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병사들이 진영으로 향하는데輕兵赴戎陣
맹렬한 기세는 종횡으로 치닫는구나盛氣縱橫馳
얼어붙은 강을 한밤중에 건너는데氷河半夜渡
북풍은 살을 찢는듯하구나北風裂膚肌
포위된 군대에는 지원도 끊겼는데 孤軍絶後援
장수는 대응할 때를 놓쳤구나主將失機宜
싸움은 패하고 북소리도 그쳤는데戰敗鼓聲死
화살도 없는 쇠뇌로 어찌해야 하나空弮何所爲
장유의 문집(張維, 1587~1638) 『계곡집』(권25), 「세하곡(塞下曲)」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 오언고시는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중의 한 명이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가 지은 「새하곡(塞下曲)」 중의 일부이다. 새하는 ‘요새의 아래’를 뜻한다. 국경을 지키는 고달픔, 혹은 변방에서 벌어진 전쟁을 노래하는 작품을 한국과 중국에서는 흔히 ‘새하곡’이라고 불렀다. 장유가 지은 이 시도 중국의 변방에서 한족 왕조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에서 겪었던 고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장유의 초상화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계곡집(谿谷集)』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장유가 지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장유가 20세가 되었던 1607년에 누르하치는 건주여진 이외의 만주족 여러 부족을 이미 정복하던 중이었다. 장유가 죽기 2년 전인 1636년에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비극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장유는 병자호란 때 포위된 남한산성에 있었던 사람 중 한 명이다.
시에는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 적이 침입하는 상황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 단순한 문학적 상상이 아니었다. 앞으로 곧 닥쳐올 것 같은 불안한 미래이거나 혹은 이미 겪은 참극이었다.
실제로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은 1636년 음력 12월, 겨울이었다. 청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넌 것이 12월 8일, 적군이 청천강 앞의 안주에 이르렀다는 계본이 서울의 조정에 도착한 것은 12월 13일이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복 의례를 행하였던 날짜는 1637년 1월 30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637년 1월 3일에 시작되어 같은 해 2월 24일에 끝났다. 병자호란은 겨울에 시작되어 겨울에 끝난 전쟁이었다.
조선시대에 여진족과 그 후계 집단인 만주족은 병자호란 이전에도 겨울에 주로 조선에 침입하였다. 여진족은 말을 타고 싸우는 기병전에 능하였다. 말을 배에 태우려면 조각배가 아닌 더 큰 배가 필요했다. 수천의 기병이 동시에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한 수백 척의 배를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다. 강이 얼어붙는 겨울에는 배가 없어도 건널 수 있었다. 여진족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배로 건너와서 조선에 침입할 만큼 배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겨울을 선택한 것이다.
1636년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 홍 타이지 (출처: 베이징 고궁박물관)
여진족이 주로 겨울에 조선에 침입한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도 익숙한 현실이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압록강 주변에 4군을 설치한 최윤덕(崔潤德, 1376~1445)은 1433년(세종 15) 6월 세종을 만났을 때 “얼음이 얼면 적은 반드시 침입할 것이니, 가을과 겨울이 되면 군사를 뽑아서 모름지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겨울은 조선이 여진족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감수했던 고난의 계절만은 아니었다. 여진족의 침구가 심할 때 조선은 때로 적극적인 공격으로 여진족 침략의 근거지를 무너뜨리기도 하였다. 그 같은 원정 중에 일부는 겨울에 감행되었다. 1479년(성종 10)의 조선군의 여진족 본거지 원정도 겨울에 단행되었다. 성종이 평안도 도원수 윤필상(尹弼商, 1427~1504)에게 서정(西征)의 교지를 내린 날이 11월 18일, 돌아온 윤필상이 복명하여 성종에게 전쟁 결과를 보고한 날은 12월 29일이었다.
