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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때


날랜 병사들이 진영으로 향하는데輕兵赴戎陣
맹렬한 기세는 종횡으로 치닫는구나盛氣縱橫馳
얼어붙은 강을 한밤중에 건너는데氷河半夜渡
북풍은 살을 찢는듯하구나北風裂膚肌

포위된 군대에는 지원도 끊겼는데 孤軍絶後援
장수는 대응할 때를 놓쳤구나主將失機宜
싸움은 패하고 북소리도 그쳤는데戰敗鼓聲死
화살도 없는 쇠뇌로 어찌해야 하나空弮何所爲


장유의 문집(張維, 1587~1638) 『계곡집』(권25), 「세하곡(塞下曲)」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 오언고시는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중의 한 명이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가 지은 「새하곡(塞下曲)」 중의 일부이다. 새하는 ‘요새의 아래’를 뜻한다. 국경을 지키는 고달픔, 혹은 변방에서 벌어진 전쟁을 노래하는 작품을 한국과 중국에서는 흔히 ‘새하곡’이라고 불렀다. 장유가 지은 이 시도 중국의 변방에서 한족 왕조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에서 겪었던 고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유의 초상화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계곡집(谿谷集)』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장유가 지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장유가 20세가 되었던 1607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이외의 만주족 여러 부족을 이미 정복하던 중이었다. 장유가 죽기 2년 전인 1636년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비극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장유는 병자호란 때 포위된 남한산성에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시에는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적이 침입하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단순한 문학적 상상이 아니었다. 앞으로 곧 닥쳐올 것 같은 불안한 미래이거나 혹은 이미 겪은 참극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은 1636년 음력 12월, 겨울이었다.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것이 12월 8일, 적군이 청천강 앞의 안주에 이르렀다는 계본이 서울의 조정에 도착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복 의례를 행하였던 날짜는 1637년 1월 30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3일에 시작되어 같은 해 2월 24일에 끝났다. 병자호란은 겨울에 시작되어 겨울에 끝난 전쟁이었다.

조선시대에 여진족과 그 후계 집단인 만주족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겨울에 주로 조선에 침입하였다. 여진족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전에 능하였다. 말을 배에 태우려면 조각배가 아닌 더 큰 배가 필요했다. 수천의 기병이 동시에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수백 척의 배를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다.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배가 없어도 건널 수 있었다. 여진족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배로 건너와서 조선에 침입할 만큼 배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겨울을 선택한 것이다.


1636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 홍 타이지 (출처: 베이징 고궁박물관)


여진족이 주로 겨울에 조선에 침입한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도 익숙한 현실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압록강 주변에 4군을 설치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은 1433년(세종 15) 6월 세종을 만났을 때 “얼음이 얼면 적은 반드시 침입할 것이니, 가을과 겨울이 되면 군사를 뽑아서 모름지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겨울은 조선이 여진족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감수했던 고난의 계절만은 아니었다. 여진족의 침구가 심할 때 조선은 때로 적극적인 공격으로 여진족 침략의 근거지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그 같은 원정 중에 일부는 겨울에 감행되었다. 1479년(성종 10)의 조선군의 여진족 본거지 원정도 겨울에 단행되었다. 성종이 평안도 도원수 윤필상(尹弼商, 1427~1504)에게 서정(西征)의 교지를 내린 날이 11월 18일, 돌아온 윤필상이 복명하여 성종에게 전쟁 결과를 보고한 날은 12월 29일이었다.

조선군은 때로 겨울이 되기 전 원정을 시작할 때도 있었다. 『성종실록』 1479년(성종 10) 11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평안도 도원수 윤필상의 출전 전에 조선군을 지휘했던 어유소(魚有沼)는 강이 얼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군한 일도 있었다. 강이 얼어붙는 겨울은 여진족뿐만 아니라 조선군에게도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계절이었다.

물론 겨울은 전쟁하기 쉬운 계절은 아니었다. 전쟁은 끝없는 행군과 야영의 연속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겨울은 옷이 부실하면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1479년 11월 19일 조선군의 원정 직전에 대사헌 김양경(金良璥, ?~1484)은 “여러 날에 걸쳐 노숙(露宿)하면 동상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터인데 하물며 정강이까지 쌓인 눈에 빠지는 땅에서는 어떻겠습니까.”라고 우려하였다.

