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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조선 선비들의 ‘드라이빙’에서
인생을 배우다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으로 육십간지 중 ‘붉은 말[赤馬]’의 해다. 예로부터 붉은 말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성을 상징해 왔다. 현대인에게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사회적 지위와 개성을 나타내듯,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말[馬]은 그와 동일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들은 말 위에서 출세의 기쁨을 만끽했고, 때로는 말 때문에 진흙탕에 구르기도 했으며, 말 한 필에 목숨을 걸기도 했다. 병오년을 맞아 옛 기록 속에 남겨진 말발굽 소리를 따라가 보자.

옛날 말[馬]의 가치를 현대의 물건과 비교하자면 단연코 ‘자동차’다. 2025년 기준 우리나라의 자동차 누적 등록대수는 약 2,600만 대에 이른다. 인구가 5,100만 명이니, 국민 2명당 1대꼴로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운전이 불가능한 인구를 제외하면 성인 대부분이 ‘오너 드라이버’인 시대다. 현대인의 일상에서 자동차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듯, 옛사람들에게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은 필수적인 이동 수단이자 중요한 자산이었고, 나아가 신분을 드러내는 사치품이기도 했다.

동양 고전의 정수 『논어』에도 이러한 말의 위상은 자주 등장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을 때, 호방한 성격의 자로(子路)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수레와 말과 값비싼 갖옷을 친구들과 함께 사용하다가 닳아서 해지더라도 유감이 없었으면 합니다.[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이를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페라리나 포르쉐 같은 슈퍼카를 타고, 에르메스나 구찌 같은 명품 옷을 입은 채 친구들과 어울리다 차에 흠집이 나거나 옷이 찢어지더라도 쿨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자로가 말한 ‘수레와 말’은 오늘날의 최고급 세단이나 스포츠카에 해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차(말)를 친구와 공유하며 호기를 부리는 것은 사내대장부의 로망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자로의 호기로움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은 스승 공자의 태도였다. 『논어』 「향당」 편에는 공자의 집 마구간에 불이 났을 때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공자는 조정에 있다가 마굿간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조정에서 퇴근하고 이렇게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느냐?”, 그리고 정작 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傷人乎, 不問馬]

공자가 이렇게 말한 것은 말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당시 말은 집안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귀한 보물이었지만, 공자에게는 그 어떤 재산보다 ‘사람’의 안전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최고급 세단이 주차장에서 불타고 있는데 차 상태보다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안부를 먼저 묻는 격이니, 공자의 인본주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또한 과거에는 “말을 가진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일을 사관의 기록에서 보았는데, 지금은 그런 풍속이 없어졌구나!”라며 각박해지는 세태를 한탄하기도 했다. “차와 칫솔은 빌려주는 게 아니다”라는 현대의 불문율처럼, 당시에도 자신의 애마를 남에게 내어주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자가 그리워한, ‘믿고 말을 빌려주던 시대’는 아마 요순시대일 것이다. 요순시대에는 길에 돈이 떨어져 있어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아마 자신의 귀중한 재산인 말 또한 타인에게 쉽게 빌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공자가 살던 시대에 말은 현재 자동차와 같이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말의 가치는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공자의 사례보다 오히려 조선의 선비들이 겪은 현실 속 ‘말’의 이야기는 훨씬 더 적나라하고 인간적이다.




위풍당당, 인생 최고의 순간을 함께하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말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성공의 아이콘’이었다. 1561년, 진사시와 생원시에 연달아 합격한 금난수(琴蘭秀, 1530~1604)에게 말은 영광의 구름과도 같았다. 무려 여섯 번의 낙방 끝에 얻어낸 결과였기에, 그 합격은 무엇보다 값지고 절실했다. 합격자 발표 후 백패(합격증)를 받아 든 그는 동기들과 함께 말을 타고 서울 시내를 누비는 ‘유가(游街)’ 행진에 나섰다. 급제자가 광대와 악대를 대동하고 거리를 돌며 친척과 선배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이 축제의 현장에서, 말의 높은 등은 그를 굽어보던 세상 사람들의 시선 위로 단숨에 올려놓았다.