조선군은 때로 겨울이 되기 전 원정을 시작할 때도 있었다. 『성종실록』 1479년(성종 10) 11월 18일의 기록을 보면 평안도 도원수 윤필상의 출전 전에 조선군을 지휘했던 어유소(魚有沼)는 강이 얼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군한 일도 있었다. 강이 얼어붙는 겨울은 여진족뿐만 아니라 조선군에게도 전쟁을 결심할 수 있는 계절이었다.
물론 겨울은 전쟁하기 쉬운 계절은 아니었다. 전쟁은 끝없는 행군과 야영의 연속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겨울은 옷이 부실하면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1479년 11월 19일 조선군의 원정 직전에 대사헌 김양경(金良璥, ?~1484)은 “여러 날에 걸쳐 노숙(露宿)하면 동상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터인데 하물며 정강이까지 쌓인 눈에 빠지는 땅에서는 어떻겠습니까.”라고 우려하였다.
이 같은 반대에도 성종은 같은 해 11월 21일 ‘겨울 원정’을 결단하면서, 군사들에게 겨울옷을 지급하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은 옷을 대량으로 준비하는 것이 쉽지 않다며 완성된 옷 대신 옷감을 지급하자고 주장했지만,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성종은 군졸들이 어떻게 급하게 옷을 만들겠냐며, 궁인들이 옷을 꿰매게 해서라도 군사들에게 겨울옷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이와 달리 사전에 준비하지 않은 ‘겨울 전쟁’은 참혹하였다. 병자호란 당시의 여러 일기 기록에는 겨울에 성곽을 방어하는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첩에 오르면 짙은 안개비가 내리고 어두침침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장사들이 모두 축축하게 젖으면서 얼어붙어 몸을 구부릴 수가 없었다.” 『병자일록(丙子日錄)』 1636년 12월 24일자에 기록된 내용이다.
국왕 인조에게도 병자호란의 겨울은 혹독하였다. 눈비가 내리는 날씨에 추위에 떨던 사람들을 지켜보던 인조는 자신이 덮는 이불도 모두 성을 지키는 군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병자일록(丙子日錄)』 1636년 12월 30일자를 보면 “이불을 모두 하사해 버려서 임금도 밤에 옷을 벗고 자지 못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자남한일기』 1637년 1월 25일 기록.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겨울철 날씨를 이용하여 무너진 성벽을 보수했다고 기록했다. (출처: 필자 제공)
맹렬한 겨울 추위가 조선군에게 고통만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대는 원래 명나라가 사용하던 유럽식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가지고 있었다. 홍이포는 사거리도 길고, 위력도 강하였다. 남한산성 외부 한봉(汗峯)이나 검단산에서 쏜 홍이포 포탄이 성 내부의 행궁 근처까지 날아왔다. 특히 청군은 남한산성 동쪽에서 홍이포로 성벽을 부수었다. 조선군은 성벽이 무너지면 가마니에 흙을 넣고 쌓은 다음 그 위에 물을 뿌렸다. 겨울 날씨에 물이 얼면 흙을 넣은 가마니들이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성벽만큼이나 튼튼하였다. 역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머물던 나만갑(羅萬甲, 1592~1642) 이 지은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 1637년 1월 25일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 추위 덕에 청군의 맹렬한 포격에도 남한산성 성벽이 유지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성벽.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홍이포로 남한산성의 성벽을 파괴했지만, 조선군은 가마니에
흙을 담은 후 물을 뿌려 무너진 성벽을 응급으로 보수했다. 1636년 12월~1637년 1월의 혹독한 겨울 추위에
물을 뿌린 가마니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성벽을 대신했다.
(출처: 필자 제공)
한국사에서 외적의 침범과 전쟁이 모두 겨울에 벌어졌던 것은 아니다. 신형식(1939~2023) 전 이화여대 교수는 1983년 『한국사연구』에 실린 「삼국시대 전쟁의 정치적 의미」에서 삼국시대 전쟁의 계절적 요인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신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왜구가 신라에 침입하는 계절은 매년 음력 4월과 5월에 집중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왜구의 신라 침범 횟수 총 34회 중에 침입한 달이 기록된 경우는 27회였다. 그중에서 겨울인 11월·12월·1월에 왜구가 침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에 비하여 4월의 침범 횟수는 11회, 5월의 침범 횟수는 5회에 달하였다.