이 같은 반대에도 성종은 같은 해 11월 21일 ‘겨울 원정’을 결단하면서, 군사들에게 겨울옷을 지급하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은 옷을 대량으로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완성된 옷 대신 옷감을 지급하자고 주장했지만,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성종은 군졸들이 어떻게 급하게 옷을 만들겠냐며, 궁인들이 옷을 꿰매게 해서라도 군사들에게 겨울옷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와 달리 사전에 준비하지 않은 ‘겨울 전쟁’은 참혹하였다. 병자호란 당시의 여러 일기 기록에는 겨울에 성곽을 방어하는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첩에 오르면 짙은 안개비가 내리고 어두침침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장사들이 모두 축축하게 젖으면서 얼어붙어 몸을 구부릴 수가 없었다.” 『병자일록(丙子日錄)』 1636년 12월 24일자에 기록된 내용이다.

국왕 인조에게도 병자호란의 겨울은 혹독하였다. 눈비가 내리는 날씨에 추위에 떨던 사람들을 지켜보던 인조는 자신이 덮는 이불도 모두 성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자일록(丙子日錄)』 1636년 12월 30일자를 보면 “이불을 모두 하사해 버려서 임금도 밤에 옷을 벗고 자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자남한일기』 1637년 1월 25일 기록.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겨울철 날씨를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을 보수했다고 기록했다. (출처: 필자 제공)


맹렬한 겨울 추위가 조선군에게 고통만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대는 원래 명나라가 사용하던 유럽식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가지고 있었다. 홍이포는 사거리도 길고, 위력도 강하였다. 남한산성 외부 한봉(汗峯)이나 검단산에서 쏜 홍이포 포탄이 성 내부의 행궁 근처까지 날아왔다. 특히 청군은 남한산성 동쪽에서 홍이포로 성벽을 부수었다. 조선군은 성벽이 무너지면 가마니에 흙을 넣고 쌓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뿌렸다. 겨울 날씨에 물이 얼면 흙을 넣은 가마니들이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성벽만큼이나 튼튼하였다. 역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머물던 나만갑(羅萬甲, 1592~1642) 이 지은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 1637년 1월 25일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 추위 덕에 청군의 맹렬한 포격에도 남한산성 성벽이 유지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성벽.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홍이포로 남한산성의 성벽을 파괴했지만, 조선군은 가마니에
흙을 담은 후 물을 뿌려 무너진 성벽을 응급으로 보수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물을 뿌린 가마니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성벽을 대신했다. (출처: 필자 제공)


한국사에서 외적의 침범과 전쟁이 모두 겨울에 벌어졌던 것은 아니다. 신형식(1939~2023) 전 이화여대 교수는 1983년 『한국사연구』에 실린 「삼국시대 전쟁의 정치적 의미」에서 삼국시대 전쟁의 계절적 요인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신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왜구가 신라에 침입하는 계절은 매년 음력 4월과 5월에 집중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구의 신라 침범 횟수 총 34회 중에 침입한 달이 기록된 경우는 27회였다. 그중에서 겨울인 11월·12월·1월에 왜구가 침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에 비하여 4월의 침범 횟수는 11회, 5월의 침범 횟수는 5회에 달하였다.