김홍도 풍속화 속 유가(游街)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원거리 이동이 잦은 관리들에게 말은 공무 수행을 위한 필수품이었다. 1520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된 황사우(黃士祐, 1486~1536)는 부임을 위해 병조에서 마패(馬牌)를 발급받았다. 마패는 국가가 보증하는 ‘하이패스’이자 역마를 징발할 수 있는 ‘관용차 이용권’과 다름없었다. 황사우는 상경하기 전 고향에서, 황효공에게서 흙이 튀기는 것을 막는 말다래와 같은 마구 장비를 갖춘 뒤, 마패를 이용하여 당당히 임지인 서울로 향했다.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인 ‘말다래’
(소장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출처: e뮤지엄)


1803년 중국으로 떠나는 사행길에 올랐던 이해응(李海應, 1775~1825)에게도 말은 각별한 존재였다. 그는 국경 도시 의주에서 수많은 말 중 가장 건장한 녀석을 고르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먼 대륙을 횡단해야 하는 만큼 강인한 체력이 필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서 국격을 보여주기 위해선 위용 있는 명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마패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똥차’와 ‘낙마’, 말 못 할 현실의 고단함


하지만 모든 말이 명마(名馬)일 수는 없었다. 1607년 김광계(金光繼, 1580~1646)의 일기에는 ‘똥차’ 같은 말 때문에 수난을 겪었다. 그는 늙은 말을 타고 과거를 보러 가다 낭패를 보았다. 말을 타고 강을 건널 땐 배까지 물이 차올라 옷을 다 버렸고, 한양 가는 길엔 말이 길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 바람에 친구들을 따라가지도 못했다. 결국 그는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새 말을 구입해야 했다. 잦은 고장으로 속을 썩이는 중고차 때문에 애를 먹는 현대인의 모습과 판박이다. 잦은 고장으로 보험사 출장서비스를 부르며 새차를 알아보는 우리와 김광계는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판자 박기, 『단원 풍속도첩』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무관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어영청 당상관이었던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훈련 날, 손에 익지 않은 말을 탔다가 진창에 처박히는 망신을 당했다. 장교에게 지급할 전용 말조차 없어, 급한 대로 남의 말을 빌려 타야 했었기 때문이다. 노상추는 낙마하여 허리를 다친 채 다시 말에 올라야 했다. 현대인들도 갑자기 자신의 차가 아닌 다른 차를 몰 때 비슷한 막막함을 겪곤 한다. 마치 낯선 렌터카의 브레이크가 유독 예민하게 느껴지거나, 매끄러운 세단을 타다가 갑자기 투박한 시골 트럭의 핸들을 잡았을 때 느껴지는 그 덜컹거림과 이질감. 노상추가 진창 위에서 느꼈을 당혹감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자동차에 적응이 필요한 것처럼, 살아있는 말과 사람 사이에는 더더욱 깊은 '익숙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탐욕의 질주, 그리고 무게를 견디는 자


말은 권력이었고, 그 힘에 취해 오만해지는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했다. 1793년, 선전관 정유검(鄭惟儉, ?~?)은 경기 감영의 아전이 규정대로 역마를 내주지 않자, 아전의 상투를 말꼬리에 묶어 끌고 가는 행패를 부렸다. 자신의 지위와 ‘말’이라는 무력을 이용해 약자를 유린한 끔찍한 ‘갑질’이었다. 왕은 그를 엄벌에 처하며 관리들의 경거망동을 경계했다.

400년이 지난 오늘날, 그 오만한 ‘말꼬리’는 주차장 입구를 가로막는 고가의 외제차 현상과 유사하다. 혹여 흠집이라도 날까 봐 일반인들이 비싼 차를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는 점을 악용해, 차를 무기 삼아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그 수단이 말에서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값비싼 탈것을 자신의 인격으로 착각하여 타인을 위협하는 행태는 과거와 현재가 소름 돋게 닮아 있다.

반면, 말의 무게를 곧 국격(國格)으로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다. 1599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조익(趙翊, 1556~1613)은 명나라 황제에게 바칠 공마(貢馬)를 도둑맞자, 그 충격으로 현기증을 일으켜 앓아눕기까지 했다.


