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혼돈이 고비를 넘고 있어서인지 겨울은 유난히 길게만 느껴집니다. 하지만 붉은 온기는 언 땅을 녹이고 있습니다. 24절기 가운데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立春)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농민들은 겨울 동안 사용하지 않던 쟁기, 호미, 낫, 괭이 등을 꺼내 녹을 제거하고 손잡이를 고치고 날을 갈기 시작합니다. 벼, 보리, 콩, 조의 종자를 골라내고 볕에 말리거나 소금물에 담가 상태를 점검합니다. 논둑과 밭두렁이 무너진 곳을 고치고 물길을 정비하지요. 이번 144호에는 붉은 말이 질주하는 봄을 마중하며 《웹진 담談》은 입춘(立春)과 ‘붉은 말의 질주’를 주제로 다채로운 글들을 준비했습니다.
단순한 가축을 넘어 동아시아의 운명을 쥔 열쇠 ‘말馬’의 이야기를 아시나요? 정동훈 선생님은 고려 말, 말이 외교와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전략 자원이었음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몽골이 제주에 남긴 목마장과 명나라 주원장의 가혹한 공마 요구는 고려를 막다른 길로 내몰았습니다. 급기야 무리한 말 징발은 위화도 회군과 왕조 교체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죠. 묵직한 말발굽 소리가 어떻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었는지, 그 치열했던 외교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말이 말을 안 듣는다!” 사극 촬영장의 처절한 비명, 들어보셨나요? 〈고려거란전쟁〉의 김한솔 PD가 붉은 말의 해를 맞아 생생한 촬영 뒷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수억 원의 제작비보다 중요한 것은 말과의 ‘교감’이었다는 진솔한 고백부터, 고작 20마리의 말을 1만 중장기병으로 재탄생시킨 CG 마법까지 사극 제작 현장의 말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Show must go on”을 외치며 불가능에 도전하는 제작진의 땀방울, 그 속에서 우리 선조들의 위대한 기마술을 다시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내 말을 좀 들어봐!” 숲속에 떨어진 붉은 말의 머리가 말을 겁니다. 자신은 주몽을 태우고 고구려를 세웠고, 김유신의 칼에 목이 베였으며, 이성계의 화살보다 빨라 또 목이 달아났다고 하네요. 역사 속 왕들을 태웠지만 억울하게 목이 잘려야 했던 수다쟁이 붉은 말의 진짜 사연은 무엇일까요? 이문영 작가님의 상상력으로 되살아난 전설 속 명마의 비하인드 스토리! 두 소녀의 야무진 바느질로 목을 되찾은 붉은 말의 마지막 비행, 그 유쾌하고 따뜻한 판타지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말은 지금의 ‘슈퍼카’이자 성공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정도희 선생님은 과거 급제 후 금의환향하던 영광의 순간부터, 툭하면 드러눕는 '똥차' 같은 말 때문에 진창에 구른 선비들의 웃픈 드라이빙 수난기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마구간 화재 때 말보다 사람을 먼저 챙긴 공자의 일화는 물질만능주의를 질주하는 우리에게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인생이라는 거친 도로 위, 오만에 빠지지 않고 고삐를 단단히 잡는 법! 선비들의 지혜 속에서 안전 운전의 길을 찾아보세요.
독 선생의 모습은 엉뚱하면서도 뭉클합니다. 평생 대감마님의 말고삐를 쥐었던 말똥이는 휘영청 밝은 달밤, 말 등에 올라타 환상적인 질주를 시작합니다. 겉모습보다 마음을 먼저 볼 줄 알았던 이 낭만 선비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은영 작가님이 선사하는 몽환적이고 따뜻한 달밤의 동화, 그 벅찬 감동을 만나보세요.
무대 위 거대한 인형 말이 전하는 전율, 연극 〈워 호스〉를 아시나요? 이수진 선생님은 전쟁의 포화 속 피어난 소년과 말의 우정, 그리고 6.25 전쟁의 숨은 영웅 ‘레클리스(아침해)’를 소개합니다. 홀로 탄약을 나르며 전장을 누빈 레클리스의 용기는 뭉클함을 주지만, 은퇴 후 갈 곳 잃은 오늘날 경주마들의 현실은 뼈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붉은 말의 해, 말은 힘차게 달리고 사람은 잠시 숨을 고르는, 서로에게 다정한 한 해가 되길 바라는 따뜻한 시선을 만나보세요.
봄은 곧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올 것입니다. 항상 정확하게 이 세상과 우주에 새로운 시간과 변화가 펼쳐지는 것이 그저 신비로울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새로운 봄을 마중 나가는 마음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써 내려간 정지용(鄭芝溶) 시인의 〈향수〉를 시(詩) 선물로 배달합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향수》 -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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