삼국시대 왜구가 주로 침입했던 음력 4월과 5월은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쌀이 떨어져가고, 가을에 심은 보리를 수확하기 직전이거나 수확 중인 시점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왜구의 신라 침범 이유 중에 하나가 춘궁기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식량 약탈일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왜구의 침략 (AI 생성 이미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왜구는 조금 달랐다. 고려시대 가장 큰 왜구 침략이 있었던 1380년(경신년) 왜구들은 8월 무렵 대규모로 침범하여 음력 9월에 섬멸되었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왜구들은 음력 5월 11일에 침입하여 6월 27일에 격퇴되었다. 삼국시대의 왜구에 비해서는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침략한 것이다.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와 또 다르게 삼국시대처럼 음력 4월에 시작되었다. 국가 대 국가가 총력으로 대결하는 전면전에서는 고려할 요소가 더 다양했으므로 왜구의 침범과는 미묘하게 다른 시점을 선택한 것이다. 왜구의 침범이든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이든 일본인들이 겨울에 침입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은 여진족의 침범 사례와 분명히 구별된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한반도와 대한해협 일대에는 강한 북서풍이 분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겨울에는 전형적인 역풍이 부는 계절인 셈이다. 이 때문에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조선 수군도 북서풍이 강한 음력 8월 이후 2월까지의 가을과 겨울을 풍고(風高)로 부르고, 북서풍이 잘 불지 않은 봄과 여름을 풍화(風和)로 부르면서 대비 태세에 차이를 두었다. 조선 수군은 특히 음력 3월부터 7월까지는 왜구의 침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음력 4월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북서풍이 잘 불지 않아서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건너오기 용이한 계절을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기에는 적절한 계절이 아니었다. 한국의 초여름 장마철에는 비 내리는 날이 많다. 원거리를 행군하고 들판에서 노숙하거나 야영해야 하는 군대에게 비가 많은 계절은 추운 겨울 만큼이나 불편함이 많은 계절이었다. 큰 강에 다리가 없고 배로 건너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여름철 홍수도 큰 장애물이었다. 유속이 빨라지고 강변이 물에 잠기면 대규모 병력이 강을 건너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군의 주력 무기였던 활과 화약 무기는 모두 여름이나 비에 취약했다. 조선시대 주력 무기인 각궁(角弓)은 여러 종류의 나무와 소뿔, 소의 힘줄을 천연 접착제인 아교(阿膠)나 어교(魚膠)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활은 습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풀어지면서 위력이 약해졌다.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의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李成桂) 장군은 위화도에서 회군해야 하는 넷째 이유로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의 접착제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에게 역병이 돌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사용한 각종 총통이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대량으로 사용했던 조총 같은 화약 무기들도 비가 올 때는 점화가 쉽지 않았다. 발사할 때는 화약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비와는 상극이었다. 물론 한글 필사본 『난리가』에서 보듯이 영조 대에는 조총의 점화 기구에 비를 막는 장치를 달았지만, 기본적으로 화약 무기는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 쓰기 힘들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계절과 날씨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때로 전쟁은 계절과 무관하게 벌어질 때도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군대에는 정해진 형세가 없고,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적에 맞추어 변화하고 승리하는 자를 일컬어 신묘하다고 한다. (故兵無常勢, 水無常形, 能因敵變化而取勝者, 謂之神.)”는 구절이 있다. 전쟁의 시기, 전투의 방법과 장소에서 상대방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집필자 소개

김병륜
김병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 전공(박사), 국방부 국방홍보원 소속 공무원으로 《국방일보》 취재 기자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 연구원(비상근)을 지냈다. 한국 군사사를 중심으로 군사 분야 역사를 연구하면서 저술, 다큐멘터리 출연, 강연, 군사 관련 콘텐츠 자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은 책에 『군사전문인을 위한 인터넷』, 『이성호 제독 평전』, 『6.25 전쟁 그 때 그날』, 옮긴 책에 『반계사진법』, 『풍천유향』 등이 있으며 군사 역사 분야 논문 30여 편을 발표하였다.
“임금의 파천 소식을 듣다”

정경달, 반곡난중일기(盤谷亂中日記),
1592년 5월 16일

1592년 5월 16일. 오늘 서울에서 갑사 1명이 도망쳐 이곳 선산 고을로 내려왔다. 전란의 소식을 들어보니 임금이 왜적을 피해 파천길에 오르셨다는 것이다. 이미 4월 그믐날 파천 길에 올랐는데, 5월 3일 무렵에 왜적이 도성에 쳐들어와 남녀 백성들이 달아나느라 서로 밟혀 죽었다고 한다. 이 도망친 갑사는 양근 고을과 충주 고을을 거쳐 산길을 따라 이곳까지 도주해 왔다고 한다.

이 소식이 부내에 전해지자, 민가의 동네마다 놀라서 동요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전대년은 정경달의 손을 잡고는 “주상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셨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한단 말이오.”라며 울부짖었다. 정경달은 성안의 인심이 이렇듯 동요하자, 소식을 전한 사람의 목을 베어 진정시키려 하였으나 전대년이 있는 힘껏 말리는 바람에 중지하였다.

“이순신의 죽음”

정경운, 고대일록(孤臺日錄),
1598년 11월 19일

1598년 11월 19일,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 이순신이 사망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제독 유정에게 두 번이나 강화를 청하면서 병력을 해산하고 돌아가겠다는 요청을 했다. 유정이 거짓으로 화친을 허락하고 이순신에게 이를 몰래 알렸다. 배를 정비하여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였는데, 왜적이 배에 오르기는 했으나 다 타지 못했을 때 제독 유정과 이순신이 공격하여 왜선 수백 척을 부딪쳐서 파괴하였다. 왜적들이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진영으로 다시 되돌아가 사천의 적장 심안도에게 힘을 합쳐 수전을 할 것이니, 즉시 달려오라고 하였다.

