 잘하도록 배려하고 기다립니다. 조급한 감독의 등줄기에 식은땀은 계속 흐르지만 우리는 말을 기다려 줘야 합니다.

그런데 연륜 있는 배우님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말을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말의 기분까지 배려하는 것입니다. 사극 촬영의 베테랑 중 베테랑이신 최수종 배우님께서는 촬영 전에 자신이 탈 말을 껴안고 쓰다듬으시며 말의 흥을 돋워주십니다. 소배압 장군을 연기하신 김준배 배우님은 말을 쓰다듬으며 “전우죠. 전우.”라며 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말 타는 사람과 정서적으로 교감할 줄 아는 게 바로 말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우’를 쓰다듬는 김준배 배우 (출처: 필자 제공)


그런데 발해를 세우신 최수종 배우님만큼(농담입니다!) 고구려의 중흥을 이룩하신 광개토 태왕도 말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여겼나 봅니다. 당시 고구려의 대표 수출품은 다름 아닌 ‘말’이었습니다. 408년, 광개토태왕은 남연(南燕)에 천리마를 수출하며 동시에 천리인(千里人) 10명도 함께 보냈습니다. 한번 달리면 천리를 달린다는 고구려의 명마, 천리마와 그 말을 타고 천리를 한달음에 달릴 수 있는 천리인은 하나의 팀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천리마는 속도가 빨라서가 아니라 지구력이 강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 그 머나먼 장거리를 끊임없이 달릴 수 있는 말. 그 말이 꾸준히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천리안과 훌륭한 팀워크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사극 촬영 역시 천릿길만큼 먼, 수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입니다. 최수종 배우님이 감싸 안았던 그 말도 최수종 배우님과 함께 그 오랜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기병 전투를 도대체 어떻게 했단 말인가.
- 중장기병과 개마무사


제가 연출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김종현 장군의 중장기병 부대가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여 극의 판도를 바꿉니다. 이 장면에서는 고구려부터 유구하게 이어져 온 개마무사鎧馬武士를 재현하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습니다.

개마무사는 말과 무사가 온몸에 쇠갑옷을 두른 최정예 돌격대, ‘인간 말’이 이룬 일종의 탱크라고 할 수 있지요. 중국이나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가 이 개마무사였다고 합니다. 실제 기록을 보면 3세기 동천 태왕 때 고구려가 철기병 5천, 즉 개마무사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 군대를 대파한 일이 있습니다.


돌격 직전 뿔나팔을 부는 김종현 장군 (출처: 필자 제공)


드라마 속 김종현 부대 개마무사 형식의 중장기병으로 묘사됩니다. 온몸을 철갑으로 두르고 뿔나팔 소리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내달리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감독 자신도 압도될 정도였습니다. 특히 말들에게 풀세트 갑옷을 입히고, 동시에 철갑옷을 입은 개마무사들이 마삭馬槊(개마무사의 장창)을 들고 돌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준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실 사극 전투 씬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은 실제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 과정 중 내내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기병 전투를 도대체 어떻게 했단 말인가.’였습니다. 실제 김종현 장군 부대의 규모는 무려 1만. 1만의 기병을 육성하고 운용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었습니다.

우선 말들에게 갑옷을 입히는 것부터가 큰일이었습니다. 말들이 갑옷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실제 철이 아닌 가벼운 갑옷을 특별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말들이 처음엔 이런 차림을 몹시 낯설어해서 갑옷 자체를 입지 않으려고 하고, 입혀놔도 벗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므로 갑옷에 익숙해지기 위해 전문 사육사를 통해 적응 훈련을 여러 날 시켰습니다. 이것은 최대한 말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촬영을 위한 필수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말의 안전을 위해 말 머리에 쓰는 말 투구는 아쉽지만 포기하였습니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말의 안전과도 직결되므로 과감히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장창도 문제였습니다. 장창을 들고 연기하는 분들은 전문 스턴트 배우님들이었지만 연습하실 때부터 힘겨워하셨습니다. 고구려군의 마삭은 평균 길이가 약 5미터에 달하는 것을 고려하여 기존 장창보다 길게 만들었거든요. 길이만큼 무거워지니 말을 타고 장창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 훈련 역시 여러 날이 소요되었습니다. 휘두르다가 자칫하면 주변 배우들을 다치게 할 수 있었으니까요. 전장이었다면 아군을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창을 들고 촬영 준비를 하는 전문 스턴트 배우 (출처: 필자 제공)


아쉬웠던 점은 역사 고증이었습니다. 고구려와 고려 시대의 말은 오늘날 사극 촬영에 동원되는 말과 품종부터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2009년 경주 쪽샘 지구에서 출토된 5세기 신라 말 갑옷을 통해 유추해보면 고대 전투마의 어깨높이는 대략 120~136㎝로 지금의 몽골 말 정도의 작은 크기였습니다.