1500년대 사행로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상상해 보자. 만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천 대의 수출용 신차를 실은 화물선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침몰해 버린다면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단순한 재산 피해를 넘어 국가의 신용과 자존심이 송두리째 흔들려 정신이 아득할 것이다. 당시 조익이 짊어졌던 ‘말 한 필’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을 것이다.




2026년, 다시 고삐를 잡으며


『논어』와 조선의 현실을 오가며 살펴본 말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누군가에게 자동차가 이동수단이자 과시의 수단이듯, 옛사람들에게도 말은 중요한 이동수단이었으며 한편으로는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마구간이 불타는 위급한 순간에도 재산인 ‘말’보다 ‘사람’의 안위를 먼저 챙김으로써, 물질이 결코 인간보다 앞설 수 없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더 빠르고 비싼 차, 더 넓고 화려한 집을 좇느라 정작 그 안의 사람을 잊고 지내는 건 아니었을까? 공자의 이 오래된 가르침은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무한 질주하는 우리에게 말고삐처럼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는 ‘시간’이라는 야생마가 놓여 있다. 금난수처럼 영광스러운 순간도 있겠지만, 김광계처럼 말이 드러눕는 답답한 날도, 노상추처럼 예기치 않게 낙마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유검처럼 오만에 빠져 폭주하지 않고, 조익처럼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며, 공자처럼 물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일 것이다.

붉은 말의 해, 비록 진흙탕에 구르는 날이 있더라도 다시 털고 일어나 고삐를 단단히 잡자. 우리 인생의 여행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집필자 소개

정도희
정도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16세기 조선 역학(易學)의 발전과 심화」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퇴계의 人心道心說 -「人心道心精一執中圖」수정을 중심으로-」, 「퇴계 이황의 점서관(占筮觀)과 점법(占法) 연구」, 「『역학도설』 권3 「교저편」 도상과 주석의 출처와 의의」 등이 있다. 주된 관심 분야는 조선시대 도상(圖像) 및 역학사이며, 조선 역학의 흐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새 말(馬)을 사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7년 1월 13일

김광계는 다른 양반들처럼 늘 말을 타고 다녔다. 제천 할아버지 댁을 갈 때도, 재종숙들 집에 갈 때도, 향교에 갈 때도, 서원에 갈 때도, 향시를 보러 갈 때도,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갈 때도 언제나 그는 그 말에 짐을 싣기도 하고, 타기도 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2년 전 겨울 이른 아침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넌 적이 있는데, 말의 배까지 차디찬 물이 차올라서 김광계의 바지가 다 젖고, 말도 고생을 했었다. 그리고 이십일 정도 지나서 김광계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서울로 가면서 그 말에다가 짐을 싣고 타고 갔었다. 그 때 말의 걸음이 매우 느려 같이 가던 친구들을 따라 가지 못하기도 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예 길에 드러눕고 말아서 말고삐를 잡았던 하인과 김광계가 애를 먹은 적도 있었다.

“고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말을 전세내다”

미상, 을묘청의변(乙卯淸議辨),
1855년 8월 12일

1855년 8월 12일, 김수근의 서원을 안동에 세울려고 할 때의 일이다. 아침에 류치흠의 관사(館舍)에 갔더니, 자리가 몹시 시끄러웠다. “어느 날 고향으로 출발하느냐”고 묻기에, 내가 “전세를 낸 말[馬]이 낭패가 되어 지금까지 미루고 있다. 만약 오늘이라도 말을 구한다면 내일 당장 출발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패로 말을 빌려 타며 임지로 가는 길”

금난수, 성재일기(惺齋日記),
1581년 12월 6일 ~ 1581년 12월 25일

금난수는 경안역(현 경기도 광주)에서 처남 조목과 사마시 급제 동기인 찰방 박길보(朴吉甫)를 만나 좋은 말을 지급받았다. 경안역에서도 융숭한 대접을 받아 이미 만족스러웠건만, 박길보는 다음에 금난수가 들른 덕풍역(현 경기도 하남시)에도 서리 김사호(金士浩)를 보내 금난수를 잘 대접해 줄 것을 연통해 놓았다. 이런 인맥 덕인지, 금난수는 들르는 역마다 매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아천역, 유춘역, 가흥역을 지나 연원역(현 충청북도 충주)에서도 찰방 민의(閔椅)가 금난수를 반기며 고급 등급의 말과 말구종을 지급해 주었다.