심안도가 연 배를 타고 앞으로 나오니, 이순신이 좌우로 협격하여 큰 전쟁이 바다 가운데서 벌어졌다. 이순신이 병사들의 앞에 서서 종일 혈전을 펼쳤는데 탄환을 맞고 머리에 맞아 전사했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溪巖日錄),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 새벽 1시, 남산에 세 대의 봉화가 피어오르다”

김종, 임진일록(壬辰日錄),
1592년 4월 23일

1592년 4월 23일, 김종(金琮)은 전장에 나가는 군사들을 위해 말을 바쳤다.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남산을 올려다보니 봉화 5대가 모두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 장계가 올라와, 왜적이 울산과 경주 등에 들어왔다는 내용을 보고하였다. 임금께서는 두 세 곳의 요충지로 군사를 파견하라는 전교(傳敎, 임금의 명령)가 있었다. 내일 이른 아침이면 군사들이 나갈 것이다.

오후가 되니 남산에서 봉화 1대를 올렸다. 오후가 되니 충청에서 온 소식에는 박진(朴晉)이 경상도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날 몇몇 정무(政務)가 임시로 정지되었고,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해 임시로 설치된 도감(都監) 역시 없앴다. 또 4경(四更, 새벽 1시~3시 사이) 남산에서 봉화 3대를 올렸다.

“원균의 패배”

정경운, 고대일록(孤臺日錄),
1597년 7월 10일 ~ 1597년 7월 18일

이순신 대신에 통제사가 원균이 1597년 7월에 수군들을 이끌어 왜적을 맞이하여 적의 소굴을 바로 쳤는데, 조선의 6척이 서생포(西生浦)에 표류했고, 한 척은 침몰했다.

원균이 다시 7월 14일에 배 200여 척을 이끌고 나가서 공산에서 적을 맞이하여 치고는 영등포(永登浦)에 배를 머무르게 했는데, 16일 밤에 적이 밤에 몰래 숨어 있다가 동이 트자 적선이 와서 사면을 포위하고 공격하니, 조선군이 크게 무너져 원균은 바다에 빠져 사라지고 충청병사 최호도 죽었다. 수군 중에 죽거나 물에 빠진 자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원균이 패배한 것은 원수 권율이 곤장을 치자, 이에 성이 난 원균이 급히 군사를 몰아나가 적의 세력이 많은지 적은지를 고려하지 않고 싸운 탓이었다.

“변방 소식에 민심이 흉흉하다”

장흥효, 경당일기(敬堂日記),
1621년 3월 2일 ~ 1621년 4월 7일

변방의 기이한 소문은 연일 안동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일전에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한 일 때문에 조선이 한 번은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결국 파병은 이루어졌고 안동에서도 여럿 파병군으로 참여하거나 안동에 있는 다수의 말들이 징발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변방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혹 조선으로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민심은 더더욱 흉흉해졌고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요동이 드디어 오랑캐에게 노략질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요동은 명나라 동북쪽 지방의 요충지로 만주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요동이 침략 당했다는 것은 오랑캐들이 본격적으로 중원을 노린다는 사실을 말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제 언제 조선에 들어올지 모를 일이었다. 명나라 같은 대국이 침략을 당했으니 과연 조선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까.

“병자호란이 시작되다”

김광계, 매원일기(梅園日記),
1636년 12월 13일 ~ 1636년 12월 20일

1636년 12월 13일, 청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인조는 이미 14일에 파천(播遷)하여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도산서원에 있던 김광계는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19일에 이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병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과 염려를 금치 못하였다. 청나라 군사의 속도와 기세 역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온 나라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김광계와 마찬가지로 예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동생 김광보가 놀란 가슴을 안고 김광계를 찾아왔다.

20일, 김광계는 조카 김초(金礎)와 함께 도산서원을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김광계를 더욱 한탄스럽게 하는 전란 소식이 들어와 있었다. 임금이 서울을 지키지 못하고, 왕의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김광계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난리를 맞음을 탄식하였다. 이 때 여러 읍의 수령들도 군수물자를 만들기 시작하고 군사를 움직이는 등 동리가 불안하였다. 김광계는 이러한 시점에 한 가문과 서원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국난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 해야만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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