쪽샘 지구 말 갑옷 재현품 (출처: 필자 제공)


중국의 역사서에도 ‘고구려에는 높이 석 자쯤 되는 말이 나오는데 주몽이 탔던 말이 퍼진 것이라 하며 과하마라 부른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과하마果下馬란 말을 탄 사람이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키의 말입니다.

과하마는 지금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말이나 몽골 말을 통해 존재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키 125~130cm 남짓의 다부진 체구에 지구력이 뛰어난 말이었고 실제 역사 기록에도 그들은 성질이 온순하고 강인해서, 쉬지 않고 장거리를 달리는 데 적합했다고 합니다.

반면 지금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는 말들은 대부분 서양종으로 비교적 더 크고 날씬한 말입니다. 화면에는 큰 말이 더 위엄 있어 보이기도 하고, 국내 승마장에서 관리되는 말들이 서양종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렇게 된 건데요. 고증을 따지자면 사실 드라마 속 개마무사 기병단에 서양말이 있는 건 아쉬운 그림입니다.

어찌 됐든 이렇게 저희가 갑옷 적응 훈련을 마치고, 무술 훈련을 끝내서 준비한 말은 최종적으로 고작 스무 마리! 귀주대첩 때 적진에 쇄도하여 기울어지던 전쟁의 판도를 바꾼 김종현의 기병대는 무려 1만이었습니다. 스무 마리에도 진땀을 뺀 우리로선 도대체 1만의 기병을 어찌 준비하고 훈련했을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만의 기병을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빈 화면을 CG로 채워 웅장함을 더 했습니다.


CG 작업 전 실제 촬영 영상 (출처: 필자 제공)

CG 작업 과정 (출처: 필자 제공)

CG와 색보정 작업 후 완성 영상 (출처: 필자 제공)


이렇게 어렵게 준비한 말 씬 촬영은 그 덕목인 기다림, 배려 그리고 공감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끝이 났습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사고 없이 끝났습니다. 그런데 촬영하며 실제로 말들을 운용해보니 마음 한쪽 구석에 드는 의문은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어떻게 기병 전투를 했을까. 불가능한 일 아닌가 이거!’

귀주 벌판, 적군과 아군 30만 명이 뒤엉킨 실제 전쟁터에서 1만의 말들을 운용하는데 기다림, 배려, 공감이 과연 먹혔을까. 쪽샘 지구의 말 갑옷에 따르면 740장의 철 조각으로 이뤄진 36㎏의 갑옷인데 그 무거운 걸 어떻게 말에게 씌워서 훈련했을까. 그것도 투구까지 씌워서 말이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운용했으면 1만의 말들이 일사불란하게 전장을 누볐을까. 촬영 현장과 달리 우리 선조들은 무전기도 없지 않았나!




붉은 말의 해, 멈추지 않고 달린다. Show must go on!


이해할 수 없고,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끊임없이 해보는 것. 이것이 우리 제작진이 만드는 드라마이고 쇼입니다. 말은 달려야 말답듯이 올해 붉은 말의 해를 맞아, 저 역시 감독으로서 멈추지 않고 불가능에 도전하리라는 다짐을 해봅니다. Show must go on! 이니까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말을 관리했던 마구간 지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길러낸 말 중 으뜸은 다름 아닌 붉은 말이었습니다. 주몽은 그 붉은 말을 타고 남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새웠습니다. 주몽에게 붉은 말은 새로운 나라의 시작이었듯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모든 분을 병오년 붉은 말의 해가 응원하길 빕니다.




집필자 소개

김한솔
김한솔
2004년 KBS에 입사한 공채 30기 PD. 《역사스페셜》, 《한국사 전》 등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팩츄얼드라마 《임진왜란 1592》,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등 드라마를 만들었다. 현재는 KBS에서 독립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볼 수 있는 사극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시대 특수부대 관련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2017년 한국방송대상 대상, 2017년 뉴욕 TV & 필름 페스티벌 작품상 금상, 2017년 휴스턴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2016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그리메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새 말(馬)을 사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7년 1월 13일

김광계는 다른 양반들처럼 늘 말을 타고 다녔다. 제천 할아버지 댁을 갈 때도, 재종숙들 집에 갈 때도, 향교에 갈 때도, 서원에 갈 때도, 향시를 보러 갈 때도,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도 언제나 그는 그 말에 짐을 싣기도 하고, 타기도 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2년 전 겨울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말의 배까지 차디찬 물이 차올라서 김광계의 바지가 다 젖고, 말도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이십일 정도 지나서 김광계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서울로 가면서 그 말에다가 짐을 싣고 타고 갔었다. 그 때 말의 걸음이 매우 느려 같이 가던 친구들을 따라 가지 못하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길에 드러눕고 말아서 말고삐를 잡았던 하인과 김광계가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말을 전세내다”

