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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서은경
서은경
만화가. 1999년 서울문화사 만화잡지공모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간 지은 책으로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만화 천로역정』, 『만화 손양원』 등이 있으며, 『그래서 이런 명화가 생겼대요』, 『초등학생을 위한 핵심정리 한국사』 등에 삽화를 그렸다.
● 제5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담임멘토
● 제6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전문심사위원
● 제7회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 면접심사위원
“새 말(馬)을 사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7년 1월 13일

김광계는 다른 양반들처럼 늘 말을 타고 다녔다. 제천 할아버지 댁을 갈 때도, 재종숙들 집에 갈 때도, 향교에 갈 때도, 서원에 갈 때도, 향시를 보러 갈 때도,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도 언제나 그는 그 말에 짐을 싣기도 하고, 타기도 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2년 전 겨울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말의 배까지 차디찬 물이 차올라서 김광계의 바지가 다 젖고, 말도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이십일 정도 지나서 김광계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서울로 가면서 그 말에다가 짐을 싣고 타고 갔었다. 그 때 말의 걸음이 매우 느려 같이 가던 친구들을 따라 가지 못하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길에 드러눕고 말아서 말고삐를 잡았던 하인과 김광계가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말을 전세내다”

미상, 을묘청의변(乙卯淸議辨),
1855년 8월 12일

1855년 8월 12일, 김수근의 서원을 안동에 세울려고 할 때의 일이다. 아침에 류치흠의 관사(館舍)에 갔더니, 자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어느 날 고향으로 출발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전세를 낸 말[馬]이 낭패가 되어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말을 구한다면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패로 말을 빌려 타며 임지로 가는 길”

금난수, 성재일기(惺齋日記),
1581년 12월 6일 ~ 1581년 12월 25일

금난수는 경안역(현 경기도 광주)에서 처남 조목과 사마시 급제 동기인 찰방 박길보(朴吉甫)를 만나 좋은 말을 지급받았다. 경안역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 이미 만족스러웠건만, 박길보는 다음에 금난수가 들른 덕풍역(현 경기도 하남시)에도 서리 김사호(金士浩)를 보내 금난수를 잘 대접해 줄 것을 연통해 놓았다. 이런 인맥 덕인지, 금난수는 들르는 역마다 매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천역, 유춘역, 가흥역을 지나 연원역(현 충청북도 충주)에서도 찰방 민의(閔椅)가 금난수를 반기며 고급 등급의 말과 말구종을 지급해 주었다.

좋은 말을 탄 덕에 피로감 없이 창락역(현 경상북도 영주시)까지 온 금난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고 말 먹이만을 먹인 뒤, 집까지 곧바로 달렸다. 12월 6일에 출발하여 약 이레 만에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의를 불러 말의 병을 치료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8년 5월 2일

1608년 5월 2일, 김광계는 종을 불러 말(馬)의원을 불러 오라고 일렀다. 지난달 21일에 김광계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박기원과 홍차회를 만나고 서원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다행히 김광계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서원에 도착하자마자 술이라도 마시려 했었다.

그 후에도 말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의원을 부르려다가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루면서 그냥 타고 다니기엔 불안해서 말의원을 부른 것이다.

“온 식구와 새해를 맞이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1월 1일

1598년 1월 1일, 오늘은 무오년 새해가 밝는 날이다. 동이 트기 전에 아우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부모와 조부모, 죽전숙부모에게 제사를 모두 지낸 다음, 작년 죽은 딸아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집에 종과 말이 없어 성묘를 드리지 못하니 한스러웠지만, 그나마 사당에서 온 식구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세 가지 색의 육탕과 네 가지의 어육 구이, 포, 혜, 오색 과일, 떡, 면을 준비해 지냈다. 전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갖추어진 제사상이었다.

늦은 오후에 사람들이 와서 새해의 덕담을 건넸다. 오는 사람마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판관 최중운과 참봉 최경수 및 그 두 아들이 찾아왔기에 술과 음식을 대접해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희문은 과음을 하여 저녁에 구토까지 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과음하여 구토까지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잠에 들면서 오희문은 올해 무오년은 작년처럼 슬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마흔 한 살 설날을 맞이하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2년 1월 1일

1712년 1월 1일. 올해 엄경수는 마흔한 살이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마흔 살을 마치 노인처럼 여겼는데, 고개를 둘러보니 40살을 먹었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쉰 살에 9년이 모자라는 나이였다. 스스로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살이 새삼 놀라웠다.

예전 성인의 말씀에, ‘마흔 살, 쉰 살이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 또한 끝일 뿐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경수는 명성이 알려진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엄경수 역시 그저 그런 변변치 못한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씁쓸하면서도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그칠 뿐이란 말인가!

“소머리 굽고 노래하며 질펀하게 보낸 새해”

김성탁, 제산일기(霽山日記),
1732년 1월 2일

천연두 때문에 온 동네에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슬픈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해맞이의 힘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함께 모여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즐기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울한 얼굴로 다니던 김성탁(金聖鐸) 역시 운곡의 이호 형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왁자한 분위기 덕에 조금씩 웃음을 찾아 갔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호 형 집의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수십 명의 손님들이 들어찬 사랑방에는 등잔불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종들이 바삐 내어오는 상들 위에는 쇠머리를 구운 고기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준비했는지, 어느 손님이 가져왔는지 촌 막걸리도 있었는데 그 시큼한 맛이 고기와 잘 어우러졌다. 술이 들어가자 다들 불콰한 얼굴로 서로 노래를 시켰다. 서로 주고받는 노래의 흥이 모두의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려 주었다. 하지만 김성탁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술에 취해 종종 광대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설한 말을 섞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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