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보 부족해. 열 보, 아홉, 여덟……넷…셋…”
‘고려 거란 전쟁’ 속 양규 장군은 오직 거란의 황제만 노리고 한 걸음, 한걸음 끝까지 자신의 마지막을 걸었다. 움직이지 않는 팔을 입으로 물고 들어 적장을 향해 시위를 당긴다. 화살은 끝내 적장의 가슴에 가닿지 못했지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다는 그의 마음은 하늘에 닿았다. 그리고 거란의 2차 침략은 그렇게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양규 장군 역할을 맡은 이후로 나는 그야말로 양규 장군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의 신화 같은 활약상을 알아보면 그 누구라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양규 장군 역으로 출연한 배우 지승현 (출처: KBS/TV리포트)
양규 장군의 대표적인 활약은 흥화진 전투와 곽주성 탈환이다. ‘흥화진의 기적’이라고도 불리는 흥화진 전투는 양규 장군의 업적 중 손에 꼽히는 전투다. 양규 장군은 단 3,000명의 병사로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을 막아 냈다. 당시 거란군은 흥화진을 함락하기 위해 7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끝내 성을 포기하고 우회한다.
양규 장군은 거란군을 얌전히 보내지 않았다. 흥화진을 포기하고 남하한 거란군의 뒤통수를 쳐서 곽주성을 탈환했다. 6,000여 명의 거란군이 지키고 있던 곽주성을 단 1,700여 명의 병력으로 기습해 되찾은 것이다. 이는 군사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전투라고 한다. 성을 함락하려면 성을 지키는 병사보다 다섯 배에서 최대 열 배가 많은 병력으로 공격해야 하는데, 오히려 서너 배 적은 병력으로 성을 함락했으니 말이다.
흥화진의 지휘관 양규 (출처: KBS/엑스포츠뉴스)
거란을 향한 양규 장군의 집념은 대단했다. 철수하는 거란군을 일곱 번 공격해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구출했다. 이는 조선 시대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쫓아 몰살한 노력에 비교되며, 그 덕분에 양규 장군은 고려의 이순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결국 양규 장군은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양규는 죽어 2차 전쟁은 마무리가 된다. 거란은 마지막까지 물어뜯는 고려군의 모습에 쉽게 다시 침략해 오지 못했다. 그 덕분에 강감찬 장군을 필두로 한 고려는 철저한 대비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3차 전쟁을 대승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후 고려는 1세기가 넘는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마지막 전투를 치르는 양규 장군. 그는 죽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출처: KBS/스포츠경향/한국일보)
“전쟁은 끝나도, 삶의 전투는 계속된다.”
이렇듯 전쟁은 누군가에게는 삶과 죽음이자, 변화의 시발점 혹은 한 시대의 마무리가 되기도 한다. 전쟁 이야기는 긴장감과 더불어 왕권이 교체되고 또 국가가 바뀌는 등 화려한 스케일로 짜릿한 스릴을 느끼게 해 준다. 후세에 전해지는 영웅들의 이야기는 자신의 선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하고, 자신이 그 장군이 된 것인 양 괜스레 벅차오르게도 한다. 전쟁은 무서운 것이지만 전쟁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아마도 자연의 흐름과도 같은 흥망성쇠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록 총칼은 오가지 않지만,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도 전쟁에 비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태어나면서부터 처음 보는 낯선 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살아가면서 내 편 네 편이 생기기도 한다. 이 사회라는 구조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학창 시절에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한다. 사회에 나와서는 하나의 빵이라도 더 얻기 위해,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와 처절히 싸워가며 우리는 지금도 생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거란의 황제라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끝까지 걸음을 옮겼던 양규 장군의 거대한 전장처럼, 우리의 일상 역시 스스로를 다스리고 이겨내야 하는 치열한 미시적 전쟁터다.
“나 자신과 벌여온 오랜 전쟁”
나의 삶도 그랬다. 돌아보면 처음 살아보는 인생은 신기하고 두려우면서도 또 재미있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꿈이라는 것이 생기고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 어느덧 20년째 연기를 하고 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만큼 치열하게 전투를 치러왔기 때문일까. 처음 발들이는 연기라는 세계에 대한 도전부터 쉽지 않은 전투였다. 캐스팅 보드에 이름을 올리는 과정은 쉼 없는 경쟁의 연속이었다. 늘 누군가와 비교당해야 했고,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다”라는 등의 다양한 거절을 마주할 때면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 느껴지기도 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출연한 무명의 지승현
하지만 끝없는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대신,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기로 했다. 나만의 색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묵묵히 집중하는 것. 역할의 크고 작음이나 선악을 가리지 않고, 그저 인물에 몰입해 관객에게 감동을 전하겠다는 본질에 충실하려 애썼다. 그렇게 묵묵히 나만의 자리를 다져가다 보니, 감사하게도 나의 진심을 알아봐 주고 찾아주는 이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상처받고 부딪히며 버텨야 했던 고단한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거칠었던 과정마저 나의 작은 역사가 되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치열하게 견뎌온 그 순간순간이 모두 ‘즐거운 전쟁’이었던 것이다.
영화 《바람》 속 김정완 역의 지승현
“새로운 전장, 새로운 나”
최근 나는 다큐멘터리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의 프리젠터, 에세이 출간, 노랫말을 쓰는 작사가 등 낯선 영역에 조심스레 도전을 시작했다. 과거의 전쟁이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부딪힘이었다면, 지금 맞서 싸워야 할 가장 큰 적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바로 나 자신이다. 새로운 도전 앞에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난 20년의 즐거웠던 전투 속에서 단단하게 다져온 경험과 통찰이라는 무기가 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전쟁터에 뛰어들 수 있다.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제작발표회 (출처: 연합뉴스/KBS제공)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촬영 현장 (출처: KBS/매일경제)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에서 공민왕으로 분한 지승현 (출처: KBS/스포츠경향)
치열한 삶이라는 전장 속에서도, 우리 모두는 매일 한계를 깨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때로는 양규 장군의 마지막 화살처럼, 온 힘을 다한 노력이 허공을 가르는 것 같아 주저앉고 싶은 날도 있을 것이다. 당장 화려한 결과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당겨진 그의 활시위가 고려에 100년의 평화의 씨앗이 되었듯이, 묵묵히 오늘을 살아낸 우리네 하루 역시 내일의 눈부신 태평성대를 여는 소중한 씨앗이 될 것이다.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아침을 맞이하고 일상을 뚫고 나가는 당신은, 이미 스스로의 삶을 단단하게 지켜내고 있는 훌륭하고 멋진 장수다.
전투에 나선 양규 장군 (출처: KBS/조선일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네 삶. 플라톤은 “인생은 훌륭한 전투의 연속이며, 가장 위대한 승리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루하루의 분투가 모여 우리네 인생도 결국 하나의 훌륭한 역사가 된다. 삶이라는 전투에서 진정한 승리자는 화려한 무기를 쥔 자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믿고 미소 짓는 사람일 것이다. 세상의 잣대나 남과의 비교에 흔들리지 말고, 씩씩하게 당신만의 진지를 구축해 나가기를 바란다. 이 눈부시고 치열한 하루하루가 훗날 가장 자랑스럽고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치러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즐거운 전쟁’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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