미상, 을묘청의변(乙卯淸議辨),
1855년 8월 12일

1855년 8월 12일, 김수근의 서원을 안동에 세울려고 할 때의 일이다. 아침에 류치흠의 관사(館舍)에 갔더니, 자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어느 날 고향으로 출발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전세를 낸 말[馬]이 낭패가 되어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말을 구한다면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패로 말을 빌려 타며 임지로 가는 길”

금난수, 성재일기(惺齋日記),
1581년 12월 6일 ~ 1581년 12월 25일

금난수는 경안역(현 경기도 광주)에서 처남 조목과 사마시 급제 동기인 찰방 박길보(朴吉甫)를 만나 좋은 말을 지급받았다. 경안역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 이미 만족스러웠건만, 박길보는 다음에 금난수가 들른 덕풍역(현 경기도 하남시)에도 서리 김사호(金士浩)를 보내 금난수를 잘 대접해 줄 것을 연통해 놓았다. 이런 인맥 덕인지, 금난수는 들르는 역마다 매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천역, 유춘역, 가흥역을 지나 연원역(현 충청북도 충주)에서도 찰방 민의(閔椅)가 금난수를 반기며 고급 등급의 말과 말구종을 지급해 주었다.

좋은 말을 탄 덕에 피로감 없이 창락역(현 경상북도 영주시)까지 온 금난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고 말 먹이만을 먹인 뒤, 집까지 곧바로 달렸다. 12월 6일에 출발하여 약 이레 만에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의를 불러 말의 병을 치료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8년 5월 2일

1608년 5월 2일, 김광계는 종을 불러 말(馬)의원을 불러 오라고 일렀다. 지난달 21일에 김광계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박기원과 홍차회를 만나고 서원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다행히 김광계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서원에 도착하자마자 술이라도 마시려 했었다.

그 후에도 말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의원을 부르려다가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루면서 그냥 타고 다니기엔 불안해서 말의원을 부른 것이다.

“온 식구와 새해를 맞이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1월 1일

1598년 1월 1일, 오늘은 무오년 새해가 밝는 날이다. 동이 트기 전에 아우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부모와 조부모, 죽전숙부모에게 제사를 모두 지낸 다음, 작년 죽은 딸아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집에 종과 말이 없어 성묘를 드리지 못하니 한스러웠지만, 그나마 사당에서 온 식구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세 가지 색의 육탕과 네 가지의 어육 구이, 포, 혜, 오색 과일, 떡, 면을 준비해 지냈다. 전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갖추어진 제사상이었다.

늦은 오후에 사람들이 와서 새해의 덕담을 건넸다. 오는 사람마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판관 최중운과 참봉 최경수 및 그 두 아들이 찾아왔기에 술과 음식을 대접해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희문은 과음을 하여 저녁에 구토까지 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과음하여 구토까지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잠에 들면서 오희문은 올해 무오년은 작년처럼 슬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마흔 한 살 설날을 맞이하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2년 1월 1일

1712년 1월 1일. 올해 엄경수는 마흔한 살이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마흔 살을 마치 노인처럼 여겼는데, 고개를 둘러보니 40살을 먹었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쉰 살에 9년이 모자라는 나이였다. 스스로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살이 새삼 놀라웠다.

예전 성인의 말씀에, ‘마흔 살, 쉰 살이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 또한 끝일 뿐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경수는 명성이 알려진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엄경수 역시 그저 그런 변변치 못한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씁쓸하면서도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그칠 뿐이란 말인가!

“소머리 굽고 노래하며 질펀하게 보낸 새해”

김성탁, 제산일기(霽山日記),
1732년 1월 2일

천연두 때문에 온 동네에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슬픈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해맞이의 힘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함께 모여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즐기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울한 얼굴로 다니던 김성탁(金聖鐸) 역시 운곡의 이호 형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왁자한 분위기 덕에 조금씩 웃음을 찾아 갔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호 형 집의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수십 명의 손님들이 들어찬 사랑방에는 등잔불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종들이 바삐 내어오는 상들 위에는 쇠머리를 구운 고기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준비했는지, 어느 손님이 가져왔는지 촌 막걸리도 있었는데 그 시큼한 맛이 고기와 잘 어우러졌다. 술이 들어가자 다들 불콰한 얼굴로 서로 노래를 시켰다. 서로 주고받는 노래의 흥이 모두의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려 주었다. 하지만 김성탁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술에 취해 종종 광대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설한 말을 섞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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