좋은 말을 탄 덕에 피로감 없이 창락역(현 경상북도 영주시)까지 온 금난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고 말 먹이만을 먹인 뒤, 집까지 곧바로 달렸다. 12월 6일에 출발하여 약 이레 만에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의를 불러 말의 병을 치료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08년 5월 2일

1608년 5월 2일, 김광계는 종을 불러 말(馬)의원을 불러 오라고 일렀다. 지난달 21일에 김광계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박기원과 홍차회를 만나고 서원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땅에 떨어진 일이 있었다. 너무 놀랐지만 다행히 김광계는 크게 다치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아파서 서원에 도착하자마자 술이라도 마시려 했었다.

그 후에도 말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서 말의원을 부르려다가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아무래도 더 이상 미루면서 그냥 타고 다니기엔 불안해서 말의원을 부른 것이다.

“온 식구와 새해를 맞이하다”

오희문, 쇄미록(𤨏尾錄),
1598년 1월 1일

1598년 1월 1일, 오늘은 무오년 새해가 밝는 날이다. 동이 트기 전에 아우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부모와 조부모, 죽전숙부모에게 제사를 모두 지낸 다음, 작년 죽은 딸아이에게 제사를 지냈다. 집에 종과 말이 없어 성묘를 드리지 못하니 한스러웠지만, 그나마 사당에서 온 식구들이 모여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세 가지 색의 육탕과 네 가지의 어육 구이, 포, 혜, 오색 과일, 떡, 면을 준비해 지냈다. 전란이 일어난 이후 가장 갖추어진 제사상이었다.

늦은 오후에 사람들이 와서 새해의 덕담을 건넸다. 오는 사람마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판관 최중운과 참봉 최경수 및 그 두 아들이 찾아왔기에 술과 음식을 대접해 종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희문은 과음을 하여 저녁에 구토까지 했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 과음하여 구토까지 하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었다. 술에 취해 잠에 들면서 오희문은 올해 무오년은 작년처럼 슬픈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였다.

“마흔 한 살 설날을 맞이하다”

엄경수, 부재일기(孚齋日記),
1712년 1월 1일

1712년 1월 1일. 올해 엄경수는 마흔한 살이 되었다.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마흔 살을 마치 노인처럼 여겼는데, 고개를 둘러보니 40살을 먹었고, 또 한 해가 지났다. 이제 쉰 살에 9년이 모자라는 나이였다. 스스로 벌써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는 살이 새삼 놀라웠다.

예전 성인의 말씀에, ‘마흔 살, 쉰 살이 되어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 또한 끝일 뿐이다.’란 구절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엄경수는 명성이 알려진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엄경수 역시 그저 그런 변변치 못한 인생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밀려들자 씁쓸하면서도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렇다면 과연 여기서 그칠 뿐이란 말인가!

“소머리 굽고 노래하며 질펀하게 보낸 새해”

김성탁, 제산일기(霽山日記),
1732년 1월 2일

천연두 때문에 온 동네에 가족을 잃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슬픈 분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새해맞이의 힘일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함께 모여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현재를 즐기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우울한 얼굴로 다니던 김성탁(金聖鐸) 역시 운곡의 이호 형 집에 들어서자 느껴지는 왁자한 분위기 덕에 조금씩 웃음을 찾아 갔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호 형 집의 부엌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수십 명의 손님들이 들어찬 사랑방에는 등잔불이 흔들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여종들이 바삐 내어오는 상들 위에는 쇠머리를 구운 고기들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주인이 준비했는지, 어느 손님이 가져왔는지 촌 막걸리도 있었는데 그 시큼한 맛이 고기와 잘 어우러졌다. 술이 들어가자 다들 불콰한 얼굴로 서로 노래를 시켰다. 서로 주고받는 노래의 흥이 모두의 근심과 적적함을 깨뜨려 주었다. 하지만 김성탁은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술에 취해 종종 광대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음설한 말을 섞기도 했기 때문에 모임이 우아하거나 고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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