삼국시대 왜구가 주로 침입했던 음력 4월과 5월은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쌀이 떨어져가고, 가을에 심은 보리를 수확하기 직전이거나 수확 중인 시점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왜구의 신라 침범 이유 중에 하나가 춘궁기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한 식량 약탈일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왜구의 침략 (AI 생성 이미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왜구는 조금 달랐다. 고려시대 가장 큰 왜구 침략이 있었던 1380년(경신년) 왜구들은 8월 무렵 대규모로 침범하여 음력 9월에 섬멸되었다. 1555년 을묘왜변 때 왜구들은 음력 5월 11일에 침입하여 6월 27일에 격퇴되었다. 삼국시대의 왜구에 비해서는 조금 더 늦은 시기에 침략한 것이다.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와 또 다르게 삼국시대처럼 음력 4월에 시작되었다. 국가 대 국가가 총력으로 대결하는 전면전에서는 고려할 요소가 더 다양했으므로 왜구의 침범과는 미묘하게 다른 시점을 선택한 것이다. 왜구의 침범이든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이든 일본인들이 겨울에 침입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은 여진족의 침범 사례와 분명히 구별된다.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한반도와 대한해협 일대에는 강한 북서풍이 분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려면 배를 타야 하는데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겨울에는 전형적인 역풍이 부는 계절인 셈이다. 이 때문에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조선 수군도 북서풍이 강한 음력 8월 이후 2월까지의 가을과 겨울을 풍고(風高)로 부르고, 북서풍이 잘 불지 않은 봄과 여름을 풍화(風和)로 부르면서 대비 태세에 차이를 두었다. 조선 수군은 특히 음력 3월부터 7월까지는 왜구의 침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방어를 강화하였다. 그런 점에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음력 4월에 전쟁을 시작한 것은 북서풍이 잘 불지 않아서 일본열도에서 한반도로 건너오기 용이한 계절을 선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름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기에는 적절한 계절이 아니었다. 한국의 초여름 장마철에는 비 내리는 날이 많다. 원거리를 행군하고 들판에서 노숙하거나 야영해야 하는 군대에게 비가 많은 계절은 추운 겨울 만큼이나 불편함이 많은 계절이었다. 큰 강에 다리가 없고 배로 건너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여름철 홍수도 큰 장애물이었다. 유속이 빨라지고 강변이 물에 잠기면 대규모 병력이 강을 건너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군의 주력 무기였던 활과 화약 무기는 모두 여름이나 비에 취약했다. 조선시대 주력 무기인 각궁(角弓)은 여러 종류의 나무와 소뿔, 소의 힘줄을 천연 접착제인 아교(阿膠)나 어교(魚膠)로 결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활은 습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풀어지면서 위력이 약해졌다. 『태조실록』 총서에 따르면 1388년(고려 우왕 14) 고려의 우군도통사였던 이성계(李成桂) 장군은 위화도에서 회군해야 하는 넷째 이유로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의 접착제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에게 역병이 돌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사용한 각종 총통이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대량으로 사용했던 조총 같은 화약 무기들도 비가 올 때는 점화가 쉽지 않았다. 발사할 때는 화약에 불을 붙여야 하는데, 비와는 상극이었다. 물론 한글 필사본 『난리가』에서 보듯이 영조 대에는 조총의 점화 기구에 비를 막는 장치를 달았지만, 기본적으로 화약 무기는 비가 많이 내리는 계절에 쓰기 힘들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계절과 날씨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물론 때로 전쟁은 계절과 무관하게 벌어질 때도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군대에는 정해진 형세가 없고, 물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적에 맞추어 변화하고 승리하는 자를 일컬어 신묘하다고 한다. (故兵無常勢, 水無常形, 能因敵變化而取勝者, 謂之神.)”는 구절이 있다. 전쟁의 시기, 전투의 방법과 장소에서 상대방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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